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역사이야기 (관심>책소개)/2.서울이야기

서울의 자서전 (2024) - 조선의 눈으로 걷다

동방박사님 2024. 5. 21. 11:09
728x90

책소개

조선 역사로 오랫동안 독자와 만나온 신병주 건국대 교수가 오랜만에 신간 『서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출발한 만큼 조선시대와 관련한 다양한 역사와 문화 공간들이 남아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51가지 테마를 잡고 서울 곳곳에 숨어 있는 조선시대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자서전’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이후 지금까지 역사의 현장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력을 계속 써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조선 건국 이후 한양 천도가 이뤄지던 시점부터 식민 침탈의 한이 서리기까지 서울의 600년 역사를 한 사람의 생애를 그려내듯 했다. 저자는 독자들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장소들을 탐방하면서, 역사의 향기를 체험했으면 하는 바람에 부제를 ‘조선의 눈으로 걷다’라고 붙였다.

이 책은 시기별로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 공간들을 소개하고, 그곳에 얽힌 사연들을 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학자 개인 문집 등 검증된 사료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역사적 객관성을 최대한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저자가 직접 탐방하면서 얻은 감상들도 서술하여, 제목 그대로 조선의 눈으로 서울이 간직해온 이력들을 독자들에게 가능하면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조선을 상징하는 공간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궐과 왕릉, 조선이 수도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강, 정조의 숨결이 남아 있는 배다리, 조선 후기 중인 문화의 산실인 서촌 등 비교적 알려진 공간에 숨겨진 이야기들과 함께, 효종이 홍덕이라는 궁녀에게 김치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사한 홍덕이 밭,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가 옷감을 물들였던 자지동천, 서울에서 느끼는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 천민 출신 유희경이 만든 문화사랑방 침류대,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과 이소정에 숨은 이야기 등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도 포함하여 책을 구성했다. 최근 영화 「파묘」가 크게 흥행했는데, 서울에도 파묘 후에 옮겨진 왕릉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소개했다.

목차

들어가는 말
1 경복궁과 근정전, 이름에 담긴 뜻
2 태종이 청계천 공사를 시작한 이유
3 단종이 옥새를 내준 곳, 경회루
4 권력을 가까이하지 않은 효령대군과 청권사
5 허름한 장소에서 피어난 긍지, 자지동천과 비우당
6 대비들을 위해 세운 궁궐, 창경궁
7 성종, 용산에 독서당을 건립하다
8 욕망과 흥에 절었던 연산군의 공간
9 단경왕후가 왕을 그리워하며 머문 인왕산 치마바위
10 조광조를 배향한 도봉서원
11 중종의 정릉이 옮겨진 사연
12 유교 국가에 세운 봉은사와 문정왕후
13 전쟁과 정치적 다툼 속에 자리했던 정릉동 행궁
14 서울에서 느끼는 이순신의 생애 흔적
15 폐출의 원인이 된 광해군의 경희궁 건설
16 이항복과 꽃구경의 명소 필운대
17 인조반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
18 이괄의 난의 승부처, 안산
19 조선 중기의 문화 사랑방을 이끈 시인 유희경과 침류대
20 물속에 잠겼다 다시 떠오른 치욕의 삼전도비
21 효종의 잠저와 홍덕이 밭
22 혜화동, 송시열과 대명의리론의 공간
23 숙종과 북한산성 수축
24 북한산성에도 행궁이 있었다
25 인현왕후와 북촌의 감고당
26 고려부터 현대까지 집권자가 영욕의 시간을 보낸 청와대
27 궁궐 깊숙이 퍼진 전염병
28 귀한 얼음의 공급처, 한강
29 경종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들
30 영조의 탕평책과 균역법이 구현된 공간들
31 성균관 유생들의 삶과 꿈
32 통명전과 어의궁에 남아 있는 정순왕후 혼례식의 흔적
33 앞으로 100년을 보고 작업한 청계천 공사
34 종로구에서 수원으로 옮겨진 사도세자 묘
35 화가의 붓끝에서 다시 태어난 한강
36 창덕궁 후원에 스며든 정조의 마음
37 광교 주변에 형성된 시장, 독과점과 정경유착을 끊어내다
38 한양의 랜드마크가 묘사된 「성시전도시」
39 경희궁과 숙종, 영조, 정조
40 용산과 노량진에 놓은 조선시대 배다리
41 동작구에 마련된 정조의 휴식처, 용양봉저정
42 정조의 눈물이 밴 효창동 고개
43 순조를 기억하는 공간, 연경당과 인릉
44 종로, 용산, 북촌에서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
45 역사의 아이러니가 깃든 궁들
46 청운동과 삼청동에 서린 세도정치
47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던 화려한 운현궁
48 부암동의 석파정과 염리동의 아소정, 권력의 빛과 그늘
49 경복궁 중건 이야기
50 경복궁 뒤뜰의 숨은 공간들
51 서울의 새해맞이

