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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안민安民’ ‘위민爲民’ ‘편민便民’의 32년
젊은 정치학자, 세종 ‘신화’에 도전하다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넘어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세종을 떠날 수 없다. 당장 지금 이 글도 세종이 창제한 한글 덕분이다. 뿐이랴 자주 쓰는 만원권 지폐를 통해서도 세종을 만난다. 그러니 그는 아주 성공적인 통치자, 한국사 최고의 성군聖君, 명군名君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세종 스스로는 말년에 자신의 통치를 돌아보며 실패투성이로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세종은 무수한 실패를 겪으면서 성장해 간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위대한 통치자로서 세종 이도의 실체를 모색하고 있다.
젊은 정치학자, 세종 ‘신화’에 도전하다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을 넘어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세종을 떠날 수 없다. 당장 지금 이 글도 세종이 창제한 한글 덕분이다. 뿐이랴 자주 쓰는 만원권 지폐를 통해서도 세종을 만난다. 그러니 그는 아주 성공적인 통치자, 한국사 최고의 성군聖君, 명군名君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세종 스스로는 말년에 자신의 통치를 돌아보며 실패투성이로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세종은 무수한 실패를 겪으면서 성장해 간 인물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저자는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위대한 통치자로서 세종 이도의 실체를 모색하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며
프롤로그
세종 연보
1. 국왕이 된 셋째 왕자[출생부터 아버지의 죽음까지: 1397~1421]
1장 세자가 아닌 왕자
1. 정안군 이방원의 셋째 아들
한양에서 태어나다|의심스러운 기록들|이도가 수정한 실록들|정치적 인간
2. 셋째 왕자로서의 삶
형제와 자매|대군 시절의 스승들|“보통 사람이 아니다”|세자가 아닌 왕자
3. 우연히 찾아온 기회
확고했던 후계자|태종이 세자를 쫓아 내다|또 한 명의 태종, 양녕
2장 태종이 선택한 국왕
1. 세자가 되다
경쟁자들|세자로 낙점되다|2개월을 채우지 못한 세자생활
2. 국왕의 자리에 오르다
태종의 전격적인 양위|경복궁에서 즉위하다|즉위교서를 발표하다|국왕으로서의 삶
3. 첫걸음을 딛다
준비되지 않은 국왕|“상왕께 아뢸 것이다”|제왕학의 교과서 《대학연의》
3장 입지를 구축하다
1. 견습의 시기
왕 위의 왕, 태종|태종의 음모|처가의 몰락을 막지 못하다|허수아비 국왕
2. 인내하며 역량을 기르다
집현전과 경연|군사의 중요성을 터득하다|국왕의 대권을 배우다
3.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태종의 이궁을 오가다|어머니 민씨가 죽다|상왕의 신뢰를 얻다|아버지 태종이 죽다
2. 홀로서기[집권 전반기: 1422~1427]
4장 친정을 시작하다
1. 신중히 왕위를 계승하다
위험인물 양녕|또 다른 위협을 제거하다|아버지의 신하들
2. 하늘의 시험
시작부터 흉년|9년의 홍수와 7년의 가뭄|구휼에 힘쓰다|정부 규모를 축소하다
3. 외교의 시험대에 오르다
영락제의 횡포|태종의 지성사대를 계승하다|남방의 왜인과 북방의 야인
5장 시행착오를 겪다
1. 본격적인 통치에 나서다
누이와 맏딸의 죽음|태종의 상제를 마치다|강무를 재개하다|성실한 국정 운영|성군현상의 시대
2. 실패를 맛보다
동전의 보급을 시도하다|이론과 다른 정치|책임을 회피하다
3. 위기에 빠지다
병이 나다|수도 한양이 불타다|용두사미로 끝나 버린 개혁
6장 주도권을 가져오다
1. 기강을 확립하다
태종의 총신을 벌하다|부패 단속을 시작하다|가벼운 처벌로 마무리짓다|국왕의 대권|‘살림의 정치’를 지향하다
2. 군사君師정치를 표방하다
학문적 성취를 자부하다|신유학의 정치론|경연을 제도화하다
3. 양녕대군을 불러오다
전초전|의지를 관철하다|새로운 시대
3. 태평의 시대[집권 중반기 1: 1427~1432]
7장 사대와 교린
1. 지성으로 사대하다
세자의 조현을 시도하다|약소국의 외교|굴욕과 인내
2. 사대의 실제와 성과
금은세공의 면제|조선 출신의 환관들|황제의 신뢰를 얻다
3. 교린과 기미
또 하나의 외교, 교린|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다|북방의 경계를 고수하다
8장 사회 안정을 꾀하다
1. 민풍의 교화
부민에서 교민으로|범죄에 강력히 대처하다|교민 방안을 모색하다|성왕의 정치를 표방하다
2. 신분제도를 강화하다
법제화를 추진하다|신분의 이동을 금지하다|정치의 도리에 대해 고민하다
3. 유가와 법가 사이
유가적 군주의 이면|또 하나의 통치수단, 형벌|법전의 정비에 힘을 쏟다
9장 통치 기반을 확립하다
1. 재정 안정을 꾀하다
조세제도 개혁을 선언하다|개혁의 정당성으로 백성을 내세우다|17만 명 이상의 여론을 듣다|개혁을 철회하다
2. 수취체제를 정비하다
양전을 시행하다|농사를 권면하다|지리서와 지도를 제작하다
3. 근면한 통치자
신하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법궁 경복궁을 쇄신하다|“백성들은 태평하고 평안하네”
4. 야망과 교착[집권 중반기 2: 1433~1437]
10장 야인 정벌을 단행하다
1. 북방의 골칫거리
야인이 침입하다|정벌의 의지를 밝히다|껄끄러운 명나라의 황제
2. 정벌의 의지를 관철하다
건주위의 이만주|공론정치의 전제, 강력한 리더십|정벌을 단행하다
3. 거센 후폭풍
초라한 성과|무의 정치를 내세우기 시작하다|황제가 정벌을 책망하다
11장 영토 개척을 시작하다
1. 수확의 계절
어느 야인 추장의 죽음|“영토를 넓힐 시기가 무르익었다”|수사를 동원해 설득하다
2. 김종서를 함길도로 파견하다
인재를 육성하고 시험하다|총애와 질투|파격적인 발탁
3. 어렵고 지루한 북방 개척
사민과 축성의 시작|군사기지를 건설하다|신뢰와 위임
12장 교착 상태에 빠지다
1. 소란스러운 북방
지속적인 소요|야인과 갈등이 고조되다|다시 정벌을 모색하다
2. 재정 위기에 봉착하다
지독한 가뭄|긴축정책을 펴다|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3. 고뇌를 토로하다
골칫거리 며느리|“통치한 보람이 조금도 없다”|신하와 격려를 주고받다
5. 전환의 모색[집권 후반기 1: 1436~1442]
13장 통치제도를 전환하다
1.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다
6조 직계제에서 의정부 서사제로|첫 번째 권력의 이양|정치적 책임을 분산하다
2. 정치적 동반자, 황희
치세를 함께하다|헌장의 수호자|유위의 정치와 무위의 정치
3. 실질적인 수상, 신개
“내 신개를 얻음이 늦었다”|2차 야인 정벌을 주도하게 하다|총애를 선사하다
14장 누적되는 피로
1. 권력의 이양을 시도하다
준비된 세자|세자의 섭정을 꺼내들다|논전에서 물러나다
2. 무인년의 정변을 재구성하다
이상한 기록|신개의 건의|민감한 정변의 기록|이숙번을 소환하다|정변의 완결
3. 사그라드는 의욕
경연을 중단하다|“나 이제 늙고 병들었다”|여러 번의 온천행
15장 조세제도를 개혁하다
1. 다시 개혁을 모색하다
선봉에 선 정인지|공법상정소를 설치하다|공법의 포기를 선언하다
2. 개혁을 강행하다
마침내 공법을 시험하다|세액을 고정하고 답험을 배제하다|더 많은 세금을 위한 개혁
3. 부국과 안민
취렴의 군주|개혁의 마지막 진통|개혁을 완수하다
6. 국왕 아닌 국왕[집권 후반기 2: 1443~1450]
16장 일선에서 물러나다
1. 권력을 이양하다
후계자 육성|편법을 동원하다|태종의 그림자
2. 이름뿐인 왕위
세자에게 국왕의 일을 맡기다|깊은 궁궐에 은거하다|대군들의 집을 전전하다
17장 영원한 왕국을 꿈꾸다
1. 새로운 문자를 만들다
25년 통치의 결과물|중화에서 이적으로|표준의 수용과 동국의 탄생|훈민과 편민
2. 건국과 정변의 정당화
실록을 수정하다|공덕과 천명으로 건국을 정당화하다|망국의 역사를 완성하다
3. 통치의 표준을 남기다
통치자를 위한 다이제스트|후계자들을 위한 감계|왕조의 영원을 노래하다
18장 먹구름이 드리우다
1. 고뇌와 신앙
두 아들의 죽음|왕비가 먼저 떠나다|불사를 벌이다
2. 수양이 부상하다
혼란한 국제정세|세자가 쓰러지다|수양이 사신을 맞이하다|죽음을 대비하다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프롤로그
세종 연보
1. 국왕이 된 셋째 왕자[출생부터 아버지의 죽음까지: 1397~1421]
1장 세자가 아닌 왕자
1. 정안군 이방원의 셋째 아들
한양에서 태어나다|의심스러운 기록들|이도가 수정한 실록들|정치적 인간
