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자유테마여행 (2006~) <여행지> 392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수구대회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수구대회 남아공화국과 우리나라와 수구경기를 관람하였는데 선수단구성이 이 얼마안되어서 성적은 부진하였지만 수구경기는 물속에서 공을 던져 상대골을 넣어 득점하는 경기인데요 팀당 7명의 선수가 매경기 7분씩 4피리 어드 까지 진행합니다 수영종목..

부산 박차정의사 생가

박차정의사 생가부산시 동래구 칠산동 319-1번지에 위치한 박차정의사 생가는 1944년 34세의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항일 운동가 (박차정 1910.7.7.~1945.27)의사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출생한 박차정의사는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현 동래여자고등학교)을 입학하여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동래지부 회원. 동래 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졸업한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조사연구부장, 상무위원, 선전부장, 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항일 운동에 이바지 하는 한편, 그 해 12얼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

모도 해안둘례길

모도의 유래는 한 어부가 고기를 낚기 위해 그물을 쳐 두었는데 그물에 고기와 함께 띠(풀)가 섞여 있었다 하여 띠엄이라 불리다 띠 모자를서 모도로 불리게 되었으며, 장봉도의 경우 섬의 모양이 길고 봉우리가 많아 장봉도라 명명하게 되었다. 현재의 북도면은 신도, 시도, 모도 세 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며, 영종 삼못선착장에서 출발한 도선이 신도를 경유하여 장봉도에 40분 내외면 도착할 수 있어 마치 하나의 섬처럼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천공항의 개항과 더불어 북도면이 도심과 고도의 접근성을 이루면서 옹진군에서 유일하게 도심에서 1시간 내외에 도착할수 있는 섬이 되어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 풀하우스, 슬픈연가, 연인 등이 촬영되어 새로운 관광지로서 조명 받고 있다.

시도에서 조망한 강화도 마니산

마니산 첨성단은 단군이 하늘에서 제사를 올리기 위해 마니산에 쌓은 제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둥근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여러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쟁 본래의 모습은 찿을 수 없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사찰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부첨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의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적이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시도

북도면 신도.시도, 모도, 장봉도의 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강화현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넓고 비옥한 목초지를 바탕으로 말을 사육하는 국영목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914년 강화군에서 부천군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으며 1968년 장봉도에서 장봉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도면을 이루는 섬인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의 각 명칭에는 그 유래가 있다. 먼저 신도는 섬 주민들의 인심이 후하고 정직하여 서로 믿고 살아간다는 뜻을 믿을 신자를 사용하여 신도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화도 마니산의 궁도 연습장에서 활 연습을 ..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신도

북도면 신도,시도, 모도.장봉도의 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강화현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넓고 비옥한 목초지를 바탕으로 말을 사육하는 국영목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914년 강화군에서 부천군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으며 1968년 장봉도에서 장봉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도면을 이루는 섬인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의 각 명칭에는 그 유래가 있다. 먼저 신도는 섬 주민들의 인심이 후하고 정직하여 서로 믿고 살아간다는 뜻을 믿을 신자를 사용하여 신도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화도 마니산의 궁도 연습장에서 활 연습을 할..

인천 삼목항. 신도.모도.시도 항구.

북도면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의 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강화현에 속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넓고 비옥한 목초지를 바탕으로 말을 사육하는 국영목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1914년 강화군에서 부천군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으며 1968년 장봉도에서 장봉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인천광역시로 통합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도면을 이루는 섬인 신도(信島) 시도(矢島), 모도(茅島) 장봉도(長峰島)의 각 명칭에는 그 유래가 있다. 먼저 신도는 섬 주민들의 인심이 후하고 정직하여 서로 믿고 살아간다는 뜻을 믿을 신자를 사용하여 신도로 불리게 되었으며 강화도 마니산의..

영종도 구읍뱃터 둘레길

영종구읍뱃터 둘레길 구읍뱃터 앞에 유채꽃이 아름답다, 예전에는 갯벌 이었던 곳이다, 이제는 갯벌에 흙을 덮어 땅으로 변해 아파트 단지가 들어 섰다. 바닷가 해변 뻘이보이는 곳은 예전 구읍배터 옆에 배 두세척 정도의 수리를 하는 작은 조선소가 있었는데. 이제는 해변 둘레길과 바이크도 이용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영종도

영종도 영종도는 나에게 참 친숙고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영종도는 행정구역이 지금은 인천광역시이지만 1960년대에는 옹진군에 속해있는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큰 섬이다. 섬에는 중산리, 운서리. 운북리. 운남리로 나뉘어져 있었도, 현재 사진으로 보이는 곳이 구읍 뱃터이다. 이곳을 통해서 인천으로 여객선이 하루에 다섯번 다녔다. 지금은 월미도에서 출항하지만 이전에는 연안부두에서 출항하고 1960~70대에는 인천 북항 (만수동지역)에서 출발하였다. 구읍뱃터에 내리면 영종도를 순회하는 버스를 타고 마을마다 버스를 내리고 (기억나는 마을이름: 동계.장춘 젖게. 전수,여담포) 영종 마을중에서는 가장 큰 마을은 전수이다. 1980년 까지만 해도 영종은 전기가 안들어와서 초롱불을 키고 사는 오지..

월미도 -> 영종도 뱃길

월미도 월미도는 인천에 가까운 섬이었다. 소월미도도 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점령했던 장소이고 1960년대에는 월미도와 인천육지 사이에는 염전이었다 어린시절 국민학교 입학전 우리집에서 과외를 가르키던던 선생님생(신학대학생)님과 6명의 어린 소년들이 월미도로 소풍을 떠난 기억이 난다. 그당시 기억으로 월미도 앞에는 염전이 있어 염전뚝방으로 걸어서 월미도에 갔던 기억이 있다. 소월미도에는 60년대인데도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 소월미도 해수욕장에서 수영복을 입고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후 월미도는 해군부대로 군사구역이 되어 월미산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었다. 월미도 앞 해변거리는 그때에도 회센타와 젊은이들이 많이모이는 인천의 명소로 자리메김하고 있다. 2000년 부터는 월미도도 개방되어 공원화..

충남 심훈기념관

심훈 (1901~1936)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挺)의 3잠 1녀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도, 1917년 왕족 이해영(李海暎) 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토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에 입학 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 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관심을 기울였다.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長恨夢)이 영화화 될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영화 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유관순기념관

유관순 (1902~1920)유관순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에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으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압박에 저항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추모의 염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작은 의문이 따른다. 박은식의 [대한독립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만세독립 당시 무려 7천여명의 생령이 일제 총칼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 수많은 애국지사들 가운데 유관순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경 이화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설립하면서 부터였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로서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고, 황도..

왕실수문장 교대식

수문장 교대의식의 역사 조선시대 수문장제도는 왕권의 강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국가방위와 같은 개념이었다. 수문장제도는 조선의 8대 임금 예종이 즉위하던 해 (1469년)에 처음으로 수문장이 배정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9대 임금 성종 시절에 제도화를 거친 후 경국대전에 수문장제도 운영규정이 수록되면서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곳 덕수궁 대한문에서의 수문장 교대의식은 1906년 대한문이 덕수궁의 정문로 정해지면서 시작되었다.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서울의 전통문화행사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

한국추상조각의거장 - 우성 김종영

김종영 미술관 지난 세기는"서화에서 미술로 전환기"였다. 안타깝게도 서양미술이 도래하던 시기가 일제강점기가 겹쳐 미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여러가지 문제가 지금 우리 미술계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어느사회분양와 마찬가지로, 지난세기 우리미술계는 맥락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