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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08월 27일 (1907 순종황제. 경운궁에서 즉위)

동방박사님 2024. 8. 2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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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 정철의 송강가사 간행 / 1907 순종황제. 경운궁에서 즉위 /1921 독립운동가 서일 사망 / 1934 한강인도교 (신교) 기공 / 1936 동아일보 일장기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 / 1970 관세청발족 / 1983 한국. 구제기능올림픽 5연패 / 1992 대한민국 주재 둥국대사관 개관

순종 (대한제국)

순종 (純宗)

대한제국 순종 황제

 

오얏꽃 ( 이화문 )

대한제국 황제

재위 1907719~ 1910829(3) / 전임 고종 / 총리 / 내각총리대신 / 대한제국 황태자 / 재위 18971012~ 1907719일 / 후임 영친왕 이은 / 조선국 왕세자 / 재위 1875325~ 1895112일 /  왕태자 / 1895112~ 18971012일 / 전임 효명세자 영 (문조) / 창덕궁 이왕 / 재위 1910829~ 1926425일 / 후임 영친왕 이은

이름

이척(李坧) / 별호 융희황제(隆熙皇帝) / 시호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 능호 유릉(裕陵)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 연호 융희(隆熙, 1907- 1910)

신상정보

출생일 1874325일 /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 사망일 1926425(52) / 사망지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 / 부친 고종 / 모친 명성황후 민씨 / 배우자 순명효황후 민씨 ·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純宗, 1874325~ 1926425)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재위 : 1907719~ 1910829)이다.

개요

휘는 척(), 본관은 전주,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이다. 묘호는 순종(純宗), 시호는 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사실상 일본 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 중 이왕가의 수장인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으로 불렸다.

생애

탄생과 세자 책봉

1874(고종 11) 28,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포함하여 41녀를 낳았지만 모두 조졸하고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이 유일하다.

1875(고종 13) 218, 왕세자에 책봉되었다.1882(고종 20)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 민씨(순명효황후)와 혼인하였다.

18951,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격상되었고 같은 해 108, 을미사변으로 어머니 명성황후를 잃었다.

황태자 시절

1897(광무 원년) 1013,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암살 미수 사건

1898(광무 2) 911, 김홍륙의 사주를 받은 공홍식이 김종화를 시켜 고종과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들이 즐기던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종은 커피의 향이 이상함을 알고는 곧바로 그 커피를 땅에 부었으나, 황태자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였다. 이로 인해 황태자는 이가 빠져 틀니를 끼고 혈변을 자주 누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범인인 김홍륙은 같은 해 1010, 교수형에 처해졌다.

826, 김홍륙(金鴻陸)이 유배 가는 것에 대한 조칙을 받고

그날로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金光植)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凶逆)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孔洪植)에게 주면서

어선(御膳, 황제의 수라)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911, 공홍식이 김종화(金鍾和)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을 황제에게 바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땅히 1,000()의 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고지기庫直로서 황제의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파면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 《고종실록38,

고종 35(1898년 대한 광무(光武) 2) 912

1904(광무 8), 황태자비 민씨가 죽자 순명비(純明妃)로 추존하였으며 즉위 후에 순명효황후로 추존하였다. 1907(광무 11) 1, 윤택영의 딸 윤씨(순정효황후)와 혼인하였다.

순종이 즉위

1907(광무 11) 4,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파견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았다.

719,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황제에 등극하였다. 등극과 동시에 대한제국 육군 대장 예편과 아울러 원수에서 대원수로 승급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로 개원하여 82일부터 사용하였다.

827, 덕수궁 돈덕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순종의 어진

국권 피탈의 가속화

대한제국군 해산, 한일신협약 및 정미의병 

이 무렵 일본은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러시아 제국의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병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일본은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한국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여 대한제국의 경제를 예속하고, 한일신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으며 이 조치에 반발하여 거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정미의병) 또한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반일 성향의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언론을 통제하고 발행인들을 탄압하였다

남한 대토벌 작전 및 기유각서 

1909(융희 3) 7,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는 기유각서의 체결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감옥 사무에 관한 행정권 등 사법권을 박탈하였다.

