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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즉위하기 전 왕세자였던 정조와 정조의 서연을 담당하도록 임명된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 「계방일기」의 첫 완역이다. 정조의 공부방에서는 유교 경전을 텍스트로 강론을 벌이며 조선 최고 지성들의 학문의 깊이와 사유의 폭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문답이 오간다. 또한 「계방일기」는 여느 경연일기나 서연일기와 달리 방 안 풍경, 세손의 표정, 잡담 같은 소소한 일까지 세밀하게 묘사해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정통 유학자이면서도 실용을 중시했던 홍대용과, 이후 조선의 르네상스기를 이룬 정조의 대담을 통해 그들의 서로 대비되고 때로는 합치하는 학문관과 정치관을 살펴볼 수 있다. 정조는 홍대용의 자질을 시험하기도 하며, 정치적 속내를 숨긴 영악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홍대용은 그럴 때마다 흔들림 없이 정론을 펼치며 한결같은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군신 간의 예의는 갖추되 서로 공방하는 장면에서는 긴장감이 흐른다. 또한 이 책에는 송시열, 홍국영,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외척들, 영조, 박지원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 전후 시기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고전과 역사, 인물을 재해석한 역사 인문서이다.
정통 유학자이면서도 실용을 중시했던 홍대용과, 이후 조선의 르네상스기를 이룬 정조의 대담을 통해 그들의 서로 대비되고 때로는 합치하는 학문관과 정치관을 살펴볼 수 있다. 정조는 홍대용의 자질을 시험하기도 하며, 정치적 속내를 숨긴 영악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홍대용은 그럴 때마다 흔들림 없이 정론을 펼치며 한결같은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군신 간의 예의는 갖추되 서로 공방하는 장면에서는 긴장감이 흐른다. 또한 이 책에는 송시열, 홍국영,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외척들, 영조, 박지원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 전후 시기의 역사도 다루고 있다.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고전과 역사, 인물을 재해석한 역사 인문서이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만천명월주인옹―달이 되고자 한 임금
건곤일초정의―주인 거문고를 닮은 선비
서연문답
첫 서연―정조와 홍대용의 만남
붕당과 탕평―무엇을 위한 탕평인가
불설지교―가르침을 거절하는 것도 가르침의 방법이다
이이제이―척리로 척리를 제압하다
우암 송시열-세손, 정치 구상을 내비치다
홍국영―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귀는 도리
척리와 사대부―친해야 할 사람을 친하게 여기다
군사의 길―임금이자 스승이 되기 위해
북경―개혁의 방법을 아뢰다
초여름밤의 꿈―세손과 홍대용, 길을 달리하다
분서―책을 불살라 세상을 편안하게 하다
서연문답 그 후
세손의 시대―하늘에 뜬 달은 오직 하나
별리―가뭇없이 가버리는 것
에필로그
월야탄금―달 외로이 빛나고 거문고 다시 울지 않다
보론 | 홍대용과 그의 시대
머리말
시대적 배경
홍대용의 성장 배경과 사상
연행
홍대용과 정조
맺음말
나가며
참고문헌
프롤로그
만천명월주인옹―달이 되고자 한 임금
건곤일초정의―주인 거문고를 닮은 선비
서연문답
첫 서연―정조와 홍대용의 만남
붕당과 탕평―무엇을 위한 탕평인가
불설지교―가르침을 거절하는 것도 가르침의 방법이다
이이제이―척리로 척리를 제압하다
우암 송시열-세손, 정치 구상을 내비치다
홍국영―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귀는 도리
척리와 사대부―친해야 할 사람을 친하게 여기다
군사의 길―임금이자 스승이 되기 위해
북경―개혁의 방법을 아뢰다
초여름밤의 꿈―세손과 홍대용, 길을 달리하다
분서―책을 불살라 세상을 편안하게 하다
서연문답 그 후
세손의 시대―하늘에 뜬 달은 오직 하나
별리―가뭇없이 가버리는 것
에필로그
월야탄금―달 외로이 빛나고 거문고 다시 울지 않다
보론 | 홍대용과 그의 시대
머리말
시대적 배경
홍대용의 성장 배경과 사상
연행
홍대용과 정조
맺음말
나가며
참고문헌
책 속으로
세손: 계방은 전번에 읽은《중용》서문의 문의를 다시 생각해보았는가? 어떻던가?
