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천주교성지 (2016~) (여행)/3.춘천.원주(서울관구) 19

포천 광암 이벽 유적지 / 광암 이벽 기념성당

이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천주교화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한 주역인 이벽李蘗(1754~1785)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한 곳으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번지(구 내천면 화현리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대 당시에는' 내촌면(內村面)'을 '안마을' 화현리 (花峴里)'를 꽃마루' 신기동(新基洞) 을 '새터' 라고도 불렀는데, 이고세서 탄생하였음은 이벽전과 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등의 전승과 증언. 부친 이부만의 집을 4대째 관리하던 관리인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벽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광암(曠庵), 자는 덕조(德璪)이며 세레명은 요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부만(李禣萬)이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

포천 광암 이벽 전시관

이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한 주역인 이벽李蘗(1754~1785)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한 곳으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번지(구 내천면 화현리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대 당시에는' 내촌면(內村面)'을 '안마을' 화현리 (花峴里)'를 꽃마루' 신기동(新基洞) 을 '새터' 라고도 불렀는데, 이고세서 탄생하였음은 이벽전과 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등의 전승과 증언. 부친 이부만의 집을 4대째 관리하던 관리인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벽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광암(曠庵), 자는 덕조(德璪)이며 세레명은 요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부만(李禣萬)이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

이벽 요한세레자 진묘터와 생가터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 진묘 터와 생가터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동로 1079번 길 7 광암 이벽은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가운데 주요 역할을 한 지도자이며, 한국 천주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안건으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이벽은 1777년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강학을 하였고, 1784년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앗다. 1785년 을사 추죠 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평소 천주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반발하였고, 이벽도 가족들에게 배교를 강요받았다. 이벽은 자신이 선택한 천주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화현리 집에서 아사(餓死) 한 것으로 추정한다. 포천 화현리는 이벽의 부친인 이부만부터 그의 증손까지 4대 묘가 들어선 선영과 이 부 만과 그 후손들이 살..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묘소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 (천주교 길음동 교회 묘원 위) 이곳은 남종삼 요한 성인과 그 가족의 묘소로, 1978년에 성인의 손자 남상철이 가족 묘역으로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성인과 함께 순교한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와 부인 이조이(필로메나)의 묘와, 창녕으로 유배 갔던 막내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전주 진영에서 순교한 장자 남명희의 묘는 없다. 남종삼 성인은 '승지'라는 직책으로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그러나 당시 공직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자,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관직을 버렸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며 통상을 요구하자, 남종삼은 서양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

갈곡리성당 (파주)

갈곡리 성당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화합로 466번 길 25 갈곡리는 칡이 많아 칡의 계곡(갈곡, 葛谷)으로 불렀고, 우리말로 칡 울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칠 울 공소'라 불렀다.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인근 우골에 청착하였던 신자들이 많아져, 1896년 세 가족이 칠 울로 옮겨, 옹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교유촌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베네딕도회, 한국인 최초수도사제, 1950년 10월 5일 순교)와 그의 누이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1950년 10월 17일 순교)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유서 깊은 신앙촌답게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배출하였다. 1898년에 교구 공식보고서에 성사 집전 기록이 보고되었고, 19..

참회와 속죄의 성당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로 111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민족화해센터는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하는 장(場)을 마련하자는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1990년경부터 건립이 준비되었고, 성당은 2008년에, 센터는 2014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이름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우리 자신의 참회와 속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성당의 외형은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전쟁 이전의 모습을 각각 그대로 재현하였다. 또한 민족화해센터는 평양 외곽 서포에 있던 메리놀 선교회 본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성당의 제대 위쪽 유리 모자이크는 남한과 북한 지역의 순교자들이 평화와 복음을 선포하시는 그리스도 왕께 한반도의 평화와 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16-2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16세 어린 나이로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천주교의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하였고, 그 후 활짝 열려 있던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마침내 1801년 순교하였다. 부인 정난주 마리아(정약현의 딸,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는 대구 대정현에 관노로 유배를 갔고. 외아들 황경환은 추자도에 남겨져 선종하였다.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상황과 대비책을 적어 북경 교주에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서'는 젊은 학자의 용기 있는 표현이며, 귀중한 교회사 사료이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달레의 "한국천주..

경기도 남양주 마재성가정성지

. 마재성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마재 성지는 거룩한 부르심의 땅이자 성가정 성지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들의 생활터전이자 가족 모두가 순교하고 시복시성의 영예를 얻게 된 성지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번째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이자 최초로 한글 교리서를 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와 부인 유선임 제칠리아 성녀, 아들 정철상 가롤로 복자와 정하상 바오로 성인, 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가족을 기념하여 봉헌된 성지이다. 마재의 성가정은 교회의 역사에도 찾아보기 힘든 가정이다. 아버지 정약종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이 두 차례의 대박해 속에서도 이어져 내려오며 가족 전체가 목숨으로 신앙을 증언하였다. 더욱이 아버지 정약종은 천주교의 창립 주역의 으뜸이 되었고, 둘째 아들 정하상은 ..

강원도 홍천성당

홍천성당 강원도 홍천읍 마 기지로 54 홍천 성당은 1923년 6월 21일 춘천 고 은려 본당 관할 공소였던 송정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여 설립되었다. 홍천 본당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송정 공소는 1890년 송정리 버덩말에 서병익 바오로 신부 (1910연 수품)의 친족이 신자 몇 가족과 함께 정착하며 시작되었다. 1923-1924년 보고서에 다르면 송정성당은 인제군 관대리와 부평리, 홍천군을 포함하여 8개 공소를 관할하며 신자가 모두 652명이었다. 송정리에 10여 칸의 한옥으로 지어 교세를 확장하던 송정 본당은 1936년에 현재 위치 홍천읍 희망리로 이전하였고, 명칭도 홍천 본당으로 변경하였다. 이곳은 홍천군, 인제군 본당들의 모 본당 (母本堂)이라 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전..

춘천교구 곰실공소

곰실 공소 (춘천교구의 요람) 강원도 춘천시 동내로 220 곰실은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의 옛 지명이며, 공실 공소는 엄주언 마르티노가 세운 공동체로 현 춘천교구의 요람이다. 엄주언은 우연히 접한 [천주실의]와 [주교 요지]에 감명을 받아 천진암에서 교리 공부를 하여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0년 곰실 윗너부랭이로 이주한 엄주언은 집 옆에 강당을 세우고 가족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후 공동체가 확대되면서 교우 수가 증가하다 엄주언은 공소 아랫 너부렁이로 옮기고, 당시 관할 본당이었던 풍수언 본당의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사목방문을 부탁하였다. 점차 교우수가 증가하면서 공소에는 신부의 상주가 절실해졌고, 마침내 1920년에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세웠다. 그리고 그해 9월 김유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