9월에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호남 지방의 의병과 13도 창의군 등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 이 해 1026,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에 의하여 청나라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소네 아라스케의 뒤를 이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대한제국의 정치와 경제, 사법, 행정, 외교, 군사 모든 부분에서 행정 권한을 박탈한 일본은 내각회의를 통해 대한제국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순종 어진

퇴위와 대한제국의 멸망

한일 병합 

1910(융희 4) 일본은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22일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1910829, 순종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였다. 아울러 역사상 왕조는 대한제국을 끝으로 소멸하였으며 전제군주정이 붕괴되었으며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창덕궁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퇴위 이후

일본 방문

19176, 순종은 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도쿄를 방문해 일본 천황을 알현할 것을 강요받는다. 순종의 일본 방문은 첫 외유(外遊)이기도 하였다.

68, 경성을 떠나 부산으로 간 순종은 6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11일에는 나고야에, 12일에 도쿄에 도착하여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알현을 받고 14일에 다이쇼 천황과 데이메이 황후를 만나 오찬에 참석한 뒤, 16일 토리이자카에 있는 왕세자궁을 방문하여 영친왕을 만났다.

순종의 전용 자동차인 순종어차

623일과 24일에는 교토에 머물렀으며 628일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91768

남대문역에 직접 나가서 특별열차를 타고 도쿄로 행하였다.

1917614

황궁에 나아가 천황과 황후를 봉황문에서 알현하고 현소에 참배하였으며,

이어 동궁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 《순종실록부록8,

191768· 614

사망

1926425일 오전 6시에 심장마비로 승하하였다. 고종의 홍릉 근처인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장례식

순종의 장례식

창덕궁 전하 승하(昌德宮殿下昇遐)

창덕궁 전하 승하, 26일 오전 610분에

창덕궁 전하의 승하를 정식으로 발표.

26일 오후 935분 정식 발표.

승하 하실 당시엔 분부가 없으시어.

창덕궁 전하께옵서 26일 오전 610분에 승하하신 뜻을

작일 오후 935분에 궁내성으로부터 정식 발표하였다.

— 《동아일보, 1926427

순종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 만큼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계파와 사회주의 계파가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묘호는 순종(純宗)이며 192651일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제안한 순종, 경종(敬宗), 성종(誠宗) 중 수망(首望)대로 결정되었다.

책소개

대한제국 시대의 실록은 외면되어야 하는가?
아프지만 알아야 할 비운의 역사

대한제국은 13년 동안 이 땅에 존재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0년 일제에 의한 병탄으로 황제의 지위를 잃고, 고종 황제는 ‘이태왕(李太王)’, 순종 황제는 ‘이왕(李王)’이라는 격하된 칭호를 얻게 되고, 결국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치욕의 기록은 당시의 실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지며 편찬 과정에서 일제의 입김이 작용하였다는 이유로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오늘날 정사(正史) 취급을 받지 못했던 비운의 기록인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을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 《대한제국 실록》은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에서 중요한 주제를 뽑아 원문의 손상을 최소화해 실음으로써 당시의 기록 그 자체를 보여주는 책이다. 서양 사람들을 ‘양이’라 부르며 배척하던 초기의 고종 시대에서부터 한일의정서, 한일신협약 등 각종 조약으로 우리의 주권을 하나하나 내주다 최종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까지 되는 마지막 황제 순종 시대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격변의 시대를 맞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당시 황실과 조정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대한제국의 마지막 역사를 실록의 눈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

목차

들어가기 전에

Ⅰ. 고종황제실록
1. 편찬 경위
2. 〈고종황제실록〉 총서
3. 대한제국 이전
즉위와 수렴청정 / 경복궁 중건 / 친정(親政)과 가례(嘉禮) / 병인양요와 병인박해 / 남연군 묘 훼손 사건과 신미양요 / 서원 철폐 / 최익현의 상소와 대원군의 퇴진 / 왕자들과 왕실 행사 / 운양호 사건과 개항 / 조선의 문이 열리다 / 《조선책략》과 위정척사 / 신식 군대 창설과 임오군란 / 여러 나라와의 교류 / 갑신정변 / 거문도 사건 / 원세개(袁世凱)의 편지 / 미국에 대한 문답 / 대왕대비 승하 / 동학란 / 갑오개혁 / 청일전쟁 /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 아관파천 / 환궁과 칭제(稱帝) 청원
4. 대한제국 〈고종황제실록〉
황제 등극 / 명성황후 국장 / 황제 독살 미수 사건 /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 새로운 질서의 쇄도 / 탄신 50주년, 즉위 40주년 / 러일 전쟁 / 국문(國文)을 정리하다 / 한일협상조약 체결 / 황태자 가례와 대리청정