홍대용: 두 ‘사' 자의 뜻이 같지 않음은 저하의 말씀이 지극히 옳아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위의 ‘두 가지’와 아래의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은 저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은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세손: 위에서 ‘두 가지’라 한 것은 인심과 도심 두 가지를, 아래에서 ‘두 가지’라 한 것은 천리와 인욕을 말한 것 같다.
홍대용: 신의 생각으로는 둘 다 인심과 도심을 가리킨 것입니다.
세손: 참으로 ‘입을 닫고 이야기하지 말 것이요, 각각 자기 견해를 지킨다’는 말 그대로군. --- pp.59-60
세손: 나 같은 사람은《논어》를 읽었다고 말하기에 부족하다 하겠다. 갑자기《논어》에 있는 한 구절을 상고할 일이 있었는데 어느 편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계방은 기억하는가?
홍대용: 신 또한 그 차례까지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나이 들고 경전에 익숙한 선비들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개 독서란 그 글의 의미를 마음속에 잘 담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구절의 차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이 글에서 말하기를, “책을 읽으면서 먼저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생각이 이미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이런 마음이 있으면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또한 마땅히 독서에서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홍대용: 두 ‘사' 자의 뜻이 같지 않음은 저하의 말씀이 지극히 옳아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위의 ‘두 가지’와 아래의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은 저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은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세손: 위에서 ‘두 가지’라 한 것은 인심과 도심 두 가지를, 아래에서 ‘두 가지’라 한 것은 천리와 인욕을 말한 것 같다.
홍대용: 신의 생각으로는 둘 다 인심과 도심을 가리킨 것입니다.
세손: 참으로 ‘입을 닫고 이야기하지 말 것이요, 각각 자기 견해를 지킨다’는 말 그대로군. --- pp.59-60
세손: 나 같은 사람은《논어》를 읽었다고 말하기에 부족하다 하겠다. 갑자기《논어》에 있는 한 구절을 상고할 일이 있었는데 어느 편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계방은 기억하는가?
홍대용: 신 또한 그 차례까지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나이 들고 경전에 익숙한 선비들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대개 독서란 그 글의 의미를 마음속에 잘 담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구절의 차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이 글에서 말하기를, “책을 읽으면서 먼저 자기 견해부터 세우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생각이 이미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책을 저술하는 것은 본래 처음 배우는 자의 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이런 마음이 있으면 “바깥으로 질주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또한 마땅히 독서에서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 pp.128-129
출판사 리뷰
조선 최고 지성들이 벌이는 사유의 쟁투, 정조의 서연을 엿보다
경연이 왕의 공부라면 서연은 왕세자의 공부다. 이 책은 훗날 학자군주, 개혁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의 서연 풍경을 그려냈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 왕세자의 서연을 담당하는 계방의 시직으로 임명된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계방일기》의 첫 완역이다. 조선 최고 지성들이 군신 간의 예의를 갖추면서도 때로는 서로 다른 사유로 긴장감 흐르는 공방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인정하며 마음을 합하기도 한다. 문답의 번역과 해설은 물론 정조 즉위 전후의 역사적 배경까지 다루고 있으며, 더불어 왕세손 시절의 정조를 재조명하고 조선 후기 실학자로 대표되는 홍대용의 진면목을 드러냈다.《영조실록》,《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편년 기록을 비롯해 홍대용의 다른 글과 관련 인물들의 문집까지 참조하여 고전과 역사를 충실히 재현했으며, 형식에서는 소설적 재구성으로 재미를 더한 역사학자의 작업으로 새로운 역사·고전 읽기의 가능성을 열었다.
