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 352

여주 고달사지 (2024-04-18)

고달사지 (驪州 高達寺址) 종목 사적 제382호 / (1993년 7월 23일 지정) /면적 60,033m2/시대 남북국 시대 주소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번지 외 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신라의 고달사 터이다. 1993년 7월 2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었다. 고달사지 개요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처음 세워진 후,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절로 성장하였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

원주 거돈사지 역사의 흔적 (2024-04-18)

원주 거돈사지(原州 居頓寺址) 사적 제168호 / (1968년 12월 19일 지정) / 면적25,339m2 /신라시대 /국유,사유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 원주 거돈사지(原州 居頓寺址)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이 절터는 현재 남아있는 3층석탑(보물 제750호)으로 보아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탑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이 절터에는 높은 축대 위에 중문을 세운 자리가 있으며, 그 뒤로 3층석탑과 금당터, 강당터가 남아 있다. 금당은 절의 중심건물로, 규모가 전면 6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다. 이 안에는 2m 정도 높이의 화강..

원주 거돈사지 전시관 (2024-04-18)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왕사.국사제도는 신라때 국통(國統) 이라는 제도와 그 맥을 같이한다. 불교 법계를 정비하고 영향력있는 승려를 대우해 신앙적 믿음과 정치적 이념을 결부시켜 안녕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운영하고자 했다. 백성의 덕망을 얻은 고승을 총해 믿음을 돌보고 결합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이 제도는 고려 태조를 거쳐 광종대에 이르러 보다 정교하고 체게적으로 정립된다. 덕망이 높은 고승을 추대하여 국왕이 예를 갖춰 모셨다. 불교가 국교로서 많은 사람의 신앙으로 청착되어 있었으므로 님중이 정치에 참여 못하는 대신, 그들을 도덕으로 교화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인 고승을 국사로 책봉함으로써나라의 안녕과 안정을 도모하였다. 왕사와 국사의 역할에는 그 기능에서 차이가 있다. 고려전기 왕사는 국왕을..

원주 법장사지 역사와 흔적 (2024-04-18)

원주 법천사지(原州 法泉寺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의 사적/종목 사적 제466호(2005년 8월 31일 지정)면적 142,122m2 시대 통일신라/소유 국유,공유,사유/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29번지 외 원주법천사지(原州法泉寺址) / 대한민국 강원도의 기념물(해지) / 종목 기념물 제48호 /(1982년 11월 3일 지정)/(2005년 8월 31일 해지) 원주 법천사지(原州 法泉寺址)는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법천사 터이다. 2005년 8월 3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66호로 지정되었다. 원주 법천사지(原州 法泉寺址) 개요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 사찰로 명봉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 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법당터 및 ..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2024-04-18)

원주 법천사지 유적전시관 원주 법천사지유적전시관은 사적 원주 법천사지 내 위치한 전시관으로 남한강 유역의 주요 페사지인 거돈사지와 흥법사지를 보존관리하고 연구하는 공간입니다. 원주 법천사지는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법고사로 창건하여,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 해린의 하산소로 지정되면서 대형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법상종 계열의 사찰로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페사되기 전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법천사지에는 국보 법천사지 지광국탑비와 2024년에 원주로 돌아올 예정인 국보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기획전시홀 밎 로비 (1층) 위 공간은 향후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및 지광국사탑비 실내로 들어오기 전까지 기획 전시실로 운영될..

의친왕 이야기 (2024-03-10)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조선의 왕족이고 대한제국의 황족 종실이며 고종의 두번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의친왕 이강 고종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의 소생으로 출생한 그의 본관은 전주이고, 휘는 강(堈)이며, 초명은 이평길(李平吉), 호는 춘암(春菴)]이다. 일생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특파 대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미국에 유학하고, 1900년 대한제국 시기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부장(3성 ..

덕혜옹주 이야기 (2024-03-10)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황녀로서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년 ‘이덕혜’(李德惠)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1]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 외동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이즈음 조울증, 우울장애, 반복성 우울 장애와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병(정신분열증) 증..

덕혜옹주 묘/의친왕 묘 (2024-03-10)

덕혜옹주 묘 (德惠翁主 墓)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의 고명딸인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의 묘이다. 고종은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덕수궁 (경운궁)에 처음으로 유치원을 설립할 정도로 덕혜옹주를 아꼈다. 덕혜옹주는 9세가 될 때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21년에 덕혜옹주에 봉혜졌고, 1925년에 일제가 유학이라는 명분을 세워 일본에 데려갔다. 일본에서는 영친왕의 숙소에 기거하면서 학습원과 중등과정을 수료하였다. 19세에 소 다케유키 (宗武志 종무지)와 정략결혼을 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다가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의친왕 묘 (義親王 墓) 고종황제와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의친왕(義親王 : 1877~1955)과 의친왕비 김씨 (..

홍릉.유릉 역사문화관 (2024-03-10)

유네스코 세계유산 홍릉. 유릉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고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 (1897년~1910)의 황제와 황후 73면늬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입니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햇습니다. 풍수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자리를 정하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만들었습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고 지금 각 왕릉에서는 해마다 제항을 지내고 있어 살아 있는 문화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홍릉은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황제 고종과 대한제국 1대황제 고..

탑골공원 역사 특별전시

조선시대 탑골 현재 종로 인사동과 낙원동 일대는 엣날 한양 경행방 (慶幸坊) 이었다. 불교를 숭상하였던 세조(1455~1468)는 이곳에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였고, 일명 백탑(白搭)이라고 일컫는 대리석 소쟁의 10층석탑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그 주변을 탑이 있는 동네라하여 탑골(塔골) 또는 탑동(塔洞) 으로 불렀다. 원각사는 왕실의 사찰로 번창하였고, 탑골 일대는 외국 사신들도 즐겨 찾는 한양의 명소(名所) 로 발전하였다. 세조 이후 원각사는 예전의 위상을 점차 잃었고, 결국 1504년 (연산군10)에 폐사 (廢寺)되었다. 임진왜란이후 원각사 터와 탑골에는 백성들의 민가가 빽빽이 들어서면서 과거 흔적을 찾을수 없었고, 10층석탑만이 우뚝 솟은 채로 옛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