Ⅱ. 순종황제실록
1. 〈순종황제실록〉 총서
2. 대한제국 〈순종황제실록〉
등극과 황태자 책봉 / 헤이그 밀사 사건 / 한일신협약 / 황제의 외출과 황태자의 유학 / 이토 히로부미 암살 / 한일합병조약
3. 〈순종황제실록〉 부록
합방과 이왕가(李王家) / 순종, 함흥과 일본에 가다 / 창덕궁 화재와 고종 승하 / 영친왕 가례와 덕혜옹주 / 순종 승하

저자 소개

저 : 황인희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과교육과를 졸업하고 20여 년 동안 출판계에서 일했다.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출판계를 떠나 논술학원과 평생교육원에서 국어와 논술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후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책들을 집필하고 있는데, 저서로는 『역사가 보이는 조선 왕릉 기행』, 『고시조 우리 역사의 돋보기』, 『잘! 생겼다 대한민국』, 『궁궐, 그날의 역사』, 『우리 역사 속 망국 이야기』, 『펭귄쌤과...

책 속으로

4월 14일 이양선은 강화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와서 정박했고 광성진에 와 닿자마자 모두 닻을 내리고 광성진의 성을 향하여 대포를 마구 쏘아댔다. 조선군도 크고 작은 모든 대포를 일제히 쏘았다. 이 교전으로 조선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양선들은 다시 호도 앞바다에 가서 닻을 내렸다. (72p)

영토의 일부를 외적에 빼앗긴 다음 날 조정에서 고종과 우의정 홍순목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양이들이 우리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매우 통분할 노릇이다.”
“이 오랑캐들은 원래 사나운 만큼 그 수효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세는 미칠 듯 날뛰며 계속 불리한 형편에 처한 보고만 오니 더욱 통분합니다.”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 이름난 우리가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몇 해 동안 서로 버티더라도 단연 거절하고야 말 것이다. 만일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라를 팔아먹은 율을 시행하라.” (74-75p)

최익현은 이 모든 이유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 주장하며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하며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라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자신이 가져간 도끼로 죽음을 내려달라고 하였다. (110p)

너희는 각기 두려움 없이 편안히 지내면서 선비들은 부지런히 공부하고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를 지으며, 다시는 ‘양(洋)’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라. 각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는 비록 외국인이 한가로이 다니는 경우가 있더라도 마땅히 일상적인 일로 보아 넘기고 먼저 시비 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저들이 능멸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있다면 응당 조약에 따라 처벌하여 결단코 우리 백성들을 억누르고 외국인을 보호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다. … 이미 서양과 수호를 맺은 이상 서울과 지방에 세워놓은 척양에 관한 비문들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버리도록 하라. (136-137p)

고종 33년(1896) 2월 11일 고종과 왕태자는 대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는 경운궁에 이어하였다. 이 날 임금은 “8월의 변고(을미사변)는 만고에 없었던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하였으며 왕후가 붕서하였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조칙을 반포하지 못하게 막았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다가 다행히 천벌이 내려 우두머리가 처단당한 결과 나라의 예법이 겨우 거행되고 나라의 체면이 조금 서게 되었다. 생각하면 뼈가 오싹하고 말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 사나운 돼지가 날치고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얼게 된다는 경계를 갑절 더해야 할 것이다. 모든 신하와 백성은 이 명령 내용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을미년(1895) 8월 22일과 10월 10일의 조칙(민씨의 폐서인과 위호 회복 관련)은 모두 역적 무리가 속여 위조한 것이니 다 취소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237-238p)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위판을 태사와 태직으로 고쳐 썼다. (258p)

고종 36년(1899) 5월 27일 임금은 “전차를 운행할 때 백성들 중 사상자가 많다고 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내부에서 낱낱이 찾아내어 구휼금을 넉넉히 지급함으로써 조정에서 근심하고 측은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 주도록 하라”라고 조령을 내렸다. 또 의정부에서는 전차를 운전할 때 반드시 사람들이 철길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살펴서, 다시는 차에 치어 다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해당 부서에 경계하였다. 이달 17일 한성전기회사에서 전차 개통식을 하고 운행을 시작하였는데, 26일 전차가 종로 거리를 질주할 때 다섯 살 난 아이가 치어 죽었다. 이에 여러 사람이 격노하여 차체를 파괴하고 기름을 뿌려 불태워버렸다. 또 전차가 전복되어 죽거나 다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이런 사건 때문에 내려진 조령이다. (287-288p)

