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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필자는 유원상 선생의 복음 이해의 큰 줄기를 동의한다. 그리고 유선생이 말씀하시는 양심의 자유 추구는 필자가 속한 장로교회의 성립 원리 중 하나로서 필자 역시 유선생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유원상 선생(그리고 무교회주의자 일반)에게 느끼는 아쉬운 점은 역시나 ‘제도는 악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이다. 분명 성경에서는 ‘직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직분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공동체가 성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세우는 것조차 ‘악한 제도’에 속한 일이며, 또, 그렇게 세움 받는 직분자는 자동적으로 양심에 속박을 받게 된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간의 세월동안 교회가 영적일 뿐 아니라 물리적 ‘공동체’로 모이고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유선생의 독립 전도자의 입장에는 얼마간 이의(異議)가 있다. 그러함에도 그가 힘을 주어 말하는 ‘제도의 역리(逆理)’에 대해서는 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면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 필자 나름대로 언급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제도가 역리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임계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환경, 그리고 개별 모임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역리의 임계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유선생이 ‘제도’ 교회는 거부했을지언정 신약의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유선생이 평생 매주 엽서를 보낸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느슨한 형태로나마 그의 전도, 즉 설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리가 분명 있지 않았던가. 그는 일종의 ‘목회’를 한 것이다.
그래서 유선생의 독립 전도자의 입장에는 얼마간 이의(異議)가 있다. 그러함에도 그가 힘을 주어 말하는 ‘제도의 역리(逆理)’에 대해서는 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면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 필자 나름대로 언급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제도가 역리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임계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환경, 그리고 개별 모임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역리의 임계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유선생이 ‘제도’ 교회는 거부했을지언정 신약의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유선생이 평생 매주 엽서를 보낸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느슨한 형태로나마 그의 전도, 즉 설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리가 분명 있지 않았던가. 그는 일종의 ‘목회’를 한 것이다.
목차
추천의 글 4
1부 복음에 관하여
절대적 진리 11 하나님의 백성과 안식 13 감사의 잔 15 엘엘엘 17
외적 능력과 내적 능력 20 해결 22 안식의 복 24 아는 예수와 믿는 예수 26
건강 상실이 축복이 되는 이유 28 일과 열매 31 비교불가능 33
머리에서 꼬리로 36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38 과녁판 40 공격과 수비 42
천직 44 세계 정복자 47 사적 축복과 공적 축복 49 버릴 수 있는 복 51
당당치 못한 죄 54 임마누엘 56 영원하신 그리스도 58 완전 불구자들 60
절대 불가능 62 냉장고 64 악인은 누구인가 66 호흡 69 오염된 감사 71
실력 대결 73 그리스도인의 완전 75 생명의 위치 77 지독한 복음 79 지금 81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84 송사 불가능 86 환난의 해결 88
믿음의 선한 싸움 90 외상신앙과 현금신앙 92 주는 사람이 강하다 95 은혜의 비밀 97
동질 99 상속자복음 101 후회없는 인생 104 엄청난 은혜 106 적응의 힘 108
선한 목자 우리 하나님 110 복음 분량은 담대 분량이다 112 의인의 믿음 115
2부 교회에 관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예배 119 거짓 나그네와 진품 나그네 121 그루터기 복음 124 본부 없는 하나님 127 기독교의 오의 129 철면피 교회 132 신학교의 죄 134
정신적 예배와 영적 예배 136 양심과 종교개혁 138 우리의 종교와 나의 종교 140
백 원짜리 양심 143 말씀의 권능을 막을 자 누군가 145 동지를 구하지 말자 147
성서냐 전도냐 149 예배의 비밀 151 멜기세덱 153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156
거름더미 복음 158 그리스도인 160 복음의 세계대전 162 중간에 막힌 담 165
유사품 기독교 167 한국에는 삭개오도 없단 말인가 169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뿐이다 17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175 나를 따라 오려거든 177 진 자 편인가 이긴 자 편인가 179
최고의 권능 최고의 지혜 181 기쁨의 비밀 183 선과 예배 186 증인 188
인형과 사람 191 하박국의 전투 194 참 종교를 식별하는 방법 196 설교와 능력 199
단단한 식물 멜기세덱 202 먹느냐 먹히느냐 어느 편인가 204 새 전도 206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요구하시는 이유 209 가인과 말씀 211 에벤에셀 213
외상없는 하나님 215 천국 비밀 217 가장 어려운 일 219 홍수속의 기갈 221
기독자의 기쁨 224
해제 227
1부 복음에 관하여
절대적 진리 11 하나님의 백성과 안식 13 감사의 잔 15 엘엘엘 17
외적 능력과 내적 능력 20 해결 22 안식의 복 24 아는 예수와 믿는 예수 26
건강 상실이 축복이 되는 이유 28 일과 열매 31 비교불가능 33
머리에서 꼬리로 36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38 과녁판 40 공격과 수비 42
천직 44 세계 정복자 47 사적 축복과 공적 축복 49 버릴 수 있는 복 51
당당치 못한 죄 54 임마누엘 56 영원하신 그리스도 58 완전 불구자들 60
절대 불가능 62 냉장고 64 악인은 누구인가 66 호흡 69 오염된 감사 71
실력 대결 73 그리스도인의 완전 75 생명의 위치 77 지독한 복음 79 지금 81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84 송사 불가능 86 환난의 해결 88
믿음의 선한 싸움 90 외상신앙과 현금신앙 92 주는 사람이 강하다 95 은혜의 비밀 97
동질 99 상속자복음 101 후회없는 인생 104 엄청난 은혜 106 적응의 힘 108
선한 목자 우리 하나님 110 복음 분량은 담대 분량이다 112 의인의 믿음 115
