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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음악 전문가 이준형의 첫 고음악 교양서
이준형의 『옛 음악, 새 연주』는 고음악의 광활한 세계를 알기 쉽게 소개한 교양서다. ‘옛 음악’이란 그동안 클래식 감상의 주류에서 비켜나 있던 바흐 이전 및 바흐까지의 음악을 성글게 묶은 말이고, ‘새 연주’란 한때 잊혔던 옛 음악을 시대 악기 연주로 새로이 드러내려는 오늘날의 흐름을 부르는 말이다. 오늘날 음반 시장에서 시대 악기 연주로 새로이 조명된 옛 음악들은 많은 감상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하나의 취향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다채로운 고음악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안내하는 ‘가이드북’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 이번에 발간되는 『옛 음악, 새 연주』는 그러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반가운 책이다.
이준형의 『옛 음악, 새 연주』는 고음악의 광활한 세계를 알기 쉽게 소개한 교양서다. ‘옛 음악’이란 그동안 클래식 감상의 주류에서 비켜나 있던 바흐 이전 및 바흐까지의 음악을 성글게 묶은 말이고, ‘새 연주’란 한때 잊혔던 옛 음악을 시대 악기 연주로 새로이 드러내려는 오늘날의 흐름을 부르는 말이다. 오늘날 음반 시장에서 시대 악기 연주로 새로이 조명된 옛 음악들은 많은 감상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하나의 취향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다채로운 고음악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안내하는 ‘가이드북’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 이번에 발간되는 『옛 음악, 새 연주』는 그러한 갈증을 해소해주는 반가운 책이다.
목차
1장 조스캥 데프레를 찾아서
2장 후아나와 마리아를 위한 음악, 영광과 환멸의 왕국 카스티야
3장 르네상스를 꿰뚫었던 ‘불꽃 남자’, 윌리엄 버드
4장 오페라의 시대를 열다,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5장 ‘암스테르담의 오르페우스’ 스베일링크
6장 알레그리 「미세레레」 - 사실과 신화의 이중주
7장 륄리와 코렐리, 오케스트라의 탄생
8장 바이올린으로 만든 장미 화관, 비버의 ?로사리오? 소나타
9장 프랑수아 쿠프랭, 혹은 신비로운 장벽
10장 안토니오 비발디와 피에타
11장 헨델, 오페라, 그리고 가수들
12장 [마태 수난곡] - 근대적 자아의 탄생
13장 피젠델과 크반츠 - 궁정 음악가의 초상
14장 프랑스 고전주의 음악과 대혁명
15장 러시아, 우크라이나, 보르트냔스키
16장 공공 연주회 - 근대 서양 음악의 여명
17장 벨칸토의 종말과 새로운 ‘노래’의 시작
18장 다양한 음악과 다양한 피아노
2장 후아나와 마리아를 위한 음악, 영광과 환멸의 왕국 카스티야
3장 르네상스를 꿰뚫었던 ‘불꽃 남자’, 윌리엄 버드
4장 오페라의 시대를 열다, 몬테베르디 ?오르페오?
5장 ‘암스테르담의 오르페우스’ 스베일링크
6장 알레그리 「미세레레」 - 사실과 신화의 이중주
7장 륄리와 코렐리, 오케스트라의 탄생
8장 바이올린으로 만든 장미 화관, 비버의 ?로사리오? 소나타
9장 프랑수아 쿠프랭, 혹은 신비로운 장벽
10장 안토니오 비발디와 피에타
11장 헨델, 오페라, 그리고 가수들
12장 [마태 수난곡] - 근대적 자아의 탄생
13장 피젠델과 크반츠 - 궁정 음악가의 초상
14장 프랑스 고전주의 음악과 대혁명
15장 러시아, 우크라이나, 보르트냔스키
16장 공공 연주회 - 근대 서양 음악의 여명
17장 벨칸토의 종말과 새로운 ‘노래’의 시작
18장 다양한 음악과 다양한 피아노
책 속으로
이 책은 중세 시대부터 프랑스 대혁명 무렵까지, 서양 음악의 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와 인물, 사건을 골라 담았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필요한 경우에는 역사와 문화, 종교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엮어내고자 했다.
--- p.6
조스캥 데프레는 당대부터 ‘음악의 제왕’이라 불렸다. 1502년에 궁정악장을 찾던 페라라 공작은 비서에게서 조스캥이 경쟁자인 하인리히 이자크Heinrich Isaac보다 더 훌륭한 작곡가라는 보고를 받았다. 비록 그가 ‘고용주가 원할 때가 아니라 자신이 쓰고 싶을 때 작곡하고 돈도 더 많이 요구한다’라는 유보 조항이 달려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의 스위스 인문학자 헨리쿠스 글라레아누스는 조스캥을 베르길리우스와, 코시모 바르톨리는 미켈란젤로와 비교했다. 〈‘복되신 동정녀’ 미사〉 같은 작품은 현재 70개에 가까운 당대 필사본이 있는데, 이에 근접한 작품조차 없다. 작곡가 사후에도 그 명성은 잊히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음악사 최초의 진정한 ‘클래식’이었다.
