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역사이야기 (독서)/11.부산이야기

부산은 넓다 (2013) - 항구의 심장박동 소리와 산동네의 궁핍함을 끌어안은 도시

동방박사님 2024. 3. 27.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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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기존의 부산 책들과는 좀 다르다. 저자는 외부인이다. 그에게 부산은 낯설면서 매혹적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가왕 자리에 오른 조용필이 ‘바위를 치더라도,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우선 들이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부산에 부딪쳤다. 그렇게 깊숙이 개입한 외부인에 의해 부산이 그 속살을 드러낸 결과물이다.

부산의 산동네, 노래방, 부산 밀면, 조내기 고구마, 영도 할매와 같은 소재는 제도권 학문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지만, 이처럼 부산의 문화를 잘 비춰주는 거울도 없다. 예컨대 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인의 만남’, 동래온천에서는 ‘농심호텔에 서 있는 노인상’, 영도다리에서는 ‘수많은 투신자살 사건’, 임시수도에서는 ‘번창했던 다방들’, 부산항에서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본 책이다.

목차

머리말 인문학의 바다에서 잡아올린 부산 이야기

제1부 ‘돌아와요 부산항에’ - 부산은 항구다

제1장 조용필은 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렀을까: 부산항과 부산다움

부산은 항구다 | ‘충무항에’서 ‘부산항에’로 | 1960년대 ‘잘 있거라 부산항’ |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 ‘그리운 내 형제’는 누구일까 |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후 | 바운스 조용필, 바운스 부산

제2장 왜관에서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을까: 왜관과 한일 교류
후쿠오카에서의 회식 | 교린의 뜻으로 세운 왜관 | 초량 왜관의 동관과 서관 | 왜관에서의 특별한 만남
| 개시대청의 무역과 잘못된 만남? | 만남과 경계의 파괴: 왜관에서 전관 거류지로

제3장 영도 할매는 어디에서 왔을까: 영도 신의 탄생기
신석기인들의 조개 가면 | 영도 할매 해코지설 | 영도는 목마장이다 | 신선동 아씨당 전설 | 작은 제주, 영도
| 영도 할매, 영등 할매, 봉래산 산신 | 영도 할매의 속신을 푸는 열쇠

제4장 기장군의 동해안별신굿은 풍어제일까: 기장 사람들의 마을 축제
살아서 꼭 봐야 할 곳 | 골맥이신과 동해안별신굿 | 부산에 축제가 있을까 | 신이 살아 있는 『갯마을』
| 굿당에서의 섈 위 댄스 | 풍어제의 위기 | 까꾸리 할매의 기원

제2부 ‘굳세어라 금순아’ - 피란과 실향의 부산

제5장 밀다원 시대는 어떻게 열렸을까: 임시수도의 다방과 문학

커피의 시대, 커피전문점의 시대 | 밀다원 시대의 개막 | 다방의 역사, 예술인들의 아지트
| 임시수도 부산, 다방의 번창 | 다방의 가십: 레지와 커피 얌생이질 | 문인들에게 좌석을 파는 다방
| 시인 자살 사건 | 밀다원 시대의 진화

제6장 그들은 왜 영도다리에서 몸을 던졌을까: 부산 사람들의 자살과 운명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 | ‘들리는 다리’의 탄생 | 영도다리에서 울고 웃는 사람들
| 영도다리 투신자살 미수 사건 | 불안과 기대, 점바치 골목 | 영도다리는 죽음의 다리
| 248명을 구해낸 박을룡 경사 | 노쇠한 영도다리 운명은 어디로

제7장 부산 밀면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부산의 맛과 누들 문화
아버지의 밀가루 | 밀면의 원조, 내호 냉면 | 冬냉이냐, 夏냉이냐 | 냉면집 배달부 | 동래시장의 누들맨
| 우암동 밀면의 탄생 | 추억으로 먹는 밀면

