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기독교-개신교 (책소개)/3.종교개혁의시대

종교개혁, 길 위에서 묻다 : 열흘 간의 다크투어리즘

동방박사님 2022. 4. 6.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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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종교개혁의 공간과 그곳의 역사에서 지혜를 구하는 다크 투어리즘

2017년이면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축제 차원에서 많은 볼거리를 제시하는 여행서가 여러 권 출간되었으나, 정작 종교개혁의 의미를 묻거나 그 의미를 성찰하고자 하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500년이라는 간극이 그때의 암울함이나 치열함을 모두 거둬낸 느낌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면면을 살펴본다면 ‘축제’만 내세우는 지금의 현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부족한 생각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여타의 여행 안내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첨예하게 대립하던 신앙의 장소를 찾아가 역사를 되짚어보고 진실을 물으며, 그 속에서 지혜를 구하는 다크 투어리즘의 여정을 담았다.
루터의 심문 장소인 보름스에서 시작하는 열흘 정도의 여행 계획에 영국을 넣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유럽 대륙의 개혁만으로도 종교개혁의 명암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목차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1
보름스: ‘시대정신’을 심문하다
아이제나흐: 독일어 성서의 산실
뮐하우젠과 바트 프랑켄하우젠: 자유를 향한 열망
나움부르크: [슬픔의 예수]로 문화 개혁의 길을 열다
라이프치히: 토론과 계몽 그리고 음악의 도시
그리마의 님브셴 수녀원: 중세 여성들의 슬픈 흔적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이름만 남은 대학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2
프라하: 지도자 없는 혁명의 도시
뉘른베르크: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최초의 제국도시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라이: 거상이 남긴 최초의 사회주택
[곁길 산책] 수도원 가도: 나치의 도망을 도운 성직자들
취리히: 개혁교회 전통의 시원이 되다
바젤: 에라스뮈스와 유럽 인문주의자들의 고향

열흘간의 다크 투어리즘 3
제네바: 칼뱅의 이주민 교회가 주도한 종교개혁
스트라스부르: 도망자들의 개혁 도시
에슬링겐: 마녀사냥의 아픈 기억을 역사로 남긴 도시
[곁길 산책] 프랑크푸르트: 재등장한 반유대주의
뮌스터: 새장 안에 갇힌 왕
네덜란드의 도르트 교회회의: 종교와 정치의 혼합
스웨덴: 피로 물든 유럽 최초의 루터주의 왕국
 

저자 소개

저 : 장수한
 
충남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서양사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마쳤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 역사·철학부 박사 과정에서 독일사를 연구하면서 사회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요리학교 I.C.I.F.에서 요리 공부를 했고 에스프레소의 매력에 흠뻑 빠져 독일로 가 커피 로스팅을 배웠다. 그 후 젤라또와 초콜릿을 배우는 등 유럽의 카페문화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침례신학대학...
 

책 속으로

선행을 하거나 면벌부를 구매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은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기만 하면 신의 은총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루터의 주장은 종래까지 가톨릭 교회가 강조해온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 성만찬과 같은 성례전의 엄수, 성지순례나 성자숭배와 같은 관행, 독신 등 모든 가톨릭 교회의 관습을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변혁의 언어였다. 이 점에서 루터의 깨달음은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루터는 자신의 고민을 혼자 안고 있지 않았고, 글로 표현했다. 자신의 깨달음을 알리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보름스: ‘시대정신’을 심문하다」중에서

성서를 읽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사회계층 역시 확대되고 있었다.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던 성서가 도시 시민 계층과 일부 농민들의 손에도 쥐어졌다. 루터의 『신약성서』는 당대의 모든 지성인들뿐만 아니라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당대의 새로운 변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커다란 자극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대척점에 서 있던 요한 코클레우스는 “모든 사람이 이 번역본을 읽고, 그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다”라며 개탄했다. ---「 아이제나흐: 독일어 성서의 산실」중에서

뮐하우젠을 거점으로 한 튀링겐 지역 농민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은 바로 뮌처다. 농민전쟁 과정에 루터를 비롯해 성직자 대부분은 농민군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를 ‘흉악범’으로 몰아붙인 뮌처는 농민의 편에 서서 용감하게 설교하고 발언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 참가한 대표적인 성직자였다.
뮌처는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의 신학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루터의 신앙을 ‘죽은 문자의 신앙’이라고 비판했다.…… 루터의 죽은 믿음에 반대해 그는 ‘살아 있는 성령의 신앙’을 추구했다. ---「뮐하우젠과 바트 프랑켄하우젠: 자유를 향한 열망」중에서