--- p.11~12
1603년 2월에 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당연히 빅토리아는 3주동안 거행된 장엄한 장례식에서 전례 음악을 총괄했고, 이때 연주된 곡이 바로 저 유명한 〈위령 성무〉다. 16세기 에스파냐 작곡가들은 유독 아름다운 레퀴엠을 많이 남겼지만, 빅토리아의 작품은 모랄레스의 것과 더불어 르네상스 폴리포니 음악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자 21세기 청중에게도 큰 감동을 주는 위대한 걸작이다. 어둡고 엄격하지만 그 안에는 가사의 의미를 담아낸 숭고하고 내밀한 열망과 심오한 깊이가 있다. 들라뤼의 레퀴엠이 저음을 중심으로 감정을 풀어낸다면, 빅토리아의 레퀴엠은 처음부터 투명하고 맑은 고음이 듣는 이를 압도한다.
--- p.42~43
버드는 1593년에 다시 에식스의 스턴던으로 물러났는데, 중요한 후원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존 피터 남작의 집인 잉게이츠스톤 홀에서 가까운 곳으로, 남작의 보호를 받으며 신앙생활과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다. 여전히 왕실 경당에 속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은퇴 생활로 접어든 셈이다. 여기서 만년의 버드는 3, 4, 5성부 미사곡, 그리고 가장 야심적이면서 위험한 작품인 〈그라두알리아〉(1605, 1607)를 썼다. 세 곡의 미사곡에는 표지도, 날짜도, 피헌정자와 출판업자의 이름도 없이 오직 작곡가의 이름만 있는데, 그 내밀하고 어둡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모여 미사를 거행했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버드는 탈리스 이후 30년 이상 누구도 쓰지 않았던 미사곡을 쓰면서 중세 이래의 오랜 영국 교회 음악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미사 통상문 가사 중 중요한 부분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신앙고백’ 중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Et in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로, 여기서 모든 성부는 돌연 다 함께 이 구절을 노래하면서 가사를 되풀이한다. 버드의 굳은 신념이 그대로 드러나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 p.55
〈오르페오〉의 주제는 ‘음악’ 그 자체다.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주인공 오르페우스, 마지막에 나타나서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아폴로, 그리고 ‘음악’, 즉 ‘라 무지카’는 음악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존재다. [...] ‘라 무지카’의 신포니아와 더불어 음악의 힘과 작품의 주제가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곡은 3막에서 오르페우스가 부르는 「위대한 정령이여Possente spirto」가 아닐까 싶다. 음악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아리아로 꼽히는 이 노래는 5막으로 이루어진 대본의 정중앙인 3막 중간에 위치하며, 고도의 상징성을 내포한다.
--- p.68~69
스베일링크는 오르간을 위한 푸가를 쓴 최초의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대위법과 성부를 늘려가며 쌓아가는 건축미는 당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또 발건반으로 독립적인 푸가 성부를 연주하도록 지시했으며, (일부 작품이기는 하지만)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음악을 구분한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 칼뱅파, 루터파 세 종파의 찬가를 모두 사용해서 오르간 변주곡을 썼다. 스베일링크가 세운 거대한 건반 음악의 전통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북독일에서 펼쳐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음악에 대한 루터파 개신교와 칼뱅파 개신교의 인식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루터교 전통에서는 오르가니스트가 예배 중에 음악과 가사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교회에 모인 신자들에게 코랄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존재 이유’였다.
--- p.85
찰스 버니가 전해주는, 10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일화는 주목할 만하다. 황제는 로마에서 「미세레레」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교황에게 악보를 요청해서 받았는데, 빈에서 황실 가수들이 장식음 없이 악보대로 부르는 연주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황제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고 의심해서 교황에게 항의했지만, 사실 악보는 진짜였다. 단지 구전과 전통으로 내려온 장식음이 악보에 기보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미세레레」의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독특한 연주 관습과 전통, 가수들의 기량, 종교적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 p.100~101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무용가, 배우였던 륄리는 그 이전까지 연주자들이 했던 무분별한 장식음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현악기의 보잉을 통일했으며 세심한 리허설을 거듭하며 앙상블을 다듬었다. 또 단원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엄격한 규율을 확립했다. 그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단원의 바이올린을 뺏어 등짝을 내리쳐서 악기를 산산조각 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는 세 배로 악기 값을 물어주고 근사한 저녁을 사주며 달랬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난폭한 독재자였지만 ‘밀당’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나 할까.
--- p.114
코렐리는 륄리보다 조금 늦게 등장했고 륄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륄리의 오케스트라가 본질적으로 주역이 아니라 오페라나 발레, 즉 ‘무대’의 일부분이었던 반면 코렐리는 륄리보다 더 큰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악단 구조를 유지했으며, 현대 모델인 4부 편성을 완성했다. 그 이전 누구도 코렐리처럼 오로지 기악 음악만으로(현재까지 남아있는 코렐리 성악곡은 한 곡도 없으며, 썼다고 해도 많은 숫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 p.119
〈로사리오〉 소나타를 이야기할 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 그리고 그 독특한 음향의 원인은 스코르다투라, 즉 변칙 조율이다. [...] 그 누구도 비버처럼 상상력이 넘치면서도 다양하게 활용한 사람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로사리오〉 소나타는 1번과 파사칼리아에서만 통상적인 5도 간격의 조율을 지시했을 뿐 나머지 열네 곡의 소나타에 각각 서로 다른 조율 방식을 택했으며, 단순한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특정한 조성이나 분위기를 묘사하고 특별한 음색을 얻기 위해서 활용했다.