2. 셋째 왕자로서의 삶
형제와 자매|대군 시절의 스승들|“보통 사람이 아니다”|세자가 아닌 왕자
3. 우연히 찾아온 기회
확고했던 후계자|태종이 세자를 쫓아 내다|또 한 명의 태종, 양녕
2장 태종이 선택한 국왕
1. 세자가 되다
경쟁자들|세자로 낙점되다|2개월을 채우지 못한 세자생활
2. 국왕의 자리에 오르다
태종의 전격적인 양위|경복궁에서 즉위하다|즉위교서를 발표하다|국왕으로서의 삶
3. 첫걸음을 딛다
준비되지 않은 국왕|“상왕께 아뢸 것이다”|제왕학의 교과서 《대학연의》
3장 입지를 구축하다
1. 견습의 시기
왕 위의 왕, 태종|태종의 음모|처가의 몰락을 막지 못하다|허수아비 국왕
2. 인내하며 역량을 기르다
집현전과 경연|군사의 중요성을 터득하다|국왕의 대권을 배우다
3.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태종의 이궁을 오가다|어머니 민씨가 죽다|상왕의 신뢰를 얻다|아버지 태종이 죽다
2. 홀로서기[집권 전반기: 1422~1427]
4장 친정을 시작하다
1. 신중히 왕위를 계승하다
위험인물 양녕|또 다른 위협을 제거하다|아버지의 신하들
2. 하늘의 시험
시작부터 흉년|9년의 홍수와 7년의 가뭄|구휼에 힘쓰다|정부 규모를 축소하다
3. 외교의 시험대에 오르다
영락제의 횡포|태종의 지성사대를 계승하다|남방의 왜인과 북방의 야인
5장 시행착오를 겪다
1. 본격적인 통치에 나서다
누이와 맏딸의 죽음|태종의 상제를 마치다|강무를 재개하다|성실한 국정 운영|성군현상의 시대
2. 실패를 맛보다
동전의 보급을 시도하다|이론과 다른 정치|책임을 회피하다
3. 위기에 빠지다
병이 나다|수도 한양이 불타다|용두사미로 끝나 버린 개혁
6장 주도권을 가져오다
1. 기강을 확립하다
태종의 총신을 벌하다|부패 단속을 시작하다|가벼운 처벌로 마무리짓다|국왕의 대권|‘살림의 정치’를 지향하다
2. 군사君師정치를 표방하다
학문적 성취를 자부하다|신유학의 정치론|경연을 제도화하다
3. 양녕대군을 불러오다
전초전|의지를 관철하다|새로운 시대
3. 태평의 시대[집권 중반기 1: 1427~1432]
7장 사대와 교린
1. 지성으로 사대하다
세자의 조현을 시도하다|약소국의 외교|굴욕과 인내
2. 사대의 실제와 성과
금은세공의 면제|조선 출신의 환관들|황제의 신뢰를 얻다
3. 교린과 기미
또 하나의 외교, 교린|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다|북방의 경계를 고수하다
8장 사회 안정을 꾀하다
1. 민풍의 교화
부민에서 교민으로|범죄에 강력히 대처하다|교민 방안을 모색하다|성왕의 정치를 표방하다
2. 신분제도를 강화하다
법제화를 추진하다|신분의 이동을 금지하다|정치의 도리에 대해 고민하다
3. 유가와 법가 사이
유가적 군주의 이면|또 하나의 통치수단, 형벌|법전의 정비에 힘을 쏟다
9장 통치 기반을 확립하다
1. 재정 안정을 꾀하다
조세제도 개혁을 선언하다|개혁의 정당성으로 백성을 내세우다|17만 명 이상의 여론을 듣다|개혁을 철회하다
2. 수취체제를 정비하다
양전을 시행하다|농사를 권면하다|지리서와 지도를 제작하다
3. 근면한 통치자
신하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법궁 경복궁을 쇄신하다|“백성들은 태평하고 평안하네”
4. 야망과 교착[집권 중반기 2: 1433~1437]
10장 야인 정벌을 단행하다
1. 북방의 골칫거리
야인이 침입하다|정벌의 의지를 밝히다|껄끄러운 명나라의 황제
2. 정벌의 의지를 관철하다
건주위의 이만주|공론정치의 전제, 강력한 리더십|정벌을 단행하다
3. 거센 후폭풍
초라한 성과|무의 정치를 내세우기 시작하다|황제가 정벌을 책망하다
11장 영토 개척을 시작하다
1. 수확의 계절
어느 야인 추장의 죽음|“영토를 넓힐 시기가 무르익었다”|수사를 동원해 설득하다
2. 김종서를 함길도로 파견하다
인재를 육성하고 시험하다|총애와 질투|파격적인 발탁
3. 어렵고 지루한 북방 개척
사민과 축성의 시작|군사기지를 건설하다|신뢰와 위임
12장 교착 상태에 빠지다
1. 소란스러운 북방
지속적인 소요|야인과 갈등이 고조되다|다시 정벌을 모색하다
2. 재정 위기에 봉착하다
지독한 가뭄|긴축정책을 펴다|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3. 고뇌를 토로하다
골칫거리 며느리|“통치한 보람이 조금도 없다”|신하와 격려를 주고받다
5. 전환의 모색[집권 후반기 1: 1436~1442]
13장 통치제도를 전환하다
1.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하다
6조 직계제에서 의정부 서사제로|첫 번째 권력의 이양|정치적 책임을 분산하다
2. 정치적 동반자, 황희
치세를 함께하다|헌장의 수호자|유위의 정치와 무위의 정치
3. 실질적인 수상, 신개
“내 신개를 얻음이 늦었다”|2차 야인 정벌을 주도하게 하다|총애를 선사하다
14장 누적되는 피로
1. 권력의 이양을 시도하다
준비된 세자|세자의 섭정을 꺼내들다|논전에서 물러나다
2. 무인년의 정변을 재구성하다
이상한 기록|신개의 건의|민감한 정변의 기록|이숙번을 소환하다|정변의 완결
3. 사그라드는 의욕
경연을 중단하다|“나 이제 늙고 병들었다”|여러 번의 온천행
15장 조세제도를 개혁하다
1. 다시 개혁을 모색하다
선봉에 선 정인지|공법상정소를 설치하다|공법의 포기를 선언하다
2. 개혁을 강행하다
마침내 공법을 시험하다|세액을 고정하고 답험을 배제하다|더 많은 세금을 위한 개혁
3. 부국과 안민
취렴의 군주|개혁의 마지막 진통|개혁을 완수하다
6. 국왕 아닌 국왕[집권 후반기 2: 1443~1450]
16장 일선에서 물러나다
1. 권력을 이양하다
후계자 육성|편법을 동원하다|태종의 그림자
2. 이름뿐인 왕위
세자에게 국왕의 일을 맡기다|깊은 궁궐에 은거하다|대군들의 집을 전전하다
17장 영원한 왕국을 꿈꾸다
1. 새로운 문자를 만들다
25년 통치의 결과물|중화에서 이적으로|표준의 수용과 동국의 탄생|훈민과 편민
2. 건국과 정변의 정당화
실록을 수정하다|공덕과 천명으로 건국을 정당화하다|망국의 역사를 완성하다
3. 통치의 표준을 남기다
통치자를 위한 다이제스트|후계자들을 위한 감계|왕조의 영원을 노래하다
18장 먹구름이 드리우다
1. 고뇌와 신앙
두 아들의 죽음|왕비가 먼저 떠나다|불사를 벌이다
2. 수양이 부상하다
혼란한 국제정세|세자가 쓰러지다|수양이 사신을 맞이하다|죽음을 대비하다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도의 경우, 1418년(태종 18)에 와서야 갑작스럽게 세자였던 맏형 이제 대신 세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2개월 뒤에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태종실록》은 이도의 재위기인 1423년(세종 5)에 편찬을 시작하여, 1431년(세종 13)에 완성되었다. …… 그가 왕위에 오른 1418년과 그 이전의 기록 그리고 그 후의 기록까지도 ‘승자의 기록’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p.33
태종은 맏이와 셋째의 위치를 확실히 구분했다. 태종은 이도에게 서화, 화석花石, 금슬琴瑟 등과 같은 좋은 예술품을 두루 제공했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편안하게 즐기기나 할 뿐이다.” 이 때문에 이도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정통하게 되었고, 세자에게 금슬을 가르쳐 줄 정도의 실력도 갖춘다. 세자가 아니었기에 배울 수 있었던 기예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왕위에 오른 후 다양한 분야의 업적을 쌓는 데 도움을 준다
--- p.42
태종은 자신 이후의 시기를 “수문守文”, 즉 아버지와 자신이 이제까지 건설해 온 국가를 지켜 나갈 수성守成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권력정치를 통해 구축한 비정상의 정치를 학문과 이념의 정치로 정상화할 수 있는 후계자를 원했던 것이다
--- p.48
1418년 8월 8일 태종은 세자 이도에게 국왕의 상징인 국새를 넘겼다. 이도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 그는 손수 임금의 모자인 익선관을 아들 이도에게 씌워 주고, 국왕을 상징하는 의장을 준비하여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한다
--- p.59
이도는 “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 말을 통해 신민들에게 좋은 정치를 펼칠 것을 약속했다. “시인발정”은 유학 경전인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주나라의 문왕이 펼친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사례로 설명하면서 “발정시인發政施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은 국가 창건과 제도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제도화 작업만 이루어졌다. 앞으로는 그것에 내용을 채우는 것, 즉 이념적인 정체성을 불어넣는 작업이 필요했다
