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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광해군에 대한 21세기의 반정(反正)
『조선의 힘』의 오항녕 교수,
광해군의 부활과 권세에 대해 비판하다!
1623년 인조(계해)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정권. 조선시대 내내 혼군(昏君) - 판단이 흐린 임금으로 불렸던 광해군.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택민(澤民) 군주로 재평가되었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였던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이렇게 광해군은 20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인식에서 비판적인 성향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되어 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1세기에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이 책은 이런 부활과 권세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지난 100년 동안 추켜세웠던, 조선시대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다시 성군(聖君)이 되었던 광해군에 대해 “그는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입니다.”라며 이 책을 21세기 초입에 시도하는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반정(反正)이라 한다.
『조선의 힘』의 오항녕 교수,
광해군의 부활과 권세에 대해 비판하다!
1623년 인조(계해)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정권. 조선시대 내내 혼군(昏君) - 판단이 흐린 임금으로 불렸던 광해군.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택민(澤民) 군주로 재평가되었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였던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이렇게 광해군은 20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인식에서 비판적인 성향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되어 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1세기에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이 책은 이런 부활과 권세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지난 100년 동안 추켜세웠던, 조선시대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다시 성군(聖君)이 되었던 광해군에 대해 “그는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입니다.”라며 이 책을 21세기 초입에 시도하는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반정(反正)이라 한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1. 새로운 정치의 시작
왜 쫓겨나야 했는가|빈전에 부는 바람|보름 만에 귀양을 가다|옥사의 시작|이른바 연루자들의 면모|종부시 도제조|고립무원의 임해군|방방곡곡이 들썩이다|서인으로 낮추어지다|불편해진 대명외교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즉위식 장면, 그리고 함의|변화의 연착륙|유교 7신|국가 오례와 즉위|여러 당파의 분리|세자를 흔들다|즉위 후의 조치|무신년 당적|우연, 절묘한 타이밍|정인홍의 귀환|그로부터 15년 뒤|회퇴변척의 부메랑|“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폐비의 길을 열다
3. 먹는 것이 하늘이다
이원익의 건의|대 개혁, 대동법|연산군, 그리고 인재|율곡과 서애가 본 공납제|재정 정상화가 필요하다|조심스러운 시범사업|왕실과 권세가의 방납 커넥션|뒤로 가는 광해군|호조판서 황신 |국가재정 개혁에 대한 비전|사건의 상관성과 인과성|좌절할 선혜, 대동법
4. 경연보다 친국이다
보수의 긍정성, 안정감|땅은 위에, 하늘은 아래에|파행, 문치주의의 교훈|아프다, 춥다, 덥다|경연 vs 여알|《서경》을 강의하다|즐거운 공부 시간|뚱뚱해진 이유|국문할 시간은 있어도|드물어진 만남|침묵의 조정이 가는 길
5. 기억을 바꾸고 싶다
‘떠든 아이 효과’|국왕의 첫 번째 하교|사초를 태우고도|사초 찾아 방방곡곡|들어가는 기록들 |실록이 잘못될 수 있다|선조 23년? 24년?|실록청의 운영 개선안|《선조실록》이 완성되다|신록 수정에 대한 편견|사론의 수정
6. 과대 소비의 소용돌이
집은 커야 하는가|불타버린 궁궐|백성이 쉬어야 할 때|목재, 석재, 철, 기와|대동법을 가로막은 궁궐 공사|풍수와 소문|꼼꼼하고 섬세한 관심|문제는 재정이다|경복궁보다 10배 크다|소요 비용의 추산|주춧돌을 빼어 바치고|관직 매매 또는 죗값|군량미를 빼어 쓰다|남의 집 불 보듯
7. 절망 속에 피는 희망
수의, 흉소|폐모의 내용|이런 죽음, 저런 죽음|윤선도의 청론|밀려난 사람들|심하의 패배|의심, 균열, 포섭|모르지 않았거늘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프롤로그
1. 새로운 정치의 시작
왜 쫓겨나야 했는가|빈전에 부는 바람|보름 만에 귀양을 가다|옥사의 시작|이른바 연루자들의 면모|종부시 도제조|고립무원의 임해군|방방곡곡이 들썩이다|서인으로 낮추어지다|불편해진 대명외교
2.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즉위식 장면, 그리고 함의|변화의 연착륙|유교 7신|국가 오례와 즉위|여러 당파의 분리|세자를 흔들다|즉위 후의 조치|무신년 당적|우연, 절묘한 타이밍|정인홍의 귀환|그로부터 15년 뒤|회퇴변척의 부메랑|“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폐비의 길을 열다
3. 먹는 것이 하늘이다
이원익의 건의|대 개혁, 대동법|연산군, 그리고 인재|율곡과 서애가 본 공납제|재정 정상화가 필요하다|조심스러운 시범사업|왕실과 권세가의 방납 커넥션|뒤로 가는 광해군|호조판서 황신 |국가재정 개혁에 대한 비전|사건의 상관성과 인과성|좌절할 선혜, 대동법
4. 경연보다 친국이다
보수의 긍정성, 안정감|땅은 위에, 하늘은 아래에|파행, 문치주의의 교훈|아프다, 춥다, 덥다|경연 vs 여알|《서경》을 강의하다|즐거운 공부 시간|뚱뚱해진 이유|국문할 시간은 있어도|드물어진 만남|침묵의 조정이 가는 길
5. 기억을 바꾸고 싶다
‘떠든 아이 효과’|국왕의 첫 번째 하교|사초를 태우고도|사초 찾아 방방곡곡|들어가는 기록들 |실록이 잘못될 수 있다|선조 23년? 24년?|실록청의 운영 개선안|《선조실록》이 완성되다|신록 수정에 대한 편견|사론의 수정
6. 과대 소비의 소용돌이
집은 커야 하는가|불타버린 궁궐|백성이 쉬어야 할 때|목재, 석재, 철, 기와|대동법을 가로막은 궁궐 공사|풍수와 소문|꼼꼼하고 섬세한 관심|문제는 재정이다|경복궁보다 10배 크다|소요 비용의 추산|주춧돌을 빼어 바치고|관직 매매 또는 죗값|군량미를 빼어 쓰다|남의 집 불 보듯
7. 절망 속에 피는 희망
수의, 흉소|폐모의 내용|이런 죽음, 저런 죽음|윤선도의 청론|밀려난 사람들|심하의 패배|의심, 균열, 포섭|모르지 않았거늘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책 속으로
추국 마당에는 운이 없어서 잡혀 온 사람도 있었다. 평양 산다는 인수(仁守), 황주에 살던 용이(龍伊)라는 사람이 그들이다. 인수는 평양에서 한양으로 일자리를 찾으러 왔다가 잡혔고, 용이는 궁가에 밀가루를 납품하려고 왔다고 붙잡혀 갇혔다. 또 임해군 궁 옆에 살다가 잡혀 온 사람도 있었다. 산휘(山輝)는 궁가에 땔나무를 팔러 왔다가 잡혀 왔다.
