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천주교성지 (2016~) (여행)/1.서울시 (서울 대교구) 10

2024-01-13 (토) 절두산 순교성지 답사

절두산 순교성지는? 조선시대부터 양화나루 잠두봉이라 불리며, 한강변의 명승지로 불리던 이곳은 병인박해(1866)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하여 현재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고 있다.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가 있고, 100년 후인 1946년 전국단위의 한국천주교순교자헌양회가 조직되어,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이 지역을 성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병인순교 100년이 되던 1967년 비로서 성당과 박물이 준공되었다. 1997년,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 제 399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유적)로 지정되었다. 2018년9월'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교황청 공식승인을 받은 세계 국제순례지가 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

명동성당

서울대교구 역사와 공간의 역사 1890년 '주교관"으로 신축된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로, 1891년 4월 19일 뮈텔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대주교에 의해 축성된 이래 주교관 및 경리부 건물로 사용되며, 한국 천주교 내에서 사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름 붙여진 사도회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라리보 주교(제9대 서울 대목구장) 노기 남대 주교 (제10대 서울대교구장)께서도 이곳에 집무를 보고 거주하였다. 교구의 업무 증가와 새 주교관의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주교관 (1927, 현 사회복지관)이 들어서고 사도회관은 성신 대학 의학부, 부제 학교, 가톨릭 출판사, 사회복지회관, 교육관 교구 사무처 및 관리국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

천주교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이자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보 신부를 시작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 박해가 있을 때마다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가 바로 이곳 새남터이다. 기해박해 때에는 앵베르(범)주교롸 모방(나) 신부, 샤스탕(정) 신부등 세 성직자가 순교하였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 외에 현석문 회장이,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 다섯 명의 신부와 평신도인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등 두 사람의 평신도가 순교하였다..

용산구 신계동 당고개 성지

당고개 순교 성지 당고개 (堂峴 : 당현) 성지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현종 5년) 12월 27일과 28일 (음력) 이틀간 남녀 천주교 신자 10명이 순교한 곳이다. 당시 일반 신자는 서소문 밖, 사제는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설을 앞둔 상인들이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처형지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해 달라고 하여 한강 가로 조금 나아간 이곳 당고개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27일에는 박종원, 홍병주, 권진이, 이경이, 손소벽, 이인덕,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 레 등 7명이, 다음날은 홍영주, 최영이, 이문우 3명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가 일어난 1846년 (헌종 12년) 9월 16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로 향하던 참수 길에 잠시 쉬어갔다. 이곳 ..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중림동 약현성당 지정번호: 사적 제52호 약현성당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박해시대 때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서소문 밖 사형장을 굽어보는 약현 언덕위에 세워진 것은 인상적이다. 프랑스 코스트신부가 설계해 1891년에 착공하고 2년 뒤인 1893년에 완공했다. 문밖성당, 성 요셉성당으로도 불렀다. 당초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주교는 1887년 남대문 밖 수렛골 (현 중구 순화동)에 집 한 채를 매입하여 교리 강습소로 이용하였다. 이곳이 공소로 발전하고, 이후 교세가 빠르게 증가하여 새로눈 본당 건물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이에 약현 본당 주임신부인 두세 신부가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승인을 얻어 토지를 매입하고 성당건설을 시작했다. 약현성당은 고딕적 요소가 극히 적은 단순한 로마네스..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지정번호 : 사적 제258호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다. 이 자리는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공동체가 있던 명레방 근처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에 귀국해 활동하던 돌우물골 (현 중구소공동)이기도 하다. 본당 설립이후 120여년간 줄곧 한국 천주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왔다.오랜 박해에서 획득한 신앙의 자유, 소외받고 가난한 민중의 안식처, 문주화 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토지 매 1883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풍수지리설에 따른 정부와의 갈등, 청일전쟁 등으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15년 만에 완공되엇다. 고딕 구조에 가까운 본격적인 서양식 성당으로 프랑스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재정지원으로 1892년 착공해 ..

절두산 순교기념비

절두산 순교기념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를 절두산으로 옮긴 이유가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대한 책임을 천주교 신자들에게 묻기위한 것 이었으므로절두산에서는 프랑스의 함대를 불러드린 혐의가 있는 신자들만 골라서 처형 하였다. 절두산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지만 안타갑게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을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29명 (무명순교자)뿐이다. 1866년 10월22일 효수형을 받은 이의송 (1866 10월22일 효수형을 받은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여래 (?~1866. 요한)등이 잘 알려진 순교자들이다.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 병인박해때 수많은 천주교신자들이 피로 물들인 한강변에 우둑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성지이다. 절두산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작은 암벽 봉우리로 1866년 병인 박해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치명한 순교성지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이자 병선의 훈련장이며 처형, 제사 진휼(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제함)하던 곳이던 양화진의 동쪽에 봉우리로 원래 가을두 (加乙頭), 혹은 누에의 머리 형상을 했다고 하여 잠두봉 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천주교인이 참수형으로 목 잘려 죽은 곳 이라는 으미의 절두산 (切頭山) 으로 불리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이곳에서 많은 신자를 처형한것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