제8장 「1번가의 기적」은 부산 산동네의 기적일까: 부산 산동네와 영화
윤제균 감독의 화려한 변신 | 「1번가의 기적」을 촬영한 산동네 | 그들이 산으로 간 까닭은?
| 「1번가의 기적」은 물만골의 기적이었나 | 일본 귀신이 출현하는 비석마을로
| 까치고갯길을 넘어 감천동 산동네로 | 산동네의 ‘똥’과 도시 재생 | 부산 산동네의 사소한 기적

제3부 ‘~라구요’ - 부산 문화의 탄생

제9장 부산 노래방에서 부르는 ‘~라구요’: 부산의 ‘방’문화와 노래

노래방의 첫 추억 | 피란민 2세대의 ‘~라구요’ | ‘라구요’의 배경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 트로트와 왜색의
주홍글씨 | 가라오케 문화의 상륙 | 노래방의 진화론 | 방 문화의 실험실, 부산 | ‘~라구요’에서 ‘삐따기’로

제10장 조내기 고구마가 주는 ‘처음처럼’: 조선통신사의 선물
겨울은 달다 | 영가대에 선 조엄 | 애민정신이 있었기에 | 고구마의 대항해 | 조내기 고구마를 찾아서
| 강필리와 이광려 | 목화와 고구마의 ‘처음처럼’

제11장 ‘동래 온천의 노인상’은 누구일까: 온천에서 찜질방으로
농심호텔의 노인상 | 동래온정의 온정개건비 | 동래온천을 향한 일본인의 욕망 | 욕조에 몸을 담근 두 여인
| 물싸움이 나다 | 때 미는 탕에서 노는 광장으로

제12장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헤엄을 칠 수 있을까: 물놀이와 유혹의 역사
해운대 해수욕장의 만화경 | 조선시대의 물놀이법, 천렵과 탁족 | 납작 가슴을 두드러지게 하는 수영
| 우리나라 제1호 해수욕장, 송도 | 활활 벗어버린 몸뚱이들 | 근대 해수욕장의 고민 | 그러나, 바다는 위험하다 | 동해남부선의 개통 | 거북 할머니의 출현과 해상 청와대 | 해운대의 역전과 송도의 운명

저자 소개

저 : 유승훈
 
‘옛 우물에서 맑고 새로운 물을 긷는다(舊井新水)’라는 신념으로 우리 문화와 부산 역사를 알리는 글을 쓰고 있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후 민속학을 전공하여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를,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6년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박물관에서 낡은 유물을 살피거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2012년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을 펴내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

책 속으로

“파월 장병들은 부산항을 떠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돌아올 수 있을까?’ 그들은 함께 부산항을 떠나지만 돌아오는 자들과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로 갈릴 것은 뻔했다. 전장으로 가는 월남 파병 장병들에게 앞으로의 부산항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곳이었다. 산 자들은 무사히 부산항에 돌아와 성대한 환영을 받을 것이요, 죽은 자들은 항구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 혼이 구천을 떠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산항을 떠나는 군함에서 장병들은 마땅히 군가를 불러야 했건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목청 터지도록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을 불렀다.”--- 「군가 대신 ‘돌아와요 부산항에’」

“시련을 극복하는 조용필의 끈기는 항구의 정신과 통한다. 흔히 부산항의 인문정신으로 손꼽는 것이 해양성, 개방성, 민중성이다.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는 길목인 부산항은 거칠지만 열려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부산항을 통해 사람과 물자뿐만 아니라 문화도 유입된다. 모든 문화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부산항은 여러 문화를 비벼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경기도 화성 출신의 조용필이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밴드를 만들어 부산에서 활동한 것이나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행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전국으로 전파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산항의 개방성은 그저 빗장을 여는 수동적 행태가 아니다. 과거의 문화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해 다른 문화를 창조하는 적극적인 창의에 가깝다. (…) 부산다움도 ‘부산항의 인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헌집을 부수고 새집을 짓는 토건의 이념은 더 이상 부산다움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여러 시대가 공존하고 과거 속에서 미래를 재생시키는 순환과 재생의 인문정신이야말로 진정 부산다운 부산을 창조하는 길이다. 가왕 조용필의 귀환이 수많은 대중의 심장을 바운스bounce하게 만들었듯이 ‘돌아온 부산항’이 인문정신을 통해 이 시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날을 기대해본다.”--- 「부산엔 여러 시대가 공존한다」