특히 궁가에 칼 등 일용할 물건을 대던 대장장이 조명환(曺命環)은 못과 말발굽을 만들어주려고 드나들다가 잡혀 왔다. 활 기술자 양선경(梁善慶), 칼 기술자 묵이(墨伊)도 그런 경우였다. 임해군 집에서 놀이판을 벌였던 광대 백은금(白隱金) 등도 임해군의 종으로 오해를 받아 끌려왔다. 그러나 의심의 눈으로 보면 이들 광대 무리보다 의심스러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pp.51∼52
필자가 조사해보았더니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명인데, 위에서 보듯 《선조실록》에서는 대북(大北) 또는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 몇몇을 빼곤 모두 깍아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편찬자 자신인 이이첨이 스스로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고 평가한 데 이르면 낯간지러운 점도 없지 않다. 기자헌에 대해,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과묵하고 아부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방납을 하면서 대동법을 무력화했던 인물이고 보면, 바르다는 평은 옳지 않은 듯하다.
또한 서인이나 남인, 소북 중에서 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없을 리 없고, 또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원본에서 보여주는 대북 정권 담당자들의 자찬과 배타성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런 점 때문에 결국 실록 수정 논의가 제기되었고, 실록 수정의 명분이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선조실록》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255
영건도감에서는 아예 무과 시험에서 활쏘기를 대리로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속은을 받기로 했다. 이들은 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과거 시험의 법을 어길 것이므로 아예 재물을 걷자는 말이다. 영건도감에서는 이들을 “말세의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말세가 맞기는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을 대상으로 정목(正木) 각 2동씩을 속죄금으로 거두어 쓴다면 무명의 필 수가 거의 3백여 동에 이를 것이니 이것을 영건에 보태자고 건의했고, 광해군도 따랐다.
아예 유배 보낸 사람들에게 일정한 수량의 은을 받고 방면시켜 살게 하는 방안까지 실행에 옮겼다. 광해군의 사돈인 밀창부원군 박승종의 아이디어였다. 계축옥사 때 당대의 이름 있는 재상들이 모두 귀양을 갔으므로 이들을 사면시키는 방편으로 이렇게 은을 받고 놓아주기를 청했던 것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더 치욕을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 궁가에 칼 등 일용할 물건을 대던 대장장이 조명환(曺命環)은 못과 말발굽을 만들어주려고 드나들다가 잡혀 왔다. 활 기술자 양선경(梁善慶), 칼 기술자 묵이(墨伊)도 그런 경우였다. 임해군 집에서 놀이판을 벌였던 광대 백은금(白隱金) 등도 임해군의 종으로 오해를 받아 끌려왔다. 그러나 의심의 눈으로 보면 이들 광대 무리보다 의심스러운 존재는 없었을 것이다. ---pp.51∼52
필자가 조사해보았더니 《선조실록》의 사론을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한 인물이 40명인데, 위에서 보듯 《선조실록》에서는 대북(大北) 또는 편찬에 참여했던 사람 몇몇을 빼곤 모두 깍아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편찬자 자신인 이이첨이 스스로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고 평가한 데 이르면 낯간지러운 점도 없지 않다. 기자헌에 대해,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과묵하고 아부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방납을 하면서 대동법을 무력화했던 인물이고 보면, 바르다는 평은 옳지 않은 듯하다.
또한 서인이나 남인, 소북 중에서 능력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 없을 리 없고, 또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 사람일진대, 원본에서 보여주는 대북 정권 담당자들의 자찬과 배타성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런 점 때문에 결국 실록 수정 논의가 제기되었고, 실록 수정의 명분이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선조실록》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p.255
영건도감에서는 아예 무과 시험에서 활쏘기를 대리로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속은을 받기로 했다. 이들은 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과거 시험의 법을 어길 것이므로 아예 재물을 걷자는 말이다. 영건도감에서는 이들을 “말세의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말세가 맞기는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들을 대상으로 정목(正木) 각 2동씩을 속죄금으로 거두어 쓴다면 무명의 필 수가 거의 3백여 동에 이를 것이니 이것을 영건에 보태자고 건의했고, 광해군도 따랐다.