정조 즉위 직전 300일간의 기록, 홍대용의《계방일기》
계방이라고도 부르는 세자익위사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본래는 세자를 호위하는 명목으로 설치된 관청이나 세자의 서연에 참여하게 되면서 주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 중에서 임명되고 있었다. 홍대용은 벼슬살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과거도 보지 않았지만 학문에 있어서 당대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재였기에 여러 관직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지내다 계방의 종8품직인 시직에 임명된 후 첫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74년(영조 50) 12월 1일부터 177년(영조 51) 8월 26일까지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홍대용이 세손의 서연에 드나들며 정조와 나눈 문답을 기록한 것이 바로《계방일기》다. 홍대용의《계방일기》는 정조와 홍대용, 그리고 다른 신하들과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의 공부방에서는 유교 경전을 텍스트로 강론을 벌이며 조선 최고 지성들의 학문의 깊이와 사유의 폭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문답이 오간다.《계방일기》가 보여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여느 경연일기나 서연일기와 달리 방 안 풍경, 세손의 표정, 잡담 같은 소소한 일까지 모두 세밀하게 묘사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저자는 “《계방일기》가 홍대용의 다른 저작,《의산문답》이나《건정동필담》만큼이나 중요한 저작이라 생각한다. 그가 세손 시절의 정조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우리 역사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는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대단한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내뿜는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덤 치고는 꽤 큰 덤이었다”(본문 322쪽)라고 고백한다.
왕이 되기 위한 공부, 서연
조선의 지배층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유교적 교양인이어야 했다.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은 미래의 왕을 길러내는 것이기에, 왕의 경연보다도 훨씬 유교 교육의 목적이 컸다. 그야말로 인문학 공부의 정수였던 것이다. 정조는 학문군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손 시절부터 공부에 남다른 기량을 보인 모범생이었다. 영특했던 정조는 일부러 한두 자 틀리게 암송하고 신하들이 이를 지적하지 못하면 나무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조에게 홍대용은 학문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교육관으로서 손색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루하게 경전만 강론한 것은 아니다. 서연은 경연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인데다 다방면으로 호기심 많은 정조였기에 강론 중에 다른 길로 새는 경우도 빈번했는데,《계방일기》는 다른 서연일기나 경연일기와는 달리 이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홍대용은 세손의 말뿐 아니라 태도나 행동거지도 놓치지 않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즉위해 임금이 될 세손의 자질을 관찰한 것이다. 독자는 어느새 이들의 공부방 속에 빠져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학자군주 정조의 새로운 면모와 진정한 선비 홍대용의 진면목
홍대용은 노론의 맥을 잇는 정통 유학자였다. 하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이나 과거를 위한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학문, 즉 ‘실용실행'을 중요시했다. 홍대용만큼 ‘실학자’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였고 수학자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의 손꼽히는 거문고 연주자였다. 또한 북학의 문을 연 장본인으로,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박제가는 홍대용이 북경에서 한족 선비들과 나눴던 필담을 정리한《건정동필담》을 읽으며 “밥 먹으면서 숟가락질을 잊었고 세수하면서 씻기를 잊었다” 했?. 홍대용이 없었다면 박지원의《열하일기》도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지원은 홍대용의 묘지명에서 “세상에서 홍대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끊고 한가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세속 밖에서 놀고자 하였던 것만 알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 많은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나라 살림을 맡거나 먼 곳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이었고,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썼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 시대를 살았던 홍대용, 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바로 그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의 세손 시절 모습을 보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정조는 군사, 즉 다스리는 자(임금)이자 가르치는 자(스승)가 되어 모든 백성과 관료들이 우러르는 하늘에 뜬 단 하나의 달이 되길 바랐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던 그에게 학문은 어찌 보면 정치적 도구에 가까웠다. 