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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루터 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3대 논문, 정본 역할을 하는 바이마르 판으로 번역하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중세 후기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해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서와 믿음에 바탕을 둔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켜 서양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883년 이후 그의 전 저작과 글을 모아 편집, 출간해오고 있는 바이마르 판 『루터 전집』(D. Martin Luht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은 물경 60,0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것은 그가 단순히 종교개혁을 촉발한 운동가가 아니라 서양 근대의 시원을 연 위대한 사상가였음을 증명해준다. 사실상 그렇게 많은 문헌들은 1517년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못으로 박은 이후, 실질적으로 종교개혁이 촉발되면서부터 수많은 가톨릭계 사람들과의 치열한 논쟁과정 속에서 생성된 지적 결과물로서,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이후 인류사에 대단한 파급 효과 ― 커다란 의미에서 ‘근대’라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환점 ― 를 가져왔다.
이 가운데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내는 루터의 3대 논문은 종교개혁자가 써낸 가장 중대한 텍스트로, 이 글들의 가치는 그것들이 시대와의 생생한 대결에서 직접 탄생한 고백서이자 그가 본질적인 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종교개혁의 대강령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실질적으로 루터 신학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루터는 이 글들을 95개조 반박문 공표 이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조여 오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함은 물론 예언자적 열정에 불타 1520년 8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단 3개월에 걸쳐 작성했다.
이처럼 루터와 그의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루터의 3대 논문은 국내 출판계에서 여러 차례 번역본이 출간된 바 있으나, 대부분 중역(重譯)이었거나 판본이 불분명했던 것이 사실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새롭게 펴내는 이번 번역본은 현재까지 루터 저작의 정본 역할을 하고 있는 바이마르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라틴어에서 번역, 루터가 의도한 바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중세 후기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통해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을 강조하면서 오직 성서와 믿음에 바탕을 둔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켜 서양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883년 이후 그의 전 저작과 글을 모아 편집, 출간해오고 있는 바이마르 판 『루터 전집』(D. Martin Luht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은 물경 60,0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것은 그가 단순히 종교개혁을 촉발한 운동가가 아니라 서양 근대의 시원을 연 위대한 사상가였음을 증명해준다. 사실상 그렇게 많은 문헌들은 1517년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못으로 박은 이후, 실질적으로 종교개혁이 촉발되면서부터 수많은 가톨릭계 사람들과의 치열한 논쟁과정 속에서 생성된 지적 결과물로서, 종교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이후 인류사에 대단한 파급 효과 ― 커다란 의미에서 ‘근대’라 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환점 ― 를 가져왔다.
이 가운데 이번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펴내는 루터의 3대 논문은 종교개혁자가 써낸 가장 중대한 텍스트로, 이 글들의 가치는 그것들이 시대와의 생생한 대결에서 직접 탄생한 고백서이자 그가 본질적인 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종교개혁의 대강령을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실질적으로 루터 신학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루터는 이 글들을 95개조 반박문 공표 이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조여 오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함은 물론 예언자적 열정에 불타 1520년 8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단 3개월에 걸쳐 작성했다.