아예 유배 보낸 사람들에게 일정한 수량의 은을 받고 방면시켜 살게 하는 방안까지 실행에 옮겼다. 광해군의 사돈인 밀창부원군 박승종의 아이디어였다. 계축옥사 때 당대의 이름 있는 재상들이 모두 귀양을 갔으므로 이들을 사면시키는 방편으로 이렇게 은을 받고 놓아주기를 청했던 것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더 치욕을 느끼게 만들었다.
---pp.304∼305
출판사 리뷰
광해군에 대한 21세기의 반정(反正)”
“나라를 망하는 과정을 알면, 나라를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오항녕 교수가 바치는 안타까운 위로, 연대의 편지
1623년 인조(계해)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정권. 조선시대 내내 혼군(昏君) - 판단이 흐린 임금으로 불렸던 광해군.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택민(澤民) 군주로 재평가되었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였던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이렇게 광해군은 20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인식에서 비판적인 성향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되어 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1세기에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이 책은 이런 부활과 권세에 대한 비판이다.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지난 100년 동안 추켜세웠던, 조선시대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다시 성군(聖君)이 되었던 광해군에 대해 “그는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입니다.”라며 이 책을 21세기 초입에 시도하는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반정(反正)이라 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정반대로 왜곡된 광해군시대를 바로잡는다는 소극적 기획은 아니다. 이 책은 파(破)가 아닌 립(立)이다. 삶을 망치는 과정을 알면 삶을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듯이, 나라가 망하는 과정을 알면 나라를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역사 이해의 증대는 실패로부터 나온다. 실패하고 나면 왜 자신들이 생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일이 발생했는지 설명할 필요를 크게 느낀다. 실패한 역사에서 더 배우자는 취지이다.
저자는 우리 시대 우리 국민들이 이 나라가 어떤 세상이 되길 원하는지 광해군과 그의 시대에서 배우길 권한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위로, 역사적 연대의 편지이기도 하다.
광해군의 시대를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과 욕망,
사건들의 우연성을 겹쳐서 읽어내다
오항녕 교수는 2010년에 펴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에 〈부활하는 광해군〉이란 논문 한 편을 실었다. 이 논문이 담론으로서의 광해군을 분석한 글이라면 이 책은 그 담론의 토대, 즉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전면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다룬 글이다. 그는 “그렇게 포착된 시대는 사뭇 느낌이 다르게 다가왔다. 사람과 구조가 함께 다가왔고, 조선의 다른 시기와도 비교가 가능해졌으며, 나가가 조선과 다른 시대에 대한 대비 속에서 질문도 많이 얻었다.”며 소회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먼저, 광해군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사료인 ‘광해군일기’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독자들이 안심하고 논지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 오항녕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록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그 편찬과정, 다른 실록과의 장단점, 읽을 때 유의할 점 등을 안내한다. 이어 광해군 시대가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한지, 조선시대사와 역사인식의 두 측면에서 해설하였다.
저자가 광해군 시대를 접근하는 시각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 그의 일관된 근대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주의 역사관이란 유럽의 계몽주의자에게 봉건사회는 암흑시대였듯이 조선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았을 해체기로 인식하는 그런 류이다. 역사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역사란 우리와 다른 삶의 양식을 가졌던 사람들과 대등하게 만나는 마당(평원) 이상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근대주의는 있지도 않은 보편사관을 만들어내어 다양한 역사를 줄 세우기 한다. 심지어 그 보편사관에 법칙성까지 부여하면서. 결국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 역사주체로서의 민중의 발견에 기초하여 운동사, 사회사, 경제사 등에 발전을 가져온 역사학은 오히려 이런 근대주의 때문에 넓은 평원을 두고서 돌아 나오기도 힘든 골목길로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세 요소에 주목한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요소이기 때문에 해석에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객관적 조건, 목적의식, 그리고 우연이 그것이다. 누구나, 어느 시대나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적,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다는 것. 그러나 또한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한다는 것. 그런데 워낙 많은 조건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들이 부딪히면서 역사는 우연이라는 독특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아,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대부분 이 우연에 대한 감각이다. 몰론 우연은 ‘멋대로’라는 말과 전혀 다르다.
객관적 조건은 역사를 해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지만 환원론의 우려가 있다. 우리 민족은 원래 냄비야, 반도 근성이 있어, 더운 나라 사람들은 게을러……, 이런 해석은 종족결정론, 환경결정론, 지리결정론의 사례이다.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쉽게 관념론에 빠진다. 그 극단에 신이 있다.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 대의 해석에도 이 세 요소를 적용한다.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과 욕망,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것이다. 시스템의 작동은 그가 말하는 문치주의(경연, 사관, 언관), 재정(부세, 대동법), 그리고 대외관계를 통해 살핀다.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는 정치세력의 교체, 수차례의 옥사, 궁궐공사를 대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비롯해 우연이 빚어내는 서사를 들려준다.
“광해군 15년 ‘잃어버린 시간’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과 그의 시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진실이 담긴 이야기다. 이 책은 그 전모를 크게 3시기로 그려낸다. 1기는 즉위부터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까지이다. 정치세력이나 정책 모두 선조 후반부터 다루는데, 이 시기는 북인 중심으로 정치세력이 형성되지만 서인, 남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이다. 새로운 국왕은 즉위하자마자 1년여 동안 친형 임해군을 진도로 귀양 보냈다가 강화에서 죽였고, 아버지 선조의 유신에게 죽음을 내렸다. 불쾌하고 불길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민생과 재정 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추진했고, 백성들은 지지했다. 왕실과 집권 북인은 이권을 지키기 위한 본심을 서서히 드러냈다. 대동법 추진자들은 하나둘 조정을 떠나든지 귀양을 갔다.