--- p.62
임금이 지신사 하연河演에게 말한다.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고자 한다”라는 말을 이른바 세종식 통치 방식인 ‘공론정치公論政治’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갓 국왕이 된 이도다. 당연히 신하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다
--- p.65
이도는 견습국왕이었다. 그는 형식상의 국왕이었고, 실권자는 상왕 태종이었다. 곁에 있던 신하들도 태종과 함께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이도는 신하들의 말에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이오”라며 유보하거나, “상왕께 아뢸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인내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 가야 했다
--- p.67
국가의 통치는 전례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국왕이라고 자의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 특히 조선은 유교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태종은 학자로서 자신의 학술적 지식에 의존했고, 별도의 자문기구를 두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도가 재위 초기에 학술 자문기구인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정상화의 의미를 지닌다
--- p.78
태종이 소천한 해에 이도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를 처결할 때에, 그 말이 임금까지 미쳐서 올바른 도리에 박절하고 해로운 자는 참형으로 처단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장 100대, 유배 3년으로 처결하라”는 명령을 내린 듯하다. 성군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시이다. 그만큼 재위 초기 왕권의 확립이 중요했다는 말이 된다
--- p.96
가뭄은 끝없이 이어졌다. 후일 “즉위한 이래, 22년 동안 재해가 없는 해가 없었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32년의 재위 기간 중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은 해가 6년에 불과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구휼 작업이 진행되었다. …… 구휼 작업은 당장 먹을 양식을 주어 구황하는 진제賑濟와 농사 지을 종자를 환자還子로 빌려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 의창義倉이다
--- p.105
부족한 재정을 타개하는 별도의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 이도는 정부 규모를 축소하여 정부 운영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선택했다. 우선 각 관사의 인원 중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인원을 내보냈다. 이 해 12월에는 수도 한양과 지방의 관원 중에서 쓸데없는 관원을 그만두게 했다
--- p.106
이도는 태종의 이러한 외교전략을 계승했다. 지성사대의 외교전략은 강대국인 명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면, 그 영향권 안에서 최대한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소국으로서 가능한 것에 힘을 집중하는 전략이다. ……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명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국제질서 내부에서 공고한 지위를 추구했다. 나아가 성실한 제후국으로서 명의 비호 아래에서 국내정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다른 제후국들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 p.110
이도는 …… 매년 강무를 시행했다. 군사적인 대비만으로는 볼 수 없다. 부왕과 마찬가지로 이도 역시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무력을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424년 이후 1446년(세종 22)까지 매년 강무를 떠난다. 최소 4일에서 최대 14일이었고, 대부분 10일 내외로 강원도 철원과 평강 등지에서 시행했다
--- p.118
1446년(세종 28) 즈음 이도는 자신의 실패들을 거론한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새로 입법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현명하지 못한 이유로, 문제가 생길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전폐錢幣, 호패, 수차, 아악 등의 사례가 그런데, 모두 셀 수 없을 정도다. 입법할 때 결과를 미리 헤아려서 처리했더라면, 이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 p.124
내가 그 말을 믿고서 저화를 폐지하고 동전을 발행했다. 그런데 지금 몇 해도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즐겨 사용하지 않아 저화처럼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동전 보급정책의 실패를 대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여러 신하가 잘못된 주장을 해서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추진한 것은 국왕인 이도 자신이었다
--- p.128
전 왕조의 말년에 뇌물을 공공연하게 주고받더니, 옛날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양과 지방의 관리들이 관가의 물건을 공공연하게 뇌물로 주고도 태연하게 여기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는 것을 받지 않는 자가 비웃음을 당할 정도다. 국가 재산을 훔치는 관리들이 계속해서 나오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 p.138
이도는 부패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 이도가 통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부패의 씨앗을 발아시킨 것은 따지고 보면 태종이었다. 그렇다면 부패 문제는 태종의 정치, 나아가 그가 일으킨 두 차례의 정변, 아예 조선 건국의 정당성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었다. 태종이 이룬 긍정적 업적조차 부정되고, 이도 자신의 통치 기반조차 부정될 수 있었다
--- p.143
이도는 현행법에 따른 죄와 형벌의 적합성을 넘어서 사고하고 있다. 요컨대 “죽이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이도의 강한 의지는 다음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조말생의 탐욕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죄는 목을 베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에 공로가 있으니 죽일 수는 없다. 더구나 대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종의 법이 이미 서 있지 않은가.” 이도는 정치적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태종의 권력정치를 통해 발생했던 정치적 죽음에 대한 부정인 듯하다. 이도는 ‘인의 정치’, ‘살림의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 p.144
이도는 이제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정치술이나 신하들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우위에 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도는 무엇을 가지고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하려 했을까? 바로 학문적 성취였다