이처럼 루터와 그의 사상 전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루터의 3대 논문은 국내 출판계에서 여러 차례 번역본이 출간된 바 있으나, 대부분 중역(重譯)이었거나 판본이 불분명했던 것이 사실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새롭게 펴내는 이번 번역본은 현재까지 루터 저작의 정본 역할을 하고 있는 바이마르 판본을 저본으로 삼아 라틴어에서 번역, 루터가 의도한 바가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
목차
옮긴이의 말 9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 그리스도인 신분의 개선에 대하여」 21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139
면죄부는 로마 아첨꾼들의 허접스러운 것이다 142
교황청은 로마 주교의 힘센 사냥 집단이다 143
세례의 성례전에 대하여 199
고해 성사에 대하여 229
견신례에 대하여 242
혼인에 대하여 244
서품에 대하여 263
최후 도유(塗油)의 성례전에 대하여 278
「교황 레오 10세에게 드리는 루터의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291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독일어 판 서문] 306
마르틴 루터의 논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307
바이마르 판의 사용 판본 목록 353
부록: 95개조 반박문 369
해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 핵심을 보여주는 3대 논문의 의미 379
연보 411
찾아보기 415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 그리스도인 신분의 개선에 대하여」 21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139
면죄부는 로마 아첨꾼들의 허접스러운 것이다 142
교황청은 로마 주교의 힘센 사냥 집단이다 143
세례의 성례전에 대하여 199
고해 성사에 대하여 229
견신례에 대하여 242
혼인에 대하여 244
서품에 대하여 263
최후 도유(塗油)의 성례전에 대하여 278
「교황 레오 10세에게 드리는 루터의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291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독일어 판 서문] 306
마르틴 루터의 논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307
바이마르 판의 사용 판본 목록 353
부록: 95개조 반박문 369
해제: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 핵심을 보여주는 3대 논문의 의미 379
연보 411
찾아보기 415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일갈,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
독일어로 쓰인 이 논문은 독일 귀족에게 자기 신분 내에서 개혁을 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도탄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교를 개혁하라는 호소이자 일갈이다. 이는 곧 성직 신분이 교회 개혁의 의지가 없으므로 평신도(귀족 신분)들이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13세기 이래 평신도의 강력한 부상(浮上), 교회 문제에 대한 평신도의 점진적인 개입, 역으로 일방적으로 성직자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교회와의 경쟁은 마침내 절정에 도달했다. 로마에 대한 독일인의 증오는 이 평신도들의 자구책에서 유일한 배출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루터가 그러한 독일인의 증오를 대변하는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세속 권력에 대한 영적 권력의 우위성, 교황의 교리적 권한 및 공의회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거부하는 반면, ‘만인 사제직’― 이 개념은 바로 반(反)로마주의 운동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말이다 ― 을 강조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 신분에 속하며 그들 사이에는 직업적 차이 외에는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기능상의 차이가 있을 뿐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를 통해 루터는 로마의 수위성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며, 로마 교황만이 성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도 없을 뿐더러 교황만이 총회를 소집할 권한도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권한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교회 개혁을 기존 구조 안에서 달성하려는 희망을 포기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단초들이 이제 교회의 내적 토론 공간을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교회 직무상 통일체로서 이해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갱신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점차 숨김없이 드러냈다.
가장 치열한 신학적 논박,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제한된 독자를 위해 라틴어로 쓴 이 논문에서 루터는 로마에 신학적으로 가장 신랄한 공격을 가했다. 즉 교회는 스콜라주의 성례전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다만 7개 성례전에 대한 공격 이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성례전 개념, 즉 교회 전례에서 역사하는 신적 생명의 객관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객관적 성례전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이것을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와 열광주의자들에게 맡겼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처럼 루터는 이미 여기서 “이것은 내 몸이다”를 고수했다. 그는 세례와 성만찬만 허용하고 회개(고해 성사)는 유보 단서를 붙여 성례전으로 인정했다. 그는 성만찬에서 평신도가 포도주를 마실 자유를 요구하고, 전통적 ‘화체설’(化體說)을 일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그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 몸의 참된 임재를 확립한다. 그러나 이 ‘임재’의 양태 문제는 미결로 남겨둔다. 특히 루터는 끈질기게 미사 내지 성만찬이 제사라는 교리를 공격한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의 유언(언약)이다. 성만찬 제정의 말씀은 전체 복음의 요약이다. 이 언약을 믿음으로써 영접하는 대신 인간들은 이것을 제사, 즉 하나의 행위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물이 하나님께 바치는 인간의 제물이 되었다.