2기는 1613년부터 1617, 18년 무렵까지이다. 본격적으로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타 정치세력을 배제하는 시기이다. 대동법은 물 건너갔고, 궁궐 짓는 망치소리만 들려온다. 광해군은 늘 궁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새 궁궐을 지으라고 한다. 경연은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위아래가 소통하지 않는다. 광해군은 경연 대신 죄인을 심문하는 추국청으로 나간다. 실록 편찬은 요원할뿐더러 기록도 부실하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한다. 이이첨을 위시한 신하들은 권력과 잇속만 챙기고, 광해군의 멘토 정인홍은 아집에 갇혀 있다. 침묵의 정치, 배제의 정치였다.
3기는 1617, 18년부터 계해반정까지이다. 드디어 불안한 정치 때문에 북인 세력 내에서도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이탈하지 않은 자들은 서로 싸운다. 윤선도는 이이첨을 비판하고, 허균은 동지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다. 관직도, 상벌도, 과거급제도 다 판다. 남은 것은 궁궐 공사이다. 후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은 말뿐이다. 군량미도 궁궐 공사비로 쓴다. 심지어 심하 전투 이후, 전사자와 부상자 집안에 주라고 명나라 황제가 준 은 1만 냥조차 공사비로 쓴다. 이제 이 딱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차츰 반정 뒤에 살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바뀐다.
“그들은 다시 농사를 지어야 했고, 바닥 난 재정을 긁어모아 나라를 운영해야 했으며, 후세를 낳고 기르고 가르쳐야 했다. 무너진 사회의 기강을 세워 그래도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했으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어야 했다. 그러다가 미처 여력이 없던 차에 닥친 침략에 허둥대기도 하고 답답해서 죽고 싶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서 하루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에필로그 중에서
선조 말, 전쟁의 후유증도 아물어갔고, 농경지 조사를 통해서 불균등한 세금부과를 완화시켜 민생이 숨통을 텄고 탈루된 세금을 찾아 재정에 보탤 수 있었다. 어느 역사에서 보이듯이 사리사욕을 공론에 감추는 자들도 있었지만, 더 공정한 태도로 정치에 임하는 사람도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이렇게 민생과 재정의 안정, 건강한 정치, 풍요로운 문화의 창출,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능동적 대처 등 너무도 절박하고 중요했던 그 시기를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아니 그냥 보내버린 것이 아니라 악화된 채로 방치되고 엉켜서 나뒹굴고 있었다. 잃어버린 15년은 실기(失機)의 업보까지 남겨주었다. 그러나 반정(反正)으로 일어난 그들은 다시 이 땅에서 살아갔다. 언제나 그 땅의 주인은 그들이었듯이. 지금 우리처럼.
1장 새로운 정치의 시작
선조 승하 후 14일 만에 귀양을 간 임해군. 그는 다음해 강화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반역을 꾀한 역모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관련자들과 무기들. 새로운 정치(新政) 초기 넉 달을 매달린 옥사치고는 너무 미미했다. 칼 20자루, 활 10개 …… 그리고 퇴직 군인 몇 명. 차츰 이 옥사와 임해군의 죽음에 광해군이 관련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임해군 옥사는 명나라를 자극하고, 결국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에서 뇌물 수수라는 전례를 만들어낸다.
2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역사의 변화는 사람의 변화에서 실감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변화 가운데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과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가늠해보려는 것이다. 동서, 남북, 대북과 소북의 분리를 간략히 살피고, 선조 말의 실권자 유영경(柳永慶)의 거취, 광해군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정인홍(鄭仁弘)의 등장과 최후를 본다. 유영경은 광해군-정인홍-이이첨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라인에 맞서 자신이 영창대군과 결탁하여 권세를 이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정치권력은 부리는 이에 따라 사욕(私慾)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지만 공기(公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정인홍의 상소는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을 추앙하기 위해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을 비난하는 논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스승인 남명을 욕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런 배타성과 독단성은 계속 광해군 정권, 북인 정권의 기반을 축소시켜갔다. 계축옥사와 폐모론은 거의 정인홍의 지침대로 전개되어갔다. 후일 정인홍은 공초에서 자신의 이런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사료는 정인홍의 이 진술을 기각하고 있다.
3장 먹는 것이 하늘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했는데, 양반 지주들이 반대하여 못했다’는 통념과 달리 이 책은 광해군과 핵심 대북세력이 대동법에 반대하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대동법을 반대하던 대북세력이 대동법을 통해 공납제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을 몰아낸 것이 계축옥사였다. 이것이 계축옥사가 갖는 진실의 증층성이다.
대동법의 좌절에는 광해군 대 내내 지속되었던 토목공사가 한 몫을 했다. 물자와 인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세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대동법의 전제가 되는 토지조사는 안중에 없었고, 공납을 조정하기는커녕 막대한 특별 공물을 더 거뒀기 때문이다.
광해군대 정상적인 당국자라면 먼저 내려야 할 두 가지 정책 판단이 있었다. 첫째, 재정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 말 임시 양전(量田) 이후로는 토지 결수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이 광해군대에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그 재정 규모에 기초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했다. 당연히 대동법을 통한 민생 안정이 우선이었으나, 광해군은 농업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2대(大, 다른 하나는 전쟁) 과대 소비 중 하나 토목을 선택했다. 민생 안정 대신 과대 소비를 택한 것이다.
