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조선시대사 이해 (독서)/1.조선왕

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 (2022 방상근)

동방박사님 2023. 1. 5.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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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신은 존중하고 대간은 예우하고
개혁과 통합, ‘두 토끼’를 잡은 리더십

새롭게 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치세”


이 책은 조선왕조의 9번째 임금인 성종의 일생을 정치에 초점을 맞춰 살핀 책이다. 성종 대는 너무나 태평한 시대여서 종종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그렇지 않다. 우선 성종 자신이 후계 순위 3순위에서 “운좋게” 왕위에 오른 불안한 처지였다. 게다가 그가 풀어야 했던 정치적 과제도 만만치 않았다. 세조 대의 정변과 권력 찬탈, 사육신 사건과 단종의 폐위와 사사, 서정西征과 북정北征, 그리고 내란(이시애의 난)이라는 격변과 혼란으로 무너져 내린 선비와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잡아야 할 책무가 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사후에 묘호로 인종仁宗이 거론될 정도로, 그는 ‘교화의 시대’를 이끌었다. 군주의 리더십을 천착한 지은이는 이 책에서 성종의 성공 비결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목차

프롤로그
성종 연보

1. 낡은 정치를 혁파하다

1장 치열하게 공부하다
‘혼맥’에 힘입은 불안한 출발|조선 임금 중 최다 경연 참가자
2장 적폐 청산의 시금석, ‘현석규 탄핵 사건’
권력의 하수인이 된 언론|임사홍의 농간, 권력 다툼의 신호탄?
3장 왕비를 폐하다
피해의식에 젖은 투기|국왕을 해치려 하다|후일의 발호를 경계하다|만세를 염려하여 결단하다
4장 풍속을 교화하다
어우동 사건의 파장|교화의 그늘
5장 우방과 협력하다
중화공동체 전략의 지속|우여곡절 건주위 정벌|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다
6장 유신을 단행하다
참된 인재를 구하려 고심하다|좌초된 ‘승출의 법’의 의의
7장 법전을 완성하다
『경국대전』의 시행과 교정|유교적 법치
8장 권신을 제어하다
실세 한명회 극복하기|‘가지치기’로 힘을 빼다

2. 포용하고 통합하다

9장 왕의 남자, 김종직
훈구대신들과도 원만한 관계|신진 사림의 구심점이 되다|각자도생하는 제자들
10장 문화정치를 추구하다
활기 띤 활자 주조와 문집 간행|서적의 보급과 사가독서
11장 조선의 무위를 보이다
성종 22년의 북정|조선의 군사적 자주권
12장 대신과 대간을 중재하다
개전인가, 경계인가|마음의 선악을 문제 삼는 정치|대신과 대간의 불화
13장 언론을 활성화하다
태평과 폭정의 갈림길|비판적 지지의 확보
14장 간쟁하는 신하 채수와 ‘열린’ 성종
사가독서에서 파직까지|복직, 광망, 칩거
15장 실패한 후계자 교육
세자의 학습 부진|끝내 풀지 못한 숙제

에필로그
마치며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방상근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평화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고려대 법학연구원 정당법연구센터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관심 분야는 정치와 법치의 관계, 정치사상과 정치가, 정치가로서 군주의 리더십 관련 문제들이다. 저서로는 《성종의 국가경영》(2022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이 있다...
 

책 속으로

자산군은 예종과 마찬가지로, 정계의 실권자인 한명회의 딸과 혼인하였고, 그를 정치적 후견인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임금이 아니었고 본인이 적장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맥을 통해서 왕이 될 수 있었던 성종은 어쩌면 조선왕조 역사상 최대의 행운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p.32

성종은 25년 동안 집권하면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잡직의 전문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분야별로 습독관제도를 두고 관련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고 토론하도록 했으며, 독서당제도를 마련하여 문신들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독서를 권장하였다
--- p.42

성종은 조강·주강·석강·야대를 정기적으로 실시한 것 외에도 수시로 경연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조 역대 제왕 중 가장 왕성한 학구열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탐구정신은 유학을 기본이념으로 삼고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왕조가 건국 후 100년이 지난 성종 대에 이르러 통치체제가 완성된 것도 경연의 활성화에서 찾을 수 있다
--- p.43