2부 교회에 관하여
구원받은 사람의 예배 119 거짓 나그네와 진품 나그네 121 그루터기 복음 124 본부 없는 하나님 127 기독교의 오의 129 철면피 교회 132 신학교의 죄 134
정신적 예배와 영적 예배 136 양심과 종교개혁 138 우리의 종교와 나의 종교 140
백 원짜리 양심 143 말씀의 권능을 막을 자 누군가 145 동지를 구하지 말자 147
성서냐 전도냐 149 예배의 비밀 151 멜기세덱 153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156
거름더미 복음 158 그리스도인 160 복음의 세계대전 162 중간에 막힌 담 165
유사품 기독교 167 한국에는 삭개오도 없단 말인가 169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뿐이다 172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175 나를 따라 오려거든 177 진 자 편인가 이긴 자 편인가 179
최고의 권능 최고의 지혜 181 기쁨의 비밀 183 선과 예배 186 증인 188
인형과 사람 191 하박국의 전투 194 참 종교를 식별하는 방법 196 설교와 능력 199
단단한 식물 멜기세덱 202 먹느냐 먹히느냐 어느 편인가 204 새 전도 206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요구하시는 이유 209 가인과 말씀 211 에벤에셀 213
외상없는 하나님 215 천국 비밀 217 가장 어려운 일 219 홍수속의 기갈 221
기독자의 기쁨 224
해제 227
출판사 리뷰
교회에 기댄, 믿음의 자립을 외치다
가나안 성도의 증가, 무리 짓는 신앙의 귀결
유원상 선생은 독립전도자다. 60년 가까운 신앙 여정의 대부분은 기성교회에서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그의 결론은 신앙의 주체성과 독립,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신앙을 제대로 확정하지 않는 신앙은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신앙적인 양심이었고, 그가 쓴 엽서는 이러한 확신과 고백위에 서 있다. 이러한 고백은 그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자연히 한국 교회의 현실을 향해 서게 된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사실 신앙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 맛을 잃은 소금
그는 ‘그저 얼마만큼의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기독교의 역할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히브리서를 빌어 한국 교회가 신앙의 초보에서 만족하여 단단한 음식을 섭취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에 머물고 있는 신앙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기드온을 예로 들며 신자가 10분의 1로 줄더라도 세속보다 양심적인 신앙인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면 교회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목회자를 만들어낼 신학교가 아니라면 신학교 간판을 내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 말한다. 맛 잃은 소금은 바닥에 버려져 짓밟히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 하나님과 함께 홀로 걷는 좁은 길
그는 스스로 독립 전도자의 길을 택했다. 감리교 목회자에서 독립교회 개척자로, 다시 무교회 신자에서 독립 전도자로의 여정을 걸었다. 때때로 복음은 믿음의 사람을 홀로되게 한다. 엘리야,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또 세례요한과 바울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홀로 믿음을 지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성경은 지속적으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신약성경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다”고 말씀한다.
무너지는 한국교회 앞에선 한 예언자의 초상
유원상 선생의 엽서들이 쓰인 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났다. 최근 십여년간 한국 교회는 급격히 신도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다. 양적 부흥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질적인 성장은 고사하고, 기독교 전체가 기본적인 도덕에 있어서도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원상 선생은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복음은 양심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 ‘다른 복음’이라고. 그는 한국 교회가 교묘히 변형시킨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조금도 ‘에누리 없는’ 복음 그대로를 전할 말씀의 일꾼이 필요한 시대이다.
완전한 실패자의 감사
구본승 (암스테르담장로교회 담임, 캄펀신학교 교회사 박사과정)
그간 유원상 선생의 엽서 모음 글들이 익두스 출판사에서 두 권 출판되었다. 이 두 권은 박찬규 대표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글들이라 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조금 더 읽기 좋은 글들을 골라 한 권으로 묶어내었다. 오래전 유원상 선생의 글들을 접하고 난 뒤 출판된 그분의 글들을 거의 대부분 구해서 읽어본 필자에게는 매우 뜻 깊은 일이다.
필자는 유원상 선생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그분의 글들만 읽은 독자이므로 이렇게 이른바 ‘소개글’을 쓰는 것이 면구스럽다. 그러나 현금, 유선생의 글들을 읽은 사람들조차 희귀하기에 박대표의 부탁을 받아 이렇게 해제를 쓰기에 이르렀다. 이하의 내용은 필자가 파악한바, 또 판단하는바 한계 안에서 서술될 것이기에, 독자께서 유선생의 글들을 읽으시는 데 약간의 유익이라도 되면 그 소임을 다한 것이다.
유원상 선생의 글들은 ‘성경을 성경으로’라는 모토가 실제로 잘 적용된 전범이라 할 만하다. 부분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신구약을 넘나들며 풀어내는 내용은 새로울 수는 있으나 이치에 안 닿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그의 성경 주해가 ‘알레고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유선생은 자기 성경 해석의 명시적인 지평을 “히브리서”(153쪽)라고 적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히브리서가 알레고리적인 정도까지 유선생의 글들도 알레고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알레고리는 다른 성경들보다 과한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유대교인들이 보면 예수님을 ‘어린양’에 빗대는 세례 요한과 바울의 말들 역시 알레고리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신약 전체가 알레고리일 것이다. 필자는 신약이 일정하게 유지하는 ‘지평’이 존재한다고 보며, 그래서 신약이라는 한 덩어리로 묶였다고 본다. 유선생은 이러한 지평을 포착하여, 성경에서 직접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을 이 지평 위에 두고 일관되게 해석한다.