고종 41년(1904)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고종 37년(1900) 북청사변 후 러시아는 만주 일대에 군사를 체류시킨 채 기한이 되도록 철수하지 않았다. 일본·영국 양국 동맹과 미국이 항의하였지만 러시아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 40년(1903) 4월에 이르러 군사를 출동시켜 멋대로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차지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존망이 자신들의 안위와 관계된다고 여겨 몇 달을 절충하였으나 해결이 나지 않았다. 러시아가 도리어 군사 장비를 늘리자, 고종 41년(1904) 2월 6일 두 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다. 9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함을 공격하여 인천에서 두 척을 격파하자 러시아함은 퇴각하다가 인천항에서 자폭 침몰하였다. 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2일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가 서울을 떠나 러시아로 귀국하였다. 이에 이르러 국면이 크게 변하여 한일의정서를 다음과 같이 체결하게 된 것이다. (300-301p)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적이 어찌 누구나가 다 처단할 수 있는 역적이 아니겠으며 다섯 대의 수레에 몸을 찢어 돌린들 어찌 그 죄를 다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법이 시행되지 않고 권세가 서지 않으면 아무리 임금의 자리라 하더라도 죽은 것과 같고 종묘와 사직이 옮겨지지 않았더라도 나라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미 다른 나라 사람이 통감부를 만들어서 군신과 백성들이 몽땅 사로잡혀 도마 위의 물고기 신세가 되는 참상을 당하게 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런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327p)

12월 1일에는 특진관 조병세가 한일조약에 분개해서 약을 먹고 죽었다. 고종 황제는 “… 짐은 큰집을 버텨주는 기둥과 대들보처럼 의지했었고 이 어려운 때에 직면하여서는 더욱 마음을 의탁했었는데 갑자기 이처럼 부고가 이르렀다. 굳은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정은 후세에 빛날 것이지만 짐의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라며 앞의 두 대신과 마찬가지로 후히 장례를 치러주도록 하는 조령을 내렸다. (333p)

아! 여러 역적을 처단하지 않고 강제로 체결된 조약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5백 년 종묘사직은 지금 멸망할 것이고 삼천리 강토는 오늘 없어질 것이며, 수백만 백성은 지금 멸망할 것이고 5천 년을 내려오던 도맥이 오늘 끊어질 것이니, 신이 오늘날 산다 한들 무엇하겠습니까? (352p)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양선, 개항, 조약…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 시대
격변의 시기를 맞은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 13년의 기록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선정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대까지의 472년간의 기록만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마지막 시기인 고종과 순종대에는 ‘실록’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말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고종과 순종 시기에도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그러나 왕이 내린 교지며, 신하들과 어떤 대화를 했는지, 각국과 맺은 여러 약정 등 구한말 시대의 여러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어 왜곡의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기에는 아쉬운 면이 더 크다. 또한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 각종 기록을 사료로서 참고하였기에 제국주의적 사관에만 치우쳐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가 결과에 대한 가치 평가 못지않게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과정과 경과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 사건에 대해 조선의 임금과 조정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다.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에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들(5적)을 처단하라는 신료들의 상소문이며, 자결로 한일협상조약의 부당함과 치욕을 나타낸 우국지사들을 애도한 고종의 말이 실록에는 실려 있다. 순종 시대의 실록에는 피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순종이 조사를 내려 애도의 뜻을 표한 바도 있다. 이러한 기록 모두가 우리에게는 망국의 슬픔이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한 장면일 것이다.
화제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는 충신과 선비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일제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압박하는 신료들도 나온다. 실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조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상소들과 의견들이 오갔는지가 궁금하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고종황제실록]과 [순종황제실록]을 바탕으로 실제 실록 그 자체를 정리한 《대한제국 실록》을 통해 우리 스스로 외면해왔던 구한말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게 했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머리말

서장. 중화 질서 속의 조선 왕조

1. 조선은 속국인가: 청조에 대한 불신과 소중화사상
2. 조약 체제하의 〈속국〉: 일본·서양과의 조약, 청의 요구
3. 조선이 바라는 〈자주 독립〉이란: 갑신정변의 실패