확실한 근거도 없이 대신을 소인으로 지목해 기망하면서, 임금을 그러한 소인을 등용한 어리석은 군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김언신에 대한 단죄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성종이 김언신을 가상하게 여기고 받아들인 이유는 그가 간신諫臣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개함을 보여준 때문일 것이다
--- p.57

실록에는 임사홍이 대간을 시켜 현석규를 공격할 때에 다들 임사홍이 음험한 줄은 알았으나 현석규의 사람됨은 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현석규의 사람됨 역시 간사하고 크게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지고서도 임금 앞에서는 깨끗한 체하고 미더운 체하여 속이는 소인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임사홍이 간관을 사주하여 현석규를 탄핵한 사건을 “소인으로써 소인을 친다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65

무술년 옥사는 성종이 친정을 선언한 직후였던 1477년(성종 8)에 현석규와 승지들 사이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유자광과 임사홍을 같은 정치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유자광은 세조 대 이래의 훈신들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이 아니라, 사욕을 추구하면서 정치를 해치는 소인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사풍의 교화를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 p.67

성종이 적장자가 아니었음에도 왕이 되었던 행운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폐비 윤씨 역시 후궁으로 입궁했음에도 공혜왕후의 죽음과 대비의 간택으로 3년 만에 왕비가 되는 행운을 잡았다. 그러나 윤씨 스스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과부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음”에도 왕비가 되었기에, 그녀의 행동과 처신은 명문가 출신의 후궁들에게는 질투 대상이 되었고 궁궐 사람들의 관심과 비난의 소재가 되었다
--- p.74

윤씨의 폐비는 그녀가 통상 있을 수 있는 그러한 갈등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종에게 위해를 가하고 원자를 내세워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된다. 적어도 성종에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자 ‘역모’로 인식되었다
--- p.86

이 사건이 풍속을 바로잡는다는 명분하에 진행된 사회 통제체제 구축의 성격이 있다는 점에 공감한다. 어우동 사건은 성종이 교화의 정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이었고 이후에 그가 ‘유신’을 추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조선 전기 역사의 큰 틀에서 보면, 세종으로 대표되는 ‘정政’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치제도의 완성 이후에 전개된 ‘교敎’의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 p.115

내가 생각건대, 사람을 등용하기는 어렵고 사람을 알아보기는 더욱 어렵다. 외모가 공손한 듯하고 언어가 정직한 듯하나 실지는 그렇지 않은 자가 있고, 외모와 언어는 민첩하지 않은 듯하나 마음과 행실이 충직한 자가 있다. 더구나 지위가 낮은 관직에 있거나 멀리 초야에 사는 자 중에 어진 인재가 있더라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전조銓曹(이조와 병조)의 주의에도 혹 구슬을 빠뜨리는 한탄이 있다
--- p.152

성종은 11월 13일에 관리의 포폄에 대해서 의정부에 전지를 내렸다. 당시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을 평가하는 담당자들이 ‘공’을 버리고 ‘사’를 따르는 관행으로 인해 용렬한 자들이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폐단이 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전최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포폄을 맡은 자들이 사정을 버리고 공도를 따라야 하며, 이로써 관리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다고 했다. 전조의 직임과 역할이 관행에 따라서 관리들의 근무성적과 업적을 평가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들의 현명함과 그렇지 못함, 그리고 내면의 마음가짐까지 분별해야 함을 요구한 것이다
--- p.154

현명하고 능력 있는 선비가 혹 하급관료로 침체되어 그 재주를 다 펴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한산한 곳에 배치되어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비록 완전한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더라도 진실로 일절의 덕행이 있으면 이도 훌륭한 사람이 되므로 또한 채용할 만하니 아울러 이름을 적어 계문하여서 나의 측석명양側席明揚(마음을 기울여 들추어냄) 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 p.155

성종은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자는 자격에 구애 없이 쓰고, 그다음으로 쓸 만한 사람은 그 임기에 따라 차례로 써서 점차 승진하게 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범용한 무리는 비록 갑자기 버리지는 않더라도 벼슬을 올려주지 않고 임기가 만료된 뒤에 같은 품계에서만 옮기도록 함으로써, 어질고 어리석은 이가 함께 오래 벼슬에 머물러 있는 폐단이 없도록 당부했다
--- p.158