--- p.139
동시대인이었던 앙투안 바토의 그림이 그렇듯이, 쿠프랭의 음악은 은밀하게, 비밀을 토로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두사람 모두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묘사했다. 다만 바토가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쿠프랭의 음악은 그 일부라는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 권의 〈하프시코드 작품집〉은 별다른 개인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 작곡가의 음악적 자서전이다. 당대 프랑스 작곡가들이나 바흐, 그리고 드뷔시와 라벨도 쿠프랭의 내밀한 표현에 감동했다. 브람스도 연주회 레퍼토리에 쿠프랭 작품을 넣었고, 1869년에서 1888년에 걸쳐 크리산더가 출판한 고음악 시리즈에서 쿠프랭 〈하프시코드 작품집〉을 맡아 편집에 참여했다. 인터메초 같은 후기 작품에서 쿠프랭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 p.154
오스페달레 네 곳은 서로 경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가장 유명한 곳은 피에타였다. 다른 곳에서도 갈루피나 포르포라, 하세 같은 저명한 음악가를 고용해서 수준 높은 음악을 연주했지만 말이다. 피에타가 누린 국제적인 명성의 한가운데에는 ‘빨간 머리 사제’ 비발디가 있다. 비발디와 피에타는 마치 오랜 연인처럼 거의 40년에 걸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함께 영광의 역사를 만들었다. 비발디는 1703년, 스물여섯 살 때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후에 피에타의 상주사제 겸 바이올린 교사로 첫 공식 직책을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성직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중요한 신분 상승의 기회였고 베네치아에서는 사제가 음악가로 활동하는 일이 흔해서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코스’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p.174~175
40여 편에 달하는 헨델 오페라 중 가장 뛰어난 10여 곡은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걸작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은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흐름도 자연스럽지만 타고난 드라마티스트이자 성악 작곡가였던 작곡가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면을 다룬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는 ‘극은 현실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19세기 말 베리스모 작곡가들보다 훨씬 더 깊은 진실을 파고들었다. [...] 훗날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헨델은 사람들 대부분은 순전한 영웅이나 악당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에서 상반되는 감정과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189~190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가령 말러 음악에 담긴 감정이나 표현은 언어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때때로 가사가 있는 작품조차도 말이다. 논리나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무의식을 통해서 진실을 찾는다고나 할까. 반면 바로크 음악은 그 반대다. 인간의 정념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본질적으로 개인보다는 보편적인 감정의 본질을 표현하려는 미학이다. 그래서 고전 수사학에 근거한 다카포 형식을 선호했고, 모든 음악은 수사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특정한 감정에 조성이나 리듬형, 음형을 체계적으로 결합하려는 음악 이론이 많았다. 즉 ‘말하는 음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바로크 음악은 명쾌하다. 작곡가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음악도 ‘쉽게’ 들리게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들린다. 직선적이고 긍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바로크 음악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단순해서 싫다는 쪽과 명쾌해서 좋다는 쪽으로 정반대로 갈린다. 그런데 어느 시대든 그렇듯이, 바로크 시대에도 위대한대가들은 당대의 음악 규칙과 법칙의 한계를 넘나드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헨델은 단조로운 다카포 아리아에 깊고 입체적인 감정을 불어넣었고, 비발디는 리토르넬로 형식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라모는 춤곡을 다른 차원으로 바꾸는 ‘변용’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흐처럼 모든 제약을 초월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바흐의 위대함이 있다. 그리고 두 곡의 수난곡, 특히 〈마태 수난곡〉은 놀라운 천재성과 깊은 신앙심이 결합된 좋은 예다.
--- p.208
독일 궁정악단은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궁정악단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프랑스나 에스파냐, 영국과 스웨덴 궁정악단은 언제나 하나였고 수도에 있었다. 즉, ‘단핵적’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도시와 지방, 혹은 중심과 주변부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그 반대였다. 30년 전쟁 이후 사실상 1,800여 개의 크고 작은 독립 국가로 분열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와 왕부터 변경백 2 과 제후-주교 3 까지 서로 다른 계급과 종교와 취향을 지닌 여러 군주가 다스렸고, 계승이나 결혼, 전쟁에 따라 영토는 물론 수도마저 계속 바뀌었다. 군주가 머무는 곳Residenz이 곧 수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궁정악단도 70~90명에 육박하는 초대형부터 열 명도 안 되는 소규모까지 더없이 다양했고 음악 전통 역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식에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등 복잡했다. 즉 ‘다핵적polycentric’이었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비슷한 환경이었지만 종교적, 음악적으로 훨씬 더 동질적이었고, 어디까지나 오페라가 궁정 음악의 핵심이었다.
--- p.226~227
고전주의 음악의 핵심 중 하나가 ‘보편성’이라면, 인본주의와 계몽주의로 유럽 문화를 이끌었던 프랑스는 그 개념의 중심이었다. 프랑스 작곡가 르 쉬외르Jean-Francois Le Sueur는 자기 작품에 관해 설명하면서 “모든 음악적인 고딕 양식을 피하고 장엄한 옛 취향을 따르면서 특정한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를 지향한다”라고 했는데, 고전주의 음악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다.
--- p.245~246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주도한 ‘현지’ 작곡가들은 트루톱스키와 코즐롭스키 5 정도를 제외하면 신기하다 싶을 만큼 대부분 우크라이나 출신이거나 우크라이나 혈통이었다. 즉 이들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는 ‘러시아인’이면서 문화적, 혈통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마치 구스타프 말러가 유대인이자 보헤미아인이면서 오스트리아인이었듯이 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는 가운데 예술 분야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와 외국인 음악가들의 공헌이 없었다면 19세기 중반부터 펼쳐진 러시아 음악의 놀라운 전력 질주는 더 늦게,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네바강의 오르페우스’라 불리며 예카테리나 2세부터 파벨 1세를 거쳐 알렉산드르 1세까지 3대에 걸친 러시아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러시아 음악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던 보르트냔스키가 아닐까 싶다.
