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조선시대사 이해 (독서)/1.조선왕

세조, 폭군과 명군 사이 (2022 김순남)

동방박사님 2023. 1. 5.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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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찬탈’ 원죄를 딛고 부국강병을 이루다
문제적 군주, 세조 이유 톺아보기

우리 역사에서 조선 7대 임금 세조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군주도 드물다. 조카를 왕위를 빼앗은 왕좌에 오르기까지와 국왕으로서의 능력?치적이 극명하게 대비되어서다. 그러기에 즉위 과정, 공신과 훈척 중심의 권력행사, 부국강병책과 그 성과 등 어쩌면 색깔이 다른 주제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다. 조선 전기 정치사를 전공한 지은이가 쓴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세조실록』을 바탕으로 포폄을 떠나 세조 이유의 ‘정치적 삶’을 온전히 그려냈다. 사적 물리력을 동원해 공적 시스템을 무력화한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했던 세조를 ‘초월적 절대군주’를 꿈꾼 정치가로 파악한 지은이의 붓끝을 따라가다 보면 세조의 ‘정치’를 새롭게 보게 된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세조 연보

1. 권력을 찬탈하다

1장 세종의 아들
1. 이유의 탄생과 성장 ● 아버지 충녕대군|부왕 세종|세종의 여러 아들 중 하나|태조의 현신
2. 대군, 그 이상 ● 왕자 이유의 국사 참여|수양대군의 대두
2장 문종의 동생, 단종의 숙부
1. 형과 아우의 공생 ● 협력 혹은 견제|문종의 요절
2. 수양의 고립 ● 단종 즉위|의정부 사람들|인사 전횡: 황표정사|안평과의 갈등|고명 사은사행
3장 계유정난, 핏빛 서사
1. 수양의 사람들 ● 한명회·권람|신숙주|홍윤성|양정·홍달손
2. 수양, 단기로 나서다 ● 정변의 징조|호랑이 등에 오른 편 가르기|계유년 그날
4장 수양 천하
1. 정난의 결과 ● 영의정부사 겸판이병조사 수양|정난공신 책봉
2. 이징옥의 난 발발과 진압 ● 김종서의 사람 이징옥의 반발|중외병마도통사 수양의 군사권 장악
3. 세조의 즉위 ● 단종의 양위: 세조의 즉위|왕실의 확립|좌익공신 책봉

2. 권력으로 강제하다

5장 권력 구조의 개편
1. 6조 직계제의 부활
2. 하위지와의 갈등 ● 하위지의 반대|이계전의 수모
6장 상왕 복위 모의 사건의 진압
1. 발단 ● 김질의 고변|성삼문과의 대질|하위지·이개·박팽년의 연루
2. 전개 ● 모반 대역|집현전 혁파|상왕 단종의 연루
3. 결과 ● 효수|사육신
4. 영월의 노산군 ● 금성대군의 역모|상왕 단종, 노산군으로 강등|노산군의 죽음
7장 난언의 횡행과 처벌
1. 정권을 부정하는 난언들
2. 난언의 실상 ● 왕실의 저주|불궤의 도모
3. 난언의 정치적 파장 ● 친세조 종친의 연루|공신의 무함
8장 훈척 중심의 국정 운영
1. 훈척의 형성 ● 수빈 한씨의 아버지 한확|장순왕후의 아버지 한명회|의숙공주의 시아버지 정인지
2. 체찰사제의 운용 ● 인사 전권 행사|훈척 중심의 국정 처결|윤자운의 사례
9장 전 국토의 충실화: 사민
1. 북방 영토의 개척 ● 4군과 6진과 행성|세종 대의 사민
2. 소복책의 강구 ● 4군 폐지|하 삼도민의 북방 이주
10장 자전자수의 이상: 진관 체제의 확립
1. 진관 체제의 성립 ● 익군과 군익도|군익도 체제의 전국 확대|진관 체제의 확립
2. 군정의 확보 ● 군역|호패법|군정의 추쇄|보법의 실시
11장 여진 정벌: 위의의 강조
1. 경진북정 ● 야인정책|경종의 필요성|모련위 정벌
2. 정해서정 ● 건주위|건주위 추장 이만주 참살