4장 경연보다 친국이다
경연은 오늘날 국무회의 성격 그 이상이었다. 국정의 철학을 공유하는 자리, 민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제도였다. 광해군은 ‘아프다, 춥다, 덥다’며 일관되게 미루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가 경연만이 아니겠지만 중요한 점은 ‘시스템의 붕괴’라는 것이다.
광해군은 대신에 친형인 임해군 옥사에 매달렸다. 이 불쾌한 서막은 광해군 4년 김직재 옥사, 광해군 5년 칠서의 옥에 이은 계축옥사, 광해군 6년 영창대군의 증살(蒸殺), 그리고 인목대비의 폐위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광해군만큼 친국(親鞫 왕이 직접 국문에 참여하는 것)에 집착한 군주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親鞫’을 검색하면 영조가 401건 광해군이 344건이다. 영조는 재위 50년이 넘고, 광해군은 15년이다. 광해군은 경연 대신 추국청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5장 기억을 바꾸고 싶다
경연이 국정에 앞서서 준비하고 토론하는 과정이라면 사관은 정책이 끝난 뒤에 이루어지는 평가의 성격을 띤다. 국왕이 즉위하면서 내리는 첫 번째 전교가 ‘신록을 편찬하라’는 통례를 깨고 광해군은 즉위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실록청을 설치하였다.‘이항복-이정구-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을 이이첨으로 대체한 뒤 무려 9년 만에 《선조실록》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이첨 등 《선조실록》 편찬자들은 신뢰를 얻지 못했다. 공정성에서 의심을 받은 것이다. 또 임진왜란과 같이 사초가 손실되는 사태가 있었더라도 통상 1~3년 안에 마치던 실록 편찬을 10년 가까이나 되어서야 마쳤다는 것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런 이유로 《선조실록》은 계해반정 뒤 수정 요구에 부딪혔고, 결과는《선조수정실록》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네 차례 있었던 실록의 수정, 개수의 시발점이 바로 《선조실록》의 불공정한 편찬에 의한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낳았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고도 궁극적인 평가는 후세 사람들이 내린다는 원칙 아래 《선조실록》을 그대로 보존했던 당국자들의 역사의식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두 실록을 놓고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조실록》의 불공정한 편찬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6장 과대소비의 소용돌이
현재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든지 어물쩍 넘어가는 사안 중의 하나가 광해군대 내내 계속된 궁궐공사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인 토목공사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목하더라도 다른 정책이나 상황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왕권강화라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숨어버린다.
선조 대부터 짓기 시작한 창덕궁이 완공되고서도 광해군은 창경궁, 경운궁을 다시 지었다. 공사는 점점 커졌다. 새로 짓기 시작한 인경궁과 경덕궁은 그 규모가 상상 밖이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국가재정의 15∼25퍼센트를 썼다. 이 비용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예산 중에서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그러고도 세금을 25퍼센트 또 올렸다. 나라의 1년 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가 되는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 이 정도면 북쪽에서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공사비용이 바닥나자 공명첩을 뿌렸다. 죄를 면제해주는 대신 은을 받았다. 급기야 군량미를 빼어 썼다. 강화에 있는 훈련도감의 쌀 9천여 석까지. 광해군 10년 10월이 되어서도 광해군은 궁궐을 지을 목재 조달에 몰두했다. 바다를 방어하는 군선까지 재목을 운반하는 데 동원했다. 이듬해인 광해군 11년 3월 이런 상태로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대후금 파병을 했고 준비 없는 파병의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군사 1만3천여 명 중 9천명이 전사하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되었다. 파병과 참패는 재정의 파탄과 군정(軍政)의 방치가 빚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훨씬 오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7장 절망 속에 피는 희망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잡지 않고 계속 끼우다 보면 하나 이상의 구멍이 남는다. 종종 바보들은 계속 단추를 끼우다가 필경 구멍을 남긴다. 그리고 우긴다. 원래 이런 옷이라고, 이것도 패션이라고. 이런 억지는 사태를 한층 궁색한 지경으로 몰고 가고, 심지어는 그동안 동조했던 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다. 그렇게 궁색한 지경을 보여주는 사태가 국내에서는 폐모론이고, 대외적으로는 흔히 중립외교로 추앙받는 후금 정책의 무기력함이다. 광해군과 이이첨, 정인홍에 동조했던 자들의 자의, 타의로 등을 돌리는 상황은 윤선도의 이이첨 비판 상소, 그리고 허균을 역모로 몰아가는 데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난맥 속에서 광해군은 정책과 사안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손을 놓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리고 민심은 차츰 새로운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자의 말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속고 왜곡할 수 있을까? 처음 제가 광해군대를 심각하게 공부하면서 가졌던 소회였습니다. 이 땅에서 버젓이, 교과서, 텔레비전, 논문, 저서, 칼럼…, 마치 유령처럼 우리를 홀리고 있었습니다. 혹세무민! 이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었습니다. 이제는 광해군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제 속에 광해군이 들어오고 이원익, 이항복이 들어왔습니다. 이이첨, 정인홍이 들어왔고, 무엇보다 농사짓고 남은 것조차 세금으로 빼앗기며 떠돌다 죽어간 사람들, 인경궁에서 돌을 쪼던 장인들, 심하 전투로 끌려가던 병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딛고 일어나는 그들이 보였습니다. 그 삶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나라를 망하는 과정을 알면, 나라를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오항녕 교수가 바치는 안타까운 위로, 연대의 편지
1623년 인조(계해)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정권. 조선시대 내내 혼군(昏君) - 판단이 흐린 임금으로 불렸던 광해군. 그러나 20세기 들어와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택민(澤民) 군주로 재평가되었다. 그 기원은 놀랍게도 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간사였던 일본인 학자 이나바 이와키치. 이렇게 광해군은 20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인식에서 비판적인 성향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이거나를 막론하고, 또 교과서든 대중서든 전문연구서든 가리지 않고 고르게 재평가를 받으며 복권되어 부활하다 못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1세기에도 광해군은 건재하다. 이 책은 이런 부활과 권세에 대한 비판이다.