“부산에서는 500여 명, 영도에서는 150여 명의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제주도를 떠나 왜 멀리 영도까지 왔을까? 제주도 해녀들의 디아스포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제주 해녀들이 이주를 결행하게 된 때는 개항 이후다. 해녀들은 조선 전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이주했다. 이를 ‘바깥물질’이라 하고 제주를 떠난 해녀들을 ‘출가 해녀’라 한다. (…) 해녀들이 처음으로 바깥물질을 시작한 시발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부산 영도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왜냐하면 해녀들을 움직인 자들은 객주였으며, 이 객주에게 돈을 대준 이는 부산을 근거지로 한 일본인 해조 무역상이기 때문이다. 부산으로 바깥물질이 시작된 이유는 해초인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기 위해서였다. 우뭇가사리는 일본에서 비단 산업과 공업용 원료로 쓰이면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해녀 노래 가운데 “이여싸나 이여싸나”라는 후렴구가 달린 노래가 있다. “등바당을 넘어간다 다대끗을 넘어가민 부산 영도이로구나 이여싸나 이여싸나”로 끝난다. 이처럼 ‘이여싸나’ 해녀 노래에서도 바깥물질의 종착지는 부산 영도였다.”--- 「작은 제주 ‘영도’」

“임시수도 부산의 다방에서 자주 도마에 오르는 또 하나의 가십은 ‘커피의 공급처’였다. 당시 커피는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 기간 동안 급증했던 다방의 수요에 맞춰 커피를 조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방들이 어떻게 커피를 공급했는지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가십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 기간에 커피가 흘러나온 곳은 미군 부대였다. 미군의 PX를 통해 유출된 인스턴트커피가 다방으로 공급되었고, 이것이 당시에 커피가 대중화될 수 있었던 기반이었다.”--- 「미군부대와 커피의 대중화」

“문인들 가운데는 비참한 피란의 현실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자살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시인들의 자살 사건은 문학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소설 『밀다원 시대』에서도 끝 무렵에 박운삼 시인의 자살사건이 나온다. 소설 속 박운삼은 실제로는 낭만파 시인 정운삼이다. 내성적인 정운삼은 실연의 슬픔까지 겹쳐 자신의 원고를 친구에게 맡기고 밀다원 다방에서 수면제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살 사건이 벌어지자 밀다원은 문을 닫았고, 아래층의 문총 사무실마저 집수리라는 핑계로 쫓겨났다.”--- 「문인들의 시대, 밀다원 시대」

“1960년대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도다리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1962년에 영도다리는 ‘죽음의 다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이틀 사이에 청소년 3명의 자살미수 사건이 연달아 벌어졌기 때문이다. 계모의 학대와 실직을 비관해 영도다리에서 투신한 주호경(18), 부모에게 서울 갈 여비를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한 김승일(18), 동생의 입학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비관해 영도다리에서 몸을 던진 최명순(20) 등의 사건은 모두 1962년 3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일어났다. ‘봄의 영도다리는 죽음의 다리’라는 오명을 안겨준 최악의 청소년 자살미수 사건은 당시 언론을 공분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다리라는 오명」

“하지만 영도다리에 온 이들은 불안한 심정을 떨치지 못했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과연 헤어진 북의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을지, 전선으로 나간 아들은 살아서 돌아올지, 매시간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아냈다. 이런 불안한 심리와 우울한 시대 배경이 겹쳐지면서 영도다리 아래에는 점집들이 번창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점 보는 집이 몇 곳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에는 80여 곳까지 늘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점쟁이들이 노점을 차리면서 영도다리 아래에는 점바치 골목이 조성되었다. 전쟁 동안 먹고살기 위해 점집을 차리는 생계형 점바치도 많았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에 영도다리 아래(남포동 쪽)를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 제방을 따라 점 보는 집들이 쭉 늘어서 있다. 말이 점 보는 집이지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는 행상과 다름없다. 사주, 팔자, 궁합, 운수 등을 써놓은 종이를 좌판 위에 깔고는 수많은 점쟁이가 점을 봐주거나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도다리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사이를 이용해 점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과거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점을 쳐주거나 독경을 하는 점복업에 주로 종사했다. 1942년부터 영도다리 인근에서 점복업을 했던 김용진 할아버지에 따르면 전쟁 기간 중 영도다리 아래의 점쟁이 대다수는 맹인이었다고 한다.--- 「영도다리와 점집의 번성」