--- p.277~278
이렇게 19세기에는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랜 세월 음악 문화를 이끌었던 궁정과 교회는 그 힘을 점차 잃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비슷한 신분과 문화적, 지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살롱과 궁정 음악 모임은 우리가 아는 형태의 연주회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음악계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쳐서 가령 오페라 극장의 구조나 음악 협회의 구성마저도 바뀌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음악 조직의 광범위한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 모든 변화는 산업화와 시민혁명, 정치개혁을 거치며 근본적으로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18세기 후반 잘로몬이 주최했던 런던의 하이든 콘서트나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콘서트마저도 현대적 공공 연주회의 구조는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입장권이 너무 비싸고 분위기도 배타적이어서 서민층은 참석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런던이나 라이프치히보다 전근대적이었던 빈은 더 심해서, 비슷한 시기 모차르트가 시도했던 예약제 콘서트Akademie의 실제 참석자 명단을 보면 대부분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중후반부터 대도시를 중심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시민 계급이 상류계층과 섞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형성된 확대된 엘리트 계층이 19세기 유럽 사회를 이끌게 되면서 공공 연주회는 진정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 p.296
로시니가 이야기하는 벨칸토 전통은 바로 바로크 시대부터 고전주의 시대까지, 카스트라토의 황금시대를 의미했다. 그의 말대로 오페라 장르가 등장한 16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250년은 화려한 명인기의 시대였다. 작곡가와 가수는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고 서로 도전하면서 함께 발전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위대한 카스트라토와 여성 가수는 뛰어난 기술적 역량과 자유로운 창의성을 갖춘 음악계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황제와 교황의 사랑을 받았던 이들은 절대주의 체제의 대변인이면서, 극장과 성당에서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던 선구적인 예술가였다. [...] 가령 코나 목구멍으로 노래하지 말 것, 올바르게 호흡하고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할 것 등은 현대와 똑같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포르타멘토, 아르페지오, 빠른 트릴 등 다양한 장식음 기법과 오늘날에는 잘 쓰지 않는 메사 디 보체 등 음을 부풀리고 약하게 하는 기법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본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바로크 벨칸토의 핵심적인 기교는 두성과 흉성이 바뀌는 것을 듣는 이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민첩하게 오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중요한 기술이었지만 특히 카스트라토 가수에게 필수적이었는데, 가령 파리넬리는 완전히 똑같은 음색과 음량으로 세 옥타브를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p.301~302
배음이 부족한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들과 잘 섞이지 않아서 콘티누오 악기로 적합하지 않다지만, 로버트 레빈Robert Levin 같은 연주자는 다채로운 상상력으로 콘티누오에서도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일찍이 “문제는 언제나 악기가 아니라 연주자에 있다”라고 했던 로잘린 투렉의 선언이 다시금 생각나는 대목이다. 옛 건반 악기뿐만 아니라 현대 피아노로도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물론 바흐를 멋지게 연주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바흐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연주하고 듣는 이유는 당대로 돌아가고자 함이 아니고 지금 현재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유한 특징과 매력을 지키면서도 음악 양식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 옛 피아노의 특성과 연주 양식을 참조해서 더욱 다채로운 ‘어휘’를 갖춰야 한다. 그것이 다양성의 시대에 사는 현대 피아노가 짊어져야 하는 의무이자 영예다.
--- p.6
조스캥 데프레는 당대부터 ‘음악의 제왕’이라 불렸다. 1502년에 궁정악장을 찾던 페라라 공작은 비서에게서 조스캥이 경쟁자인 하인리히 이자크Heinrich Isaac보다 더 훌륭한 작곡가라는 보고를 받았다. 비록 그가 ‘고용주가 원할 때가 아니라 자신이 쓰고 싶을 때 작곡하고 돈도 더 많이 요구한다’라는 유보 조항이 달려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의 스위스 인문학자 헨리쿠스 글라레아누스는 조스캥을 베르길리우스와, 코시모 바르톨리는 미켈란젤로와 비교했다. 〈‘복되신 동정녀’ 미사〉 같은 작품은 현재 70개에 가까운 당대 필사본이 있는데, 이에 근접한 작품조차 없다. 작곡가 사후에도 그 명성은 잊히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음악사 최초의 진정한 ‘클래식’이었다.
--- p.11~12
1603년 2월에 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당연히 빅토리아는 3주동안 거행된 장엄한 장례식에서 전례 음악을 총괄했고, 이때 연주된 곡이 바로 저 유명한 〈위령 성무〉다. 16세기 에스파냐 작곡가들은 유독 아름다운 레퀴엠을 많이 남겼지만, 빅토리아의 작품은 모랄레스의 것과 더불어 르네상스 폴리포니 음악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자 21세기 청중에게도 큰 감동을 주는 위대한 걸작이다. 어둡고 엄격하지만 그 안에는 가사의 의미를 담아낸 숭고하고 내밀한 열망과 심오한 깊이가 있다. 들라뤼의 레퀴엠이 저음을 중심으로 감정을 풀어낸다면, 빅토리아의 레퀴엠은 처음부터 투명하고 맑은 고음이 듣는 이를 압도한다.