오항녕 교수(전주대 역사문화학과)는 지난 100년 동안 추켜세웠던, 조선시대 사람들 표현대로 하면 다시 성군(聖君)이 되었던 광해군에 대해 “그는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입니다.”라며 이 책을 21세기 초입에 시도하는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반정(反正)이라 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정반대로 왜곡된 광해군시대를 바로잡는다는 소극적 기획은 아니다. 이 책은 파(破)가 아닌 립(立)이다. 삶을 망치는 과정을 알면 삶을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듯이, 나라가 망하는 과정을 알면 나라를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역사 이해의 증대는 실패로부터 나온다. 실패하고 나면 왜 자신들이 생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고 다른 일이 발생했는지 설명할 필요를 크게 느낀다. 실패한 역사에서 더 배우자는 취지이다.
저자는 우리 시대 우리 국민들이 이 나라가 어떤 세상이 되길 원하는지 광해군과 그의 시대에서 배우길 권한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위로, 역사적 연대의 편지이기도 하다.
광해군의 시대를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과 욕망,
사건들의 우연성을 겹쳐서 읽어내다
오항녕 교수는 2010년에 펴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에 〈부활하는 광해군〉이란 논문 한 편을 실었다. 이 논문이 담론으로서의 광해군을 분석한 글이라면 이 책은 그 담론의 토대, 즉 광해군과 그의 시대를 전면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다룬 글이다. 그는 “그렇게 포착된 시대는 사뭇 느낌이 다르게 다가왔다. 사람과 구조가 함께 다가왔고, 조선의 다른 시기와도 비교가 가능해졌으며, 나가가 조선과 다른 시대에 대한 대비 속에서 질문도 많이 얻었다.”며 소회한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먼저, 광해군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사료인 ‘광해군일기’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독자들이 안심하고 논지에 동참할 수 있게 해준다. 오항녕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실록 전문가’다운 안목으로 그 편찬과정, 다른 실록과의 장단점, 읽을 때 유의할 점 등을 안내한다. 이어 광해군 시대가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한지, 조선시대사와 역사인식의 두 측면에서 해설하였다.
저자가 광해군 시대를 접근하는 시각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 첫째, 그의 일관된 근대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주의 역사관이란 유럽의 계몽주의자에게 봉건사회는 암흑시대였듯이 조선은 빨리 지나갔으면 좋았을 해체기로 인식하는 그런 류이다. 역사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역사란 우리와 다른 삶의 양식을 가졌던 사람들과 대등하게 만나는 마당(평원) 이상이 아니라는 것. 그런데 근대주의는 있지도 않은 보편사관을 만들어내어 다양한 역사를 줄 세우기 한다. 심지어 그 보편사관에 법칙성까지 부여하면서. 결국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 역사주체로서의 민중의 발견에 기초하여 운동사, 사회사, 경제사 등에 발전을 가져온 역사학은 오히려 이런 근대주의 때문에 넓은 평원을 두고서 돌아 나오기도 힘든 골목길로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세 요소에 주목한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요소이기 때문에 해석에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객관적 조건, 목적의식, 그리고 우연이 그것이다. 누구나, 어느 시대나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적,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다는 것. 그러나 또한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한다는 것. 그런데 워낙 많은 조건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욕구들이 부딪히면서 역사는 우연이라는 독특한 지점을 만들어낸다. ‘아, 그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대부분 이 우연에 대한 감각이다. 몰론 우연은 ‘멋대로’라는 말과 전혀 다르다.
객관적 조건은 역사를 해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지만 환원론의 우려가 있다. 우리 민족은 원래 냄비야, 반도 근성이 있어, 더운 나라 사람들은 게을러……, 이런 해석은 종족결정론, 환경결정론, 지리결정론의 사례이다. 목적의식만 강조하면 쉽게 관념론에 빠진다. 그 극단에 신이 있다.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 대의 해석에도 이 세 요소를 적용한다. 객관적 조건으로서의 시스템의 작동, 사람들의 비전과 욕망,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것이다. 시스템의 작동은 그가 말하는 문치주의(경연, 사관, 언관), 재정(부세, 대동법), 그리고 대외관계를 통해 살핀다. 사람들의 욕망과 의지는 정치세력의 교체, 수차례의 옥사, 궁궐공사를 대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비롯해 우연이 빚어내는 서사를 들려준다.
“광해군 15년 ‘잃어버린 시간’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과 그의 시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진실이 담긴 이야기다. 이 책은 그 전모를 크게 3시기로 그려낸다. 1기는 즉위부터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까지이다. 정치세력이나 정책 모두 선조 후반부터 다루는데, 이 시기는 북인 중심으로 정치세력이 형성되지만 서인, 남인들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기이다. 새로운 국왕은 즉위하자마자 1년여 동안 친형 임해군을 진도로 귀양 보냈다가 강화에서 죽였고, 아버지 선조의 유신에게 죽음을 내렸다. 불쾌하고 불길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민생과 재정 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추진했고, 백성들은 지지했다. 왕실과 집권 북인은 이권을 지키기 위한 본심을 서서히 드러냈다. 대동법 추진자들은 하나둘 조정을 떠나든지 귀양을 갔다.