“감천동 산동네에 가면 모두들 두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된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다. 푸른 천마산과 옥녀봉이 감천동 산동네를 따뜻이 보듬고 있으며, 남쪽에는 파란 바다와 감천항이 펼쳐져 있다. 바다를 낀 부산 산동네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두 번째는 60도에 이르는 급경사 지역에 켜켜이 쌓여 있는 주택 군락이다. 이 주택 군락은 건설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오직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정말 기적이라 할 만큼 작은 집들이 빼곡히 쌓여 있다. 호사가들은 이 풍경을 보고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표현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천동 산동네는 차라리 ‘남해의 다랭이논’에 비유할 만하지 않겠는가. 바닷가 근처의 경사진 산비탈을 층층이 개간하여 만든 계단식 논은 바닷가 농촌의 ‘경작의 미학’으로, 층층 계단처럼 집들로 쌓인 감천동 산동네는 바닷가 산동네의 ‘건축의 미학’으로 대구對句를 세울 만하다. 둘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다랭이논이나 산동네나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좁은 땅을 억척스럽게 이용하려는 ‘가난과 극복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부산의 산토리니 VS 부산의 다랭이논」

“1980년대 부산은 ‘왜색 문화의 전파 기지’로서 혹독한 비판을 받아왔다. 한일 수교 이후 우리나라의 관문이자 일본과 가까운 부산은 다시 일본인들의 방문이 가장 높은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1980년대 초반 부관 페리호를 통해서 일본 서민들의 여행과 보따리 행상들의 방문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카메라 몇 개를 들고 와서 판 뒤 그 돈으로 부산에서 여행을 즐기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한편 일본의 공중파가 부산에서 유행해 일본의 NTV방송이 KBS, MBC와 더불어 3대 방송으로 꼽히기까지 했다. 파라볼라 안테나(일명 접시형 안테나)의 보급이 일반화되자 일본 TV를 시청하는 부산 시민이 크게 늘어났다.”--- 「왜색문화의 전진기지」

“지금도 일본인들은 동래 온천을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으로 손꼽는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을 향해 품었던 온천욕의 욕망은 꽤 오래된 것이다. 세종 때 조선 정부가 교린정책에 따라 삼포를 개방해주자 일본인들의 동래 온천을 향한 발걸음이 크게 늘었다. 타국에서 온천욕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동래 온천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본인들의 투어리즘tourism 때문에 적잖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내이포(경남 창원 진해구)를 통해서 서울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귀국할 때 꼭 동래 온천을 방문하고자 했다. 이렇게 가는 길은 한참 돌아가는 경로이므로 그들을 따라다녀야 하는 조선인과 말들이 몹시 지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부산포의 일본인들은 동래 온천으로, 내이포의 일본인들은 영산 온천으로 분산시켜 목욕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동래 온천을 좋아했던 일본인들이 이런 명을 제대로 지켰을지는 의문이다.”--- 「동래 온천을 향한 일본인들의 욕망」

