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위키한국사 (2024-07) [웹북]/2.한국근대사 (1863~1945) 12

전쟁과 동원문화 (2020)

책소개근현대 한국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깊숙이 일본제국주의에 편입되었으며, 일본이 패전한 후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에 진주하여 구축한 냉전체제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한국전쟁을 계기로 분단체제가 고착화되었고, 남한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인 이념으로 굳어졌다. 아시아-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 사이에서 형성된 ‘전쟁문화’와 ‘전쟁 장치’는 장기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여 동서 양대 진영의 냉전체제가 무너진 현재에도 혼종·착종된 형태로 여전히 한국사회에 맹위를 떨치고 있다.일본과 식민지 조선 사이에 만들어진 역사적 관계나 세계적 냉전체제의 틀 속에서 변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분단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투로서의 전쟁’..

[웹북] 제물포조약(1882)의 이해

제물포 조약  제물포 조약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 일본어: 済物浦条約)은 1882년 8월 30일(고종 19년 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경과일본 제국은 임오군란 때의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를 파견, 유력한 육해군의 시위 아래 제물포에 상륙했다. 일본의 출병 소식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영선사 김윤식의 의견을 청취하고 속국을 보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오장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재빨리 출동케 했다. 이때 청나라에서는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일본 공사를 자중시키는 한편, 조선 정부의 태도를 완화시켜 양국 사이에 제물포에서..

[웹북] 임오군란(1882)의 이해

임오군란壬午軍亂참가자 조선군 / 장소 조선 조선날짜 1882년 (고종 19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 8월 30일(음력 7월 17일)원인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결과 중전 민씨의 피난, 흥선 대원군의 재집권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 불량쌀로 지급하여 일어난 난이다. 10년 전 실각했던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중전과 외척 민씨 제거 및 비리 척결, 그리고 일본과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시켰고, 전임 선혜청 당상 김보현, 당시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 선혜청 창고지기인 그 수하의 착복 비리와 부정 축재 사실까지 드러나며 관련자들이 살해됐다. 성공하는 듯했던 난은, ..

[웹북] 조·미수호통상조약 (1876)

조미 수호 통상 조약조미 수호 통상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영어: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은 1882년(고종 19년) 조선과 미국 간에 조인된 조약이다.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 간에 제물포에서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개설미국 정부의 명을 받은 슈펠트는 처음에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수호 조약을 맺으려고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에 입항하였다. 그는 일본 영사(領事) 곤토(近藤眞鋤)로 하여..

[웹북] 강화도 수호조약 - 1876년 (고종13년) 2월27일.

강화도 조약 조일수호조규 통칭・약칭 강화도 조약 · 한일수호조약 · 병자수호조약서명일 1876년(고종 13년) 2월 27일서명장소 조선 조선 경기도 강화유수부 연무당 (대한민국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언어 한문 · 일본어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영어: Japan-Korea Treaty of 1876) 또는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은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 일본측에는 병자수교조약이라고도 부른다.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웹북] 윤요호 사건 (1875년 9월20일~9월22일)

운요호 사건운요호 사건날짜 1875년 9월 20일(음력 8월 21일) ~ 9월 22일(음력 8월 23일)장소 강화도 / 결과 조선의 패배, 강화도 조약 조인교전국조선 / 일본 제국지휘관이민덕 / 이노우에 요시카병력400여명의 병력과 /해안포대 군함 1척/ 병력 22명피해 규모35명 사망/16명 부상 /2명 경상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영어: Un'yō incident,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1]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 영어: Ganghwa Island incident)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조선 정부의 동태를 살피다,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배경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일본은 메이지 유신(..