김종직은 벼슬자리에 결원이 적어 인사적체 현상이 심각한데, 임금의 명령으로 새로 서용하는 자가 많아 관직(자리)이 모자라 모두 서용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 관료들 가운데 어질지 못한 자를 내치는 ‘승출의 법’을 시행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 p.160

승출의 법은 실패했지만, 이후에 전개되는 교화의 정치에서 대신들의 탐오한 풍속에 대한 대간의 탄핵과 격렬한 비판이 가능해지고, ‘공公’을 추구해야 한다는 정치의 대의가 분명하게 세워지게 되었다. 이 점에서 1485년(성종 16)의 ‘승출의 법’을 둘러싼 논쟁은 성종의 치세를 그 이전과 이후로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의 정치사를 성종 시대 이전과 이후로 구별 짓게 하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p.169

성종은 세종과 마찬가지로 형벌에서 엄형주의를 원칙으로 하였지만, 형벌 집행의 착오를 막고 신중을 기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되도록 죄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1479년(성종 10) 11월 30일에 계절마다 삼성三省의 관원이 석방할 죄수를 조사하는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한 기사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삼성’이란 강상의 죄를 범한 사람을 추국하는 세 개의 기관, 곧 의정부·사헌부·의금부를 통틀어 말한다
--- p.180

성종은 즉위 초부터 내수사의 장리長利, 곧 ‘곡식을 꾸어주고 일 년 후에 꾸어준 곡식의 절반을 받는 변리’가 야기하는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내수사의 장리는 연 30~50퍼센트의 고리채로 당시 왕실의 재산을 증식하는 방법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 이를 관장하는 장리소가 전국에 562개가 있었는데, 1472년(성종 3) 1월 성종은 이 가운데 325개를 혁파했다. 고리대 행위를 담당하는 기관을 반절 이상 혁파한 것이다
--- p.198

성종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세력을 스스로 치워나갔다. 비록 즉위 초에 정희왕후의 도움으로 귀성군을 제거했다고는 하지만, 성종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외척이자 훈구대신인 한명회 세력은 귀성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성종은 친정을 선포한 후 10년 동안, 그 세력을 서서히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리더십을 키워나갔다
--- p.225

흔히 성종 대에 등장한 사림들이 세조 대의 훈구대신들과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종직의 사례를 보면 그가 훈구대신들과 갈등하기보다는 친밀한 교류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1485년(성종 16)에 승출의 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여 정치 개혁의 선봉에 서기도 하였지만, 그가 관직생활을 하면서 훈구대신이나 선배 관료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탄핵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 p.239

김종직은 도학만을 전일하게 추구하지 않았다. 홍귀달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덕행·문장·정사政事 등 다방면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 큰 스승이었다. 김굉필·정여창 같은 도학자, 남효온과 같은 방외인, 그리고 김일손·조위와 같은 문장가가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 김종직은 훈구의 시대에서 사림의 시대로 전환되는 도정에 위치한, 그리하여 기성세대의 구태를 지양하며 새로운 분위기를 예비하게 하는 조선 전기의 변곡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 p.243

성종은 승지에게 명하여 출판할 만한 서적을 알아보게 한다. 이틀 뒤인 1월 25일에는 예조에 “근래에 책값이 너무 비싸서 사는 사람이 괴로워하니, 내가 여러 서적을 널리 찍어서 유생에게 혜택을 주고자 하는 뜻에 어그러진다. 호조로 하여금 어전魚箭·세포稅布를 매년 넉넉히 전교서에 주어 팔아서 종이를 사서 서적을 많이 인쇄하고 값을 줄여서 사람마다 쉽게 사서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
--- p.264

성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1492년(성종 23)에 독서당을 개설하였다. 그 장소는 지금의 마포 한강 변에 있던 귀후서歸厚署 뒤쪽 언덕의 사찰로, 그 절을 20칸 정도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이 독서당에서는 1495년(연산군 1)부터 무오사화가 있던 1498년(연산군 4)까지 매년 5, 6명이 독서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 여파로 폐쇄되었다
--- p.270

29일에 성종은 임사홍을 임용하였다. 다만 권한이 없는 행직行職에 앉혀 그가 권력을 얻어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는 비판을 무마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간의 의심과 반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30일에 대사헌 이칙과 대사간 안호 등은 촛불을 밝히고 무리를 지어 임금 앞으로 나아가서 “종묘사직과 백성이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것은 임사홍을 기용하느냐 않느냐에 달려있다”면서 임금을 윽박질렀다. 이에 성종은 “오늘 만약 임사홍을 기용하면 내일 나라가 망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 p.300