루터는 인간의 상태와 무관한 ‘작위적 행위’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특히 강하게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성례전적 은혜를 신앙으로써 받을 필요성을 강조한다. “믿으라, 그러면 이미 먹은(은혜를 받은) 것이다.” 수찬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적 임재를 일으킨다. 빵과 포도주의 본질은 변화 없이 남아 있다. 이로써 그것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사제의 성례전적 직무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사제직은 기껏해야 교육적 목회의 의미에서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성서를 아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존재 가치를 가질 뿐이다. 이처럼 종교적 삶의 핵심인 미사를 거부하고 4개 성례전을 거부한 이 논문에서 분명해진 것은 루터의 생각이 본질적으로 교리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빈번한 출간, 번역, 주해 그리고 찬반의 입장들은 이 논문이 완결된 주제를 갖춘, 가장 두드러진 종교개혁적 저서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개신교 교리 형성에서 이 논문의 모범적 의미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혁명을 강조한 이 논문은 많은 찬성 외에 더 많은 이반(離叛)을 초래했는데, 특히 교회의 계급서열적-성례전적 구조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개혁 가톨릭적-인문주의적 사고를 가진 자들에게서 특히 그러했다. 수년간 루터의 길에 공감했던 에라스무스(Erasmus)가 로마 교회와의 분명한 단절을 지지하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理想)을 대중에게 친근하게 설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이 텍스트는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에게 내린 파문 위협 교서인 ‘주여, 일어나소서’의 공표 이후, 교황에게 루터의 정통성과 선한 뜻을 확신시키기 위해 교황청과 연결된 카롤루스 밀티츠(Carolus Miltitz)의 권고로 쓰였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을 대중에게 친근하게 서술하기 위해 교회에 대한 공격이 후퇴한다. 따라서 이 글은 루터의 모든 글 가운데 가장 온건한 편으로 전체 그리스도교계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루터는 가톨릭 분위기에 가장 접근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기조에는 만인 사제직 개념이 깔려 있다.
루터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구원받은 인간의 진수인데,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예속되는 백성에 대립되는 그리스도교 자유의 백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율법적 경건의 위험에 대한 공격은 ‘자유’ 개념을 날카롭게 드러내게 만들었는데, 여기서 자유의 개념은 칭의론(稱義論)의 결과이다. 즉 인간의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율법의 예속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 함의를 밝힌 이 텍스트는 교회의 바빌론 포로가 칭의론 이해를 성례전론에 적용했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론은 칭의 받은 자의 삶에서 자유와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의 신학적 독창성과 학문적, 사상적 완성은 1520년의 다른 두 위대한 발언에 뒤처지지만 그것이 대중에 끼친 영향력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복음적 존재에 대한 인상 깊은 용이한 명제들로 말미암아 당대에 비교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독일어로 쓰인 이 논문은 독일 귀족에게 자기 신분 내에서 개혁을 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도탄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교를 개혁하라는 호소이자 일갈이다. 이는 곧 성직 신분이 교회 개혁의 의지가 없으므로 평신도(귀족 신분)들이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13세기 이래 평신도의 강력한 부상(浮上), 교회 문제에 대한 평신도의 점진적인 개입, 역으로 일방적으로 성직자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교회와의 경쟁은 마침내 절정에 도달했다. 로마에 대한 독일인의 증오는 이 평신도들의 자구책에서 유일한 배출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루터가 그러한 독일인의 증오를 대변하는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세속 권력에 대한 영적 권력의 우위성, 교황의 교리적 권한 및 공의회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거부하는 반면, ‘만인 사제직’― 이 개념은 바로 반(反)로마주의 운동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말이다 ― 을 강조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직 신분에 속하며 그들 사이에는 직업적 차이 외에는 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사회에서의 차이는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기능상의 차이가 있을 뿐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를 통해 루터는 로마의 수위성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며, 로마 교황만이 성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도 없을 뿐더러 교황만이 총회를 소집할 권한도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권한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교회 개혁을 기존 구조 안에서 달성하려는 희망을 포기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단초들이 이제 교회의 내적 토론 공간을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교회 직무상 통일체로서 이해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갱신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점차 숨김없이 드러냈다.
