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국제평화 연구 (책소개)/6.미국외교

카우보이들의 외교사 - 멀로주의에서 부시 독트린까지 미국의 외교전략

동방박사님 2022. 10. 12.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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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미국 하면 카우보이를 떠올릴 만큼 카우보이는 미국과 미국인의 성향을 잘 드러낸다. 신문지상에는 종종 카우보이 복장을 한 두 사람의 사진이 게재되고 세간에서는 이것이 부시의 카우보이 외교의 한 면모라고 풍자하기도 한다.

미국 외교사 또는 미 대통령들의 외교정책을 단순히 무슨무슨 주의로 함축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고 큰 의미도 없지만, 전체적인 외교사의 흐름에서 역대 대통령의 외교 노선이나 기조를 파악하는 것은 앞으로 미국 외교의 전망을 짚어보는 데 유용하다. 그 흐름을 유심히 살펴보면 미국 외교가 일정한 패턴을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것을 반전의 외교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장기적인 외교정책이나 국가 차원의 비전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급작스레 터지는 사건을 고비로 미국 외교가 요동친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이 어설픈 제국에 불과하다고 비꼬면서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과 국민 여론, 그리고 외교정책 간의 함수관계에 주목하면 그 원인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다고 조언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는 국민들이 대체적으로 외교나 국제 사안에 둔감한 편이면서도 그것이 국내 현실 문제와 얽혀서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 국내 여론이 급하게 반전하고 결국 그런 기류가 차기 정책 결정이나 대통령 선거에 그대로 반영된다 점을 지적하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미 국민의 정서와 여론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는 것이 미국 외교의 흐름을 전망할 수 있는 또 다른 채널이 된다고 말한다.

 

목차

머리말
1장 ‘건국의 아버지들’과 외교 원칙
2장 먼로 독트린과 대륙으로의 팽창
3장 기지개를 편 제국
4장 흔들리는 이상주의
5장 냉전
6장 냉전의 그림자
7장 새로운 질서, 새로운 도전
8장 미국은 특별한 제국인가
주석 |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자 : 김봉중金琫中
전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 대학교 석사 미국 톨레도 대학교 박사 미국 샌디에이고 시립대학 사학과 교수 현재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미국 외교사, 특히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서부터 카터의 인권 외교와 탈냉전 이후를 포함한 현대 미국 외교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의 대외관계를 통해서 현대 미국의 정체성을 깊숙이 추적하는 동시에 일반인들이 미국에 대한 올바른 식견을 가질 수...
 

출판사 리뷰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한미FTA 문제와 북한 미사일 발사 문제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미국의 외교력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미국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든 그 반대의 시각에서 바라보든 상관없이 미국의 외교 전략은 이처럼 한반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교 전략의 꼭짓점에는 미 대통령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외교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고 보면 이는 더 자명하게 드러난다. 조지 워싱턴에서부터 제임스 먼로를 거쳐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스 트루먼, 존 F. 케네디,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그리고 지금의 조지 W. 부시에 이르기까지 미국 외교의 흐름은 이들 미 대통령의 외교인식과 거의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국민들은 전통적으로 외교에 무관심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 대통령들은 외교에 울고 웃어왔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케네디는 전쟁 영웅 아이젠하워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들 사이에서 젊고 활기찬 대통령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외교 부문에서는 강경파의 등쌀에 밀려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결국 댈러스 거리에서 암살된 비운의 대통령으로 남아야 했다. 그가 해결하지 못한 베트남 문제는 결국 존슨 대통령에게 떠넘겨졌고,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악몽에서 한동안 헤어날 수 없었다.
미국사 중에서도 미국 외교사, 그 안에서도 미 대통령들의 외교 전략을 먼저 살펴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들이 한손에 미국 외교뿐만 아니라 세계 외교의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열쇠로 미국 외교의 모든 것을 완전히 열어젖힐 수는 없다. 미국 외교의 본질을 까발릴 수 있는 마스터 키는 없다는 얘기다. 저자는 미국 외교의 실체를 어떤 형태로든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서두에서 고백한다. 다시 말해 실체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미국 외교를 특정 이론 틀에 끼워 맞춰 해석하려 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미국 외교를 구성하는 메커니즘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완전 해부할 수 있는 날카로운 메스 또한 개발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의사항이다. 다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미국 외교의 곡선이 미 대통령들의 선택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그 대통령을 선택한 미 국민의 여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들여다봄으로써 미국 외교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통찰해보자는 게 저자의 역사인식이다.