3. 권위를 가탁하다

12장 천제의 친행
1. 세조 이전의 원단제 ● 태조~태종 대 원단의 기우·기곡제|세종 대 원단제의 논란|
2. 환구제의 친행 ● 준비|친제
13장 연석 정치
1. 경연과 강무의 운용 ● 군왕 존엄의 강조|공신의 무례와 세조의 경고
2. 술자리의 정치성 ● 국정 운영의 장|불경·무례의 난무
14장 지방 순행
1. 순행의 목적·준비 ● 민정의 파악과 군정의 감찰|준비
2. 황해도·평안도 순행의 실제 ● 사전 조치|여정
3. 순행의 실효 ● 지방 통치의 감찰|친왕 세력의 확보|위의의 과시
15장 불교적 신이와 상서
1. 불사의 주역 ● 호불의 군주|불경의 언해와 편찬 그리고 신미|원각사 건립
2. 사리 분신과 서기 ● 관세음보살의 현신|서기|생불의 출현
16장 편찬 사업과 국가 재정의 표준화
1. 율령을 넘어서는 전장제도의 모색: 만세성법의 편찬
● 『경국대전』 편찬의 전사|『경국대전』 편찬
2. 조선 건국의 정당성 완결: 『동국통감』 편찬
● 정도전의 『고려사』|세종의 『고려사』 편찬 곡절|『동국통감』의 편찬
3. 세입·세출의 표준화 ● 공안과 횡간|횡간의 제정

4. 권력과 권위가 충돌하다

17장 역린
1. 선위 권유 ● 정창손의 파직|정인지의 능상·불경
2. 공신의 역모 ● 봉석주의 역모|양정 참살
3. 세자의 대리 ● 발영시·등준시|탐주|원상제의 실시
18장 권신 전천의 경고: 불경과 신임 사이
1. 이시애의 난 ● 함길도의 동향|이시애의 반란|정토군의 편성과 출정|공방|북청 거산 전투|진압
2. 한명회·신숙주의 위기 ● 남용신의 환열|군군신신의 경고
19장 공신 사이의 대립
1. 적개공신의 대두 ● 새로운 충신의 등장|적개공신 책봉
2. 신구 공신 사이의 경쟁
20장 군신 권력의 역전
1. 세조의 승하 ● 선위|승하
2. 남이 옥사 ● 유자광의 고변|남이 역모|적개공신 몰락
3. 공신시대의 개막 ● 익대공신 책봉|사옥

에필로그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김순남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조선 전기 정치 및 군사 제도사이다. 저서로는 《조선 초기 체찰사제體察使制 연구》,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 I》(공저) 등과 논문 〈16세기 조선과 야인野人 사이의 모피 교역의 전개〉, 〈15세기 중반~16세기 조선 북방 군역의 폐단과 군액 감소〉 등이 있다. 근년에 조선...
 

책 속으로

형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장 80대를 맞고 숨소리도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반면 의정부의 세상은 활짝 열렸다. 문종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의정부는 이미 왕에게도 보고하지 않은 채 나랏일을 처리해 온 터였다. 의정부는 세자를 볼모로 궁성을 장악했다. 의정부가 어찌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 p.45

단종은 즉위한 뒤 교서를 통해 모든 일을 의정부에 맡긴다고 천명했다. 의정부가 주인 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수양과 안평은 단종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 바, 분경奔競 금지 대상 범주에 자신들이 포함된 것에 반발했다
--- p.53

피바람이 몰아친 다음 날인 1453년(단종 1) 10월 11일 주요 인사가 단행되었다. 수양이 영의정부사 영경연서운관사 겸판이병조사가 되었다. 의정부 서사제에서 영의정은 신하로서는 최고권력자였다. 단종이 허울뿐인 왕이라면 실질적 권력자는 영의정 수양이었다. 게다가 각 조의 판서가 최고책임자로 있음에도 그보다 상위의 판사직까지 겸하여 이조와 병조를 장악했다
--- p.97

수양은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조선의 제7대 국왕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했다.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이징옥의 난을 진압한 2년 뒤였다
--- p.111

좌익공신으로 총 44명이었다. 세조 집권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권람·한명회·신숙주 등을 포함하여 이름을 올린 수의 3분의 1이 정난공신에 이어 거듭 책봉되었다. 종친이나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는 이들의 수는 정난공신보다 더 많았다. 한명회와 한계미, 권람과 권지 등 공신 상호 사이에 혈연으로 얽힌 이들도 적지 않았다
--- p.116