--- p.145
이도가 열었던 경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의 학술적 성취는 풍요로운 통치의 성과로 연결된다. 이도는 재위 기간에 총 1,898회의 경연을 개최했다. 그는 1439년(세종 21) 윤2월 16일까지 경연을 열었다
--- p.149
정책적 현안과 관련된 책들도 경연에서 다뤘다. 그는 법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육전》을 두 번이나 경연에서 읽었다. 음악서인 《율려신서》를 읽고는, 음률을 제정하여 아악보를 완성했다. 중국어 습득을 위해 《직해소학直解小學》을 경연에서 강의했고, 수도의 풍수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풍수학 서적까지 경연을 통해 다뤘다. 후대의 관성적인 경연과는 차이가 엿보인다
--- p.152
이도는 유학의 도덕과 윤리를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정책을 시도했다. 충과 효의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에게 내면화시켜 정치공동체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시기에 유교적 의례들이 보급된다.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안방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는 의례가 이 시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 p.184
이도는 노비에 대한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비에게도 출산 전이나 후에 휴가를 주고, 양로연을 열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노비라 할지라도 참여하게 했다. 나아가 이도는 노비의 존재에 의문을 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 p.188
이도는 결국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법안을 법전에 포함했다. 1433년(세종 15) 《신찬경제속육전》이라는 새로운 법전을 발간했다. 이 안에 부민고소조部民告訴條가 있었다. “자기의 억울한 일을 호소한 것은 고소장을 수리하여 다시 판결한다”라는 조항이다
--- p.193
이도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다. 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법전을 편찬하고 보급을 시도했다. 다만 이두와 한문으로 된 법전은 관리들이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알려 줘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법전의 보급 작업은 후일 백성들이 직접 이것을 읽을 수 있는 수단, 즉 문자의 발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 p.197
백성들이 싫어한다면 이 법을 시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답험할 때에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다.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봐 주고 가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매우 우려하고 있다. 각 도에서 보고가 모두 도착하거든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모든 관리에게 숙의하여 보도하도록 하라
--- p.204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고을의 연혁, 성씨, 성곽, 사찰 등 다른 지리지에 기록된 정보뿐만 아니라, 지역별 경작지, 군사의 수, 공물, 토산물 등 다른 지리지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다양한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도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통치를 구현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p.212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이 시기 이도의 일과를 잘 보여 주는 기록이다. 신하들이 국왕을 알현해 정무에 관하여 보고하는 조회인 상참常參과 조참朝參, 정무에 대한 토론을 하는 시사視事, 각 관아의 관리들이 돌아가며 국왕과 접견하는 윤대輪對, 고전에 토론하며 성학을 연마하는 경연을 정열적으로 이어 간다. 관료들과 직접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들이 활성화되면서, 정책 결정 과정의 객관성, 합리성, 공정성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 p.214
야인 정벌의 경우, 이도는 약 3개월 동안 20여 차례의 회의를 개최하며 정벌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했다. 요컨대 공론정치는 강력한 리더십을 전제로 한다. 단순하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만으로는 정책이 결정되거나 진행되지 않는다. 논의는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리더십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 p.230
이도는 인복이 괜찮았다. 그러나 이도 스스로 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 많은 시간을 들여 인재들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쓸 만한 인물인지 시험했고, 최종적으로는 적재적소에 배치해 활용했다. 그중에서도 김종서와 정인지는 이도가 육성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 p.246
김종서는 7년 동안 영토 개척에 헌신했다. 1435년(세종 17) 3월 27일 이도는 김종서를 아예 군사를 관장하는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했다. 그는 1440년(세종 22)까지 도절제사를 맡았다. …… 오랫동안 북방의 전권을 맡기고, 작은 허물에 대해서는 논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도의 신념이었다
--- p.253
이도는 6조 직계제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중신들을 견제할 필요는 없었다. ……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제도이다. 재위 18년째인 1436년 즈음에 이르러 이도는 그것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도가 의정부 서사제로 통치제도를 변경한다고 교서를 선포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 p.280
“6조는 안건을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의논하여 아뢴 뒤에 임금의 분부를 받아서 도로 6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게 하라.” 이도는 의정부의 재상들에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배정했다. 물론 임금의 대권만은 자신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 p.282
이도는 32년이라는 오랜 기간 국왕을 역임했다. 국왕으로서 경험과 연륜이 쌓일수록, 그는 많은 혁신을 추구했다. …… 반면 황희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한 사직 상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역할을 이도와 구분했다. “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그대로 하는 것은 임금의 중요한 권한[대법大法]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은 충성스런 신하의 지극한 마음입니다.”