--- p.42~43
버드는 1593년에 다시 에식스의 스턴던으로 물러났는데, 중요한 후원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존 피터 남작의 집인 잉게이츠스톤 홀에서 가까운 곳으로, 남작의 보호를 받으며 신앙생활과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다. 여전히 왕실 경당에 속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은퇴 생활로 접어든 셈이다. 여기서 만년의 버드는 3, 4, 5성부 미사곡, 그리고 가장 야심적이면서 위험한 작품인 〈그라두알리아〉(1605, 1607)를 썼다. 세 곡의 미사곡에는 표지도, 날짜도, 피헌정자와 출판업자의 이름도 없이 오직 작곡가의 이름만 있는데, 그 내밀하고 어둡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모여 미사를 거행했던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버드는 탈리스 이후 30년 이상 누구도 쓰지 않았던 미사곡을 쓰면서 중세 이래의 오랜 영국 교회 음악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미사 통상문 가사 중 중요한 부분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신앙고백’ 중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Et in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로, 여기서 모든 성부는 돌연 다 함께 이 구절을 노래하면서 가사를 되풀이한다. 버드의 굳은 신념이 그대로 드러나는 감동적인 순간이다.
--- p.55
〈오르페오〉의 주제는 ‘음악’ 그 자체다.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주인공 오르페우스, 마지막에 나타나서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아폴로, 그리고 ‘음악’, 즉 ‘라 무지카’는 음악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존재다. [...] ‘라 무지카’의 신포니아와 더불어 음악의 힘과 작품의 주제가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곡은 3막에서 오르페우스가 부르는 「위대한 정령이여Possente spirto」가 아닐까 싶다. 음악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아리아로 꼽히는 이 노래는 5막으로 이루어진 대본의 정중앙인 3막 중간에 위치하며, 고도의 상징성을 내포한다.
--- p.68~69
스베일링크는 오르간을 위한 푸가를 쓴 최초의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대위법과 성부를 늘려가며 쌓아가는 건축미는 당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또 발건반으로 독립적인 푸가 성부를 연주하도록 지시했으며, (일부 작품이기는 하지만) 오르간과 하프시코드를 위한 음악을 구분한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가톨릭, 칼뱅파, 루터파 세 종파의 찬가를 모두 사용해서 오르간 변주곡을 썼다. 스베일링크가 세운 거대한 건반 음악의 전통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북독일에서 펼쳐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음악에 대한 루터파 개신교와 칼뱅파 개신교의 인식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루터교 전통에서는 오르가니스트가 예배 중에 음악과 가사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교회에 모인 신자들에게 코랄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이 ‘존재 이유’였다.
--- p.85
찰스 버니가 전해주는, 10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일화는 주목할 만하다. 황제는 로마에서 「미세레레」를 듣고 감동한 나머지 교황에게 악보를 요청해서 받았는데, 빈에서 황실 가수들이 장식음 없이 악보대로 부르는 연주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황제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고 의심해서 교황에게 항의했지만, 사실 악보는 진짜였다. 단지 구전과 전통으로 내려온 장식음이 악보에 기보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미세레레」의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독특한 연주 관습과 전통, 가수들의 기량, 종교적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 p.100~101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무용가, 배우였던 륄리는 그 이전까지 연주자들이 했던 무분별한 장식음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현악기의 보잉을 통일했으며 세심한 리허설을 거듭하며 앙상블을 다듬었다. 또 단원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면서 엄격한 규율을 확립했다. 그는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단원의 바이올린을 뺏어 등짝을 내리쳐서 악기를 산산조각 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는 세 배로 악기 값을 물어주고 근사한 저녁을 사주며 달랬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난폭한 독재자였지만 ‘밀당’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나 할까.
--- p.114
코렐리는 륄리보다 조금 늦게 등장했고 륄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륄리의 오케스트라가 본질적으로 주역이 아니라 오페라나 발레, 즉 ‘무대’의 일부분이었던 반면 코렐리는 륄리보다 더 큰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음악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악단 구조를 유지했으며, 현대 모델인 4부 편성을 완성했다. 그 이전 누구도 코렐리처럼 오로지 기악 음악만으로(현재까지 남아있는 코렐리 성악곡은 한 곡도 없으며, 썼다고 해도 많은 숫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 p.119
〈로사리오〉 소나타를 이야기할 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 그리고 그 독특한 음향의 원인은 스코르다투라, 즉 변칙 조율이다. [...] 그 누구도 비버처럼 상상력이 넘치면서도 다양하게 활용한 사람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로사리오〉 소나타는 1번과 파사칼리아에서만 통상적인 5도 간격의 조율을 지시했을 뿐 나머지 열네 곡의 소나타에 각각 서로 다른 조율 방식을 택했으며, 단순한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특정한 조성이나 분위기를 묘사하고 특별한 음색을 얻기 위해서 활용했다.