세조는 재위 14년 내내 정권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겨냥하여 끊임없이 유포된 난언에 시달렸다. 이는 단순한 헛소문을 넘어 실제 모반으로 구체화하거나 타인을 무고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거나 지방 수령의 지휘 체계를 동요시키는 등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정권의 안정이 난언의 수습에 달려 있었다
--- p.158

세조의 집권 동안 한명회나 신숙주를 포함한 공신들은 국가의 중대사를 현장에서 처결했다. 세조는 이들을 지방으로 보내 자신의 통치 의지를 관철했다. 이들은 각지의 동태를 파악하고 감시했으며, 축성·제언 축조·군적의 작성·사민·군용의 점고 등 지방에서 처결해야 할 국가 중대사를 주도해 추진했다. 이들의 활동 영역은 전국 8도에 걸쳐 있었다
--- p.171

평안도 등의 ‘사람은 적고 땅은 넓은’ 문제를 사민 방식으로 해결하려던 세조는 먼저 평안도로 들어갈 백성을 하삼도에서 모집했다. 이를 위해 1459년(세조 5) 12월 좌찬성 황수신을 경상도, 판중추원사 심회를 전라도, 좌참찬 성봉조를 충청도 등의 모민 체찰사로 각각 삼아 사목을 내려 주었다
--- p.183

군익도를 거진으로 규정하자 행정상의 도와 군사도가 혼동되는 복잡성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 거진에 제진을 속하게 했다. 이것이 진관 체제였다. 진관 체제로 편성함으로써 …… 각 고을이 제진으로서 하나의 군사 단위가 되었다. 제진 몇 곳을 묶어 거진으로 편성했다. 행정 조직과 군사 조직의 일치, 이 어려운 일을 세조는 자기 시대에 실현했다
--- p.191

세조는 진관 체제를 확립하여 관찰사-수령을 근간으로 하는 8도의 지방 행정 체제를 주진-거진-제진의 군사 체제와 일치시켰다. 각 고을을 독립적 군사 단위인 진으로 삼아 진관으로 편제함으로써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지키는 촘촘한 방어 체제의 이상을 조선에 실현했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도 완성하지 못했던 강력한 국방 조선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 p.193

세조는 1459년(세조 5) 2월 1일 드디어 호패법을 다시 실시했다. 그러면서 바로 호구와 군적을 분명히 할 방도를 자세히 진술하도록 했다. 호패법을 2년간 실시한 세조는 1461년(세조 7) 7월에 그간의 정책 경험을 바탕으로 호적과 군적을 개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p.197

1460년(세조 6) 3월 세조는 마침내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모련위 오랑캐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 곧 신숙주를 도체찰사로 삼았다. 신숙주는 8월 27일에서 8월 30일에 걸쳐 모련위 오랑캐를 정벌했다. …… 이것이 1460년(세조 6) 8월의 이른바 ‘경진북정’이다
--- p.207

경진북정은 명나라에 사전 통고 없이 세조가 독자적으로 결정한 야인 정벌이었다. 세조는 이 정벌로 조선 국왕으로서의 힘을 과시하여 외부적으로는 이징옥의 난 때 협력한 야인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군왕으로서의 위의를 과시할 수 있었다.
--- p.208

1467년(세조 13) 9월 명의 협공 요청에 따라 조선에서 군사를 동원해 건주위를 정벌한 ‘정해서정’이다. 이때 동원된 군사 1만 명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정토군이었다. 이 정벌은 명의 요청으로 단행되었지만 조선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 p.211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과 아버지 세종도 하지 않았던 하늘에 대한 제사를 재위 3년부터 재위 10년까지 친히 지냈다. 특히 기우나 기곡 등 기도할 만한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매년 새해 처음에 행하는 정기적인 일로 제사했다. 환구단에서의 친제란 자신이 하늘의 아들임을 인정받는 행위였다
--- p.223