유선생의 엽서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이 소개글의 제목처럼 ‘완전한 실패자의 감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15, 16쪽). 이에서 ‘복음’(1부 주제)과 ‘교회’(2부 주제)에 대한 이해가 흘러나오며,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완전한 실패자’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발견한 자기 자신, 더 나아가서는 인간 실존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롬 3:10) 선보다도 악을 더 좋아하는 악의 종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부터 변치 않고는(요 3:3) 동물적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참으로 저주받을 존재입니다. 그 정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실적 심판기록이 바로 인간의 역사입니다.”(28쪽) “인생이란 흑암 세력과의 싸움을 잠시도 쉴 수 없는 존재”이다.(22쪽) 이러한 인생은 “죽음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 “다오 다오”, “참으로 탐심에는 한정이 없습니다.”(39쪽) “인간들은 복이라면 받는 것과 얻는 것뿐인 줄 알고, 반대로 버리는 것이 복인 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탐심의 우상 숭배자로(골 3:5) 항상 욕심이 잉태 중인 죄의 종 된 사망 족속입니다.”(51쪽)
필자에게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용어보다는 ‘완전한 실패자’가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 와 닿고 유용한 표현으로 보인다. 전자는 전통적으로 잘 정리된 신학용어이긴 하지만, 본의(本義)를 비켜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단지 ‘인간의 윤리적 불완전’을 말하고 퉁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불완전은 계량화할 수 있기에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완전한 실패자’로 기꺼이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완전한 실패자가 되고 이 자리에서 ‘감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성공한 자리, 번영하는 자리, 무엇을 획득한 자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심입니까, 일백 자녀를 기르게 하심입니까? 또는 만년의 장수를 누리게 하심이겠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위하여 전도 사업을 위하여 창조하셨겠습니까? 만일 그것들이 창조의 목적이었다면, 우리들은 틀림없이 실패자, 낙오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창조의 목적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야훼를 찬송하게 하심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사 43:21) 그러므로 우리는 사업을 못하고, 전도를 못하고, 자녀도 없고, 가난, 중병, 단명短命의 일생이었다 해도 결코 그것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만 할 수 있다면 오직 그것 하나로 그 인생은 훌륭한 합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마 3:17)”(47쪽)
하나님 창조의 목적은 감사와 찬송이며, 내가 모든 일에 실패하여 완전한 실패자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실패자’가 아니고 ‘합격자’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단지 완전한 실패자로 머무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합격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연단’을 통해 가능하다. 다음의 인용을 보자.
“하나님은 기독자를 권세 있는 친 백성으로 연단하시며 극상품 포도로 만드시는 영원히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자녀 단련법도 최고의 방법을 쓰십니다. 이가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요 1:12, 디 2:14, 사 5:2, 히 12:8, 고후 5:17) 그는 자녀된 자를 당신처럼 성장시키기 위하여 항상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며(사 45:15) 일부러 환난을 창조하시는 엄중한 아버지이십니다.(사 45:7) 그러나 동시에 선한 목자도 되시기에 그 환난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고 끝까지 동참하시는 사랑의 어머니도 되십니다.”(110쪽)
이 말인즉슨, 하나님은 인생에게 자신이 완전한 실패자임을 연단을 통해 굳히신다는 뜻이다. 이러한 연단이 없다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징계의 환난을 잘 감당하는 이가 참 아들이요 반대로 징계에 순응 못하는 이는 바로 사생자라는 말씀이 참 진리입니다.(히 12:6-8)”(108쪽)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인생의 생사화복”(108쪽)을 통해 인생을 연단하시고 내적으로는 “저주의 율법”(112쪽)을 통해 죄를 알게 하신다. 그러나 인생의 환난이든 율법이든 그 자체에는 생명을 내어놓을 힘도, 죄를 제거할 힘도(112쪽) 없다. “그리스도 은혜의 복음”(116쪽)을 듣고 환난 가운데서는 “최고의 은사”인 “부러움 없는 만족한 마음”(105쪽)을 받고 율법의 저주 앞에서는 “해방의 은혜”(112쪽)를 받아, “인생 최고 저주라 할 죽음까지도 기쁨으로 받아서 감사하는”(116쪽) 사람이 바로 기독자다.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심”(167쪽)에 대한 유선생의 독특한 이해에서 확연하게 요약된다. 히 7:11의 “온전한 양심”을 그는 “버릴 것 없이 모든 것이 진선미로, 감사로 소화되고, 만사가 거룩으로 만족한 양심”으로 풀고 있다. 양심을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감사의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난, 중병, 단명 등은 단지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족과 감사의 재료이기에 이제 선한 것이다. “이처럼 미친 인생(전9:3)에게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병고입니다. 쇠기둥처럼 믿었던 자신의 건강이 고장 나서 죽음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의 자기 위치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엄청난 착각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것인 정상 위치로 돌아올 때 거기서 진정한 평강의 인생이 됩니다.(시29:11) 그는 주 안에서의 자기가 주인공으로 우주를 점령한 자신의 영광에 눈뜨게 되니, 이제는 호흡이 찬송이 됩니다. 이는 자기보다 행복한 자가 없다는 은혜 때문에 더 이상 행복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29쪽) 이렇게 감사 찬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자”(45쪽)이며, “임마누엘의 보배를 지닌 질그릇”, 즉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천국 시민”(31쪽)이다.
필자는 유선생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접하면서, ‘위로’와 ‘인간의 곤고함’과 ‘감사’로 신앙을 요약하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떠올렸다. 또,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의 제 1문 역시 뇌리를 스쳤다. 이러한 신앙의 요체가 우리에게 소박하고 한편으로는 투박해 보이거나 모자라는 것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여러 다른 것을 원한다. 유선생은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고 핵심을 꿰뚫고 있다. 다음 인용을 보자.