--- p.139
동시대인이었던 앙투안 바토의 그림이 그렇듯이, 쿠프랭의 음악은 은밀하게, 비밀을 토로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두사람 모두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묘사했다. 다만 바토가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한다면, 쿠프랭의 음악은 그 일부라는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 권의 〈하프시코드 작품집〉은 별다른 개인적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 작곡가의 음악적 자서전이다. 당대 프랑스 작곡가들이나 바흐, 그리고 드뷔시와 라벨도 쿠프랭의 내밀한 표현에 감동했다. 브람스도 연주회 레퍼토리에 쿠프랭 작품을 넣었고, 1869년에서 1888년에 걸쳐 크리산더가 출판한 고음악 시리즈에서 쿠프랭 〈하프시코드 작품집〉을 맡아 편집에 참여했다. 인터메초 같은 후기 작품에서 쿠프랭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 p.154
오스페달레 네 곳은 서로 경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가장 유명한 곳은 피에타였다. 다른 곳에서도 갈루피나 포르포라, 하세 같은 저명한 음악가를 고용해서 수준 높은 음악을 연주했지만 말이다. 피에타가 누린 국제적인 명성의 한가운데에는 ‘빨간 머리 사제’ 비발디가 있다. 비발디와 피에타는 마치 오랜 연인처럼 거의 40년에 걸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함께 영광의 역사를 만들었다. 비발디는 1703년, 스물여섯 살 때 사제 서품을 받고 얼마 후에 피에타의 상주사제 겸 바이올린 교사로 첫 공식 직책을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성직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중요한 신분 상승의 기회였고 베네치아에서는 사제가 음악가로 활동하는 일이 흔해서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코스’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 p.174~175
40여 편에 달하는 헨델 오페라 중 가장 뛰어난 10여 곡은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걸작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은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흐름도 자연스럽지만 타고난 드라마티스트이자 성악 작곡가였던 작곡가가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면을 다룬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는 ‘극은 현실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19세기 말 베리스모 작곡가들보다 훨씬 더 깊은 진실을 파고들었다. [...] 훗날 모차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헨델은 사람들 대부분은 순전한 영웅이나 악당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에서 상반되는 감정과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189~190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가령 말러 음악에 담긴 감정이나 표현은 언어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때때로 가사가 있는 작품조차도 말이다. 논리나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무의식을 통해서 진실을 찾는다고나 할까. 반면 바로크 음악은 그 반대다. 인간의 정념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본질적으로 개인보다는 보편적인 감정의 본질을 표현하려는 미학이다. 그래서 고전 수사학에 근거한 다카포 형식을 선호했고, 모든 음악은 수사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특정한 감정에 조성이나 리듬형, 음형을 체계적으로 결합하려는 음악 이론이 많았다. 즉 ‘말하는 음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바로크 음악은 명쾌하다. 작곡가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음악도 ‘쉽게’ 들리게 노력했고, 실제로 그렇게 들린다. 직선적이고 긍정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바로크 음악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단순해서 싫다는 쪽과 명쾌해서 좋다는 쪽으로 정반대로 갈린다. 그런데 어느 시대든 그렇듯이, 바로크 시대에도 위대한대가들은 당대의 음악 규칙과 법칙의 한계를 넘나드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헨델은 단조로운 다카포 아리아에 깊고 입체적인 감정을 불어넣었고, 비발디는 리토르넬로 형식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라모는 춤곡을 다른 차원으로 바꾸는 ‘변용’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흐처럼 모든 제약을 초월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바흐의 위대함이 있다. 그리고 두 곡의 수난곡, 특히 〈마태 수난곡〉은 놀라운 천재성과 깊은 신앙심이 결합된 좋은 예다.
--- p.208
독일 궁정악단은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의 궁정악단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프랑스나 에스파냐, 영국과 스웨덴 궁정악단은 언제나 하나였고 수도에 있었다. 즉, ‘단핵적’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도시와 지방, 혹은 중심과 주변부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은 그 반대였다. 30년 전쟁 이후 사실상 1,800여 개의 크고 작은 독립 국가로 분열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와 왕부터 변경백 2 과 제후-주교 3 까지 서로 다른 계급과 종교와 취향을 지닌 여러 군주가 다스렸고, 계승이나 결혼, 전쟁에 따라 영토는 물론 수도마저 계속 바뀌었다. 군주가 머무는 곳Residenz이 곧 수도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궁정악단도 70~90명에 육박하는 초대형부터 열 명도 안 되는 소규모까지 더없이 다양했고 음악 전통 역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식에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 등 복잡했다. 즉 ‘다핵적polycentric’이었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비슷한 환경이었지만 종교적, 음악적으로 훨씬 더 동질적이었고, 어디까지나 오페라가 궁정 음악의 핵심이었다.
--- p.226~227
고전주의 음악의 핵심 중 하나가 ‘보편성’이라면, 인본주의와 계몽주의로 유럽 문화를 이끌었던 프랑스는 그 개념의 중심이었다. 프랑스 작곡가 르 쉬외르Jean-Francois Le Sueur는 자기 작품에 관해 설명하면서 “모든 음악적인 고딕 양식을 피하고 장엄한 옛 취향을 따르면서 특정한 국가나 국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를 지향한다”라고 했는데, 고전주의 음악의 핵심을 꿰뚫는 문장이다.
--- p.245~246
러시아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주도한 ‘현지’ 작곡가들은 트루톱스키와 코즐롭스키 5 정도를 제외하면 신기하다 싶을 만큼 대부분 우크라이나 출신이거나 우크라이나 혈통이었다. 즉 이들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는 ‘러시아인’이면서 문화적, 혈통적으로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마치 구스타프 말러가 유대인이자 보헤미아인이면서 오스트리아인이었듯이 말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는 가운데 예술 분야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우크라이나와 외국인 음악가들의 공헌이 없었다면 19세기 중반부터 펼쳐진 러시아 음악의 놀라운 전력 질주는 더 늦게,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네바강의 오르페우스’라 불리며 예카테리나 2세부터 파벨 1세를 거쳐 알렉산드르 1세까지 3대에 걸친 러시아 황제의 후원을 받으며 러시아 음악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던 보르트냔스키가 아닐까 싶다.