조선인들에게 송도 해수욕장이 주는 문화 충격은 매우 컸다.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던 때라 반나체로 활보하는 송도 해수욕장은 이국 문화를 접하는 신세계였던 것이다. 송도 해수욕장에 가면 반자연주의자들의 왕국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가슴에서 엉덩이까지만 가린 인어 떼가 놀고 있고, 휴식장 그늘 밑에는 가슴을 열고 맥주를 마시는 풍미가 있었다. 이뿐이랴! 사랑을 실은 보트를 밀고 가는 애인들의 속삭임도 송도의 여름 표정이다. 앞서 말했던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이렇게 만화경 같은 송도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다 벗고 놀터’인 근대 해수욕장의 고민은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떼어놓을 것인가에 있었다. 그리하여 해수욕장은 남성과 여성들이 따로 헤엄을 치도록 경계를 지었다. 쉽게 말하면 남성용과 여성용 해수욕장을 따로 두었던 것이다. 부산부도 송도 해수욕장이 협소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남녀 혼탕임을 유감으로 생각해서 1927년에 부인해수욕장을 신설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약 4000원의 공비를 들여야 했다.
--- 「1927년 ‘부인 해수욕장’ 신설 논란」

출판사 리뷰

부산, 그 넓은 역사적 품과 문화적 너비를
만든 역사의 12가지 힘을 추적하다


치욕의 역사와 애달픈 관부연락선의 뱃고동 소리 | 물만골, 감천마을, 아미동 산동네가 일궈낸 기적 | 영도다리에 깃든 부산 사람들의 삶과 운명 | 밀면이 일궈낸 부산의 맛과 누들 문화 | 왜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잘못된’ 만남 | 식민지의 파도에서 살아남은 영도 해녀들 | 한국전쟁기 밀다원 다방이 탄생시킨 문학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부산이란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핍진하게 다룬 『부산은 넓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기존의 부산 책들과는 좀 다르다. 저자는 외부인이다. 그에게 부산은 낯설면서 매혹적이었다. 머리말에서도 “부산에 대해 무지했던 내가 지역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박물관에서 일하면서다. 10년 전 부산박물관은 서울내기인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박물관에서 유물 구입, 전시, 조사 등을 하면서 점차 부산의 역사문화와 그 매력을 하나둘 알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역사문화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곳이 바로 부산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고의 가왕 자리에 오른 조용필이 ‘바위를 치더라도,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우선 들이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부산에 부딪쳤다. 그렇게 깊숙이 개입한 외부인에 의해 부산이 그 속살을 드러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인문학의 바다에서 부산의 이야기를 거둬 올리고자 했다. 인문학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 즉 사람의 생각과 말, 시간과 공간을 연구하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간학이다. 저자는 가능한 한 낮은 자세에서 부산을 바라보고, 거시적인 것보다 미시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부산의 산동네, 노래방, 부산 밀면, 조내기 고구마, 영도 할매와 같은 소재는 제도권 학문에서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지만, 이처럼 부산의 문화를 잘 비춰주는 거울도 없다. 저자는 인문학이란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라는 전제 아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고자 했다. 예컨대 왜관에서는 ‘조선과 일본인의 만남’, 동래온천에서는 ‘농심호텔에 서 있는 노인상’, 영도다리에서는 ‘수많은 투신자살 사건’, 임시수도에서는 ‘번창했던 다방들’, 부산항에서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봤다.
‘부산’ 하면 언제나 넓고 푸른 바다가 떠오른다. 출항하는 컨테이너선 앞으로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끼룩끼룩 하늘로 나는 갈매기 아래에도 넓은 바다가 있다. 해운대, 광안리, 송도 해수욕장에 몰린 피서객들 사이에도 넓은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다. 생명을 탄생시킨 어머니와 같은 바다가 도시를 감싸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운이다.
그러나 바다만으로 넓은 부산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부산이 넓은 것은 자연환경 때문만은 아니다. 부산의 역사적 품이 넓다는 것이며, 부산의 문화적 너비가 광대하다는 것이다. 항구도시인 부산은 해양 문화와 내륙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충돌하는 곳이었기에 그 역사적 품은 장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부산 사람들의 가슴과 아량도 넓었다.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에게 교린의 관점에서 왜관을 제공해주었고, 해방된 고국으로 들어온 동포들을 먼저 맞이해준 곳도 부산이었다.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북한 피란민들이 정착할 수 있었던 땅도 다름 아닌 부산이었다. 부산 사람들은 바깥의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담대하게 받아들이면서 웅숭깊은 부산을 만들어갔다. 그러한 점들은 조선시대부터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계속적으로 분주하게 오가며 아주 가까운 어제의 일부터 아주 먼 과거의 기억까지 보듬으려 한 이 책의 역사 읽기 방식에서 충분히 잘 드러난다.