저자 소개

저 : 신병주 (申炳周)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건국대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조선시대사학회 회장, 한국문화재재단 이사, 문화재청 궁·능 활용 심의위원, 외교부 의전정책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으며, 역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 KBS라디오 「글로벌 한국사, 그날 세계는」,...

출판사 리뷰

조선에서 현대까지
다시 쓴 서울의 자서전


짓고 무너지고 헐리고 재건하는 세월 속에서 살아남은 장소들
50여 개의 풍경 속에 떠오르는 역사의 조각
시간은 어떻게 공간이 되고, 공간은 어떻게 역사가 되는가

권력을 가까이하지 않은 효령대군과 청권사
허름한 장소에서 피어난 긍지, 자지동천과 비우당
물속에 잠겼다 다시 떠오른 치욕의 삼전도비
독과점과 정경유착을 끊어낸 광교 인근 시장
정조의 눈물이 밴 효창동 고개
역사의 아이러니가 깃든 궁들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던 화려한 운현궁
부암동의 석파정과 염리동의 아소정, 권력의 빛과 그늘

궁궐의 도시, 서울

서울은 궁궐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 사대문 안에 모여 있다. 이 책 또한 상당 분량을 궁궐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글인 ‘경복궁과 근정전, 이름에 담긴 뜻’에서 저자는 500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한양 천도를 단행함으로써 대체한 행위에 담긴 뜻을 여러모로 추적한다. 천도 1년 후부터 열 달에 걸친 궁궐 공사 끝에 완성된 경복궁은 755칸 정도의 소박한 규모였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했을 때 규모가 7200여 칸임을 생각해보면 1/10 수준이다. 성리학 이념을 담아 건국한 왕조였던 만큼 검소와 절약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대비들을 위해 세운 궁궐, 창경궁’에서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두고 붙어 있어서 창덕궁이 수용할 수 없는 공간을 설치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창경궁에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묻은 통명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문정전,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하고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 등이 있다. 13번째 글에선 정릉동 행궁을 다룬다. 전란을 겪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폐허가 되었을 때 당시 황화방에 위치한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해 임시 행궁으로 삼았다. 이곳은 정릉동 행궁이라고도 불렸는데,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이 원래 이곳에 있엇기 때문이다. 선조는 1593년부터 1608년까지 이곳에 머물다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곳은 광해군대에 경운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897년 고종은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근대를 대표하는 궁궐로 자리잡게 되었다. 15번째 글에서는 광해군 폐출의 원인이 된 ‘경희궁 건설’을 다룬다. 광해군은 새문동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술사 김일용의 말을 핑계삼아 경희궁 창건에 착수했지만, 이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을 제거하기 위한 술수로서 처음부터 정치적인 의도가 컸다. 반대 상소도 엄청났지만, 왕의 뜻에 부합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김극효는 옛 집터의 섬돌과 주춧돌을 바쳤으며, 유대일과 이중기는 집터를 경희궁의 대내에 편입되게 했다. 광해군은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세력은 폐출의 명분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꼽았다. 24번째 글에서는 북한산성 안에 있었던 행궁의 존재를 제기한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수축한 후 그 안에 행성을 만든 것인데, 영조 때도 이곳으로 거둥이 이뤄지곤 했다. 그러나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쇠락의 길을 걷다 방치되어 지금은 내전 지역에 기단석과 계단, 주춧돌 등만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조 시대로 넘어오면 창덕궁이 역사의 중심에 온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북원北苑, 금원禁苑, 상림上林 등으로 불린 창덕궁 후원은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되어 조선 오아실의 풍류와 멋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후원의 넓이는 9만여 평으로 조선 궁궐 후원 중 가장 넓고 아름답다. 이곳에는 조선 초기부터 100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세워졌지만, 현재에는 40여 채가 남아 있다. 정조는 특히 창덕궁 후원을 사랑해 경치가 뛰어난 10곳을 선정해 ‘상림십경’이라 했고, 특히 왕실 도서관 규장각을 지었으며 나중에는 거처를 이곳으로 옮겼다.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의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정자는 존덕정尊德亭이다. 후원의 정자 중에서도 화려하고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전쟁, 내란과 관련된 공간들