--- p.288
의정부에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심복들을 임명해 놓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개申?(1374~1446)였다. 그는 이도에게 배향된 7명의 배향공신 중 하나다
--- p.290
《서경》에서 한 임금은 대신을 자신의 복심腹心으로 비유했다. 이도에게는 신개가 그러한 복심이었다. 의논할 일이 있으면 번번이 개인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후궁의 승급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까지도 신개와 상의를 거쳐 결정할 정도였다
--- p.294
1442년이 저물 무렵,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공법의 법은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내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둔다고 여길 것이다.” 공법을 전국에 시험했고, 신개의 예상대로 예전보다 두 배가 넘는 세금이 걷혔다. 이제 이도는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는 ‘취렴聚斂’의 군주가 되었다. 신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은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백성의 재물을 무자비하게 긁어모으는 신하[취렴지신聚斂之臣]를 두느니,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겠다.” 부국을 위해 안민의 가치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 p.329
“내가 늙었기 때문에, 국가의 여러 업무를 세자에게 전부 맡겼다.” 그는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이양해 갔다. 1449년(세종 31) 즈음에는 이도가 판결하는 일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사대와 제향 때 별도로 의논할 일, 크고 작은 군사를 움직이는 일, 당상관을 제수하는 일, 사형수에 대한 일이 전부였다. 나머지 정무는 모두 세자가 맡아서 처리했다. 사실상의 임금은 세자였고, 이도는 이름만 국왕이었다
--- p.344
1430년에 편찬한 농서 《농사직설》, 1432년에 편찬한 교육서 《삼강행실도》, 1433년에 편찬한 법전 《신찬경제속육전》 등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책의 대상은 한자를 읽을 수 있는 관료들이다. 임금이 농사를 권면하는 교서를 내려도 그 대상은 백성이 아니라 관료다. 관료들이 그것을 읽고 백성들에게 임금의 지시를 알려 줘야 한다. 문자가 통치의 효율을 저해한다. 훈민정음은 이도가 25년간의 통치를 결산한 결과물이었다
--- p.350
실록의 수정 작업은 태종이 일으켰던 무인정변의 정당화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도는 수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태조의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작업도 수정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이 해 3월 1일 임금은 태조가 왜구를 소탕한 사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지시한다
--- p.359
문자의 창제, 역사서의 편찬 작업과 함께 이도가 수행한 마지막 과업 중 하나는 후계자들을 위해 통치 지침서를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책이 《치평요람治平要覽》이다
--- p.365
세종은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던 임금이었다. 화폐 개혁, 영토 개척, 공법 개혁, 축성, 사민 등은 그것을 위한 대표적인 정책들이다. 부국강병은 안민과는 배치된다. 물론 세종이 이뤄 낸 부국강병은 후일 안민의 초석이 되었다. 조선은 이후 450년 이상 유지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보장했다
--- p.33
태종은 맏이와 셋째의 위치를 확실히 구분했다. 태종은 이도에게 서화, 화석花石, 금슬琴瑟 등과 같은 좋은 예술품을 두루 제공했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편안하게 즐기기나 할 뿐이다.” 이 때문에 이도는 다양한 예술 분야에 정통하게 되었고, 세자에게 금슬을 가르쳐 줄 정도의 실력도 갖춘다. 세자가 아니었기에 배울 수 있었던 기예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왕위에 오른 후 다양한 분야의 업적을 쌓는 데 도움을 준다
--- p.42
태종은 자신 이후의 시기를 “수문守文”, 즉 아버지와 자신이 이제까지 건설해 온 국가를 지켜 나갈 수성守成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권력정치를 통해 구축한 비정상의 정치를 학문과 이념의 정치로 정상화할 수 있는 후계자를 원했던 것이다
--- p.48
1418년 8월 8일 태종은 세자 이도에게 국왕의 상징인 국새를 넘겼다. 이도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 그는 손수 임금의 모자인 익선관을 아들 이도에게 씌워 주고, 국왕을 상징하는 의장을 준비하여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한다
--- p.59
이도는 “시인발정施仁發政”이라는 말을 통해 신민들에게 좋은 정치를 펼칠 것을 약속했다. “시인발정”은 유학 경전인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는 주나라의 문왕이 펼친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사례로 설명하면서 “발정시인發政施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은 국가 창건과 제도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제도화 작업만 이루어졌다. 앞으로는 그것에 내용을 채우는 것, 즉 이념적인 정체성을 불어넣는 작업이 필요했다
--- p.62
임금이 지신사 하연河演에게 말한다.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 우의정과 이조, 병조의 당상관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 ……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고자 한다”라는 말을 이른바 세종식 통치 방식인 ‘공론정치公論政治’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갓 국왕이 된 이도다. 당연히 신하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다
--- p.65
이도는 견습국왕이었다. 그는 형식상의 국왕이었고, 실권자는 상왕 태종이었다. 곁에 있던 신하들도 태종과 함께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이도는 신하들의 말에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이오”라며 유보하거나, “상왕께 아뢸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인내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워 가야 했다
--- p.67
국가의 통치는 전례나 원칙을 따라야 한다. 국왕이라고 자의적으로 통치할 수 없다. 특히 조선은 유교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태종은 학자로서 자신의 학술적 지식에 의존했고, 별도의 자문기구를 두지 않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도가 재위 초기에 학술 자문기구인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정상화의 의미를 지닌다
--- p.78
태종이 소천한 해에 이도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를 처결할 때에, 그 말이 임금까지 미쳐서 올바른 도리에 박절하고 해로운 자는 참형으로 처단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장 100대, 유배 3년으로 처결하라”는 명령을 내린 듯하다. 성군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시이다. 그만큼 재위 초기 왕권의 확립이 중요했다는 말이 된다
--- p.96
가뭄은 끝없이 이어졌다. 후일 “즉위한 이래, 22년 동안 재해가 없는 해가 없었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32년의 재위 기간 중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은 해가 6년에 불과했다. 거듭된 흉년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구휼 작업이 진행되었다. …… 구휼 작업은 당장 먹을 양식을 주어 구황하는 진제賑濟와 농사 지을 종자를 환자還子로 빌려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 의창義倉이다
--- p.105
부족한 재정을 타개하는 별도의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 이도는 정부 규모를 축소하여 정부 운영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방안을 선택했다. 우선 각 관사의 인원 중에서 꼭 필요하지 않은 인원을 내보냈다. 이 해 12월에는 수도 한양과 지방의 관원 중에서 쓸데없는 관원을 그만두게 했다
--- p.106