세조는 경연이나 강무를 통해 군왕으로서의 존엄을 강조하는 한편 공신에 대한 존중과 신뢰 역시 드러냈다. 동시에 훈신·권신들에게 경도되는 관료를 불경죄로 처벌했다. 이런 가운데 이들의 무례와 불경 혹은 나태 등 일탈 행위가 이어졌다. 하지만 세조는 이를 즉각 처벌하지는 못했다. 그저 경고하는 수준이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양자는 애초에 군신으로서가 아니라 ‘권력의 찬탈’에 합의하고 계유정난의 ‘원죄’를 함께 짊어지면서 관계가 시작되었다. 세조는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운명 공동체를 형성했다
--- p.234

1464년(세조 10) 1월 충청도를 순행하기에 앞서 세조는 아첨하기 위해 겉치레하지 말라고 해당 지역의 관찰사·절도사·수령에게 경고했다. …… 길가 산골짜기에 땔나무를 쌓고 횃불을 모아 두는 일과 도로를 보수하는 등의 일을 다 금하며, 만일 명령을 어기고 아첨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 이하 무겁게 논죄할 것이다
--- p.250

세조는 『경국대전』의 편찬에 착수했다. 통상 조선의 만세성법이라 할 『경국대전』은 세조의 손자였던 성종의 업적으로 분류되지만, 실제 『경국대전』의 얼개를 잡아 초안을 완성한 이는 세조였다
--- p.279

1467년(세조 13) 6월 세조는 상정소 당상이 각각 새로 정한 『대전』을 받아 하나하나 따져 논의했다. 다음 달 드디어 새로 지은 『경국대전』의 초안이 올라왔다. 당시 세조는 여러 종친과 재상들에게 조목에 대한 각각의 소견을 개진하고 잘못된 점을 조리 있게 말하게 했다
--- p.281

통사로서의 『동국통감』 편찬에 착수한 세조는 재위 후반 결실을 보기 위해 진력했다. 하지만 당대에 이루지는 못했다. 1467년(세조 13) 5월 지방 반란이 일어났고 이듬해 9월 돌아갔기 때문이다. 『동국통감』은 손자인 성종 대에 완성되었다. 이 『동국통감』 체제의 특징은 우리 역사의 시작을 단군까지 끌어올렸다는 것이었다
--- p.286

세조의 추진력에 힘입어 1467년(세조 13) 11월 12일 여러 분야에서 시험 삼아 취한 횡간이 인쇄되었다. 세조는 이를 반포해 해당 관사에 내려보냈다. 이로써 세입 외에 세출 규정까지 마련되었다. 국가 재정이 표준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 p.290

훈신들의 이 같은 발언은 결국 세조의 퇴위를 의미했다. 그것은 군왕인 세조 자신에 대한 불경 행위였다. 앞서 술김에 행했던 정인지의 실언은 신임을 전제로 한 허물없는 관계이기에 가능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재위 후반 ‘태상’ 운운하는 발언은 세조를 왕위에서 물러난 임금으로 간주해 나온 것이었다
--- p.300

세조는 1466년(세조 12) 6월 25일 주서와 사관을 광화문 밖으로 보냈다. 거기서 번갈아 백성이 능히 스스로 아뢸 수 없었던 민간의 이익과 손해, 시정의 잘되고 잘못된 점을 듣도록 했다. 이때 억울함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제비를 뽑아야 했다. 주서와 사관은 뽑힌 사람의 말을 듣고 기록하여 아뢰었다. 그러면 세조는 이들의 보고를 받고 친히 물어서 조처했다. 군사에 관해서는 도총부 낭관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 p.308

세조는 이시애의 반란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때 반란은 권신화한 이들을 정조준하여 처벌하기 위한 도구였다. …… 은인이고 동지이지만 아울러 부담이기도 했던 이들을 견제했다. 1467년(세조 13) 5월의 이시애 난은 이들에 대한 정치적 견제가 극으로 치달은 계기가 되었다. 6월 5일 세조는 한명회·신숙주의 죄를 ‘전천專擅’이라 규정했다
--- p.331

이시애의 난과 적개공신의 책봉 이후 세조는 파격 인사를 통해 신구 공신의 충성 경쟁을 유도하려 한 듯하다. 즉 의정부와 6조의 핵심에는 적개공신의 유력 주자를 포진시키고, 승정원에는 정난·좌익공신인 한명회와 신숙주 등을 포진시키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 자신에 대한 충성을 끌어내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준과 남이, 허종의 인사는 파격이었지만 세조에게는 바람직했다
--- p.346

