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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연대기 1931~2011 (2024)

동방박사님 2024. 8. 1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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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식민지 시기 평양의 을밀대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인 강주룡부터 2011년 부산의 35미터 크레인 위에 오른 김진숙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끈질긴 투쟁사를 통해 그간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않았던 여성 노동운동의 기억들을 복원하고 한국의 산업화와 노동운동의 역사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다시 쓴다. 역사학자 남화숙은 이들 여성 노동자들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 계급의식과 젠더의식을 발전시키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전투적으로 투쟁해 온 역사를 발굴해 냄으로써 이들을 자본가-국가-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 피해자이기보다는 산업화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어엿한 주체로 그려낸다. 식민지 조선의 엄혹한 조건에서도, 해방 후 노동법이 형성되는 중요한 국면에서도, 박정희 시대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속에서도,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자신의 열망과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연대기.

목차

서론 009

1장 식민지 평양에 체공녀가 나타났다 023
2장 193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여공 079
3장 파업 여공, 근대적 주체의 등장: 식민 통치하 민족 · 계급 · 성의 문제 127
4장 격동의 1950년대 여성 노동자 175
5장 산업화 시대 노조를 이끈 여자들 221
6장 민주화 이후 여성 노동자와 기억의 정치 303

감사의 글 369
참고문헌 375

저자 소개 

저 : 남화숙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거쳐 미국 시애틀의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타대학교 조교수를 거쳐 현재 워싱턴대학교 잭슨국제대학 및 역사학과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지도교수였던 고 제임스 팔레 교수를 기려 만들어진 ‘제임스 팔레 한국학 교수’직을 맡고 있다. Journal of Korean Studies의 공동 편집인(2008~09년), ...

역 : 남관숙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스탠포드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Taligent사(미국), 동양시스템즈 등의 IT 회사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며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 등 IT 업체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자료들을 번역하고 있다..

책 속으로

통념에 의하면, 온순한 존재로 인식되는 이들 여공이 전투적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은 그들의 순진함과 무지를 이용한 외부 세력의 조종 때문이었다. 이들이 노조의 지원이 있건 없건 억압적 노동 통제에 맞서 줄기차게 고도의 투쟁성을 보여 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근현대 한국의 국가 형성 과정에서 여공에 대한 이런 식의 고정관념은 점점 더 공고해져 갔다. 1970, 80년대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활발히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 속에서 여공의 수가 급증한 1970년대가 되면 그 이미지는 훨씬 나빠져 ‘공순이’라는 멸칭까지 붙게 된다. 1990년대부터 진행된 신자유주의화 과정은 여성의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더욱더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노동자들이 국가 형성 과정에 동원되거나 저항을 조직하는 방식 등에서 젠더 동학이 작동한 때문이었다. 이 책은 이와 같이 20세기 한국의 근대화와 노동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담당했던 중대한 역할과 그들에 대한 역사적 서사 사이에서 끈질기게 지속돼 온 커다란 간극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 p.11

여공에 대한 나의 지적 관심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후반, 여성운동과 학생운동을 경험한 연구자로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설명하는 논의들을 마주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당시는 1987년 6월 항쟁에 뒤이은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남성 노동자, 특히 중공업 노동자들이 긴 침묵을 끝내고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점이었다. 활동가들과 진보적인 학자들은 새롭게 등장한 이들의 노동조합운동을 축복하면서 이전 시기 여성이 주도했던 노동자 투쟁에 비판의 시선을 돌렸다. 19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민주화 이후 젠더 불평등의 현실이 나아지기를 바랐지만 그들의 기대는 외면당하고 오히려 과거의 기여가 평가절하됐다. 바로 그 여성들의 노동운동이 노동자 대투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조건을 마련했는데도 말이다. 여성이 지배적인 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수행한 이 초창기 투쟁의 조건들은 무시한 채 이들은 1970년대 민주 노동운동의 소위 “한계”들을 무자비하게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1970년대 운동은 (이후 전개될 남성 주도의 노동운동과 달리)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물리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경제투쟁에만 매몰돼 있었다. 따라서 여성 노동자들의 희생과 성취는 남성이 주도하는 진정한 노동운동의 시작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일종의 전사前史로 자리매김된다.
--- p.13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는 노동운동의 주도 세력이 된 남성 노조원의 관점에서 다시 쓰였고, 19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의 이른바 ‘한계’라는 관념이 노동운동과 노동 관련 학술 문헌에서 상식이 되었다. 여성 주도의 운동에서 남성 주도의 운동으로의 ‘진보’라는 생각은 한국 노동운동 안팎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남성 중심적 사고의 습관과 쉽게 공명하며 안착했고, 따라서 여성 활동가들이 아무리 부당하다고 느낀다 해도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역사 쓰기, 신화 만들기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나 역시 당시 나를 사로잡았던 분하고 억울한 감정의 정체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감정은 지난 수십 년간 나를 불편하게 했고 젠더 정치에 초점을 맞춘 한국 노동사 연구를 놓지 않게 한 동력이 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많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구술사 인터뷰에 응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도 ‘역사가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다’는 비슷한 문제의식이었던 것 같다.
--- p.327~328