이도는 태종의 이러한 외교전략을 계승했다. 지성사대의 외교전략은 강대국인 명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면, 그 영향권 안에서 최대한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소국으로서 가능한 것에 힘을 집중하는 전략이다. ……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명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국제질서 내부에서 공고한 지위를 추구했다. 나아가 성실한 제후국으로서 명의 비호 아래에서 국내정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다른 제후국들과의 관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 p.110
이도는 …… 매년 강무를 시행했다. 군사적인 대비만으로는 볼 수 없다. 부왕과 마찬가지로 이도 역시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무력을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424년 이후 1446년(세종 22)까지 매년 강무를 떠난다. 최소 4일에서 최대 14일이었고, 대부분 10일 내외로 강원도 철원과 평강 등지에서 시행했다
--- p.118
1446년(세종 28) 즈음 이도는 자신의 실패들을 거론한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새로 입법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현명하지 못한 이유로, 문제가 생길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전폐錢幣, 호패, 수차, 아악 등의 사례가 그런데, 모두 셀 수 없을 정도다. 입법할 때 결과를 미리 헤아려서 처리했더라면, 이런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 p.124
내가 그 말을 믿고서 저화를 폐지하고 동전을 발행했다. 그런데 지금 몇 해도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즐겨 사용하지 않아 저화처럼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동전 보급정책의 실패를 대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여러 신하가 잘못된 주장을 해서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고 정책을 추진한 것은 국왕인 이도 자신이었다
--- p.128
전 왕조의 말년에 뇌물을 공공연하게 주고받더니, 옛날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한양과 지방의 관리들이 관가의 물건을 공공연하게 뇌물로 주고도 태연하게 여기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는 것을 받지 않는 자가 비웃음을 당할 정도다. 국가 재산을 훔치는 관리들이 계속해서 나오니, 내가 매우 민망하게 여긴다
--- p.138
이도는 부패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 이도가 통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부패의 씨앗을 발아시킨 것은 따지고 보면 태종이었다. 그렇다면 부패 문제는 태종의 정치, 나아가 그가 일으킨 두 차례의 정변, 아예 조선 건국의 정당성 문제로도 연결될 수 있었다. 태종이 이룬 긍정적 업적조차 부정되고, 이도 자신의 통치 기반조차 부정될 수 있었다
--- p.143
이도는 현행법에 따른 죄와 형벌의 적합성을 넘어서 사고하고 있다. 요컨대 “죽이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이도의 강한 의지는 다음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조말생의 탐욕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죄는 목을 베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국가에 공로가 있으니 죽일 수는 없다. 더구나 대신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종의 법이 이미 서 있지 않은가.” 이도는 정치적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태종의 권력정치를 통해 발생했던 정치적 죽음에 대한 부정인 듯하다. 이도는 ‘인의 정치’, ‘살림의 정치’를 지향하고 있다
--- p.144
이도는 이제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정치술이나 신하들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우위에 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도는 무엇을 가지고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하려 했을까? 바로 학문적 성취였다
--- p.145
이도가 열었던 경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의 학술적 성취는 풍요로운 통치의 성과로 연결된다. 이도는 재위 기간에 총 1,898회의 경연을 개최했다. 그는 1439년(세종 21) 윤2월 16일까지 경연을 열었다
--- p.149
정책적 현안과 관련된 책들도 경연에서 다뤘다. 그는 법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육전》을 두 번이나 경연에서 읽었다. 음악서인 《율려신서》를 읽고는, 음률을 제정하여 아악보를 완성했다. 중국어 습득을 위해 《직해소학直解小學》을 경연에서 강의했고, 수도의 풍수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풍수학 서적까지 경연을 통해 다뤘다. 후대의 관성적인 경연과는 차이가 엿보인다
--- p.152
이도는 유학의 도덕과 윤리를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정책을 시도했다. 충과 효의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에게 내면화시켜 정치공동체를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시기에 유교적 의례들이 보급된다.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안방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는 의례가 이 시기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 p.184
이도는 노비에 대한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노비에게도 출산 전이나 후에 휴가를 주고, 양로연을 열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노비라 할지라도 참여하게 했다. 나아가 이도는 노비의 존재에 의문을 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 p.188
이도는 결국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법안을 법전에 포함했다. 1433년(세종 15) 《신찬경제속육전》이라는 새로운 법전을 발간했다. 이 안에 부민고소조部民告訴條가 있었다. “자기의 억울한 일을 호소한 것은 고소장을 수리하여 다시 판결한다”라는 조항이다
--- p.193
이도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다. 법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법전을 편찬하고 보급을 시도했다. 다만 이두와 한문으로 된 법전은 관리들이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알려 줘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법전의 보급 작업은 후일 백성들이 직접 이것을 읽을 수 있는 수단, 즉 문자의 발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 p.197
백성들이 싫어한다면 이 법을 시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답험할 때에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다.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봐 주고 가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가 매우 우려하고 있다. 각 도에서 보고가 모두 도착하거든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들을 모든 관리에게 숙의하여 보도하도록 하라
--- p.204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고을의 연혁, 성씨, 성곽, 사찰 등 다른 지리지에 기록된 정보뿐만 아니라, 지역별 경작지, 군사의 수, 공물, 토산물 등 다른 지리지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다양한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도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통치를 구현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p.212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이 시기 이도의 일과를 잘 보여 주는 기록이다. 신하들이 국왕을 알현해 정무에 관하여 보고하는 조회인 상참常參과 조참朝參, 정무에 대한 토론을 하는 시사視事, 각 관아의 관리들이 돌아가며 국왕과 접견하는 윤대輪對, 고전에 토론하며 성학을 연마하는 경연을 정열적으로 이어 간다. 관료들과 직접 접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들이 활성화되면서, 정책 결정 과정의 객관성, 합리성, 공정성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 p.214