그는 홍대용이 ‘격물치지’와 실천에 대해 힘써 아뢸 때 ‘격물치지가 먼저고 성의·정심이 나중인 줄 누가 모르랴. 하지만 임금은 어려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평천하의 책임을 맡게 되는데 수신·제가나 그 이전에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공부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치국·평천하의 일을 버릴 수는 없다.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다스려 가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보통 서연에서는 정치적인 부분이 배제되고 학문적인 논의를 중점으로 해야 했는데, 문답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정치적 야심이 개혁군주로서의 정조를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고 마음을 나누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정조였으나 학문의 깊이로만 보면 당시 세손이던 정조의 학문이 홍대용을 따를 수는 없었다. 첫 서연에서 정조는 갑자기《중용》의 내용을 물으며 자신의 선생으로서의 홍대용의 자질을 시험한다. 하지만 홍대용은 학문을 넓게 보아 큰 뜻을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했지,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따지는 이가 아니었다. 홍대용은 자신의 학문을 지나치게 자신하는 정조에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간한다. 이처럼 군신 간의 예의는 갖추되 서로 공방하는 장면에서는 긴장감이 흐른다. 때로는 정조가 정치한 속내를 숨긴 영악한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도 홍대용은 흔들림 없이 정론을 펼치며 한결같은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새 정조는 호기심 많은 학생으로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늘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학문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홍대용은 경험 많은 선생으로서 어떤 문의에도 막힘없이 대답해준다. 서연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이해도 깊어지는데, 후에 다른 신하가 정조에게 홍대용을 고문으로 갖춰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 만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대용이 진심을 다해 자신이 평생 공부해온 것을 권해도 정조는 홍대용이 말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당장의 정치를 위한 정치에 관심을 두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조와 홍대용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홍대용과 같은 교육관이 있었기에 학문군주, 개혁군주로서의 정조가 있었을 것이다. 정치나 학문의 지향은 서로 반!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반할 수밖에 없었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은 겨뤘지만 마음은 나누었던 그들의 문답 속에서 조선 최고 지식인들이 내뿜는 지성의 향취를 맛볼 수 있다. 정조의 공부방에 들어가 그들의 학문과 사유, 그들이 꿈꿨던 나라를 그리며 고전과 역사의 향연에 취해보는 것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새로운 역사 인문서의 탄생
이 책은《계방일기》를 중심으로 그 전후 시기의 역사와 더불어 서연에서의 대화를 해설한 것이다. 문답에 중심에 있는 것은 정조와 홍대용이지만 정조의 공부방 안팎으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공자, 주자에 이어 정조에 의해 송자로 추대된 송시열, 정조의 심복이었으나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 홍국영,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외척들, 늙은 임금 영조. 또 홍대용과는 둘도 없는 지인인 박지원, 그리고 연행에서 만난 중국 선비들의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 소설처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으나 내용에서는《계방일기》원본과 다른 여타 사료에 충실했다.《계방일기》의 오자까지 수정해가면서 번역하였고 기록에 빠진 부분이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영조실록》,《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등 편년기록과 관련 인물들의 문집을 통하여 채워 넣어 매우 촘촘하게 서술하고 있다.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고전과 역사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역사학자의 작업으로 새로운 역사 인문서의 장을 열었다.
경연이 왕의 공부라면 서연은 왕세자의 공부다. 이 책은 훗날 학자군주, 개혁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의 서연 풍경을 그려냈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 왕세자의 서연을 담당하는 계방의 시직으로 임명된 홍대용이 약 300일 동안 정조의 서연에 참석해 나눈 문답을 기록한《계방일기》의 첫 완역이다. 조선 최고 지성들이 군신 간의 예의를 갖추면서도 때로는 서로 다른 사유로 긴장감 흐르는 공방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인정하며 마음을 합하기도 한다. 문답의 번역과 해설은 물론 정조 즉위 전후의 역사적 배경까지 다루고 있으며, 더불어 왕세손 시절의 정조를 재조명하고 조선 후기 실학자로 대표되는 홍대용의 진면목을 드러냈다.《영조실록》,《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편년 기록을 비롯해 홍대용의 다른 글과 관련 인물들의 문집까지 참조하여 고전과 역사를 충실히 재현했으며, 형식에서는 소설적 재구성으로 재미를 더한 역사학자의 작업으로 새로운 역사·고전 읽기의 가능성을 열었다.