아들에게 왕위를 넘긴 다음 날인 1468년(세조 14) 9월 8일 무덤에 석실을 만들지 말라는 유명을 남기고 수강궁 정침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2세, 재위 14년째였다
--- p.352

예종 즉위년 유자광의 고변으로 시작된 남이의 일은 강순까지 연루되었다. 이 일로 적개공신의 대표 주자들은 모반 혐의로 정치적 위기에 빠졌다. 세조 대 말 공신 사이의 충성 경쟁이 예종 대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구 공신의 결정적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권력 구도는 다시 재편되었다
--- p.356
 

출판사 리뷰

피로 얼룩진, 드라마틱한 즉위 과정

이유는 능력자였다. 귀화 야인들 사이에 ‘큰호랑이’라 불릴 정도로 무에 뛰어났고, 공법 제정이나 한글 창제에도 관여했을 만큼 나랏일에도 능했다. 그런 만큼 부왕 서거 후 형인 문종의 비호가 아니었으면 탄핵되어 곤장을 맞을 뻔했을 지경에까지 이르니 단종 대 들어 “권세를 혼자 쥐고 흔들며” 아우 안평에게 반역을 재촉하는 김종서 등 권신의 전횡과 견제에 대해 칼을 뽑아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실록을 중심으로 서술한 1453년 계유정난의 배경과 과정은 그 어떤 TV드라마보다 극적이니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김종서가 물러서서 건네받은 편지를 달에 비춰 보았다. 바로 그 순간 수양이 어을운에게 눈짓했다. 어을운은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다. 김종서가 땅에 쓰러졌다. 아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렸다. 양정이 들어와 칼을 뽑아 김승규를 베었다.”(89쪽)

정통성 시비를 일축한, 눈부신 치적

왕좌에 오른 이유는 단호하면서도 유능했다. 친동생 둘이 죽임을 당하고 조카가 스스로 목을 매도록 했으며 성삼문 등을 처형되는 등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들에 대한 ‘단죄’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한편 각 고을이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지키는(自戰自守) 진관체제 확립, 국가 운영의 만세성법인 『경국대전』과 단군으로 시작되는 한국사의 정통을 세우는 『동국통감』의 편찬(286쪽), 검약을 기치로 국가 세출의 표준화를 도모한 「횡간」 제정 등 조선 오백 년의 토대를 굳건히 했다. 아울러 한명회 등 공신을 지방에 파견하는 체찰사제 운영, 호패법과 군역제도의 정비, 백정 중 제비를 뽑은 사람은 직접 억울함을 고할 수 있게 한 ‘탐주’의 시행도 세조의 치적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여진 정벌을 독자적으로 단행하거나 환구단에서 정례적으로 천제天祭를 직접 거행하는 등 조선의 위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내 편’을 얼르고 조인 술치의 대가

세조 이유는 술치術治의 대가이기도 했다. 서얼인 유자광을 인사권을 가진 낭관에 임명하는 등 인사을 오로지 하면서 계유정난을 함께한 소수의 ‘내 편’-요즘 말로는 ‘핵관’-과는 ‘열매’를 함께 나누었다. 경연慶宴이라 해서 이들과 노래하고 춤추는 술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권력의 달콤함을 나누었으니 지은이는 이를 ‘연석宴席 정치’라 했다(237쪽). 그러나 이 자리에선 정인지가 세조에게 “너”라고 칭하는 등 무례·불경·나태가 빈번했으니 조선 역사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그러면서도 이시애의 난과 연루되었다는 ‘설’이 돈 한명회와 신숙주를 ‘전천專擅’이라 해서 내치는가 하면 “힘들게 살지 말고 물러나라”고 한 공신 양정을 참살하는 등 채찍을 휘둘러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휘둘러 권신을 제어했다.

21세기 한국 정치에 대한 반면교사

이 책은 태종~성종으로 이어지는 ‘군주평전 시리즈’ 중 두 번째 책이다. 철저하게 실록을 중심으로 서술했다는 점이 곧 장점이자 단점이랄 수 있지만 지은이의 내공과 글솜씨 덕에 읽는 맛은 각별하고, 우리 정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계유정난을 계기로 왕의 아들에서 아버지 세종의 ‘예치’를 넘어서는 초월적 절대 군주로 자리매김하려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정치가 ‘세조’를 만나는 것이 의미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