제1장. 진정한 독립 국가로: 1894~1895년

1. 청일전쟁의 발발: 조선을 둘러싼 전쟁
2. 갑오개혁: 개혁과 외세
3. 종속 관계의 종언: 홍범 14조 서고

제2장. 조선 왕조로부터 대한제국으로: 1895~1897년

1. 을미사변, 아관파천: 국왕 고종의 방황
2. 〈황제〉 즉위의 열망: 구본신참의 구현
3. 대한제국의 성립: 준비된 〈중화 황제〉

제3장. 새 국가상의 모색: 황제와 지식인의 협화와 불화

1. 독립협회 결성: 개화파 지식인들이 지향한 것
2. 황제의 러시아 접근과 독립협희의 반대
3. 독립협회의 강제 해산: 의회 개설의 좌절

제4장. 대한제국의 시대: 황제 통치의 현실과 한계

1. 유교 종주의 전제 군주: 구본신참의 도달점
2. 황제국의 문화: 건축, 의복, 애국가

제5장. 보호국으로의 길: 러일전쟁 전야에서 개전으로

1. 대한제국의 외교: 다양한 가능성
2. 한일 의정서: 무시된 중립 선언
3. 제1차 한일 협약 체결: 재무, 외교 고문의 도입

제6장. 제2차 한일 협약 체결: 통감부 설치, 보호국화

1. 서양 국가의 승인, 황제에 대한 강요
2. 조인: 대신들의 저항과 타협
3. 헤이그 밀사 사건: 황제의 저항
4. 제3차 한일 협약의 체결: 황제의 강제 양위 후

제7장. 대한제국의 저항과 종언: 1910년 8월 병합으로

1. 일진회와 의병 운동: 고종 황제의 시대
2. 남북 순행과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 순종 황제의 시대
3. 한국 병합 조약 체결: 황제에서 〈이왕〉으로

종장. 한국 병합을 둘러싼 논쟁: 역사학과 국제법

후기 | 〈한국 병합〉 관련 연표 | 주요 참고 자료 |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저 : 모리 마유코 (Mayuko Mori,もり まゆこ,森 万佑子)
 
한반도 지역 연구 전문가.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 근대사이다. 1983년 일본 아이치현에서 태어났다. 2008년 도쿄 대학교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지역문화연구전공에서 석사(학술)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에 동 대학원 박사 과정에 진학하고, 2010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 2012년 수료했다. 2012년 도쿄 대학교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지역문화연구전공 박사 과정에 복학, 2016년 박...
 
역 : 최덕수 (崔德壽)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근대 한국 정치사 및 외교사 전공. 저서로는 《개항과 朝日관계》(2004, 고려대학교출판부)와 《대한제국과 국제환경》(선인, 2005), 공저로 《조약으로 본 한국 근대사》(열린책들, 2010), 《근대 한국의 개혁 구상과 유길준》(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15)가 있다. 역서로는 《조선의 개화사상과 내셔널리즘》(열린책들, 2014), 《근대 조선과 일본》(열린책들, 20...

책 속으로

한국은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다. 35년은 태어난 아이가 장년이 되기까지의 긴 시간이다. 이른바 〈혐한〉 도서를 좋아하는 사람도, 케이팝 아이돌에 열을 올리는 사람도, 적어도 이제까지 한 번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지 지배에 관하여 논의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인가〉라는 한일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근본 문제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학적 방법으로 일반 독자를 위해 쓴 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첫 문장」중에서

보호 조약이라고 불리는 제2차 한일 협약을 비롯하여 한국 병합에 이르는 과정에서 양국 간에 체결된 모든 구조약과 협정에 대해서 양국에서 장벽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을 논의하고 청산했어야 하는 국교 정상화를 위한 조약이, 구조약과 협정을 〈이미 무효〉라고 하여 논의를 기피하였던 것이다.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는 애매한 표현에 의해서 한국은 〈1910년 한국 병합 조약은 원래부터, 그 이전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을사 보호 조약)도 무효〉, 일본 정부는 〈병합 조약은 한국이 독립선언(1948년)을 했을 때부터 무효〉라고 각각 해석하였다. 이와 같은 해석의 차이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중략) 또한 이 조약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 p.322~323