2기는 1613년부터 1617, 18년 무렵까지이다. 본격적으로 대북 정권이 독주하면서 타 정치세력을 배제하는 시기이다. 대동법은 물 건너갔고, 궁궐 짓는 망치소리만 들려온다. 광해군은 늘 궁궐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며 새 궁궐을 지으라고 한다. 경연은 문을 닫은 지 오래여서 위아래가 소통하지 않는다. 광해군은 경연 대신 죄인을 심문하는 추국청으로 나간다. 실록 편찬은 요원할뿐더러 기록도 부실하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한다. 이이첨을 위시한 신하들은 권력과 잇속만 챙기고, 광해군의 멘토 정인홍은 아집에 갇혀 있다. 침묵의 정치, 배제의 정치였다.
3기는 1617, 18년부터 계해반정까지이다. 드디어 불안한 정치 때문에 북인 세력 내에서도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이탈하지 않은 자들은 서로 싸운다. 윤선도는 이이첨을 비판하고, 허균은 동지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다. 관직도, 상벌도, 과거급제도 다 판다. 남은 것은 궁궐 공사이다. 후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은 말뿐이다. 군량미도 궁궐 공사비로 쓴다. 심지어 심하 전투 이후, 전사자와 부상자 집안에 주라고 명나라 황제가 준 은 1만 냥조차 공사비로 쓴다. 이제 이 딱한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차츰 반정 뒤에 살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바뀐다.
“그들은 다시 농사를 지어야 했고, 바닥 난 재정을 긁어모아 나라를 운영해야 했으며, 후세를 낳고 기르고 가르쳐야 했다. 무너진 사회의 기강을 세워 그래도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했으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어야 했다. 그러다가 미처 여력이 없던 차에 닥친 침략에 허둥대기도 하고 답답해서 죽고 싶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서 하루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에필로그 중에서
선조 말, 전쟁의 후유증도 아물어갔고, 농경지 조사를 통해서 불균등한 세금부과를 완화시켜 민생이 숨통을 텄고 탈루된 세금을 찾아 재정에 보탤 수 있었다. 어느 역사에서 보이듯이 사리사욕을 공론에 감추는 자들도 있었지만, 더 공정한 태도로 정치에 임하는 사람도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이렇게 민생과 재정의 안정, 건강한 정치, 풍요로운 문화의 창출,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능동적 대처 등 너무도 절박하고 중요했던 그 시기를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버렸다. 아니 그냥 보내버린 것이 아니라 악화된 채로 방치되고 엉켜서 나뒹굴고 있었다. 잃어버린 15년은 실기(失機)의 업보까지 남겨주었다. 그러나 반정(反正)으로 일어난 그들은 다시 이 땅에서 살아갔다. 언제나 그 땅의 주인은 그들이었듯이. 지금 우리처럼.
1장 새로운 정치의 시작
선조 승하 후 14일 만에 귀양을 간 임해군. 그는 다음해 강화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반역을 꾀한 역모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빈곤한 관련자들과 무기들. 새로운 정치(新政) 초기 넉 달을 매달린 옥사치고는 너무 미미했다. 칼 20자루, 활 10개 …… 그리고 퇴직 군인 몇 명. 차츰 이 옥사와 임해군의 죽음에 광해군이 관련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임해군 옥사는 명나라를 자극하고, 결국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에서 뇌물 수수라는 전례를 만들어낸다.
2장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역사의 변화는 사람의 변화에서 실감할 수 있다. 여기서는 변화 가운데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과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가늠해보려는 것이다. 동서, 남북, 대북과 소북의 분리를 간략히 살피고, 선조 말의 실권자 유영경(柳永慶)의 거취, 광해군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정인홍(鄭仁弘)의 등장과 최후를 본다. 유영경은 광해군-정인홍-이이첨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라인에 맞서 자신이 영창대군과 결탁하여 권세를 이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정치권력은 부리는 이에 따라 사욕(私慾)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지만 공기(公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다.
정인홍의 상소는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을 추앙하기 위해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을 비난하는 논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스승인 남명을 욕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런 배타성과 독단성은 계속 광해군 정권, 북인 정권의 기반을 축소시켜갔다. 계축옥사와 폐모론은 거의 정인홍의 지침대로 전개되어갔다. 후일 정인홍은 공초에서 자신의 이런 혐의를 부인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사료는 정인홍의 이 진술을 기각하고 있다.
3장 먹는 것이 하늘이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했는데, 양반 지주들이 반대하여 못했다’는 통념과 달리 이 책은 광해군과 핵심 대북세력이 대동법에 반대하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대동법을 반대하던 대북세력이 대동법을 통해 공납제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을 몰아낸 것이 계축옥사였다. 이것이 계축옥사가 갖는 진실의 증층성이다.
대동법의 좌절에는 광해군 대 내내 지속되었던 토목공사가 한 몫을 했다. 물자와 인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세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대동법의 전제가 되는 토지조사는 안중에 없었고, 공납을 조정하기는커녕 막대한 특별 공물을 더 거뒀기 때문이다.
광해군대 정상적인 당국자라면 먼저 내려야 할 두 가지 정책 판단이 있었다. 첫째, 재정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 말 임시 양전(量田) 이후로는 토지 결수를 파악하기 위한 양전이 광해군대에 아예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그 재정 규모에 기초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했다. 당연히 대동법을 통한 민생 안정이 우선이었으나, 광해군은 농업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2대(大, 다른 하나는 전쟁) 과대 소비 중 하나 토목을 선택했다. 민생 안정 대신 과대 소비를 택한 것이다.