“기독교만 하더라도 그 신앙의 동기가 여러 가지입니다. 즉 국가를 위한 신앙, 민중을 위한, 교회를 위한 신앙 또는 지역 사회 때문에 그리고 자기 자신 때문에 등이 있으니 이는 모두가 어떠한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자기 죄의 해결이 근본이니 예수란 죄에서의 구원이란 뜻이요, 이 구원이 해결된 곳에 임마누엘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1:21, 23)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이니 이외의 것은 모두 무너지고 변합니다. ... 그래서 자기 죄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아닌 다른 것들을 자랑하는 무리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자임이 이미 드러난 대로입니다.(마 7:23)”(156쪽)
복음의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유원상 선생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유선생은 스스로를 “무교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139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의지하는 신앙” 혹은 “교회 신앙”(86쪽)과 대척점에 서있는 신앙이다. 따라서 유선생에게 교회는 긍정적인 의미로 잘 쓰이지 않는 용어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선택한 것은 무교회주의 신앙을 애착해서라기보다는 “다만 양심대로 믿다보니 이렇게 된 것뿐”이다. “이는 루터의 말대로 자기 양심에 위배되는 짓은 안전하지도 않고 또 정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139쪽)
이 양심은, 위에서 보았듯이, 만족과 감사로 온전한 양심이다. 그는 이 양심을 침해하는 어떤 것도 거부하기로 “결단”을(178쪽) 했고 이 결단이 그를 무교회주의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제도교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나 개인적 기호(嗜好)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충실하려는 그의 결단이 그를 무교회주의자가 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수준이 높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신앙 양심을 침해한다면 그는 여전히 그 교회에 속하기를 꺼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유선생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교회를 비판한다(이 둘은 사실, 칼로 두부 베듯 서로 딱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제도’로서의 교회라는 측면이다. 다음의 인용들을 보라.
“첫째 하나님의 일은 홀로 하는 것이지 결코 단체나 조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요 6:29의 ‘일’은 단수입니다) 또 이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롬 10:10) 또 이는 자기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 출발이기에 중단될 수 없는 생명적인 것입니다.(히 7:25, 삼상 12:23)”(176쪽)
“종교가 외형화되면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난 것이요, 시대의 총아인 문명 역시 궁극은 전쟁에 다다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몸을 바쳐서 예루살렘 성소 휘장을 찢었습니다.(마27:51, 히 10:19-20)”(181쪽)
“기독자란 누군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지만 소위 신자는 아닙니다. 세례교인도 침례 교인도 아닙니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도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기쁨의 왕자가 기독자입니다.”(224쪽)
이 인용들 외에도 교회의 제도화를 거부하는 말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제도는 결국 딱딱하게 굳게 마련이고 이 제도를 탐욕스런 사람들이 올라타서 기독자의 양심을 속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유선생이 보도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유선생은 현재 시중에 흔히 통용되는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들과 다른 진단을 내린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화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개신교인들이 특별히 수준히 낮아서 이렇게 됐다거나 한국 사회가 특별히 후진적이어서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 교회가 매우 제도화된 것으로 보며, 제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신앙의 근본에서 멀어지고 신자들을 소외시킨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인용들을 보라.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교파가 94개요 장로교만도 52개라 합니다. 이처럼 복잡한 교회 문제에 속지 않으려면 기독교의 초점이 무엇이며,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심 즉 온전한 양심입니다.(히 7:11)”(167쪽)
“오늘날은 복음의 홍수 시대입니다. 전도자는 모두가 복음 복음하며 떠듭니다. 심오한 성서 지식과 신학을 언변으로 또는 글로 근사하게 발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감탄할 만큼 의욕적이고 열정적입니다. 교리로서는 빈틈없을 것이며, 지식으로도 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복음의 설명이지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221쪽)
“오늘날 기독교는 빈틈없는 조직과 방법으로 번창해 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된 것입니다. 여기에 삭개오가 낄 수 없고 소외당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속에다 미련을 두고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라도 삭개오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직결되는 새롭고 산 길을 찾아야 합니다.(렘 2:13, 히 10:19, 20)”(168쪽)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의 혹은 반감이 있고 스스로 개혁적이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선생의 글을 일종의 ‘사이다’로 소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선생이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는 내용은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다. 우선, 제도 교회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제도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이 있다. 하지만, 유선생처럼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천작하기보다는 새로운 “단체나 조직”(176쪽) 아니면 새로운 ‘컨텐츠’, 즉 “심오한 성서 지식과 신학”(221쪽)을 대안으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이 양자 모두 유선생의 견지로는 ‘제도’, 즉 ‘교회’에 속하는 것들이고 교회 신앙 내지는 변종된 교회 신앙의 일종이다. 이것은 결국 “물질과 사람의 힘”, “재력이나 조직력,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사奇事, 이적 등의 보이는 힘”(20쪽)에 의해 움직이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제도에서 단지 ‘퇴거’하는 것으로 되는가? 그렇지 않다. 유선생은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대예배’라 부르는 것을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의 전 삶이 예배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선이 아닌 것은 바로 악인 것처럼 예배가 아닌 것이 죄입니다. 나는 그래서 나 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이것이 곧 선이요, 대예배임을 믿고 기뻐하는 삶입니다.(요 4:23)”(187쪽) 유선생이 교회 신앙을 배격하고 취한 “단독자”(146쪽), “독립의 길”(170쪽)은 홀로 예배를 드리고 홀로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도자”(149쪽)의 길을 걷는 것을 다 포함한다. 신앙을 취사선택하여 형성하지 않고, 철저하게 말씀을 궁구하며, 이를 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기존 교회의 예배보다 더 예배로 불릴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예배를 스스로의 양심과 신앙에 입각하여 확립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단독자, 독립적인 전도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유선생은 이러한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무교회 동지들에게서도 “독립”한 듯이 보인다.(“나를 따라오려거든”) 그가 말하는바 “독립의 고독”(178쪽)은 “쓸쓸한 고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직결 독립”(177쪽)이다.