나움부르크의 대성당이 보여주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작품들은 8세기나 12세기에 일어난 이전의 르네상스와 또 다른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으나, 이제 르네상스 운동은 로마와 그리스의 정신이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권위 있는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 그 중요한 변화였다. 그래서 고대와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살던 시대를 동일시하는 한편, 그사이 기간을 ‘중세’로 부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요 관심사가 바뀌었다. 기껏해야 고대의 저작에 관심을 기울이던 이전과 달리, 고전을 통해 인간의 실제성과 가치로 관심을 이동시켰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르네상스’를 운운하게 되는 근거다. 인간의 존엄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슬픔의 예수]와 [에케하르트와 우타 부인]은 바로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 나움부르크: [슬픔의 예수]로 문화 개혁의 길을 열다」중에서

가장 절친한 동료였던 멜란히톤은 이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아니 참석하지 않았다는 편이 오히려 정확할지 모른다. 그때는 비텐베르크에서 가까운 바트 프랑켄하우젠에서 5000명이 넘는 농민들이 영주들의 칼과 창에 죽어 피의 강을 이룬 지 몇 주가 지나지 않았고, 여전히 독일 전역에서 농민군과 귀족 사이에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카타리나는 후에 훌륭한 내조자임을 스스로 입증하기는 했지만, 루터가 택한 결혼식 시기는 적절하지 않았다. 멜란히톤은 이 결혼을 “미숙한 행동”이라며 비판했다. 루터의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그의 결혼은 자신의 동시대인에 대한 비인간적 태도를 드러내 사회의식의 부재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리마의 님브셴 수녀원: 중세 여성들의 슬픈 흔적」중에서

최근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 신학 대학들은 이 시대에 어떤 대응을 선택할까? 대학의 홍보비를 늘리거나 강사들의 수를 대폭 줄이고 교수들이 더 많은 강의를 맡는 것으로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특히 두려운 것은 오늘의 한국 신학 대학들이 위기를 맞아 정체성 확립을 기치로 내걸면서 근본주의적 신학으로 경도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 본연의 ‘자유’ 정신을 압도하려는 이러한 움직임이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비텐베르크 대학을 비롯해 여타 대학의 역사에서 충분히 확인된 사실 아닐까?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이름만 남은 대학」중에서

지금 콘스탄츠의 항구 옆 호텔이 후스의 처형을 결정한 공의회 장소이고, 주택들 사이에 서 있는 큰 돌에 새겨진 “요하네스 후스, 1415년 7월 6일”이라는 글자만이 그곳에서 그가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물론 그는 지금도 콘스탄츠에서 개혁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불의에 맞섰던 그의 위대한 정신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후스의 흔적은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우리는 성공한 개혁가에게는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실패한 개혁가들은 방치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프라하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콘스탄츠는 후스가 화형을 당한 장소 아닌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화형’에 처하고도 그곳을 기억의 뒤안길로 밀어버린다면, 그렇게 역사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면 앞으로 힘을 가진 사람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안타깝게도 콘스탄츠에는 그를 기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프라하: 지도자 없는 혁명의 도시」중에서

한편 황제와 교황이 보낸 대사들은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 뉘른베르크 시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특히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종교를 둘러싼 싸움이 위험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1524년 6월 2일 포펜로이트에서 온 농민들이 시청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농민들은 성직자에게 내온 ‘십일조’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곡물을 십일조로 냈을 뿐만 아니라 수확한 모든 과일에조차 십일조를 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아주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낸다고 해서 의로움을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고 설교하는 장크트 로렌츠 교회의 설교자들에게로 몰려들었다. ---「뉘른베르크: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최초의 제국도시」중에서

1516년부터 야코프 푸거는 아우크스부르크의 가난한 수공업자들과 일용 노동자들을 위해 집을 짓기로 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시 들머리에 있는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이 딸린 집 부지를 미리 구입하고서 1521년 여름 일종의 헌장을 발표했다. 그것은 기존의 건축물이 아니라 새로운 주거 단지를 푸거가의 재원으로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그의 시대를 넘어 사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도였다. 낡은 집을 철거하는 작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대지 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상적인 작은 도시가 건설되었다. 요양원이나 임시 거처가 아니라 아주 훌륭한 주거용 주택이었다.…… 사람들이 후에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푸거라이’라고 부른 이 ‘작은 도시’가 보여준 진정한 지혜 중 하나는, 이른바 이 ‘은총의 집’에 들어온 가족들이 각기 사회적 존재로서 개성을 보호받고 굴욕이 아닌 긍지에 찬 자의식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입주자들은 당대에도 그랬고 후대에도 아주 적은 금액을 임대료로 부담해야 했다. 건물을 유지하는 데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였지만, 그것은 입주자들이 공짜로 살지 않는다는 자긍심의 표시였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라이: 거상이 남긴 최초의 사회주택」중에서