서울의 서쪽을 대표하는 인왕산 옆에는 안산鞍山이 있다. 산 모양이 말의 안장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산은 조선시대 역사에 획을 그은 공간이기도 하다. 18번째 글에서 이를 다룬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반군이 한때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 정권을 거의 무너뜨리려 할 때 관군이 반격의 물꼬를 튼 곳이 안산이었다. 이괄의 한양 진격을 저지하지 못했을 때 안주목사 정충신이 나서서 반군보다 먼저 안산을 점거한 다음 진을 치고 한양도성을 내려다보며 적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안산 전투의 서막을 그렇게 올랐다. 결국 이괄의 난은 진압됐지만 후유증이 컸다. 궁궐에 대한 방화와 약탈, 『승정원일기』의 분실 등이었다. 이괄과 함께 반군의 중심으로 활약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후금 진영으로 투항해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봉장이 되어 조선 침략에 앞장서기도 했다.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잠심 롯데백화점에서 성남 방면으로 고풍스러운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그 유명한 삼전도비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과거 이곳에 삼전 나루가 있었기 때문에 삼전도비로 불린다. 삼전도비의 건립은 청의 일방적인 요구였지만 당시 정세상 거절할 수 없었다. 누구 쓰느냐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다급해진 인조는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했다. 인조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이경석은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여 청의 비위에 맞춰 쓰긴 썼지만, 그 치욕감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후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강점기인 1917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해 다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1945년 광복 후 다시 삼전도비를 없애자는 논의 끝에 땅에 묻었으나 1963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자 정부에서는 역사의 반성으로 삼자는 의미에서 원래 위치했던 곳에서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고, 다시 송파대로의 확장으로 삼전동의 어린이 놀이터 안으로 옮겨놓았다가, 이후 원래 위치와 가까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해 20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강과 서울

35번째 글 ‘화가의 붓끝에서 다시 태어난 한강’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을 다룬다. 당시 한강 중에서도 서울 주변의 한강을 일컬어 경강京江이라 불렀는데, 경강은 도성 안의 시장에 미곡, 목재, 어물, 소금 등을 공급하면서 유통망의 중심 역할을 했다. ‘경교’에는 경강의 교외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선이 『경교명승첩』을 그린 배경에는 정선의 벗인 사천 이병연이 있다. 정선은 65세 때인 1740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하면서, 이병연이 시를 지어 보내면 자신은 그림을 그려 화첩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이들의 우정은 결국 1741년에 두 권의 화첩으로 완성되었다.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마라”는 인장까지 남겨두었다. 정선은 현재의 미사리 부근을 그린 「미호美湖」는 특별히 두 점을 남겼다. 미호에 위치한 석실서원은 안동 김씨 김상용을 배향한 서원인데, 정선은 그의 후손인 김창협·김창흡 등의 후원을 받은 만큼 석실서원에 대한 감회가 매우 컸을 것이다. 「광진」과 「송파진」 「동작진」 「양화환도」 등의 그림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고, 해당 위치에 현재도 광진교, 동작대교, 양화대교 등 주요 다리가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했던 공간의 기능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용산과 노량진은 조선시대 화성으로 자주 행차했던 정조의 행렬이 강을 걸어서 건너기 위해 배다리를 놓았던 장소다. 당시 정조가 배를 가로로 이어 붙여 강을 건너기 위해 주교청을 설치하고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후보지를 선정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외에 한강의 얼음 채취와 동빙고·서빙고의 존재, 얼음이 잘 얼지 않을 때 난지도에서 갈대를 베어와 창고 주변을 덮었던 이야기들 한강에 대한 이야기들이 몇 편 더 소개되고 있어 서울의 자서전에서 한강의 존재감을 여실히 느껴볼 수 있다.

이 책은 청계천 공사, 단종이 옥새를 내준 경회루, 용산에 독서당을 세운 성종, 욕망과 흥에 절었던 연산군의 공간, 단경왕후가 왕을 그리워하며 머문 인왕산 치미바위, 중종의 정릉이 파묘되어 옮겨진 사연, 이항복과 꽃구경의 명소 필운대, 송시열과 대명의리론의 공간으로서의 혜화동, 성균관과 그 주변에 얽힌 이야기들 등 서울이 겪어낸 역사 속 장소들을 다방면으로 불러내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