이상 소략하게나마 유원상 선생의 글들을 개관해보았다. 약간의 개인적 소회를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필자는 유원상 선생의 복음 이해의 큰 줄기를 동의한다. 그리고 유선생이 말씀하시는 양심의 자유 추구는 필자가 속한 장로교회의 성립 원리 중 하나로서 필자 역시 유선생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유원상 선생(그리고 무교회주의자 일반)에게 느끼는 아쉬운 점은 역시나 ‘제도는 악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이다. 분명 성경에서는 ‘직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직분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공동체가 성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세우는 것조차 ‘악한 제도’에 속한 일이며, 또, 그렇게 세움 받는 직분자는 자동적으로 양심에 속박을 받게 된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간의 세월동안 교회가 영적일 뿐 아니라 물리적 ‘공동체’로 모이고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유선생의 독립 전도자의 입장에는 얼마간 이의(異議)가 있다. 그러함에도 그가 힘을 주어 말하는 ‘제도의 역리(逆理)’에 대해서는 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면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 필자 나름대로 언급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제도가 역리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임계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환경, 그리고 개별 모임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역리의 임계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유선생이 ‘제도’ 교회는 거부했을지언정 신약의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유선생이 평생 매주 엽서를 보낸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느슨한 형태로나마 그의 전도, 즉 설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리가 분명 있지 않았던가. 그는 일종의 ‘목회’를 한 것이다.
가나안 성도의 증가, 무리 짓는 신앙의 귀결
유원상 선생은 독립전도자다. 60년 가까운 신앙 여정의 대부분은 기성교회에서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그의 결론은 신앙의 주체성과 독립,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신앙을 제대로 확정하지 않는 신앙은 의미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신앙적인 양심이었고, 그가 쓴 엽서는 이러한 확신과 고백위에 서 있다. 이러한 고백은 그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자연히 한국 교회의 현실을 향해 서게 된다. 그가 보기에, 한국 교회는 사실 신앙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 맛을 잃은 소금
그는 ‘그저 얼마만큼의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이 기독교의 역할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히브리서를 빌어 한국 교회가 신앙의 초보에서 만족하여 단단한 음식을 섭취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에 머물고 있는 신앙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기드온을 예로 들며 신자가 10분의 1로 줄더라도 세속보다 양심적인 신앙인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면 교회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목회자를 만들어낼 신학교가 아니라면 신학교 간판을 내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 말한다. 맛 잃은 소금은 바닥에 버려져 짓밟히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 하나님과 함께 홀로 걷는 좁은 길
그는 스스로 독립 전도자의 길을 택했다. 감리교 목회자에서 독립교회 개척자로, 다시 무교회 신자에서 독립 전도자로의 여정을 걸었다. 때때로 복음은 믿음의 사람을 홀로되게 한다. 엘리야,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또 세례요한과 바울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다.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홀로 믿음을 지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성경은 지속적으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다. 신약성경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고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다”고 말씀한다.
무너지는 한국교회 앞에선 한 예언자의 초상
유원상 선생의 엽서들이 쓰인 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났다. 최근 십여년간 한국 교회는 급격히 신도의 이탈이 증가하고 있다. 양적 부흥은 임계점에 이르렀다. 질적인 성장은 고사하고, 기독교 전체가 기본적인 도덕에 있어서도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원상 선생은 말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복음은 양심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 ‘다른 복음’이라고. 그는 한국 교회가 교묘히 변형시킨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조금도 ‘에누리 없는’ 복음 그대로를 전할 말씀의 일꾼이 필요한 시대이다.
완전한 실패자의 감사
구본승 (암스테르담장로교회 담임, 캄펀신학교 교회사 박사과정)
그간 유원상 선생의 엽서 모음 글들이 익두스 출판사에서 두 권 출판되었다. 이 두 권은 박찬규 대표가 심혈을 기울여 고른 글들이라 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조금 더 읽기 좋은 글들을 골라 한 권으로 묶어내었다. 오래전 유원상 선생의 글들을 접하고 난 뒤 출판된 그분의 글들을 거의 대부분 구해서 읽어본 필자에게는 매우 뜻 깊은 일이다.
필자는 유원상 선생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그분의 글들만 읽은 독자이므로 이렇게 이른바 ‘소개글’을 쓰는 것이 면구스럽다. 그러나 현금, 유선생의 글들을 읽은 사람들조차 희귀하기에 박대표의 부탁을 받아 이렇게 해제를 쓰기에 이르렀다. 이하의 내용은 필자가 파악한바, 또 판단하는바 한계 안에서 서술될 것이기에, 독자께서 유선생의 글들을 읽으시는 데 약간의 유익이라도 되면 그 소임을 다한 것이다.
유원상 선생의 글들은 ‘성경을 성경으로’라는 모토가 실제로 잘 적용된 전범이라 할 만하다. 부분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신구약을 넘나들며 풀어내는 내용은 새로울 수는 있으나 이치에 안 닿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러한 그의 성경 주해가 ‘알레고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러나 유선생은 자기 성경 해석의 명시적인 지평을 “히브리서”(153쪽)라고 적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히브리서가 알레고리적인 정도까지 유선생의 글들도 알레고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의 알레고리는 다른 성경들보다 과한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유대교인들이 보면 예수님을 ‘어린양’에 빗대는 세례 요한과 바울의 말들 역시 알레고리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신약 전체가 알레고리일 것이다. 필자는 신약이 일정하게 유지하는 ‘지평’이 존재한다고 보며, 그래서 신약이라는 한 덩어리로 묶였다고 본다. 유선생은 이러한 지평을 포착하여, 성경에서 직접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을 이 지평 위에 두고 일관되게 해석한다.
