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천주교성지 (2016~) (여행) 56

2024-01-13 (토) 절두산 순교성지 답사

절두산 순교성지는? 조선시대부터 양화나루 잠두봉이라 불리며, 한강변의 명승지로 불리던 이곳은 병인박해(1866)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하여 현재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고 있다. 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가 있고, 100년 후인 1946년 전국단위의 한국천주교순교자헌양회가 조직되어,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이 지역을 성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병인순교 100년이 되던 1967년 비로서 성당과 박물이 준공되었다. 1997년,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 제 399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유적)로 지정되었다. 2018년9월'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교황청 공식승인을 받은 세계 국제순례지가 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

포천 광암 이벽 유적지 / 광암 이벽 기념성당

이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천주교화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한 주역인 이벽李蘗(1754~1785)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한 곳으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번지(구 내천면 화현리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대 당시에는' 내촌면(內村面)'을 '안마을' 화현리 (花峴里)'를 꽃마루' 신기동(新基洞) 을 '새터' 라고도 불렀는데, 이고세서 탄생하였음은 이벽전과 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등의 전승과 증언. 부친 이부만의 집을 4대째 관리하던 관리인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벽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광암(曠庵), 자는 덕조(德璪)이며 세레명은 요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부만(李禣萬)이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

포천 광암 이벽 전시관

이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한 주역인 이벽李蘗(1754~1785)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한 곳으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번지(구 내천면 화현리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대 당시에는' 내촌면(內村面)'을 '안마을' 화현리 (花峴里)'를 꽃마루' 신기동(新基洞) 을 '새터' 라고도 불렀는데, 이고세서 탄생하였음은 이벽전과 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등의 전승과 증언. 부친 이부만의 집을 4대째 관리하던 관리인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벽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광암(曠庵), 자는 덕조(德璪)이며 세레명은 요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부만(李禣萬)이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

경기도. 구 김포성당

김포성당 ㅣ 金浦聖堂 등록문화재542호 김포시 북변동 261-3 김포성당은 걸포리 공소(公所) 로 시작하여 8.15광복 후 교세가 확장됨에 다라 184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년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제3대 신원식 루카 주임신부 및 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당시 마송에 주둔해 있던 해병대 이영우대령의 군(軍)장비 지원으로 1956년 12월27일 봉헌식을 가졌다. 본 성당은 한국전쟁 후의 석조건축물로서 정면 중앙상부의 종탑과 뾰족한 아치형태의 창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입구는 둥근 아치형태를 하고 있으며 평면은 좌측과 우측에 부출입구가 돌출되어 있어 라틴십자형의 평면 형식을 하고 있다. 김포성당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몰론 화강석의 구조적 기법을 간직하고 있어서 건축학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크다. 구..

강화도 갑곶순교성지

강화도와 한국 천주교회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부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1975년 조선 최초 선교사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조모 송 씨(은원 군의 처)와 며느리 신 씨에게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져, 왕족이었던 이들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강화도에 귀향해 살던 철종의 조부인 은원 군도 처형되었다. 또한 강화도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만나 첨예한 갈등을 빚은 곳으로 상징되는 곳이기도 하다. 선교사들의 경유지 갑곶 해안 이후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가 유입될 때 이용되던 육로 통행이 여의치 않게 되자, 1845년 5월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고 주교의 명으로 선교사를 비밀리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

박순집 베드로 (1830~1911) 갑곶순교성지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 박순집(베드로)의 묘가 모셔져 있다. 비록 참수 치명자는 아니나 그의 생에는 어으 순교자 못지않은 삶이었다.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수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목숨을 걸고 찿아 안장했으며, 후에 선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해 유해발굴과 시복시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1890년 인천제물포로 이주해 숙골( 현 도화동)에서 선종할 때 까지 전교활동에 힘쓰며 인천교구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 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아가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신앙을 이어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때..

갑곶순교성지 (순교자:박상손,우윤집,최순복 3위비)

수많은 순교자들이 갑곶 진두에서 효수당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강화도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1868년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협력한 최인서, 장치선 회장과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서울 포청에서 옥살이를 하다 강화 병영지 진무영으로 호송되어 효수당하게 된다. 1866년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에 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빌미로 삼았고, 이후 미국은 1871년 강화도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특히 갑곶 나루터는 당시 많은 신자들이 목을 베어 말뚝에 달아매는 효수터가 되었다 이 째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 손, 우윤집, 최순복 등이 첫 번째로 잡혀가 이곶 갑곶 진두에서 효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