종교개혁의 여행길에서 벗어난 일탈이기는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가들을 그토록 엄격히 이단으로 처벌하고 심지어 화형에 처한 가톨릭 교회는 물론이고, 교회의 개혁을 그토록 열망하던 프로테스탄트 교회 역시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력자들의 해외 망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 범죄자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주장한다면, 전쟁 중에 고통을 당한 사람들, 정치적 저항을 택한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교회는 왜 그토록 무자비했을까? 이 극명한 대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곁길 산책' 수도원 가도: 나치의 도망을 도운 성직자들」중에서

베른 논쟁 이후 가톨릭을 지지하던 칸톤들의 위기감이 높아졌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츠빙글리 또한 1530년대 초부터 스위스 연방의 종교개혁 완성이라는 목표를 열정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츠빙글리는 가톨릭 칸톤들을 향해 로마 가톨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복음 선포를 시행할 것과 용병제에 근거한 연금 제도를 철폐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전면적인 무장 공격을 주장했다. 개혁을 받아들인 칸톤들은 만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자신들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했다.
10월 11일 카펠 인근에서 개혁파와 가톨릭 사이에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취리히 개혁파는 350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가톨릭 측 병사는 그 두 배에 이르렀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성직자 25명을 포함한 취리히군 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결과는 츠빙글리의 예상과 달랐다. 승리한 가톨릭군의 운터발덴 출신 사령관 푸킹거는 츠빙글리를 칼로 찔러 죽이고 부하들을 시켜 그 사지를 찢은 뒤 불태웠다. 그가 추앙받는 성유골로 남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그의 죽음에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성서의 글귀를 인용했다. ---「취리히: 개혁교회 전통의 시원이 되다」중에서

당연히 그는 ‘후마니타스’를 문헌 연구와 연결시켰으며, 인문학 연구는 종교와 신앙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에라스뮈스는 ‘후마니타스’라는 개념으로 정신교육, 인격 형성, 내면의 종교성 등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스도인의 후마니타스’라는 말을 통해 그는 사회 부문에서의 모범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의 상대적인 고유 가치와 그 존엄성을 새롭게 강조했다. 이는 중세 교회의 인간 이해와 달랐을 뿐 아니라 루터의 ‘죄’ 많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과도 크게 대조된다. 에라스뮈스의 영향은 실로 깊고 넓었다. 그는 루터의 개혁에 용기를 불어넣고 개혁의 도구를 손에 쥐어주었을 뿐 아니라 츠빙글리의 개혁 사상에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칼뱅의 인문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칼뱅이 성서문자주의에 묶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에라스뮈스에게서 받은 자극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바젤: 에라스뮈스와 유럽 인문주의자들의 고향」중에서

스페인 출신으로 독자 노선을 걷던 사상가 세르베투스는 출판업자, 지질학자, 천문학자,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 비판적인 주석을 달아 보냈을 뿐 아니라 1553년에 『기독교의 재건』이라는 책을 출간해 칼뱅의 주요 논지들을 부정하는 한편, 원기독교로의 회복이라는 인문주의와 재침례파의 이상을 지지했다. 세르베투스는 그해 8월 리옹의 가톨릭 재판정에 회부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가까스로 탈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1553년 10월 칼뱅의 개혁 도시 제네바 인근에 있는 샹펠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주요 죄목은 삼위일체론과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세르베투스의 심문 과정에 칼뱅은 주요 증인이었다. 제네바에서 그의 증언은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르베투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도록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칼뱅이 개혁을 지도하는 도시에서 그것도 종교적 이유로 칼뱅의 적극적인 개입 없이 화형을 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지에 가까운 주장이다. 칼뱅은 그 이듬해인 1554년 『미겔 세르베투스의 오류에 대항하는 정통 신학의 변호』를 출간해 이단을 억누르고 극단적인 경우 사형에 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공직자의 의무라고 선언함으로써, 세르베투스의 처형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제네바: 칼뱅의 이주민 교회가 주도한 종교개혁」중에서