유선생의 엽서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이 소개글의 제목처럼 ‘완전한 실패자의 감사’라고 필자는 생각한다(15, 16쪽). 이에서 ‘복음’(1부 주제)과 ‘교회’(2부 주제)에 대한 이해가 흘러나오며,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완전한 실패자’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발견한 자기 자신, 더 나아가서는 인간 실존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롬 3:10) 선보다도 악을 더 좋아하는 악의 종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근본부터 변치 않고는(요 3:3) 동물적 근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참으로 저주받을 존재입니다. 그 정체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실적 심판기록이 바로 인간의 역사입니다.”(28쪽) “인생이란 흑암 세력과의 싸움을 잠시도 쉴 수 없는 존재”이다.(22쪽) 이러한 인생은 “죽음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 “다오 다오”, “참으로 탐심에는 한정이 없습니다.”(39쪽) “인간들은 복이라면 받는 것과 얻는 것뿐인 줄 알고, 반대로 버리는 것이 복인 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탐심의 우상 숭배자로(골 3:5) 항상 욕심이 잉태 중인 죄의 종 된 사망 족속입니다.”(51쪽)
필자에게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용어보다는 ‘완전한 실패자’가 한국의 상황에서 더욱 와 닿고 유용한 표현으로 보인다. 전자는 전통적으로 잘 정리된 신학용어이긴 하지만, 본의(本義)를 비켜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단지 ‘인간의 윤리적 불완전’을 말하고 퉁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스스로를 ‘윤리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불완전은 계량화할 수 있기에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완전한 실패자’로 기꺼이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완전한 실패자가 되고 이 자리에서 ‘감사’를 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감사는 성공한 자리, 번영하는 자리, 무엇을 획득한 자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을 보자.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심입니까, 일백 자녀를 기르게 하심입니까? 또는 만년의 장수를 누리게 하심이겠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위하여 전도 사업을 위하여 창조하셨겠습니까? 만일 그것들이 창조의 목적이었다면, 우리들은 틀림없이 실패자, 낙오자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것은 창조의 목적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야훼를 찬송하게 하심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사 43:21) 그러므로 우리는 사업을 못하고, 전도를 못하고, 자녀도 없고, 가난, 중병, 단명短命의 일생이었다 해도 결코 그것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만 할 수 있다면 오직 그것 하나로 그 인생은 훌륭한 합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마 3:17)”(47쪽)
하나님 창조의 목적은 감사와 찬송이며, 내가 모든 일에 실패하여 완전한 실패자로 드러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만 할 수 있다면 나는 ‘실패자’가 아니고 ‘합격자’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사실은 단지 완전한 실패자로 머무는 게 인생의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서 ‘합격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연단’을 통해 가능하다. 다음의 인용을 보자.
“하나님은 기독자를 권세 있는 친 백성으로 연단하시며 극상품 포도로 만드시는 영원히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자녀 단련법도 최고의 방법을 쓰십니다. 이가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요 1:12, 디 2:14, 사 5:2, 히 12:8, 고후 5:17) 그는 자녀된 자를 당신처럼 성장시키기 위하여 항상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며(사 45:15) 일부러 환난을 창조하시는 엄중한 아버지이십니다.(사 45:7) 그러나 동시에 선한 목자도 되시기에 그 환난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고 끝까지 동참하시는 사랑의 어머니도 되십니다.”(110쪽)
이 말인즉슨, 하나님은 인생에게 자신이 완전한 실패자임을 연단을 통해 굳히신다는 뜻이다. 이러한 연단이 없다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징계의 환난을 잘 감당하는 이가 참 아들이요 반대로 징계에 순응 못하는 이는 바로 사생자라는 말씀이 참 진리입니다.(히 12:6-8)”(108쪽)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인생의 생사화복”(108쪽)을 통해 인생을 연단하시고 내적으로는 “저주의 율법”(112쪽)을 통해 죄를 알게 하신다. 그러나 인생의 환난이든 율법이든 그 자체에는 생명을 내어놓을 힘도, 죄를 제거할 힘도(112쪽) 없다. “그리스도 은혜의 복음”(116쪽)을 듣고 환난 가운데서는 “최고의 은사”인 “부러움 없는 만족한 마음”(105쪽)을 받고 율법의 저주 앞에서는 “해방의 은혜”(112쪽)를 받아, “인생 최고 저주라 할 죽음까지도 기쁨으로 받아서 감사하는”(116쪽) 사람이 바로 기독자다.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심”(167쪽)에 대한 유선생의 독특한 이해에서 확연하게 요약된다. 히 7:11의 “온전한 양심”을 그는 “버릴 것 없이 모든 것이 진선미로, 감사로 소화되고, 만사가 거룩으로 만족한 양심”으로 풀고 있다. 양심을 도덕적 차원이 아니라 감사의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난, 중병, 단명 등은 단지 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족과 감사의 재료이기에 이제 선한 것이다. “이처럼 미친 인생(전9:3)에게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병고입니다. 쇠기둥처럼 믿었던 자신의 건강이 고장 나서 죽음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의 자기 위치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엄청난 착각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것인 정상 위치로 돌아올 때 거기서 진정한 평강의 인생이 됩니다.(시29:11) 그는 주 안에서의 자기가 주인공으로 우주를 점령한 자신의 영광에 눈뜨게 되니, 이제는 호흡이 찬송이 됩니다. 이는 자기보다 행복한 자가 없다는 은혜 때문에 더 이상 행복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29쪽) 이렇게 감사 찬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자”(45쪽)이며, “임마누엘의 보배를 지닌 질그릇”, 즉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천국 시민”(31쪽)이다.
필자는 유선생의 신앙에 대한 이해를 접하면서, ‘위로’와 ‘인간의 곤고함’과 ‘감사’로 신앙을 요약하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떠올렸다. 또,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의 제 1문 역시 뇌리를 스쳤다. 이러한 신앙의 요체가 우리에게 소박하고 한편으로는 투박해 보이거나 모자라는 것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는 여러 다른 것을 원한다. 유선생은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고 핵심을 꿰뚫고 있다. 다음 인용을 보자.
