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1.민주인권기억 13

4.19 혁명기념관

4.19 혁명의 개요 원 인 우리나라는 1945년 8월15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들의 생활은 곤경에 빠졌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주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장기 집권에 몰두하여 민의를 거스른 독재 정치를 지속하고 부정. 부패가 난무했다. 국민의 신임을 잃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간접선거에 의한 당선이 어렵게되자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어 2대 대통령에 강선 되었다. 당시 영구집권을 위해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없애는 내용으로 헌법을 고쳐 3대 대통령이 되었다. 1960년 3월15일, 4대 정.부통령 선거에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팔..

국립 4.19 민주묘지

국립 4.19 민주묘지란? 국립 4.19 민주묘지는 1960년 4월19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부정과 부패, 독재권력에 항거하여 싸우다 희생되신 분들이 잠들어 계신 성스로운 곳이다. 4.19혁명은 8.15 광복과 남북분단 이후 누적된 정치 사회적 모순에 맞서 학생과 시민들이 주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당시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를 강력 규탄하여 정권교체를 촉발하였고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1.연혁 1961. 2월 : 국무회의에서 공원묘지 설립 결의. 1963. 9월 : 묘지준공 및 기념탑 제막 (서울시 관리). 1995. 4월: 성역화 사업후 국립묘지 승격 (국가보훈처관리). 1997. 4월 : 유영봉안소와 4.19혁명기념관 개관. 2005. 7월 : 국립 4.19 민주..

남산 인권길 3 (옛 중앙정보부장 공관, 6국 취조실 기억공간)

과거 중앙정보부가 소유하고 있었던 부지 일부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로 조성되어 있다. 중정 부장의 공관으로 쓰던 집은 현재 문학의집으로 조성되어 있다. 소방재난본부 건물 인근에 있으며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지하에는 카페가 영업 중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민간의 방첩 활동까지 육군 특무대에서 수행했기 때문에 인권 및 월권 문제로 말이 많았던 터라 순수하게 민간의 방첩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기관의 창설이 필요했다. 제2공화국 당시부터 이런 계획이 있었는데, 이는 5.16 군사정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쿠데타 며칠 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었다. 제2공화국 하에서 이런 정보기관의 창설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후락이다. 실제로 이후락은 5.16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기까지 했다. 제..

남산 인권길 2 (기억의 터, 통감 관저 터, 위안부 할머니 기억공간)

구 통감관저 경술국치 이후 통감관저는 조선총독관저로 쓰였다. 1939년 새 총독관저를 경복궁 옛 후원 자리(현재 청와대 자리)에 세운 뒤부터는 역대 통감과 총독들의 업적이라 쓰고 만행이라 읽는다을 기리고 유물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쓰였다.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시정기념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2층에는 17점의 사군자폭(四君子幅)이 걸려 있다. 이것을 보아가던 기자는 우뚝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는 방 안에 나섰다. 이 방은 합병조인실(合倂調印室). 이 방이 바로 30년 전 일한합병의 도장을 찍던 그 한순간을 가졌던 방인 것이다. 오늘의 조선을 낳아놓던 역사적 산실(産室)이요, 이 강산 백의인에게 새길을 밝혀준 봉화대(烽火臺)도 되었던 것이다. 여섯 칸 남짓한 방 안에 거울을 좌우로 이토공..

남산 인권길 1 (수방사령부 터, 소릿길 터널, 옛 중앙정보부 제5별관)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을 근거지로 하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 군단급 기능/작전사령부. 애칭은 방패부대. 별칭은 충정대(忠正臺). 1961년 6월 1일 창설되었으며, 2개의 사단과 1개의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다. 2022년 현재 사령관은 김규하 육군 중장(육사 47기)이다. 수방사 창설 이전 이 수방사 이전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지키는 부대들은 당연히 존재했고, 첫 주자는 1948년 창설된 (구)수도경비사령부(지금의 수도사단)와 1949년 5월 12일 (구)수도사단으로 승격한 7여단(지금의 제7보병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구)수도사단이 그 명칭답게 경기도 동두천과 포천 전방 경계를 맡던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적의 보전 공격을 맞이했는데, 문제는 부실한 대전차 장비와 병력차[2]로 동두천과 포천에서..

고 노회찬 국회의원

노회찬 노회찬 (魯會燦) 1956년 8월 31일 ~2018년 7월 23일)은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1982년 용접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9년 인천 지역민주노동자 연맹사건으로 구속돼 3년간 수감되었다. 이후로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 독과 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당했다가 2016년 20대총선에서 당선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 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 9시 38분 신당도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김근태의 생애 김근태는 1947년 2월 4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 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시절이던 1985년 9월 39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 경찰국의 고문 시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받았다. 서울민사 지방법원 합의 41부 (재판장 고현철 부장판사)는 1990년 전민련 결성 사건과 관련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전 민청연 의장 김근태 (46)가 '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현 경찰청)..

전태일 열사

전태일 全泰壹 전태일 全泰壹 (1948년 9월 28일 ~1970년 11월 3일) 은 대한민국 봉제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 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개선과 위생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조직..

민주열사 박종철

박종철 朴鐘哲 박종철 朴鐘哲 (1964년 4월1일 ~1987년 1월14일 부산출생) 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가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1941년 4월1일 부산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부산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해 언어학과 하생회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중 1986년 4월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15일 징역 10개월 (집행유해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박종철은 2001년 2월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