〈재산·청구권〉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경제 협력금〉이라고 국회에서 설명하였다. 한국 국내에서는 〈대일 청구권〉이라고 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다른 한편, 조약 교섭 과정에서 이케다 하야토 정권은 냉전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자 하는 일본 국내 여론을 고려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여 경제면에서 한일 협력을 중시하였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의 의도와도 일치하였다.
--- p.324

현재 한국은 대한제국 병합을 향한 일련의 여러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성립하지 않았던 조약에 의해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기 때문에 〈강점〉(강제 점령)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한편 일본에서는 합법으로 형식적으로는 합의하여 성립한 〈통치〉였다고 하고 있다.
--- p.325

① 통상의 결재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② 고종 황제가 인정하지 않았다, ③ 일본 측에 의한 강제가 있었다는 것은 벌써 120년 동안 계속 바뀐 것이 없다. 이것은 단순히 국제법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 문제인 것이다.
--- p.347

조선 왕조·대한제국과 일본에서는 정치의 존재 양식도, 그것에 동반하는 사실의 기록과 정리하는 방법도 크게 달랐다. 양국에서 현재까지 남아 확인 가능한 사료를 사용하여, 일본에서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에서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논의하여도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이 적지 않다. 조약 체제의 외교를 실천했던 나라와 그렇지 않았던 나라의 기록을 대등하게 사용하며 논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른 한편 일본 측의 사료에만 의거하는 것은 일본의 주관이 포함되어, 일본으로부터 보는 한국사가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p.350

사실에 대한 이해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그것 때문에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입장이 성립한다. 다만 그와 같은 가운데서도 대한제국의 사료에서 추출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지배에 합의하지 않았고 환영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편 작은 부분까지 순차적으로 서술되는 일본 사료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일본이 한국인으로부터 통치에 대한 〈합의〉와 〈정당성〉을 무리하게 얻으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 p.351

출판사 리뷰

한일 갈등의 진원, 대한제국 강제 병합
그 결정적인 근대사의 시간을 되짚다


한국(조선) 근대사를 연구해 온 젊은 일본 학자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연구서가 출간되었다. 『한국 병합: 논쟁을 넘어, 다시 살핀 대한제국의 궤적』은 한국(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차근차근 짚으며 국권 피탈의 수난사를 깊이 들여다본다.

도쿄 여자 대학교 국제사회학과 교수 모리 마유코(森万佑子). 그는 혐한 현상과 케이팝 열풍이 공존하는 일본의 사회 문화 속에서, 일본 대중이 100여 년 전 한일 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 한일 간 논란과 갈등의 진원인 이른바 〈한국 병합〉, 즉 대한제국 강제 병합의 역사적 배경과 진행 과정을 세세하게 살피고, 역사학 대 국제법의 구도로 논쟁해 온 지난 30여 년간의 학술적 공방도 아울러 정리한다.

이 책은 일본의 젊은 세대는 물론 우리 한국인도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는 국권 피탈의 상세한 역사적 과정을 다시금 짚어 봄으로써, 논쟁과 갈등을 넘어 더 나은 한일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올바른 역사학적 인식의 장을 마련한다. 일본인 연구자의 저작임에도 일본 측 사료에 국한되지 않고 한일 양쪽의 사료를 골고루 분석하여 당대사를 정리한 것이 특히 돋보인다.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또 수시로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연구자들과 교류하여 꾸준히 양국의 최신 연구 성과를 습득해 온 결실이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일본의 보호국에서 식민지로


저자는 그간 한국 병합에 관한 일본의 저작들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여 가는 과정〉을 주로 논해 왔다며, 『한국 병합』은 그와 달리 〈대한제국이 성립하고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 주목함을 밝힌다. 당대 일본의 정치와 외교가 한국 병합을 향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피는 데에서 더 나아가, 대한제국 황제와 정부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고,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했거나 동조했던 다양한 인물과 세력의 정체와 역할을 분석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어떻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갔는지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책은 우선 조선 왕조와 중국 간의 특수한 관계를 설명하고, 그 정체성이 서구식 조약 체제 유입 이후 어떻게 다루어지고 변모해 갔는지 소개한다. 이어 청일전쟁을 계기로 과거의 중화 질서가 해체되면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이 대두하고 그 속에서 조선이 맞이한 위기와 변화를 다룬다.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이유로 조선에 출병한 청과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투며 끝내 청일전쟁을 벌이고,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키운다. 이 무렵 조선은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국가의 각종 체제를 대폭 바꾸고 청의 예속에서 벗어났음을 선언한다. 그 사이 일본은 조선 왕실을 견제하며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저지르고, 위기를 느낀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는 등, 1897년 대한제국 수립에 이르기까지 조선 정부는 많은 위기를 겪는다.