--- p.277~278
이렇게 19세기에는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랜 세월 음악 문화를 이끌었던 궁정과 교회는 그 힘을 점차 잃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 잘 알고 지내는 비슷한 신분과 문화적, 지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인 살롱과 궁정 음악 모임은 우리가 아는 형태의 연주회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음악계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쳐서 가령 오페라 극장의 구조나 음악 협회의 구성마저도 바뀌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음악 조직의 광범위한 ‘표준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 모든 변화는 산업화와 시민혁명, 정치개혁을 거치며 근본적으로 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18세기 후반 잘로몬이 주최했던 런던의 하이든 콘서트나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콘서트마저도 현대적 공공 연주회의 구조는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입장권이 너무 비싸고 분위기도 배타적이어서 서민층은 참석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도 했다.
런던이나 라이프치히보다 전근대적이었던 빈은 더 심해서, 비슷한 시기 모차르트가 시도했던 예약제 콘서트Akademie의 실제 참석자 명단을 보면 대부분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 중후반부터 대도시를 중심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시민 계급이 상류계층과 섞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형성된 확대된 엘리트 계층이 19세기 유럽 사회를 이끌게 되면서 공공 연주회는 진정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 p.296
로시니가 이야기하는 벨칸토 전통은 바로 바로크 시대부터 고전주의 시대까지, 카스트라토의 황금시대를 의미했다. 그의 말대로 오페라 장르가 등장한 16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250년은 화려한 명인기의 시대였다. 작곡가와 가수는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고 서로 도전하면서 함께 발전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위대한 카스트라토와 여성 가수는 뛰어난 기술적 역량과 자유로운 창의성을 갖춘 음악계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황제와 교황의 사랑을 받았던 이들은 절대주의 체제의 대변인이면서, 극장과 성당에서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던 선구적인 예술가였다. [...] 가령 코나 목구멍으로 노래하지 말 것, 올바르게 호흡하고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할 것 등은 현대와 똑같지만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그것은 포르타멘토, 아르페지오, 빠른 트릴 등 다양한 장식음 기법과 오늘날에는 잘 쓰지 않는 메사 디 보체 등 음을 부풀리고 약하게 하는 기법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본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바로크 벨칸토의 핵심적인 기교는 두성과 흉성이 바뀌는 것을 듣는 이가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민첩하게 오가는 것이었다. 이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중요한 기술이었지만 특히 카스트라토 가수에게 필수적이었는데, 가령 파리넬리는 완전히 똑같은 음색과 음량으로 세 옥타브를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p.301~302
배음이 부족한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들과 잘 섞이지 않아서 콘티누오 악기로 적합하지 않다지만, 로버트 레빈Robert Levin 같은 연주자는 다채로운 상상력으로 콘티누오에서도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일찍이 “문제는 언제나 악기가 아니라 연주자에 있다”라고 했던 로잘린 투렉의 선언이 다시금 생각나는 대목이다. 옛 건반 악기뿐만 아니라 현대 피아노로도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물론 바흐를 멋지게 연주할 수 있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바흐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연주하고 듣는 이유는 당대로 돌아가고자 함이 아니고 지금 현재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유한 특징과 매력을 지키면서도 음악 양식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 옛 피아노의 특성과 연주 양식을 참조해서 더욱 다채로운 ‘어휘’를 갖춰야 한다. 그것이 다양성의 시대에 사는 현대 피아노가 짊어져야 하는 의무이자 영예다.
--- p.328
출판사 리뷰
지금으로부터 삼사백 년 전의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다. 물론 그들도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했을 것이지만, 봉건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생활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감수성과 사고 방식은 오늘날과 무척 달랐다. 당연히 옛 음악에는 그 시대상과 생활 감정, 음악적 관습, 그 시대의 한계가 담기지만, 또한 그런 한계를 돌파하려는 예술가적인 창의성도 한 줄기 섬광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 이준형은 옛 음악에 담겨 있는 시대상과 예술관을 세심하고도 친절하게 해설한다. 그 범위는 매우 넓고도 다채롭다. 악기와 악단, 연주법과 작곡법 등의 음악적인 면면도 있지만, 당시의 기관과 제도 같은 사회적 측면, 대항해 시대나 북해 한자 동맹의 융성,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 등과 같은 세계사적 변혁들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음악가들은 한 세계의 일원으로서 음악계뿐 아니라 보다 큰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해 냈다. 그러므로 옛 음악에 담긴 시대상과 미적 관념을 이해한다면 낯설거나 모호했던 고음악 감상의 폭이 보다 깊어질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 책은 모두 18장에 걸쳐 고음악의 대음악가 혹은 중요한 화두를 다룬다. 르네상스 최고의 음악가 조스캥 데프레에서 출발해 고전주의 시대의 베토벤, 낭만주의의 쇼팽에 이르기까지 수백여년의 시간을 오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필두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스페인, 영국과 러시아 등 유럽 전역을 종횡으로 오간다. 이준형의 서술은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펼쳐지는 고음악의 지형도는 더없이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결코 딱딱한 교과서적인 서술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음악사와 각 음악 장르사의 전반적인 변천을 성실하게 전달한다. 르네상스의 대가들인 플랑드르의 조스캥, 스페인의 들라뤼와 빅토리아, 영국의 윌리엄 버드를 통해 다성음악의 황금기를 만난다면, 몬테베르디와 헨델, 벨칸토의 종말 등은 오페라에 할애되어 있다. 독자는 오페라의 탄생과 창법의 변화, 시민 예술로서의 융성 과정을 자연스럽게 엿보게 된다. 한편 옛 ‘건반 음악’으로는 네덜란드의 스베일링크, 프랑스의 프랑수아 쿠프랭을 소개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탄생과 변천을 다룬다.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의 피아노 음악을 이해하는 깨알 같은 지식도 얻을 수 있다. 한편 독주에서 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규모의 기악 음악은 륄리, 코렐리, 비버, 비발디, 피젠델, 크반츠 등의 다양한 작품으로 소개한다. 물론 옛 시대는 종교의 지배력이 강했으므로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알레그리의 〈미세레레〉나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같은 종교 음악의 세계 또한 만나게 된다.