추천평

이 책은 오랫동안 ‘형제들의 공동체’에만 목소리를 부여해 온 지배적 지식체계에 대한 문제 제기로 가득 차 있다. 을밀대의 강주룡에서 시작해 2011년 김진숙의 고공 농성에 이르기까지, 하늘 높이 올라서야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여성 노동자들의 긴 서사가 이 책에 아로새겨져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평양 을밀대의 강주룡, 1962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전남방직의 김 양, 그리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8년 경제 위기 이후 재현되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의 서사들 사이를 누비는 “구조적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김주익 열사 추모 연설에서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다”며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김진숙의 외침이 ‘형제’에서 제외된 마이너리티들의 연대에 대한 갈구이자, 지금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불온한 꿈에 대한 선언임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
-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과학부 교수)
내가 쓴 소설 『체공녀 강주룡』에서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나는 내가 강주룡을, 그의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다 믿어 왔다. 따라서 『체공녀 연대기』를 읽으며 울 이유가 내게는 없다. 그런데 왜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마는가.

사실과 그 의의들로 구성된 학술서는 어떻게 소설가를 울리는가. 촘촘한 기록으로 재건된 역사는 지어낸 이야기를 압도하고 또한 우리, 여성 노동자들이 딛고 있는 계보에 대한 감동으로 쇄도한다. 이름 모를 여공이 체공녀로 새로이 이름 불릴 때, 강주룡으로부터 이어진 계보가 김진숙에 닿을 때, 뜻밖의 겸허와 그만큼의 자긍심을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롭지 않다.
- 박서련 (소설가 『체공녀 강주룡』)
책을 읽으며 일제치하의 고단한 삶과 억압에 저항했던 여러 ‘운동’과 그 운동가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시대에도 열도가 높던 ‘노동’ ‘민족’ ‘여성’ 사이의 충돌과 길항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거기엔 치명적인 분열과,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한계’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여성이 노동의 주체이지 않았던 적도, 이중 삼중의 굴레를 뒤집어쓴 ‘민족’이지 않았던 적도 없었던 것이다. 방직공장에서든, 일본인 가정의 식모로든, 미쓰코시 백화점 판매원이든, 또 늘 ‘봉건’에 귀속된 것으로 간주되는 ‘구여성’이든, 그들의 모든 일과 돌봄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컨베이어벨트 속으로 가차 없이 끌려들어 갔다. ‘노동’과 ‘여성’은 어쩌다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한국 여성이 진 이중고·삼중고 안에 그대로 같이 녹아 있었다.

다만 억압과 고통이 짓누르고 ‘운동’이 그것을 재현하거나 대표하지 못했던 것이다. 위대한 투쟁을 감행한 강주룡이나 훗날의 김진숙은 그들 여성 노동자 중 물론 가장 견결하고 뛰어난 ‘송곳’이었기에, 그 얼굴과 말과 몸들에는 대표되거나 조직되지 못한 수없이 많은 이들의 일과 삶이 스며 있었던 것이겠다. 지금도 그렇겠다. 새삼스럽게, 책은 그런 깨달음을 다시 쨍하게 주었다.
-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