부시의 카우보이 외교는 어디에서 왔는가

미국 하면 카우보이를 떠올릴 만큼 카우보이는 미국과 미국인의 성향을 잘 드러낸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처럼 미국과의 관계가 유별나게 친밀한 주요 인사의 경우 자신의 텍사스 목장으로 친히 초대해 언론에 ‘자신들의 우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신문지상에는 종종 카우보이 복장을 한 두 사람의 사진이 게재되고 세간에서는 이것이 부시의 카우보이 외교의 한 면모라고 풍자하기도 한다. 카우보이의 이미지는 다양하지만, 부시의 외교정책을 비유하는 데 쓰일 때는 대체로 무례하고 ‘나홀로’ 행동하는 면이 부각된다. 한마디로 부시의 카우보이 외교는 일방주의다. 부시의 외교는 황량한 서부에서 홀로 소를 모는 카우보이처럼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외교 방식에서는 고이즈미처럼 전적으로 부시 편이 되든지 아니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시가 처음부터 이런 식의 카우보이 외교를 구사한 것은 아니었다.
2000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부시가 민주당 알 고어를 우여곡절 끝에 누르고 당선되자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클린턴의 그것과 달리 강경책으로 급선회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대부분 빗나갔다. 부시가 추구한 외교정책은 클린턴의 외교와 비교해서 큰 변화가 없었다. 부시는 선거 기간 내내 클린턴의 외교정책을 집요하게 비판했지만 그건 단지 선거용에 불과했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북강경책을 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부시는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이어갔다. 부시는 보스니아나 나토 문제 등 미국과 유럽의 외교적 현안 문제에서도 클린턴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2001년 6월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부시 역시 미국과 유럽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부시의 유럽 방문을 취재하던 어느 신문은 부시의 외교가 클린턴의 외교와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할 정도였다.
물론 클린턴과 부시의 외교정책이 완전히 일치한 것은 아니다. 냉전의 해체 이후 국가 간 군사, 이데올로기 대립이 크게 줄어들면서 미국 외교는 전통적인 중립?고립주의 노선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클린턴의 고립주의가 국제 사회와의 동조와 협조에 근거한 것이었다면 부시의 고립주의는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충실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일방주의 외교도 불사하는 것이었다. 임기 초에 교토의정서나 반탄도탄미사일 조약에서 미국을 탈퇴시킨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부시의 일방주의 외교는 이처럼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문가들의 우려처럼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부시의 외교정책에 반전을 일으킨 사건은 두말 할 것 없이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테러였다. 냉전 종식 이후 10여 년간 유지되었던 미국 외교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은 일순간 사라지고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외교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세계는 미국의 편이 되든지 테러리스트들의 편이 되어야 했다. 같은 해 9월 20일 국회의사당에서 부시가 행한 연설은 일명 부시 독트린, 이른바 카우보이 외교의 시작을 선포한 것이었다. 부시는 “지구상의 어느 테러 조직이라도 그것을 찾아내고 그 활동을 저지하며 격퇴시킬 때까지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는 “세계의 전쟁이며 문명의 전쟁이며 진보, 복수주의, 관용, 그리고 자유를 믿는 모든 인류의 전쟁”이라고 선언하고, “지구상의 어느 나라든지 우리 편이 되든지 테러리스트 편이 되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그런데 미국 외교사에서 부시만이 카우보이였을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미국 외교사를 펼쳐보면 역대 대통령의 외교인식이 천차만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한 외교전략이 때로는 세계를 뒤흔들기도 하고, 미국 스스로 고립을 초래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카우보이들의 외교사

한 조사에 따르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가장 좋아한 영화는 서부극 하이눈(High Noon)이라고 한다. 영화 개봉 당시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이 영화를 세 번 봤고, 클린턴 대통령은 8년의 재임 기간에 30번 정도를 봤다고 한다. 케네디, 존슨, 닉슨, 레이건, 조지 H. W. 부시도 영화 속 주인공인 보안관 게리쿠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고 하니 과연 카우보이들의 나라라고 할 만하다. 고독한 보안관의 운명이 전 세계의 모든 문제를 외롭게 결정해야만 하는 고독한 대통령의 이미지와 닮아 있기 때문에 미 대통령들이 게리쿠퍼에 연민을 느낀 것이 아니겠냐는 심리적 해석도 있지만, 어쨌든 이들의 외교인식은 이른바 카우보이형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는 외교 문제에 해박한 지식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한국전쟁을 끝내겠다는 카리스마를 앞세워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사실 아이젠하워의 외교는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가 전담했다. 덜레스는 대량 보복과 같은 단호한 표현을 즐겨 썼지만 대부분 수사적 표현에 그친 것이었다. 세계는 보복이 필요할 정도로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의 외교는 늘 이중적이었다.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적은 곳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주권 존중을 외쳤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펼쳤다.
냉전이 계속되고 미국이 소련에 밀리는 인상을 받는 사건이 계속되자 미국은 젊고 패기 있는 지도자, 케네디를 선택했다. 케네디는 취임 연설에서 뉴프런티어를 외치며 국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인류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미국은 어떠한 짐이라도 져야 하며 어떠한 대가라도 치러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함을 힘주어 강조했다. 미국은 새로운 대통령의 매력과 의지에 매료되었고 그가 미국을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쿠마 미사일 위기로 미국은 냉전 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경험을 맛보게 되었고, 베트남은 미국을 울렸다. 피그스 만 침공 실패 사건은 지금도 케네디의 결정적 외교 오점으로 남아 있다.
케네디의 암살로 ‘우연한 대통령’이 된 존슨 또한 베트남의 난제를 넘지 못했다. 존슨은 베트남에 무지했다. 전쟁은 확대되었고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그는 사상 최초로 군사 외교적 실패를 자인하고 차기 대통령 출마를 포기한 대통령이 되었다.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미국의 개입도 계속되었다. 닉슨은 소련과 중국의 후원을 얻어 북베트남과 결국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결국 베트남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닉슨은 워터게이트에 연루되어 백악관을 쓸쓸이 떠나야 했다.
냉전 시대 진정한 카우보이는 레이건이었다. 냉전은 세월의 흐름 앞에서 그 기세가 꺾이고 전반적인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레이건은 이런 기류에 역류하면 등장했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강하게 몰아붙이면서 힘을 바탕으로 한 외교를 추구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그의 편이었다. 소련은 미국에 화해의 손짓을 보내왔고 공산체제가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임기 말 터진 이란-콘트라 게이트 사건은 그를 거의 탄핵 직전까지 몰고 갔고 할리우드 배우 출신답게 화려한 언변과 동작으로 국민을 기만했다는 평가가 잇달았다.
레이건의 후계자였던 조지 H. W. 부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짧고 찬란한 전쟁이었던 걸프전쟁을 개전 100시간 만에 승리로 이끌었다. 걸프전 당시 부시는 현대 미국사에서 종종 보였던 황제적 대통령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합참의장 콜린 파월이 주창한 이른바 파월 독트린의 영향이 큰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전쟁은 정책의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국민들이 이해하고 지지해야 하는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직후 부시의 지지율은 역대 최고인 89퍼센트로 치솟았다. 그런데도 그는 빌 클린턴에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미국 외교의 전통, 중립주의 또는 고립주의