스트라스부르가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인쇄술의 발전이다. 15세기 인쇄술의 발전은 지식 기술의 혁명이었다. 서기 100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지식 기술 분야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혁명이라고 할 이 혁명은 적어도 크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성취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조건은 지식의 확산에 대한 수요다. 대학과 상업의 발전이 이런 수요를 크게 증대시켰다. 두 번째 조건은 수없이 많은 글자를 생산할 재료다. 다행히 활자를 주조하는 데 필요한 납은 이미 충분히 있었고, 종이 역시 활판인쇄기의 개발을 전후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재료들은 활판인쇄술의 발전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곧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구텐베르크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그래서 후에 ‘천년의 인물’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스트라스부르: 도망자들의 개혁 도시」중에서

종교개혁 자체가 마녀재판을 더욱 부추겼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종교적 갈등과 종교전쟁 시기에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마녀재판이라는 극단의 방법을 각기 자기 분파 신앙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녀재판의 종식은 종교전쟁의 여파가 잦아들고 새로운 정신적 기풍이 마련되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기다려야만 했다. ---「에슬링겐: 마녀사냥의 아픈 기억을 역사로 남긴 도시」중에서

루터에 의해 오히려 강화된 반유대인 정서는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가로채고 있다는 의구심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프랑크푸르트는 그 불꽃을 보여준 도시였다. 이 도시의 장인들과 상인들은 네덜란드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주해온 것이 경제 불황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민들의 불만은 1614년 8월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테러로 이어졌다. 시민들이 유대인들의 집을 약탈했고, 그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도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고 그들은 상업에서 능력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좀바르트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준거라고 본 복식부기를 채택해 금융업에 뛰어드는 등 자본주의적 경제를 선도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그들을 대체할 인적 자원이 아직까지 없었다. 1616년 시의회는 이 반란의 주동자를 처형하고 유대인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유대인들은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고 반란의 와중에 파괴된 유대인 공동체도 서서히 복구되어 유대인들은 이전의 경제적 위상을 회복했다. ---「'곁길 산책' 프랑크푸르트: 재등장한 반유대주의」중에서

재침례파가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와 신앙의 혼합을 당연시하는 가톨릭이나 루터주의와 달리, 자유교회를 지향한 데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재침례파에 대한 박해와 탄압은 뮌스터 시에 이른바 ‘천년왕국’이 건설되기 전부터 이미 여러 지역에서 혹독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재침례파를 따르는 무리들은 약 1만 2000명에 달했는데, 1527년부터 1533년 사이에 적어도 679명의 재침례파가 처형되었다. 티롤과 바이에른처럼 확고한 가톨릭 권력이 지배하는 지역 대부분에서는 물론이고, 쿠어작센처럼 개혁주의를 표방한 행정 당국이나 스위스의 도시 정부 역시 드물지 않게 재침례파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했다. 재침례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투쟁하거나 ‘전투’를 지지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어디에서나 국가교회에 반대했고 그것이 탄압과 추방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
---「뮌스터: 새장 안에 갇힌 왕」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대의 전선에 선 신앙, 개혁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같은 선구자들이 사후와 생전에 화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지나, “오로지 믿음만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시대정신을 표현한 마르틴 루터는 역사상 길이 남을 일대 변화의 포문을 열며,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신앙 개혁 운동이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였던 유럽에서 종교개혁은 그 시대의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치는 전선(戰線)이 되었다. 사람들의 삶이 교회와 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의 문제에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집약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극단의 대립으로 표출되었다. 파노라마 박물관을 세우게 한 피의 참화 농민전쟁이 아니더라도, 핍박과 대립, 죽음이 드리운 어두운 양상은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었다.

첨예하게 대립하던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그 진실과 한국 교회의 길을 묻는다

가톨릭의 탄압으로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개혁가들은 개혁의 길에서 숱한 위기에 처했으며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다. 너무나도 암울했던 그 시대에 마르틴 루터는 당대 교회와 성직자가 누리던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고 기독교 세계로 가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장 칼뱅은 신의 전지전능함과 ‘예정’을 내세워 동시대를 뒤덮고 있던 모든 주술(呪術)을 타파해버림으로써 합리적인 사회로 가는 변혁의 길을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곧바로 영방 제후들의 권력과 타협하면서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았고, 칼뱅은 자신의 개혁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해 신학을 활용했다.
개혁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했고, 자신들이 받은 탄압을 다른 개혁 세력들에게 혹은 이견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 루터나 칼뱅 같은 주류 종교개혁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던 대안 세력 역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와 ‘천년왕국’이라는 미래를 선택함으로써 인간과 사회 현실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한계를 드러내며 좌초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에 자극을 받은 종교개혁은 그 인문주의적 지향을 잃어버리고 개혁의 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양상을 드러냈다. 이렇기에 종교개혁은 그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볼거리와 여행 코스 등을 소개하는 일반적인 여행서가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한국 교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갈 길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