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 360

대한제국의 미술-그림

1883년 (고종 20년)에 체결된 조일 통상조약을 기념한 연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12명이 둘러앉은 큰 테이블에 서양식 식기와 음식이 놓여 있다. 그림 왼편에 혼자 앉은 이가 조선 측 전권대신인 민영목이고, 그를 기준으로 왼편이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 오른쪽이 일본 측 전권공사 다게조에이다. 조선 관리들은 관복과 전복 및 도포 차림이며, 일본식 의상을 입은 일본인과 중국식 의상을 착용한 여성, 그리고 조선 여성도 1명이 앉아 있다. 식탁 중앙에는 꽃을 꽂은 꽃병과 고임 음식이 놓였고 개인마다 생선모양의 음식과 나이프, 스푼, 술잔, 양념통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개화기 조선의 시대상과 서양식 연회 문화의 유입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도화서 화원 안중식이 그린 그림이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

대한제국의 미술- 공예

대한제국의 공예 - 산업과 예술의 길로 고종의 근대화의 일환으로 역점을 두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공예부문의 개량이었다. 전통 공예의 경우 19세기 말 관요, 민요로 전환되면서 그 질이 현격히 떨어지고, 궁중의 서양 식기 선호와 맞물리며 입지까지 좁아진 도자의 사레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 쇠퇴 일로에 서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공예의 복구와 진흥을 위해 1908년 대한제국의 황실지원으로 한성 미술품 제작소가 설립됐다. 그렇지만 자금난으로 1913년 운영 주체가 바뀌고 명칭도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로 변경됐다. 이후 대한제국의 상징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며 역기능을 보였지만, 공예를 미술품, 미술공예품으로 처음 부르기 시작하였고, 도안의 개념을 수용하여 실용 기물이 아닌 감상용 공예품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선..

대한제국의 미술 - 왕실 인물사진

제국의 미술 1897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면서 궁중미술에도 변화가 생겼다. 규범성이 강하고, 보수성이 짙은 궁중미술의 특성상 대하네 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기본적으로는 조선 후기 이래로 전해져 오던 전통이 지속됐지만, 황제가 된 고종의 위상에 맞춰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용되는 황색 용포(龍袍)와 의장물이 이전과 기록화에 새로이 등ㄹ장한 등 달라진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적으로 어렵던 당시의 상황 속에 황권을 강화하려는 고종의 의도가 반영됐다. 본래 궁중 장식화는 본격적인 '그림"이라기보다 궁궐의 치장을 위한 일종의 "물건"으로 까지 여겨졌기 때문에 그 변화가 극히 드물게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고종 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및 일본 미술 등의 사실적이고도 세밀한 화풍을 수용, 변화를 ..

서울시청 외관

서울의 기억이 머무는 곳 1960년대 서울특별시청의 모습과 그 주변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사진이다. 이 당시 서울거리를 달리던 자동차들의 모습과 덕수궁 담의 형태, 시청 앞 광장의 모습 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청 앞 광장의 모습 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시청 하늘 위에는 "시민의 알 (4월 28일)을 알리는 5개의 애드벌룬이 떠 있다. 사진에 더해진 정보중 주황색 글은 실재하는 지명과 건물에 대한 것이고, 흰색 정보는 역사적 상상력이 가미된 허구다.

서울남산 국악당

서울남산국악당은 2007년 전통공연예술의 진흥과 국악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건립된 우리나라의 첫 국 악 전문 공연장입니다. 한국의 역사적 전통과 정체성을 담고 있는 전통 한옥의 미감을 살리기 위해 지상 1층 의 한옥 건축물을 기반으로 공연장을 지하에 배치한 구조는 주변 자연 환경과 어우러져 다른 공연장과는 차 별되는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지하 1층 공연장 로비와 연결된 성큰가든 ‘침상원’은 경복궁 교태전(왕 비 거주 공간)의 느낌을 살린 계단식 정원으로 꾸며져 지하 공연장이지만 자연 채광과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 해 줍니다. 300석 규모의 공연장은 목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자연스러운 미감과 함께 마당 개념의 돌출무대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관객과의 원활한 교감을 끌어낼 뿐만 아니라 음향장치 없이..