대한제국은 정부 수립 이듬해인 1898년 이후 여러 가지 국가사업을 벌이고, 체제 및 사회 문화의 변화를 이어가며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 재정 위기 등을 겪으며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일본의 압박을 받는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한일 의정서, 그리고 제1차 한일 협약 등을 체결하며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이어 1905년에는 제2차 한일 협약, 즉 을사 보호 조약 체결을 강제당하며 외교권과 내정 전반을 일본에 빼앗겨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그 와중에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는 등 저항하지만, 이를 계기로 1907년 양위까지 당한다. 순종으로의 강제 양위 직후에는 제3차 한일 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내정은 일본에 완전히 장악되고, 결국 1910년 8월 이른바 〈한국 병합 조약〉을 체결당하며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에 이른다.

병합 조약들을 둘러싼 논쟁: 역사학 대 국제법

한편 저자는 책의 종장에서, 1990년대 이후 30여 년에 걸쳐 한일 연구자들이 수행한 〈한국 병합〉 관련 연구 성과와 논쟁점을 압축적으로 정리한다. 1980년대 후반 급속한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늘고, 동시에 한국에서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쉽지 않았던 대일 관계 및 식민지 역사에 대한 비판적 견해 제기가 급격히 는다. 아울러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관련 증언이 나오면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대중의 관심과 발언도 본격화한다.

이 무렵 한국 사학계에서 새로운 사료들을 발굴하면서 한일 간 조약들에 대한 무효론 등 〈한국 병합〉을 둘러싼 문제들이 대두된다. 이를 계기로 한일 연구자들 사이에 공동 연구와 학술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주요 쟁점에 대해 양측 사료 연구에 입각한 논쟁이 불붙는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에서 대한제국과 일본 간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라고 밝힌 것, 그리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식민지 청구권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밝힌 것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등이 그것이다. 주로 역사학 대 국제법의 구도로 펼쳐져 온 이러한 양측의 학술적 공방을 소개하며, 저자는 당시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통치에 대한 〈합의〉와 〈정당성〉을 무리하게 얻으려 했음을 확인한다.

2018년 대법원에서 피고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이후, 현재 한일 국민 간의 감정적 대립은 극에 달한 상태이다. 일본은 국제법적으로 해소된 사안에 대해 한국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 반면 한국은 강압적이고 불법적인 조약 체결 과정을 뒷받침하는 역사학의 증거들을 제시하며 일본의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일본의 대중이 국제법적 논리에 편향해 있음을 지적하며, 갈등과 반목을 넘어 평화와 공존의 길로 나아가려면 당대에 대한 역사학적 인식을 늘려야 함을 주문한다. 그런 토대가 형성되어야만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논의가 가능해짐은 분명한 사실이다.

추천평

일본의 관점에서 그려 온 〈한국 병합〉을, 대한제국 성립과 붕괴 과정을 통해 다시 들여다본다. (중략) 대한제국 황제를 중심인물로 설정한 이 책이 안내하는 역사적 사실은 묵직하다.
- 아사히 신문
이 책의 안목은 (중략) 병합의 과정을 조선 측 역사를 통해 되돌아본 데에서 두드러진다. 제국주의의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떻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조선에 손을 뻗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외교가 흥미롭다.
- 마이니치 신문
한일 간 갈등의 기원을 신진 역사학자가 정면으로 다룬다. (중략) 합법·불법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한국 병합의 실체……. (중략) 한일 사이의 해묵은 난제를 젊은 세대가 다시금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저자의 열의가 전해져 온다.
- 니혼게이자이 신문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870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고종황제 대원수 상복 (국가록곡문화재)

고종황제 대원수 상복 高宗 皇帝 大元帥 常服

1899년 원수부가 설치된 후 1904년 폐지될 때까지 고종황제가 대원수로 평상시에 입었던 군복이다. 깃에 5개의 별이 있는 의령장과 소매에 있는 112개의 '人' 자형 수장이 대원수의 게급을 나타낸다.<대한제국>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5043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