야인 정벌의 경우, 이도는 약 3개월 동안 20여 차례의 회의를 개최하며 정벌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설득했다. 요컨대 공론정치는 강력한 리더십을 전제로 한다. 단순하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만으로는 정책이 결정되거나 진행되지 않는다. 논의는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리더십이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 p.230
이도는 인복이 괜찮았다. 그러나 이도 스스로 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 많은 시간을 들여 인재들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쓸 만한 인물인지 시험했고, 최종적으로는 적재적소에 배치해 활용했다. 그중에서도 김종서와 정인지는 이도가 육성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 p.246
김종서는 7년 동안 영토 개척에 헌신했다. 1435년(세종 17) 3월 27일 이도는 김종서를 아예 군사를 관장하는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했다. 그는 1440년(세종 22)까지 도절제사를 맡았다. …… 오랫동안 북방의 전권을 맡기고, 작은 허물에 대해서는 논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도의 신념이었다
--- p.253
이도는 6조 직계제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중신들을 견제할 필요는 없었다. …… 6조 직계제는 국왕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제도이다. 재위 18년째인 1436년 즈음에 이르러 이도는 그것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도가 의정부 서사제로 통치제도를 변경한다고 교서를 선포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 p.280
“6조는 안건을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의논하여 아뢴 뒤에 임금의 분부를 받아서 도로 6조로 돌려보내서 시행하게 하라.” 이도는 의정부의 재상들에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배정했다. 물론 임금의 대권만은 자신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 p.282
이도는 32년이라는 오랜 기간 국왕을 역임했다. 국왕으로서 경험과 연륜이 쌓일수록, 그는 많은 혁신을 추구했다. …… 반면 황희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한 사직 상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역할을 이도와 구분했다. “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그대로 하는 것은 임금의 중요한 권한[대법大法]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을 그치게 하는 것은 충성스런 신하의 지극한 마음입니다.”
--- p.288
의정부에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심복들을 임명해 놓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개申?(1374~1446)였다. 그는 이도에게 배향된 7명의 배향공신 중 하나다
--- p.290
《서경》에서 한 임금은 대신을 자신의 복심腹心으로 비유했다. 이도에게는 신개가 그러한 복심이었다. 의논할 일이 있으면 번번이 개인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후궁의 승급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까지도 신개와 상의를 거쳐 결정할 정도였다
--- p.294
1442년이 저물 무렵,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공법의 법은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내가 가혹하게 세금을 거둔다고 여길 것이다.” 공법을 전국에 시험했고, 신개의 예상대로 예전보다 두 배가 넘는 세금이 걷혔다. 이제 이도는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거두는 ‘취렴聚斂’의 군주가 되었다. 신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은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백성의 재물을 무자비하게 긁어모으는 신하[취렴지신聚斂之臣]를 두느니,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두겠다.” 부국을 위해 안민의 가치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 p.329
“내가 늙었기 때문에, 국가의 여러 업무를 세자에게 전부 맡겼다.” 그는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이양해 갔다. 1449년(세종 31) 즈음에는 이도가 판결하는 일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게 되었다. 사대와 제향 때 별도로 의논할 일, 크고 작은 군사를 움직이는 일, 당상관을 제수하는 일, 사형수에 대한 일이 전부였다. 나머지 정무는 모두 세자가 맡아서 처리했다. 사실상의 임금은 세자였고, 이도는 이름만 국왕이었다
--- p.344
1430년에 편찬한 농서 《농사직설》, 1432년에 편찬한 교육서 《삼강행실도》, 1433년에 편찬한 법전 《신찬경제속육전》 등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다. 책의 대상은 한자를 읽을 수 있는 관료들이다. 임금이 농사를 권면하는 교서를 내려도 그 대상은 백성이 아니라 관료다. 관료들이 그것을 읽고 백성들에게 임금의 지시를 알려 줘야 한다. 문자가 통치의 효율을 저해한다. 훈민정음은 이도가 25년간의 통치를 결산한 결과물이었다
--- p.350
실록의 수정 작업은 태종이 일으켰던 무인정변의 정당화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도는 수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태조의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작업도 수정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이 해 3월 1일 임금은 태조가 왜구를 소탕한 사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경상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지시한다
--- p.359
문자의 창제, 역사서의 편찬 작업과 함께 이도가 수행한 마지막 과업 중 하나는 후계자들을 위해 통치 지침서를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책이 《치평요람治平要覽》이다
--- p.365
세종은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던 임금이었다. 화폐 개혁, 영토 개척, 공법 개혁, 축성, 사민 등은 그것을 위한 대표적인 정책들이다. 부국강병은 안민과는 배치된다. 물론 세종이 이뤄 낸 부국강병은 후일 안민의 초석이 되었다. 조선은 이후 450년 이상 유지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을 보장했다
--- p.389
출판사 리뷰
세종이 아닌 인간 이도
이 평전은 ‘이도李?’라는 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각 문장의 서술에서부터 주어로 세종이 아니라 이도라는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세종世宗’이라는 묘호는 이도가 죽은 후에 임금으로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평전은 사후의 칭송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로 살아간 한 인간의 행적을 고찰한다. 독자들은 이 평전에서 결코 완성형이 아닌, 성장하는 국왕으로서 이도의 정치적 여정을 함께하면서 세종 이도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 대한 비판적 접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세종 이도의 정치적 삶을 기록하고 있는 《세종실록》은 그의 사후에 만들어졌다. 이도 자신도 재위 중에 《태조실록》, 《태종실록》을 신하들을 시켜 몇 차례 수정하며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의 정변을 정당화했다. ‘신화와 성역’을 넘어서기 위한 비판적 사료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젊은 정치학자인 저자는 이 지점에 대담하게 도전했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이 평전은 권력과 이념의 대립에 주목하고 있다. 정치적 현실과 도덕적 이상의 대립이다. 저자는 도덕과 윤리로 점철된 역사의 기록들 속에서 정치적 수사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해서 화폐 및 공법 개혁, 영토 개척, 사민 등 정책을 둘러싼 시행착오, ‘공론정치’를 위한 의정부 서사제 도입 배경 등을 통해 세종 정치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장형 양녕의 처우, 골칫거리 며느리 처리 등 군주 이전에 왕실의 가장인 인간 세종의 민낯을 만날 수 있다.