역대 미 대통령들이 모두 카우보이형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조지 워싱턴에서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자 미국 초기 대통령들은 신중한 고립주의?중립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워싱턴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반드시 중립노선을 따라야 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해 미국의 외교 전통을 닦았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외교 노선을 이어받은 애덤스와 제퍼슨, 매디슨도 이를 외교 철학으로 삼았다. 건국 초기 이러한 미국 외교의 성격은 먼로 독트린으로 집대성되었다.
미국의 중립 노선이 깨져나가기 시작한 시점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세기의 전환기에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고,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전 세계에 미국의 힘을 과시했다. 그 결과 미국은 중남미와 태평양으로 팽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필리핀이 수중에 들어오면서 아시아에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바야흐로 미국이 제국으로서의 기지개를 펴게 되는 상징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팽창의 중심에는 루스벨트가 있었다.
루스벨트는 1898년 전쟁이 터지자 해군 차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서부의 카우보이들을 불러 모아 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이 유명한 러프라이더스인데 결국 루스벨트는 카우보이 대통령의 원형이 된 셈이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소신과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은 외교정책에서 빛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의 외교 원칙과 철학을 단순하게 정리했고 그것을 단호하게 시행했다. 루스벨트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야말로 외교의 목적이라고 판단했다. 루스벨트는 임기 동안 자신이 추구한 이상을 완성했다고 스스로 만족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1908년 대통령에 재도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돌연 아프리카로 사냥을 떠난다. 당시 언론에서는 카우보이에서 대통령을 오가는 루스벨트의 기이한 행적을 풍자하기도 한다.

주의, 도덕주의형 대통령의 외교 전략

피 말리는 제국주의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이상주의적 외교를 펼친 대통령도 있었다. 우드로 윌슨이다. 그는 새로운 외교의 선교사였다. 윌슨이 주창한 이상주의적 국제주의는 미국의 이상을 국제 질서에 주입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외교정책은 신자유 철학과 질서에 기초를 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대기업과 트러스트를 파괴하고 자유 경쟁을 부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원칙이 국제 질서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작고 힘없는 나라와 민족 위에서 군림하며 독점적인 횡포를 부리는 큰 나라의 식민주의를 철폐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의 외교는 결과적으로 국내외의 반발에 부닥쳐 열매를 거두지 못했지만 20세기 미국 외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았다.
윌슨이 이상주의자였다면 지미 카터는 이상주의를 도덕주의로 한 단계 놓여놓은, 윌슨주의의 전도자이자 인권외교, 도덕외교의 창시자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합이 결성되고 유엔인권헌장이 선포되었지만 세계는 곧바로 냉전체제로 재편되면서 실리주의와 현실주의가 미국 외교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비극과 워터게이트와 같은 추문이 일어나자 미국 국민은 냉전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메마른 현실주의에 환멸을 느꼈고 1976년 인권 외교를 표방한 무명의 카터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이다. 카터는 당선 직후부터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서 인권을 유린하는 미국의 우방 정권을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반체제 인사 사하로프에게 친서를 보내 소련 인권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과 의지를 표명하기까지 했다. 윌슨의 이상주의 외교와 마찬가지로 카터의 도덕주의 외교는 그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 힘든 것이었고, 실리와 현실을 무시한 천진난만한 이상주의적 발현이라는 비판도 많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그의 외교정책으로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카터는 임기 이후에도 인류 평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주의가 단순히 정치용이 아니었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