정조 즉위 직전 300일간의 기록, 홍대용의《계방일기》
계방이라고도 부르는 세자익위사는 세자시강원과 함께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본래는 세자를 호위하는 명목으로 설치된 관청이나 세자의 서연에 참여하게 되면서 주로 공신이나 재상의 자제 중에서 임명되고 있었다. 홍대용은 벼슬살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과거도 보지 않았지만 학문에 있어서 당대 첫손가락에 꼽히는 인재였기에 여러 관직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지내다 계방의 종8품직인 시직에 임명된 후 첫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74년(영조 50) 12월 1일부터 177년(영조 51) 8월 26일까지 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홍대용이 세손의 서연에 드나들며 정조와 나눈 문답을 기록한 것이 바로《계방일기》다. 홍대용의《계방일기》는 정조와 홍대용, 그리고 다른 신하들과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의 공부방에서는 유교 경전을 텍스트로 강론을 벌이며 조선 최고 지성들의 학문의 깊이와 사유의 폭을 보여주는 수준 높은 문답이 오간다.《계방일기》가 보여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여느 경연일기나 서연일기와 달리 방 안 풍경, 세손의 표정, 잡담 같은 소소한 일까지 모두 세밀하게 묘사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저자는 “《계방일기》가 홍대용의 다른 저작,《의산문답》이나《건정동필담》만큼이나 중요한 저작이라 생각한다. 그가 세손 시절의 정조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우리 역사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는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바로 그 현장에 들어가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대단한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내뿜는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덤 치고는 꽤 큰 덤이었다”(본문 322쪽)라고 고백한다.
왕이 되기 위한 공부, 서연
조선의 지배층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유교적 교양인이어야 했다.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은 미래의 왕을 길러내는 것이기에, 왕의 경연보다도 훨씬 유교 교육의 목적이 컸다. 그야말로 인문학 공부의 정수였던 것이다. 정조는 학문군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손 시절부터 공부에 남다른 기량을 보인 모범생이었다. 영특했던 정조는 일부러 한두 자 틀리게 암송하고 신하들이 이를 지적하지 못하면 나무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조에게 홍대용은 학문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교육관으로서 손색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루하게 경전만 강론한 것은 아니다. 서연은 경연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인데다 다방면으로 호기심 많은 정조였기에 강론 중에 다른 길로 새는 경우도 빈번했는데,《계방일기》는 다른 서연일기나 경연일기와는 달리 이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홍대용은 세손의 말뿐 아니라 태도나 행동거지도 놓치지 않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즉위해 임금이 될 세손의 자질을 관찰한 것이다. 독자는 어느새 이들의 공부방 속에 빠져들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학자군주 정조의 새로운 면모와 진정한 선비 홍대용의 진면목
홍대용은 노론의 맥을 잇는 정통 유학자였다. 하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이나 과거를 위한 학문에 얽매이지 않고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학문, 즉 ‘실용실행'을 중요시했다. 홍대용만큼 ‘실학자’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과학자였고 수학자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의 손꼽히는 거문고 연주자였다. 또한 북학의 문을 연 장본인으로,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이 그의 뒤를 따랐다. 박제가는 홍대용이 북경에서 한족 선비들과 나눴던 필담을 정리한《건정동필담》을 읽으며 “밥 먹으면서 숟가락질을 잊었고 세수하면서 씻기를 잊었다” 했?. 홍대용이 없었다면 박지원의《열하일기》도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지원은 홍대용의 묘지명에서 “세상에서 홍대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끊고 한가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세속 밖에서 놀고자 하였던 것만 알 뿐이다. 