‘견습국왕’에서 ‘국왕 아닌 국왕’까지
평전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크게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국왕이 된 셋째 왕자’는 왕자 이도가 태종의 선택을 받아 ‘견습국왕’ 생활을 하던 시절을 다룬다. 겨우 2개월의 세자생활을 거친 젊은 국왕이 살얼음판 같은 처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2부 홀로서기’는 태종의 서거 이후 본격적인 친정을 시작한 이도의 집권 전반기를 다뤘다.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관리하고, 흉년으로 인한 국내정치와 사대교린의 국제정치, 그리고 재정 문제까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해결해가는 젊은 국왕의 모습을 제시했다. ‘3부 태평의 시대’와 ‘4부 야망과 교착’은 근면한 통치자로서의 그의 통치 스타일이 제시된다. 3부가 국내정치의 안정화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4부는 영토 개척의 지난한 과정을 소개했다. ‘5부 전환의 시도’와 ‘6부 국왕 아닌 국왕’은 자신에게 몰린 업무와 권한을 대신들과 세자에게 분산시킨 이후, 국왕의 행적을 분석했다. 그는 더 많은 재정의 확보를 위한 세금 개혁 나아가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역사서 편찬, 통치 지침서 편찬, 궁중의례에 사용하는 신악 등 앞으로 수백 년간 지속할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것으로 왕업을 마친다.
세종의 통치 전반을 정리, 평가한 첫 번째 시도
세종에 대한 연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의 통치 32년을 제대로 정리하고 평가해낸 저작은 없었다. 그동안은 주제별 혹은 특정 분야의 분석에 그쳐왔다. 문文, 사史, 철哲의 인문학적 연구성과를 섭렵한 저자는 젊은 정치학자의 패기로 세종 이도의 통치 전반을 정리, 분석해냈다. 무엇보다 전문 학술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위해 간결하고 쉬운 서술을 추구했다는 점이 이 평전의 미덕이다. 꼭 일 년 전인 지난 해 12월 선보인 《태종처럼 승부하라》를 시작으로, 조선왕조 초기 군주 4인의 통치술과 인간적 면모를 살핀 기획 ‘군주 평전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걸맞은 수작이다. 비록 재위 순서에는 어긋나지만.
이 평전은 ‘이도李?’라는 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각 문장의 서술에서부터 주어로 세종이 아니라 이도라는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세종世宗’이라는 묘호는 이도가 죽은 후에 임금으로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평전은 사후의 칭송이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국왕이라는 정치행위자로 살아간 한 인간의 행적을 고찰한다. 독자들은 이 평전에서 결코 완성형이 아닌, 성장하는 국왕으로서 이도의 정치적 여정을 함께하면서 세종 이도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 대한 비판적 접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세종 이도의 정치적 삶을 기록하고 있는 《세종실록》은 그의 사후에 만들어졌다. 이도 자신도 재위 중에 《태조실록》, 《태종실록》을 신하들을 시켜 몇 차례 수정하며 할아버지 태조와 아버지 태종의 정변을 정당화했다. ‘신화와 성역’을 넘어서기 위한 비판적 사료 읽기가 필요한 이유다. 젊은 정치학자인 저자는 이 지점에 대담하게 도전했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이 평전은 권력과 이념의 대립에 주목하고 있다. 정치적 현실과 도덕적 이상의 대립이다. 저자는 도덕과 윤리로 점철된 역사의 기록들 속에서 정치적 수사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해서 화폐 및 공법 개혁, 영토 개척, 사민 등 정책을 둘러싼 시행착오, ‘공론정치’를 위한 의정부 서사제 도입 배경 등을 통해 세종 정치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장형 양녕의 처우, 골칫거리 며느리 처리 등 군주 이전에 왕실의 가장인 인간 세종의 민낯을 만날 수 있다.
‘견습국왕’에서 ‘국왕 아닌 국왕’까지
평전은 시간적 흐름에 따라 크게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국왕이 된 셋째 왕자’는 왕자 이도가 태종의 선택을 받아 ‘견습국왕’ 생활을 하던 시절을 다룬다. 겨우 2개월의 세자생활을 거친 젊은 국왕이 살얼음판 같은 처지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2부 홀로서기’는 태종의 서거 이후 본격적인 친정을 시작한 이도의 집권 전반기를 다뤘다.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관리하고, 흉년으로 인한 국내정치와 사대교린의 국제정치, 그리고 재정 문제까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해결해가는 젊은 국왕의 모습을 제시했다. ‘3부 태평의 시대’와 ‘4부 야망과 교착’은 근면한 통치자로서의 그의 통치 스타일이 제시된다. 3부가 국내정치의 안정화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4부는 영토 개척의 지난한 과정을 소개했다. ‘5부 전환의 시도’와 ‘6부 국왕 아닌 국왕’은 자신에게 몰린 업무와 권한을 대신들과 세자에게 분산시킨 이후, 국왕의 행적을 분석했다. 그는 더 많은 재정의 확보를 위한 세금 개혁 나아가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역사서 편찬, 통치 지침서 편찬, 궁중의례에 사용하는 신악 등 앞으로 수백 년간 지속할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것으로 왕업을 마친다.
세종의 통치 전반을 정리, 평가한 첫 번째 시도
세종에 대한 연구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의 통치 32년을 제대로 정리하고 평가해낸 저작은 없었다. 그동안은 주제별 혹은 특정 분야의 분석에 그쳐왔다. 문文, 사史, 철哲의 인문학적 연구성과를 섭렵한 저자는 젊은 정치학자의 패기로 세종 이도의 통치 전반을 정리, 분석해냈다. 무엇보다 전문 학술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을 위해 간결하고 쉬운 서술을 추구했다는 점이 이 평전의 미덕이다. 꼭 일 년 전인 지난 해 12월 선보인 《태종처럼 승부하라》를 시작으로, 조선왕조 초기 군주 4인의 통치술과 인간적 면모를 살핀 기획 ‘군주 평전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걸맞은 수작이다. 비록 재위 순서에는 어긋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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