남산골 한옥마을2

남산골 한옥마을2남산골한옥마을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이승업 가옥"이라 하여 특이하게 건축자의 이름이 기념으로 붙여진 집입니다. 경복궁 중건 당시(1865~1872) 근정전 아래채 공사를 맡았던 이승업이 삼각동에 한껏 솜씨를 들여 짓고 잠시 살았던 집으로서, 국가적 사업이었던 당시 경복궁 중수과정의 풍부했던 좋은 자재들이 흘러들어 상승효과 (솜씨+자재)가 발휘된 좋은 집입니다. 집주인 이승업은 새 집에 들고 얼마 안 돼 빚에 몰려 벽동군수 이규상(李圭祥 1837~1917)에게 매각(1889) 하였습니다. 당시 한양 장안에서 남문안 홍문섯골 이벽동댁 (거주인 1대 이규상) 이라 하면 우편이 그냥 배송되었고, 덕수궁에서 빤히 보여 고종께서 저집 대문은 왜 저렇게 높으냐고 물으셔서 잘 서 있던 대문을  낯추느..

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골 전통정원 안내우리 민족과 서울의 상징인 남산은 옛 이름을 목면산이라고 하였으며, 도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산으로 불리어 왔다. 남산은 그 자연의 경치가 아름다워 선인들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짓고 자연의 순리에 詩, 畵로 화답하는 풍류생활을 하던 곳으로서 각종놀이와 여가생활을 위하여 수려한 경관을 찾는 선남선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이 곳 남산골 전통정원 내에는그간 훼손되었던 지형을 원형대로 복원하여 남산의 자연식생인 전토 수종을 심었으며, 계곡을 만들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였고 또한  정자 연못 등을 복원하여 전통양식의 정원으로 꾸몄다.               남산골 한옥마을 안내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2가 84-1 일대. 조성시간 : 1993년 12월 28일 ~1..

12.내손으로 펼처보는 대동여지도

내손으로 펼처 보는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똑깥이 제작한 영인본입니다. 직접손으로 펼치고, 지역을 맞추며, 옛 조선으로 떠나볼까요? 근대의 도전 1876년 조선의 개항(開港)은 많은것을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세계질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세계관이 변화했고, 지도 또한 ..

10.지도의 제작

10.지도의 제작 1454년 수양대군은 도성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삼각산 보현봉에 올라 산줄기의 형세와 물줄기의 맥 脈을 살핍니다. 이때 산천의 形勢형세에 밝은 정척, 그림을 잘그리는 강희안, 지도에 밝은 양성지가 수양대군과 함께 했고, 또한 상지관 相地官, 화원, 산사算士 등이 참가했습니다.이렇게 전문 분야의 관리들이 지도를 만드는데 참여 했다는점은 조선시대 지도가 갖는여러 특성을 보여 줍니다. 산천의 형세에 밝은 정척과 상지관이 함께 참여한 것은 도성의 자리가 풍수상의 吉地길지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지도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도성 주위의 산봉우리를 아름답게 그릴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문인화가로 유명한 강희안과 유능한 화원이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리와 ..

9.신경준의 관찬지도

신경준이 그려 영조에게 바친 도별지도 (경상도) -팔도도중 경상도 9.신경준의 관찬지도 수례, 수차水車, 선박 등 실용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신경준 申景濬 (1712~1781)은 지리학에도 밝은 관리였습니다. 그는 일종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의 지리지 부분과, 전국을 그린 지도책인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 》편찬사업을 맡았습니다. 「산구고山水考」「도로고道路考」「강계고疆界考」 등 전국의 지리정보를 총정리 했으며 일전한 간격의 방안위에 국토를 표현 했습니다.전국단위의 표준화된 좌표위에 지리 정보를 수록하여, 전확성을 강조하는 방안식 대축척지도의 발달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1770년 영조에게 바친 는 커다란 전국지도 족자 하나와, 8장의 도별 지도를 편집한 전국330여 고을에 개별 지도를 수..

8.지도연대기. 가문의 지도제작

지도연대기 고려의 지도학 성과를 게승한 조선은 건국 10년만인 1402년 &lt;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gt;라는 기념비적인 세계지도를 제작했습니다. 이어서 효율적인 지방행정을 위해 세종은 1424년 전국의 지리정보를 광범위하게 조사 했습니다. 이러한 사업은 15세기에 지속적으로 진행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