사람들은, 그가 세상 많은 사물의 이치를 종합하고 정리하여 나라 살림을 맡거나 먼 곳에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이었고, 나라를 지킬 기이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썼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 시대를 살았던 홍대용, 그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르네상스, 바로 그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의 세손 시절 모습을 보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정조는 군사, 즉 다스리는 자(임금)이자 가르치는 자(스승)가 되어 모든 백성과 관료들이 우러르는 하늘에 뜬 단 하나의 달이 되길 바랐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던 그에게 학문은 어찌 보면 정치적 도구에 가까웠다. 그는 홍대용이 ‘격물치지’와 실천에 대해 힘써 아뢸 때 ‘격물치지가 먼저고 성의·정심이 나중인 줄 누가 모르랴. 하지만 임금은 어려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평천하의 책임을 맡게 되는데 수신·제가나 그 이전에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의 공부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치국·평천하의 일을 버릴 수는 없다. 한편으로 배우면서 한편으로 다스려 가면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보통 서연에서는 정치적인 부분이 배제되고 학문적인 논의를 중점으로 해야 했는데, 문답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그의 정치적 야심이 개혁군주로서의 정조를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고 마음을 나누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정조였으나 학문의 깊이로만 보면 당시 세손이던 정조의 학문이 홍대용을 따를 수는 없었다. 첫 서연에서 정조는 갑자기《중용》의 내용을 물으며 자신의 선생으로서의 홍대용의 자질을 시험한다. 하지만 홍대용은 학문을 넓게 보아 큰 뜻을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했지, 경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따지는 이가 아니었다. 홍대용은 자신의 학문을 지나치게 자신하는 정조에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간한다. 이처럼 군신 간의 예의는 갖추되 서로 공방하는 장면에서는 긴장감이 흐른다. 때로는 정조가 정치한 속내를 숨긴 영악한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도 홍대용은 흔들림 없이 정론을 펼치며 한결같은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새 정조는 호기심 많은 학생으로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늘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학문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홍대용은 경험 많은 선생으로서 어떤 문의에도 막힘없이 대답해준다. 서연이 계속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이해도 깊어지는데, 후에 다른 신하가 정조에게 홍대용을 고문으로 갖춰두라고 추천하자 정조는 “몇 차례 보고 이미 그럴 만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홍대용이 진심을 다해 자신이 평생 공부해온 것을 권해도 정조는 홍대용이 말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는 당장의 정치를 위한 정치에 관심을 두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조와 홍대용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홍대용과 같은 교육관이 있었기에 학문군주, 개혁군주로서의 정조가 있었을 것이다. 정치나 학문의 지향은 서로 반!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반할 수밖에 없었던 정조와 홍대용, 생각은 겨뤘지만 마음은 나누었던 그들의 문답 속에서 조선 최고 지식인들이 내뿜는 지성의 향취를 맛볼 수 있다. 정조의 공부방에 들어가 그들의 학문과 사유, 그들이 꿈꿨던 나라를 그리며 고전과 역사의 향연에 취해보는 것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새로운 역사 인문서의 탄생
이 책은《계방일기》를 중심으로 그 전후 시기의 역사와 더불어 서연에서의 대화를 해설한 것이다. 문답에 중심에 있는 것은 정조와 홍대용이지만 정조의 공부방 안팎으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공자, 주자에 이어 정조에 의해 송자로 추대된 송시열, 정조의 심복이었으나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 홍국영,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외척들, 늙은 임금 영조. 또 홍대용과는 둘도 없는 지인인 박지원, 그리고 연행에서 만난 중국 선비들의 이야기도 심금을 울린다. 소설처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으나 내용에서는《계방일기》원본과 다른 여타 사료에 충실했다.《계방일기》의 오자까지 수정해가면서 번역하였고 기록에 빠진 부분이나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영조실록》,《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등 편년기록과 관련 인물들의 문집을 통하여 채워 넣어 매우 촘촘하게 서술하고 있다.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고전과 역사와 인물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역사학자의 작업으로 새로운 역사 인문서의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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