[웹북] 신미양요 발발 (1866년 10월 18일)

신미양요신미양요 / 날짜 1871년 6월 1일~1871년 6월 11일 / 장소 강화도 일대 / 결과 미국의 군사적 승리 / 조선의 외교적 승리 /  미군의 철수 / 조선의 쇄국 정책 강화교전국 /   조선 미국의 기 미국지휘관 /  어재연† / 정기원 / 이현학† / 김현경† / 박치성† / 유예준† 미국 존 로저스 / 미국 윈필드 스콧 슐레이병력약 500명 군함 5척, 대포 90문, 병력 800명피해 규모344명 이상 사망 / 24명 부상 3명 사망 / 10명 부상신미양요(辛未洋擾, 영어: Western Disturbance in the Shinmi Year)는 1871년 6월 1일(음력 4월 14일)부터 6월 11일(음력 4월 24일) 사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투이다.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

[웹북] 제너럴 셔먼호사건 (1866년 9월 5일) (음력 7월27일)

제너럴셔먼호 사건날짜 1866년 8월 21일 ~ 9월 4일 / 장소 조선 평안도 평양 대동강 / 결과 조선의 승리교전국 /  조선 과 미국조선 지휘관 / 박규수 / 신태정 / 이현익 / 백낙연 항해사(Pilot) 겸 통역관미국 토마스 목사 (aka 최난헌) / 선주 프레스턴 / 선장 페이지 / 항해사 윌슨 미국 상선 병력스쿠너 한 척, / 서양인 5명, / 중국인 13명, / 말레이인 3명,피해 규모  / 전원 사망.제너럴셔먼호 사건(-號事件)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미국 앤드루 존슨 대통령 2년) 음력 7월 27일(양력 9월 5일) 평양 군민(軍民)들이 중무장한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를 격침시킨 사건이다.양력 8월 중순에 서해안에 출물한 제너럴셔면호는 통상..

[웹북] 병인박해 (1866~1871)

병인박해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벌어진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당시 8,000여 명이상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되었다.흥선대원군은 본래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없었기 때문에 탄압을 하려는 계획이 없었다. 오히려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하여 프랑스의 도움을 이끌어 내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대내외적인 변화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책을 실시하였다.1866년 봄부터 시작된 박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년 8월), 병인양요(1866년 10월), 남연군 분묘 도굴 사..

[웹북] 경복궁 중건 시작 (1865) / 경복궁 소개

경복궁 중건 시작 (1865)조선(朝鮮) 시대 말기 수렴청정을 하였었던 신정왕후(神貞王后)에게서 지시를 받은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이 정원용(鄭元容), 조두순(趙斗淳), 이경재(李景在), 김병학(金炳學) 등 4명의 역대 영의정(領議政)들과 야합하여 1865년(고종 2년)부터 1872년(고종 9년)까지 행한 궁궐 중건이다. 경복궁 중건을 흥선대원군이 지휘함으로써 약9년여의 권력(섭정)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의 비용이 많이 나와 이유원(李裕元)과 최익현(崔益鉉) 등에게 통렬히 경고 및 비판등을 받으며 결국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은 1873년 권불십년(權不十年)처럼 섭정 권좌에서 9년여만에 물러나게 된다.배경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왕실의 위신이 떨어진 조선 말기에 고종이..

[웹북] 고종 (대한제국 황제) 고종즉위 (1863년 12월13일)

고종高宗대한제국 황제재위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9년)즉위식 환구단 / 후임 순종 / 총리 의정대신 (1897년-1907년) / 내각총리대신 (1907년-1910년)대조선국 대군주 / 재위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2년) / 총리 총리대신 (1895년-1896년) / 조선 국왕재위 1864년 1월 21일 ~ 1895년 1월 7일(30년) / 즉위식 창덕궁 인정문 / 전임 철종재상 영의정  의정대신 (1896년-1897년) 덕수궁 이태왕 재위 1910년 ~ 1919년 이름 휘 재황(載晃) → 형(㷩) 묘호 고종(高宗)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존호 통천융운····홍휴수강 능호 홍릉(洪陵)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

[웹북] 흥선대원군 일대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년 1월 24일(1820년 음력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음력 2월 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본명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부친이다. 영향력이 있었던 풍양 조씨 세도 집안과 양주 조씨 고급 관료 집안, 신 안동 김씨 세도 집안에게 각기 서예(붓글씨)를 써서 바치고 서화(그림) 등을 그려다가 바쳐 보신책을 강구한 그는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개항을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