성종은 인물의 진퇴는 대간의 말에 따라 가볍게 바꿀 수는 없다고 했다. 만약 큰 허물이 있다면 바꾸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물을 쓸 초기에 현부나 선악을 논하기보다는 맡겨본 후에 허물이 있을 때 바꾸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간은 처음에 사람을 고르지 않았다가 잘못한 일이 있은 후에 바꾼다면 제때 구제할 수가 없기에 “과실이 있은 다음에야 고친다”는 성종의 논리는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 p.322

재위 마지막 해인 1494년(성종 25) 8월 26일 성종은 심술이 바르지 못하며 용렬하다고 지목된 인물들에 대해서 “요순이 아니면 누가 허물이 없겠는가?”라면서 가능한 한 그들을 포용하고자 하였다. 임금의 허물과 현명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대간에 대해서는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면서 “비방하는 자가 있는 것은 곧 나의 어질지 못함”이라고 말하였다
--- p.329

성종의 호학과 언론 우용優容은 결과적으로 국왕 스스로가 조정에서 ‘도의 권위가 군주보다 높다道高于君’는 분위기를 조성하며 도덕과 도학의 권위에 호소하는 언론이 공론으로 제기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 p.337

성종 대 언론이 활성화된 배경과 관련하여 주목할 또 다른 것은, 세조 대에 폐지되거나 축소되었던 여러 가지 제도, 특히 청요직임淸要職任들의 활동과 관련한 직제들이 성종의 즉위와 함께 복구되거나 신설되어 언론 활성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복구된 제도들은 경연의 재개, 야대夜對의 신설과 같은 경연 관련 제도의 부활, 예문관 직제의 변경, 예문록의 작성, 예문관원의 구임久任(오래 임명함), 사가독서제의 부활 등과 같은 집현전 관련 직제의 복구, 사간원 인원의 증원, 서경법의 복구, 언관들의 차자箚子 사용 등이다
--- p.339

성종 6년 10월에 성종은 이제까지 재상을 중심으로 예문록(예문관의 관원을 뽑기 위해 그 후보자의 성명을 적은 기록)을 선발한 것을 변경하여 예문관원들이 협의하여 후보자를 선발할 것을 명했다. 예문관원(후에 홍문관원)이 언관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언관의 자천제’를 처음으로 지시한 것이다
--- p.339
 

출판사 리뷰

호학과 언론 우용優容으로 개혁 기틀 마련

성종은 제왕학을 익히지도 못한 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경국대전』 반포로 국정 운영의 틀을 제도화하고, 수많은 전적을 간행했으며, ‘효치’와 ‘교화’를 통치 이념으로 조선 전기의 성세를 이룩하는 치적을 쌓았다. 그 바탕은 호학好學과 언론 우용이었다. 성종은 “배우기를 좋아한” 세종보다 더 많은 경연을 개최했을 정도로 학문적 소양을 갖추려 노력했다. 조강·주강·석강·야대를 정기적으로 실시한 것 외에도 수시로 경연을 실시했고 독서당을 신설하고 사가독서제를 시행하는 등 도학정치의 실현에 힘썼다. 아울러 언관 성격의 예문관 관원 후보들을 관원들이 협의하는 ‘언관 자천제’를 지시하는 등 언론을 활성화하여 개혁 정치의 우군으로 삼았다.

‘개전론改悛論’을 앞세워 통합을 지향

성종 시대는 통상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시작되어 훗날 사화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평가된다. 실제 ‘현석규 사건’의 주모자인 임사홍이 심판을 받았다고 직첩을 돌려주려 하자 대사헌 이칙 등이 최초의 ‘촛불시위’를 벌이여 성종을 압박하자 성종은 “죄 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거니와, 천도가 10년이면 변하는데, 임사홍인들 어찌 스스로 새로워지는 마음이 없겠는가?”라는 개전론을 펴며 “오늘 만약 임사홍을 기용하면 내일 나라가 망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또한 어부 좌윤에 제수된 윤은로가 방납한 일이 있다며 사헌부에 비판하자 “사람에게 한 가지 실수한 바가 있다고 해서 종신토록 쓰지 않음이 옳겠는가”라고 부당하다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세조 대 공신들의 적폐를 알면서도 언로의 활성화로 이들을 견제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취해 이들을 포용해 나갔다.