어떤 도시인들 현대사의 숨은 때가 덕지덕지 앉은 곳이 없겠냐만, 부산은 역사성은 그 얼룩이 더욱 휘황찬란하다. 베트남을 향해 떠나는 장병들의 그 불안한 마음, 일본과 가까워 왜색문화의 전진기지로서의 비판, 피란 수도로서의 흔적 등은 부산이라는 육체에 두겹 세겹으로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넓은 부산’의 발전을 옥죄었던 관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산은 제2의 도시’라는 별 볼일 없는 카드였다. 여기에는 전쟁 이후 급격한 산업, 인구, 무역의 성장 속에서 빛을 발했던 ‘경제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부산이 이처럼 ‘제2의 도시’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만족하거나 혹은 과거 회상에 연연하고 있을 때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현재 부산은 과연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가? 이미 여러 통계로 볼 때 서울은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섰고, 뒤에 있던 도시들도 부산을 앞지르거나 바짝 쫓아오고 있다.
시대정신이 달라져 지금은 도시의 독자적 가치와 삶의 질을 따지는 시대다. 경제개발과 토건 시대에 유행했던 산술적 수치를 들이대며 순위를 따져본들 별 도움이 안 된다. 더욱이 벤치마킹이라는 명목으로 앞서가는 서울을 계속 따라 해봤자 별 재미를 못 보는 시대다. 따라 하는 사람은 잘해도 언제나 2위가 아니던가. 부산이 지닌 가치를 살리며 부산만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봐야 할 때다. 부산이 걸어온 길 속에서 부산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유일한 해답일 것이다.

개항 이후 부산은 한국사의 전면에서 높은 파도를 맞아온 탓에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다. 부산에 내재해 있는 근현대사의 기억은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당시에는 갈등과 모순, 슬픔과 고통을 안겨줬던 역사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어둡고 슬픈 역사도 우리가 간직해야 할 역사인데, 부산은 아직 이런 점에서 서툴다. 인천에서는 서민들이 살았던 과거의 달동네를 문화 콘텐츠로 삼아 달동네박물관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들은 저마다 나서서 자기 지역의 역사 소재를 문화 콘텐츠와 이야깃거리로 만들어 그들만의 역사를 꾸려나가고 있다. 비단 역사 전쟁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을 두고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각 지방 역시 ‘자신의 역사화’라는 전쟁을 펼치고 있다.
오해는 할 필요가 없다. 부산이 역사문화 콘텐츠 ‘원조 싸움’의 전면에 나서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따금 저자는 부산의 근현대 생활사와 관련된 문의를 받거나 자문 의뢰를 받으면서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대부분 부산의 역사문화 원천 소스를 발굴하는 사업을 외면한 채 이미 잘 알려진 역사문화 콘텐츠에 겉옷만 갈아입혀 무대에 등장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에서는 문화 창조를 외치면서 실제 산복도로 사람들의 삶과 생활문화에 대한 진지한 발굴조사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하나의 사례다.
그러하니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15년 전부터 표방했던 ‘역사문화 도시’라는 개념조차 부산에서는 낯설기만 하다. 부산의 근현대사에서 한국전쟁과 피란민들이 미친 영향만큼 큰 것은 없다. 당시 실향민들은 이제 연로해 세상을 하나둘 떠나고 있지만 이들의 역사적 기억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데 예산과 인력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오래전 속초시가 피란민 기록조사에 나선 것과는 크게 대조된다. 진지하게 기록과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성급히 역사문화 콘텐츠를 말하려는 것은 그저 공중누각을 쌓으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이와 관련 저자는 “나부터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어쭙잖게 이 책을 생각해낸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라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