가장 치열한 신학적 논박,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제한된 독자를 위해 라틴어로 쓴 이 논문에서 루터는 로마에 신학적으로 가장 신랄한 공격을 가했다. 즉 교회는 스콜라주의 성례전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다만 7개 성례전에 대한 공격 이상을 의미하는데 이는 전통적인 성례전 개념, 즉 교회 전례에서 역사하는 신적 생명의 객관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객관적 성례전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극단적으로까지 밀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이것을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와 열광주의자들에게 맡겼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처럼 루터는 이미 여기서 “이것은 내 몸이다”를 고수했다. 그는 세례와 성만찬만 허용하고 회개(고해 성사)는 유보 단서를 붙여 성례전으로 인정했다. 그는 성만찬에서 평신도가 포도주를 마실 자유를 요구하고, 전통적 ‘화체설’(化體說)을 일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그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 몸의 참된 임재를 확립한다. 그러나 이 ‘임재’의 양태 문제는 미결로 남겨둔다. 특히 루터는 끈질기게 미사 내지 성만찬이 제사라는 교리를 공격한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의 유언(언약)이다. 성만찬 제정의 말씀은 전체 복음의 요약이다. 이 언약을 믿음으로써 영접하는 대신 인간들은 이것을 제사, 즉 하나의 행위로 만들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물이 하나님께 바치는 인간의 제물이 되었다.
루터는 인간의 상태와 무관한 ‘작위적 행위’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특히 강하게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성례전적 은혜를 신앙으로써 받을 필요성을 강조한다. “믿으라, 그러면 이미 먹은(은혜를 받은) 것이다.” 수찬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적 임재를 일으킨다. 빵과 포도주의 본질은 변화 없이 남아 있다. 이로써 그것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사제의 성례전적 직무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사제직은 기껏해야 교육적 목회의 의미에서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성서를 아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존재 가치를 가질 뿐이다. 이처럼 종교적 삶의 핵심인 미사를 거부하고 4개 성례전을 거부한 이 논문에서 분명해진 것은 루터의 생각이 본질적으로 교리상 로마 가톨릭 교회와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빈번한 출간, 번역, 주해 그리고 찬반의 입장들은 이 논문이 완결된 주제를 갖춘, 가장 두드러진 종교개혁적 저서들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개신교 교리 형성에서 이 논문의 모범적 의미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혁명을 강조한 이 논문은 많은 찬성 외에 더 많은 이반(離叛)을 초래했는데, 특히 교회의 계급서열적-성례전적 구조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개혁 가톨릭적-인문주의적 사고를 가진 자들에게서 특히 그러했다. 수년간 루터의 길에 공감했던 에라스무스(Erasmus)가 로마 교회와의 분명한 단절을 지지하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理想)을 대중에게 친근하게 설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설」
이 텍스트는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에게 내린 파문 위협 교서인 ‘주여, 일어나소서’의 공표 이후, 교황에게 루터의 정통성과 선한 뜻을 확신시키기 위해 교황청과 연결된 카롤루스 밀티츠(Carolus Miltitz)의 권고로 쓰였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상을 대중에게 친근하게 서술하기 위해 교회에 대한 공격이 후퇴한다. 따라서 이 글은 루터의 모든 글 가운데 가장 온건한 편으로 전체 그리스도교계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루터는 가톨릭 분위기에 가장 접근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의 기조에는 만인 사제직 개념이 깔려 있다.
루터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구원받은 인간의 진수인데,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예속되는 백성에 대립되는 그리스도교 자유의 백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율법적 경건의 위험에 대한 공격은 ‘자유’ 개념을 날카롭게 드러내게 만들었는데, 여기서 자유의 개념은 칭의론(稱義論)의 결과이다. 즉 인간의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율법의 예속에서 완전히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 함의를 밝힌 이 텍스트는 교회의 바빌론 포로가 칭의론 이해를 성례전론에 적용했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론은 칭의 받은 자의 삶에서 자유와 봉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의 신학적 독창성과 학문적, 사상적 완성은 1520년의 다른 두 위대한 발언에 뒤처지지만 그것이 대중에 끼친 영향력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복음적 존재에 대한 인상 깊은 용이한 명제들로 말미암아 당대에 비교할 것이 없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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