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동양철학의 이해 (독서>책소개)/2.한국철학사상

율곡이이 시선

동방박사님 2021. 12. 22.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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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율곡(1536~1584)은 조선 중기의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풍요로운 문운(文運)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명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제로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인자한 보살핌 속에서 일찍부터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16세 때 유가경전은 물론 제자서를 두루 섭렵하고, 나아가 불학(佛學)에 대한 관심까지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우리나라의 주기론을 정립하면서 이후의 기호학풍의 밭을 일군 학자이다. 그가 젊어서 책제(策題)에 응하여 지은 『천도책(天道策)』은 중국의 학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이름을 떨칠 만큼 탁월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었다. 율곡의 주기론은 당신의 성리학이 다소 관념적으로 흐르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자연 자체의 생성원리로부터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여 제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의 실체인 기(氣)를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였고 여기에서 인성(人性)도 또한 자연의 본질인 기(氣)를 근거로 하여 논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탓에 자연 율곡은 관념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때로는 선조에게 『진시폐소(陳時弊疏)』, 『만언봉사(萬言封事)』 등의 시무책을 제시하여 민생을 확립할 것을 주장하면서 백성들의 고충을 덜고자 하였다.

목차

율곡전서 권1
화석정에서·13
우연히 흥이 나다·14
동문을 나서면서·15
도중에서·17
보개산을 바라보며·19
산 속에서·20
풍악산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늙은 스님에게·21
풍악산에서 본 대로 쓰다·24
송라암·29
보응 스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30
산 속에서 네 수를 읊다·31
우연히 시를 짓다·33
등불 아래서 글을 보며·34
배천 시냇가에서 달빛에 술잔을 기울이며·35
굽은 길에다 말을 세우고 가야산을 되돌아보며·36
석천의 시에 차운하다·37
성산에서 강릉을 향하여 가다·39
예안을 지나다가 퇴계 이 선생을 뵙고 율시를 바치다·40
국화 꽃잎을 술잔에 띄우고·42
강복사의 석불·43
시를 재촉하는 비·44
옥계동에 들어갔다가·45
고산 황기로의 죽음을 슬퍼하며·46
청송 선생의 은거를 찾아가서·47
개천으로 돌아가는 토정 이지함을 송별하다·48
상산동에서·49
청송 선생을 곡하다·50
오원역에 쓰다·51
하수에 이르러 탄식하다·53
연경 가는 길에서 아우에게 부치다·55
늙은 스님의 시축에 쓰다·57
유명 스님이 매우 귀찮게 시를 지어 달라고 하므로 붓 가는 대로 써서 주다·58
금강연·59
다시 월정사에서 노닐다·60
내산에 들어가려다 비를 만나고·61
산인에게·62
산인의 시축에 차운하다·63
다시 풍악산에서 노닐고 내산으로 들어가려다 비를 만나다·64
산인 설의에게·65
상산동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옛일이 생각나서 느낀 대로 짓다·66
어떤 스님이 시를 지어 달라고 하기에 퇴계의 시에 차운하다·67
심장원에게 주다·68

율곡전서 권2
정철이 약속을 해 놓고도 집에 있지 않아서·71
구월 보름밤에 달을 보고·72
퇴계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며·73
의령감 윤조의 죽음을 슬퍼하며·74
퇴직을 간청하여 허락받고 임금 은혜에 감동하여·76
세 번이나 상소한 뒤에 물러나길 허락받고서·79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면서 안뇌경이 보내온 시에 화답하다·80
달밤에 옛 친구가 쟁을 켜는 소리를 듣고서·81
김장생이 석담에 찾아와 글을 배우다가 평양으로 돌아간다기에 시를 지어서 주다·83
인감 스님이 시를 지어 달라고 하기에·84
사암 상공께 올리다·85
유월 가뭄을 걱정하면서·86
비 온 뒤에 송대립이 보낸 시에 차운하다·87
허봉이 찾아왔기에 시를 지어주다·88
배 안에서 남산을 바라보며·90
눈 속에 소를 타고 성혼을 찾아갔다가·91
조각배에다 거문고를 실었지만·92
노랫소리를 들으면서·93
한데 앉아 달빛에 술을 마시다·94
소리꾼 벽도가 흥을 돋구어·95
호연정 술자리에서 운수 스님에게 지어 주다·96
세상맛이 물보다 싱거우니·97
스님에게 주다·98
은병정사의 학도들에게 부치다·99
큰형수의 죽음을 슬퍼하며·100
서울을 떠나 해주로 내려가며·103

율곡전서 습유 권1
강릉으로 귀성하는 장윤을 보내면서·107
청감당에서 중온의 시에 차운하여·108
아버님의 삼년상을 마치고 형님과 헤어지며·109
강을 건너는 항량을 보내며·111
대화 가는 길에서·115
보산역에 쓰다·118
국화를 심다·119
회원관 벽에서 장인의 필적을 보고 서글픈 느낌이 들다·120
인정과 법은 나란히 하기 어려워·121
고향으로 가는 길에·122
눈을 씹으며·123
스님의 두루마리에 차운하다·124
경혼에게 주다·125
최황의 시에 차운하여 헤어지는 마음을 말하다·126
고향 시골집에서 아우와 헤어지다·128
승지 정유일을 곡하다·129
천연스님에게 지어 주다·130

부록
율곡의 생애와 시/윤기홍·135
연보·140
原詩題目 찾아보기·142
 

저자 소개

저 : 율곡 이이 (李珥, 석담, 숙헌)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로 꼽히는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 오죽헌에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파주 율곡으로, 그는 율곡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여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한 이래 모두 아홉 번의 과거에 합격하고 그중 일곱 번 장원하였다.

선조 2년,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은 일종의 연구 휴가인 사가독서를 얻는다. 그 기간에 열정적인 정책 제안서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제출하지만 그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실망한 그는 관직을 떠난다. 이후 은거와 출사, 사직을 반복하다 38세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다시 중앙 정치에 복귀한다. 이듬해 정3품 우부승지가 된 율곡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당황한 선조가 신하들에게 제언을 구하자,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 밖에도 평생 학문과 저술에 힘써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선비들의 기본 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많은 저술을 남긴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 해 7월에 「인심도심설」을 지어 바쳤고 『김시습전』을 지었다. 8월에는 형조판서가 되고, 9월에는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선조의 신임을 받아 고위직을 두루 거친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선조 16), 조정에 나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 군정을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이유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개혁안들은 당시 거의 채용되지 못했으나 그의 학문과 경세 사상은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인들에게 계승되었다.

역 : 허경진

 
현 淵民學會 편집위원장. 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피난 시절 목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시를 썼으며, 1974년 「요나서」로 연세문학상을 받았다. 대학원 시절 도서관 고서실에 쌓인 한시 문집을 보고 독자로 하여금 쉽게 다가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한시 번역에 힘써 최치원부터 황현에 이르는 ‘한국의 한시’ 40여 권을 출간했으며, 앞으로 100권을 채우는 것이 꿈이다.

지은 책으로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조선의 중인들』, 『주해 천자문』, 『한국의 읍성』, 『악인열전』, 『허균 평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다산 정약용 산문집』, 『연암 박지원 소설집』, 『서유견문』, 『삼국유사』, 『매천야록』, 『택리지』, 『한국역대한시시화』, 『허균의 시화』 등이 있다. 특히 외국 도서관에 있는 우리나라 고서를 조사 연구해 간행한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의 한국 고서들』은 전공자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큰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