“기독교만 하더라도 그 신앙의 동기가 여러 가지입니다. 즉 국가를 위한 신앙, 민중을 위한, 교회를 위한 신앙 또는 지역 사회 때문에 그리고 자기 자신 때문에 등이 있으니 이는 모두가 어떠한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자기 죄의 해결이 근본이니 예수란 죄에서의 구원이란 뜻이요, 이 구원이 해결된 곳에 임마누엘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1:21, 23)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이니 이외의 것은 모두 무너지고 변합니다. ... 그래서 자기 죄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 아닌 다른 것들을 자랑하는 무리는 예수와는 상관없는 자임이 이미 드러난 대로입니다.(마 7:23)”(156쪽)
복음의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 유원상 선생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유선생은 스스로를 “무교회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139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의지하는 신앙” 혹은 “교회 신앙”(86쪽)과 대척점에 서있는 신앙이다. 따라서 유선생에게 교회는 긍정적인 의미로 잘 쓰이지 않는 용어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선택한 것은 무교회주의 신앙을 애착해서라기보다는 “다만 양심대로 믿다보니 이렇게 된 것뿐”이다. “이는 루터의 말대로 자기 양심에 위배되는 짓은 안전하지도 않고 또 정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139쪽)
이 양심은, 위에서 보았듯이, 만족과 감사로 온전한 양심이다. 그는 이 양심을 침해하는 어떤 것도 거부하기로 “결단”을(178쪽) 했고 이 결단이 그를 무교회주의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제도교회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나 개인적 기호(嗜好)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충실하려는 그의 결단이 그를 무교회주의자가 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으로 수준이 높거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신앙 양심을 침해한다면 그는 여전히 그 교회에 속하기를 꺼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유선생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교회를 비판한다(이 둘은 사실, 칼로 두부 베듯 서로 딱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제도’로서의 교회라는 측면이다. 다음의 인용들을 보라.
“첫째 하나님의 일은 홀로 하는 것이지 결코 단체나 조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요 6:29의 ‘일’은 단수입니다) 또 이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롬 10:10) 또 이는 자기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 출발이기에 중단될 수 없는 생명적인 것입니다.(히 7:25, 삼상 12:23)”(176쪽)
“종교가 외형화되면 이미 그 한계가 드러난 것이요, 시대의 총아인 문명 역시 궁극은 전쟁에 다다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몸을 바쳐서 예루살렘 성소 휘장을 찢었습니다.(마27:51, 히 10:19-20)”(181쪽)
“기독자란 누군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지만 소위 신자는 아닙니다. 세례교인도 침례 교인도 아닙니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도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기쁨의 왕자가 기독자입니다.”(224쪽)
이 인용들 외에도 교회의 제도화를 거부하는 말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제도는 결국 딱딱하게 굳게 마련이고 이 제도를 탐욕스런 사람들이 올라타서 기독자의 양심을 속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바로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한국 교회의 부흥기에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유선생이 보도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유선생은 현재 시중에 흔히 통용되는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들과 다른 진단을 내린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화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개신교인들이 특별히 수준히 낮아서 이렇게 됐다거나 한국 사회가 특별히 후진적이어서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 교회가 매우 제도화된 것으로 보며, 제도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신앙의 근본에서 멀어지고 신자들을 소외시킨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인용들을 보라.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교파가 94개요 장로교만도 52개라 합니다. 이처럼 복잡한 교회 문제에 속지 않으려면 기독교의 초점이 무엇이며,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양심 즉 온전한 양심입니다.(히 7:11)”(167쪽)
“오늘날은 복음의 홍수 시대입니다. 전도자는 모두가 복음 복음하며 떠듭니다. 심오한 성서 지식과 신학을 언변으로 또는 글로 근사하게 발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감탄할 만큼 의욕적이고 열정적입니다. 교리로서는 빈틈없을 것이며, 지식으로도 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복음의 설명이지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221쪽)
“오늘날 기독교는 빈틈없는 조직과 방법으로 번창해 가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된 것입니다. 여기에 삭개오가 낄 수 없고 소외당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 속에다 미련을 두고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라도 삭개오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직결되는 새롭고 산 길을 찾아야 합니다.(렘 2:13, 히 10:19, 20)”(168쪽)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해 이의 혹은 반감이 있고 스스로 개혁적이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선생의 글을 일종의 ‘사이다’로 소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선생이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는 내용은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다. 우선, 제도 교회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제도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이 있다. 하지만, 유선생처럼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천작하기보다는 새로운 “단체나 조직”(176쪽) 아니면 새로운 ‘컨텐츠’, 즉 “심오한 성서 지식과 신학”(221쪽)을 대안으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나 이 양자 모두 유선생의 견지로는 ‘제도’, 즉 ‘교회’에 속하는 것들이고 교회 신앙 내지는 변종된 교회 신앙의 일종이다. 이것은 결국 “물질과 사람의 힘”, “재력이나 조직력,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사奇事, 이적 등의 보이는 힘”(20쪽)에 의해 움직이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제도에서 단지 ‘퇴거’하는 것으로 되는가? 그렇지 않다. 유선생은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대예배’라 부르는 것을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의 전 삶이 예배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선이 아닌 것은 바로 악인 것처럼 예배가 아닌 것이 죄입니다. 나는 그래서 나 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이것이 곧 선이요, 대예배임을 믿고 기뻐하는 삶입니다.(요 4:23)”(187쪽) 유선생이 교회 신앙을 배격하고 취한 “단독자”(146쪽), “독립의 길”(170쪽)은 홀로 예배를 드리고 홀로 말씀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도자”(149쪽)의 길을 걷는 것을 다 포함한다. 신앙을 취사선택하여 형성하지 않고, 철저하게 말씀을 궁구하며, 이를 많은 사람에게 전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기존 교회의 예배보다 더 예배로 불릴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예배를 스스로의 양심과 신앙에 입각하여 확립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단독자, 독립적인 전도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유선생은 이러한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무교회 동지들에게서도 “독립”한 듯이 보인다.(“나를 따라오려거든”) 그가 말하는바 “독립의 고독”(178쪽)은 “쓸쓸한 고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직결 독립”(177쪽)이다.