망원경으로 살피고 현미경으로 짚고

이 책의 미덕은 사실에 충실하고 꼼꼼하면서도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종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자 훈신인 한명회를 두고 ‘압구정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력을 깎아나가 ‘적막한 탄식’만 하다 세상을 떠나게 한 ‘가지치기’의 술치術治의 과정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을 살핀 부분은 망원경으로 살핀 조망의 예라 할 수 있다. 후대 사화들이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투쟁이란 일반적 해석 대신 김종직이 실은 훈구대신들과 원만한 관계였다는 사실 등을 들어 그를 “기성세대의 구태를 지양하며 새로운 분위기를 예비하게 하는 조선 전기의 변곡점을 상징하는 인물”로 파악한 것은 설득력 있다. 이와 함께 약전 형식의 ‘왕의 남자, 김종직’(9장)이나 ‘간쟁하는 신하 채수와 ‘열린’ 성종’(14장)은 책의 깊이와 더불어 읽는 재미를 돋우는 대목이다.

사학과 정치사상의 행복한 만남

이 책은 조선 전기 태종·세종·세조·성종의 치세를 다룬 ‘군주 평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효치와 교화’란 통치이념을 구현하는 승출의 법 등 구체적 사실을 살피면서도 개혁과 통합의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종의 리더십을 평가한다는 이 책은 사학과 정치사상의 행복한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성종의 구체적 시책도 볼 만하지만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면서도 기득권과 신진세력 간의 사생결단을 피하고 정치적 통합을 유지해 ‘교화의 정치’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그의 통치술은 눈여겨볼 만하다.

사학계·철학계·정치학계에서 바라본 성종시대(저자 방상근 정리)

성종시대, 안정과 갈등이 공존하다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의 치세는 한편으로는 왕조 초기의 정변과 같은 권력투쟁의 문제가 마무리되고 국정 운영의 틀이 제도화되고 안정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을 건국했던 혁명파 사대부들이 여러 차례의 정변을 거치면서 분화되고 세조시대의 공신들이 훈구대신으로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인물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잠재적으로 갈등요인을 내재하고 있었다. 성종시대의 정치와 관련하여서는 사학 계통과 철학 계통의 연구가 존재한다.

사학계가 바라본 성종시대

사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역성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급진파 신진사대부들, 이른바 훈구파 또는 사공파로 불린 관학파 사대부들이 권력과 부를 축적함으로써 권신이 되어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고려의 중흥을 내세웠지만 여말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온건파 신진사대부들이 조선의 창업과정에서 배제되었다가 훗날 사림파 또는 절의파로 불리며 성종시대에 재등장하여 훈구파와 대립을 형성하며 새로운 정치를 모색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사학계의 연구는 연산군과 중종 대의 사화를 통해 부각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갈등의 기원을 성종시대 신세력의 등장에 따른 구세력과의 갈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 시기의 정치사를 훈구와 사림의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하는 통설의 견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며, 관직의 고유임무가 재직 당시 그 관원의 행동과 논리를 크게 규정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성종시대 당시 삼사三司로 불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구성원은 언제나 유동적이었고 유망한 관원들은 거의 대부분 삼사를 거쳐 대신으로 승진했으며 관서의 인사이동이 빈번했음이 지적되었다. 또한 사학계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정치사나 제도사의 측면에서 이 시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성종시대의 정치를 주도했던 관학파들의 이념과 사상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철학계가 바라본 성종시대