4장 경연보다 친국이다
경연은 오늘날 국무회의 성격 그 이상이었다. 국정의 철학을 공유하는 자리, 민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제도였다. 광해군은 ‘아프다, 춥다, 덥다’며 일관되게 미루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가 경연만이 아니겠지만 중요한 점은 ‘시스템의 붕괴’라는 것이다.
광해군은 대신에 친형인 임해군 옥사에 매달렸다. 이 불쾌한 서막은 광해군 4년 김직재 옥사, 광해군 5년 칠서의 옥에 이은 계축옥사, 광해군 6년 영창대군의 증살(蒸殺), 그리고 인목대비의 폐위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광해군만큼 친국(親鞫 왕이 직접 국문에 참여하는 것)에 집착한 군주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親鞫’을 검색하면 영조가 401건 광해군이 344건이다. 영조는 재위 50년이 넘고, 광해군은 15년이다. 광해군은 경연 대신 추국청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5장 기억을 바꾸고 싶다
경연이 국정에 앞서서 준비하고 토론하는 과정이라면 사관은 정책이 끝난 뒤에 이루어지는 평가의 성격을 띤다. 국왕이 즉위하면서 내리는 첫 번째 전교가 ‘신록을 편찬하라’는 통례를 깨고 광해군은 즉위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실록청을 설치하였다.‘이항복-이정구-신흠’으로 구성된 실록편찬 라인을 이이첨으로 대체한 뒤 무려 9년 만에 《선조실록》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이첨 등 《선조실록》 편찬자들은 신뢰를 얻지 못했다. 공정성에서 의심을 받은 것이다. 또 임진왜란과 같이 사초가 손실되는 사태가 있었더라도 통상 1~3년 안에 마치던 실록 편찬을 10년 가까이나 되어서야 마쳤다는 것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런 이유로 《선조실록》은 계해반정 뒤 수정 요구에 부딪혔고, 결과는《선조수정실록》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 네 차례 있었던 실록의 수정, 개수의 시발점이 바로 《선조실록》의 불공정한 편찬에 의한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낳았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다행히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고도 궁극적인 평가는 후세 사람들이 내린다는 원칙 아래 《선조실록》을 그대로 보존했던 당국자들의 역사의식 덕분에 우리는 오히려 두 실록을 놓고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선조실록》의 불공정한 편찬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일이다.
6장 과대소비의 소용돌이
현재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든지 어물쩍 넘어가는 사안 중의 하나가 광해군대 내내 계속된 궁궐공사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인 토목공사에 대해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주목하더라도 다른 정책이나 상황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왕권강화라는 일반적인 해석으로 숨어버린다.
선조 대부터 짓기 시작한 창덕궁이 완공되고서도 광해군은 창경궁, 경운궁을 다시 지었다. 공사는 점점 커졌다. 새로 짓기 시작한 인경궁과 경덕궁은 그 규모가 상상 밖이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국가재정의 15∼25퍼센트를 썼다. 이 비용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예산 중에서 교육비나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과 같다. 그러고도 세금을 25퍼센트 또 올렸다. 나라의 1년 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가 되는 철을 석 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 이 정도면 북쪽에서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공사비용이 바닥나자 공명첩을 뿌렸다. 죄를 면제해주는 대신 은을 받았다. 급기야 군량미를 빼어 썼다. 강화에 있는 훈련도감의 쌀 9천여 석까지. 광해군 10년 10월이 되어서도 광해군은 궁궐을 지을 목재 조달에 몰두했다. 바다를 방어하는 군선까지 재목을 운반하는 데 동원했다. 이듬해인 광해군 11년 3월 이런 상태로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대후금 파병을 했고 준비 없는 파병의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군사 1만3천여 명 중 9천명이 전사하였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농업노동에 노예로 동원되었다. 파병과 참패는 재정의 파탄과 군정(軍政)의 방치가 빚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훨씬 오랜 원인을 가지고 있었다.
7장 절망 속에 피는 희망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잡지 않고 계속 끼우다 보면 하나 이상의 구멍이 남는다. 종종 바보들은 계속 단추를 끼우다가 필경 구멍을 남긴다. 그리고 우긴다. 원래 이런 옷이라고, 이것도 패션이라고. 이런 억지는 사태를 한층 궁색한 지경으로 몰고 가고, 심지어는 그동안 동조했던 자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든다. 그렇게 궁색한 지경을 보여주는 사태가 국내에서는 폐모론이고, 대외적으로는 흔히 중립외교로 추앙받는 후금 정책의 무기력함이다. 광해군과 이이첨, 정인홍에 동조했던 자들의 자의, 타의로 등을 돌리는 상황은 윤선도의 이이첨 비판 상소, 그리고 허균을 역모로 몰아가는 데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난맥 속에서 광해군은 정책과 사안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손을 놓는 상황이 도래했다. 그리고 민심은 차츰 새로운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자의 말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속고 왜곡할 수 있을까? 처음 제가 광해군대를 심각하게 공부하면서 가졌던 소회였습니다. 이 땅에서 버젓이, 교과서, 텔레비전, 논문, 저서, 칼럼…, 마치 유령처럼 우리를 홀리고 있었습니다. 혹세무민! 이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었습니다. 이제는 광해군 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제 속에 광해군이 들어오고 이원익, 이항복이 들어왔습니다. 이이첨, 정인홍이 들어왔고, 무엇보다 농사짓고 남은 것조차 세금으로 빼앗기며 떠돌다 죽어간 사람들, 인경궁에서 돌을 쪼던 장인들, 심하 전투로 끌려가던 병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딛고 일어나는 그들이 보였습니다. 그 삶을 딛고 다시 시작하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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