이상 소략하게나마 유원상 선생의 글들을 개관해보았다. 약간의 개인적 소회를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자 한다.
필자는 유원상 선생의 복음 이해의 큰 줄기를 동의한다. 그리고 유선생이 말씀하시는 양심의 자유 추구는 필자가 속한 장로교회의 성립 원리 중 하나로서 필자 역시 유선생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유원상 선생(그리고 무교회주의자 일반)에게 느끼는 아쉬운 점은 역시나 ‘제도는 악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이다. 분명 성경에서는 ‘직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직분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공동체가 성립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세우는 것조차 ‘악한 제도’에 속한 일이며, 또, 그렇게 세움 받는 직분자는 자동적으로 양심에 속박을 받게 된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는 그간의 세월동안 교회가 영적일 뿐 아니라 물리적 ‘공동체’로 모이고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서 유선생의 독립 전도자의 입장에는 얼마간 이의(異議)가 있다. 그러함에도 그가 힘을 주어 말하는 ‘제도의 역리(逆理)’에 대해서는 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면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 시점에서 필자 나름대로 언급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제도가 역리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임계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회문화적 환경, 그리고 개별 모임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역리의 임계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유선생이 ‘제도’ 교회는 거부했을지언정 신약의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유선생이 평생 매주 엽서를 보낸 ‘무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느슨한 형태로나마 그의 전도, 즉 설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리가 분명 있지 않았던가. 그는 일종의 ‘목회’를 한 것이다.
추천평
종교개혁의 정신, 미래로부터 온 편지를 읽다
유원상 선생(1920-2008)의 글을 받아서 놀랍게 읽었다. 해방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학교에서 근무하시다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를 하다가 다시 어떤 제도에도 얽매이지 않는 '믿음의 자유'를 추구하며 독립 순회 전도자로 살아오셨다는 이력은 간명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가 독립전도자로 30년간 활동하며 쓴 1,500여 매의 전도엽서가 이 책의 기반을 이룬다. 매주 한 편씩, 매회 200장을 등사해서 주변에 나누었다고 한다. 믿음의 기초와 신앙생활의 원리를 다루는 그의 엽서는 평범하고 담백하다. 일상성을 벗어난 호들갑이 없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분량에 독특한 필치로 써내려간 글은 주저함도 없고, 겉치장도 없이 핵심으로 내달리는 단호함으로 꽉 차 있다. 기독자의 결기를 여기서 본다.
[가나안 성도에게 보내는 편지]는 유원상 선생의 전도엽서 중 가려 뽑은 것이다. 물론 이 제목은 이미 고인이 되신 저자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절묘하게 이 제목에 부합한다. '가나안 성도' 즉 '안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조어로 '교회를 떠나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일은 그 이전부터 간간이 있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적인 장에서 논의된 것은 2014년에 나온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나는 그 책을 쓰고나서 지금 우리가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는 이들과 비슷한 질문을 갖고 씨름했던 역사적 존재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를 계승하는 여러 흐름들을 추적해 가고 있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 상황에서는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1861-1930)와 한국의 김교신(1901-1945)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유원상 선생은 선구적 ‘가나안 성도’로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인물이다. 엽서 한 쪽에 불과한 짦은 글에 담긴 그의 성경인용과 해석은 탄탄하고 통찰력이 돋보인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글들은 통렬하고, 명쾌하다. 한 세대 전의 글이지만, 마치 미래로부터 온 편지로 읽힌다. 가나안 성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양희송 (청어람 ARMC 대표)
유원상 선생(1920-2008)의 글을 받아서 놀랍게 읽었다. 해방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학교에서 근무하시다가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를 하다가 다시 어떤 제도에도 얽매이지 않는 '믿음의 자유'를 추구하며 독립 순회 전도자로 살아오셨다는 이력은 간명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가 독립전도자로 30년간 활동하며 쓴 1,500여 매의 전도엽서가 이 책의 기반을 이룬다. 매주 한 편씩, 매회 200장을 등사해서 주변에 나누었다고 한다. 믿음의 기초와 신앙생활의 원리를 다루는 그의 엽서는 평범하고 담백하다. 일상성을 벗어난 호들갑이 없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분량에 독특한 필치로 써내려간 글은 주저함도 없고, 겉치장도 없이 핵심으로 내달리는 단호함으로 꽉 차 있다. 기독자의 결기를 여기서 본다.
[가나안 성도에게 보내는 편지]는 유원상 선생의 전도엽서 중 가려 뽑은 것이다. 물론 이 제목은 이미 고인이 되신 저자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글은 절묘하게 이 제목에 부합한다. '가나안 성도' 즉 '안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조어로 '교회를 떠나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일은 그 이전부터 간간이 있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적인 장에서 논의된 것은 2014년에 나온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나는 그 책을 쓰고나서 지금 우리가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는 이들과 비슷한 질문을 갖고 씨름했던 역사적 존재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를 계승하는 여러 흐름들을 추적해 가고 있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 상황에서는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1861-1930)와 한국의 김교신(1901-1945)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유원상 선생은 선구적 ‘가나안 성도’로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인물이다. 엽서 한 쪽에 불과한 짦은 글에 담긴 그의 성경인용과 해석은 탄탄하고 통찰력이 돋보인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글들은 통렬하고, 명쾌하다. 한 세대 전의 글이지만, 마치 미래로부터 온 편지로 읽힌다. 가나안 성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양희송 (청어람 ARM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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