한편 철학계에서 성종시대를 포함하는 15세기 유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조선사의 그 어느 시기와 비교해서도 빈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시기의 유학사상 자체가 다른 시대에 견주어 풍요롭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 말에 수입된 성리학이 아직 유교적 관료지식인들에게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으며, 이 시기 사상계를 장학했던 관학파 유학자들은 학문보다 시무時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었고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필요를 강렬하게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다른 하나는 16세기 이후 사상사적 의미를 가진 집단으로 등장하는 사림파를 위주로 15세기의 유학사상을 해설하려는 시각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 시대를 대변하는 관학파 유학사상을 훈구파의 잡문雜文으로 판단하여 거의 다루지 않으며, 그 대신 도통道統이라는 잣대를 통해 이 시기에 어떻게 사림파의 절의정신이 계승되어 왔는가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 결과 형이상학적 이기론理氣論 이해의 미성숙성과 심화의 문제 또는 이질성이라는 관점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이처럼 15세기 관학파 사상에 대한 철학계의 연구들은 대체로 이 시기를 하나의 과도기로 바라본다. 이기론이나 경학사상의 관점에서는 미성숙성으로 파악하고, 도통론이나 도학道學의 관점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그 결과 정도전과 권근의 경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종종 “학문이 없었다”고 표현되는 15세기를 주도한 관학파의 정치이념과 사상에 대한 철학 계통의 연구는 거의 부재한 상황이다.

정치학계가 바라본 성종시대

정치학계의 연구도 큰 틀에서 볼 때 사학계와 철학계의 연구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15세기를 성리학이 아직 이해되지 않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시대로 간주하거나 도통론에 입각하여 사상사를 보는 시각이 강하게 작용하여 관학파의 사상을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그 결과 15세기를 여말선초의 연장선으로 보면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설명한 후 사림정치의 문을 연 조광조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최근에는 정치가로서 군주의 리더십에 주목하는 연구가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태종이나 세종에 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성종, 군주의 자격을 묻다』가 바라본 성종시대

‘교화의 정치’가 새롭게 등장하다


이 책은 성종시대와 15세기를 설명하는 연구들이 간과했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왕조 초기의 권력투쟁과 제도화의 문제가 일단락되면서, 주자학 정치론의 핵심인 ‘교화의 정치’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관점에서 성종시대를 해석하고 있다. 이는 정치투쟁의 초점이 창업 이래 지속되어 온 권력투쟁과 제도화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가의 내면과 심성으로 이동함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제도화의 성과가 나타났고 성종 즉위년에 『경국대전』(기축대전)이 완성되었다. 그 이후에 세조시대에 무너진 기강을 다시 세우고 풍속을 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력한 힘을 얻었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자는 논의가 최우선적인 정치과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성종은 풍속의 교화를 자신의 사명으로 자각하고 그 과업을 끝까지 관철하고자 노력한 군주였다.

본래 주자학에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의 두 가지 방법으로 정政과 교敎를 강조한다. 전자는 법도와 금령으로 외물을 제어하는 것이고, 후자는 도덕과 제례로 마음(내면)을 가지런히 하는 것을 말한다. 주자학은 제도나 법령을 통해서 질서를 바로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치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내면의 변화를 통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 위정자가 먼저 자신을 수양하여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종시대가 국가운영의 틀이 제도화해가는 수성守成의 시기였다면, 성종시대는 제도화 단계를 넘어서 교화의 정치로 이행했던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세조시대에 국정을 전횡했던 훈구대신들의 부패와 비리에 대한 반성으로 성종시대에 군자와 소인에 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성종의 친정親政 초기였던 성종 9년(1478)에 있었던 ‘무술년의 옥사獄事’를 계기로 사적으로 붕당을 결성하여 정치를 해치는 소인을 어떻게 분별하여 물리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인사시스템의 개혁뿐만이 아니라 심술(마음가짐)의 선악을 근거로 출척黜斥을 행하는 교화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성종의 리더십, 개혁과 통합의 딜레마를 극복하다

그런데 이처럼 정치가의 내면과 심성의 선악에 초점을 맞춘 교화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갈등의 근원적 해결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은 알기가 어려운 것인데, 단지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교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공직에서 내친다면 누구도 그러한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화의 정치는 끊임없는 정치적 분쟁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화가 추구하는 ‘내면성의 정치’는 피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잘 조정하여 정치적 파국을 막을 수 있는가가 정치리더십에서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개혁과 통합의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종의 리더십을 평가한다. 성종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면서도 대신을 존중하고 대간을 우대하며 인사권과 형벌권을 신중히 사용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통합을 이루어낸 반면에, 연산군과 중종은 그런 역량이 부족했기에 ‘사화’라는 비극과 파국이 초래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사례는 주자학이 현실정치와 유리되어 과거시험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명나라와 구별되는 조선만의 독자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제까지 사학계나 철학계의 연구가 짚어내지 못한 이 책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