한편 이 책에는 각 장마다 저자가 추천하는 음반 정보를 수록했다. 음반 혹은 음원을 검색할 때의 수월성을 고려해 원어로 실었다. ‘옛 음악’을 ‘새 연주’로 들으며 책을 읽어나가기를 권한다. 새로운 지식이 더 넓은 이해로 가는 길을 열어주면 옛 음악과 독자 여러분 사이에 놓인 수백여년의 시차를 금세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담백하지만 성실하고 세심하지만 곳곳 위트가 들어 있는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기쁨과 싱싱한 지적, 감각적 호기심이 자라나 당장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저자 이준형은 시대 악기 연주가 단순히 옛 악기로 옛 음악을 ‘복원’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는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예술 행위”라고 강조한다. 음악이 아무리 낡아가더라도 연주는 늘 새롭다. 그것이 음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옛 음악, 새 연주』는 오래 잊혔던 음악 작품들을 건져 소개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고 감상의 폭을 넓혀 우리의 음악 감상 그 자체를 새롭게 해 줄 것이다.
저자 이준형은 옛 음악에 담겨 있는 시대상과 예술관을 세심하고도 친절하게 해설한다. 그 범위는 매우 넓고도 다채롭다. 악기와 악단, 연주법과 작곡법 등의 음악적인 면면도 있지만, 당시의 기관과 제도 같은 사회적 측면, 대항해 시대나 북해 한자 동맹의 융성,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 등과 같은 세계사적 변혁들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음악가들은 한 세계의 일원으로서 음악계뿐 아니라 보다 큰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해 냈다. 그러므로 옛 음악에 담긴 시대상과 미적 관념을 이해한다면 낯설거나 모호했던 고음악 감상의 폭이 보다 깊어질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 책은 모두 18장에 걸쳐 고음악의 대음악가 혹은 중요한 화두를 다룬다. 르네상스 최고의 음악가 조스캥 데프레에서 출발해 고전주의 시대의 베토벤, 낭만주의의 쇼팽에 이르기까지 수백여년의 시간을 오가고,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필두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스페인, 영국과 러시아 등 유럽 전역을 종횡으로 오간다. 이준형의 서술은 간결하고 담백하지만, 펼쳐지는 고음악의 지형도는 더없이 다채롭고 흥미진진하다.
이 책은 결코 딱딱한 교과서적인 서술로 빠지지 않으면서도 음악사와 각 음악 장르사의 전반적인 변천을 성실하게 전달한다. 르네상스의 대가들인 플랑드르의 조스캥, 스페인의 들라뤼와 빅토리아, 영국의 윌리엄 버드를 통해 다성음악의 황금기를 만난다면, 몬테베르디와 헨델, 벨칸토의 종말 등은 오페라에 할애되어 있다. 독자는 오페라의 탄생과 창법의 변화, 시민 예술로서의 융성 과정을 자연스럽게 엿보게 된다. 한편 옛 ‘건반 음악’으로는 네덜란드의 스베일링크, 프랑스의 프랑수아 쿠프랭을 소개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탄생과 변천을 다룬다.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의 피아노 음악을 이해하는 깨알 같은 지식도 얻을 수 있다. 한편 독주에서 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규모의 기악 음악은 륄리, 코렐리, 비버, 비발디, 피젠델, 크반츠 등의 다양한 작품으로 소개한다. 물론 옛 시대는 종교의 지배력이 강했으므로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알레그리의 〈미세레레〉나 바흐의 〈마태 수난곡〉 같은 종교 음악의 세계 또한 만나게 된다.
한편 이 책에는 각 장마다 저자가 추천하는 음반 정보를 수록했다. 음반 혹은 음원을 검색할 때의 수월성을 고려해 원어로 실었다. ‘옛 음악’을 ‘새 연주’로 들으며 책을 읽어나가기를 권한다. 새로운 지식이 더 넓은 이해로 가는 길을 열어주면 옛 음악과 독자 여러분 사이에 놓인 수백여년의 시차를 금세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담백하지만 성실하고 세심하지만 곳곳 위트가 들어 있는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기쁨과 싱싱한 지적, 감각적 호기심이 자라나 당장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저자 이준형은 시대 악기 연주가 단순히 옛 악기로 옛 음악을 ‘복원’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서는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예술 행위”라고 강조한다. 음악이 아무리 낡아가더라도 연주는 늘 새롭다. 그것이 음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옛 음악, 새 연주』는 오래 잊혔던 음악 작품들을 건져 소개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고 감상의 폭을 넓혀 우리의 음악 감상 그 자체를 새롭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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