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중국.동아시아 이해 (독서)/1.중국역사문화

아편전쟁과 중화제국의 위기

동방박사님 2021. 12. 14.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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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근대의 시발점이자 중화제국의 위기와 도전, 제국 간의
거대한 충돌과 각축전의 시작인 ‘아편전쟁’의 전후 역사는
오늘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재편과정을 보는 프리즘이다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의 장을 연 사건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서구 제국들과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갔다. 이후 계기는 달랐지만 일본과 조선 또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강제개항과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했다.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반식민지 상태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에 반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빼앗겼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과정과 결과, 그 배경에 아시아와 유럽을 무대로 한 두 국제질서의 충돌이 있었고, 그 접점에 중국의 아편전쟁이 있었다. 우리가 아편전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아편전쟁 이후의 열강에 의한 외부 충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대응을 중국 근대사의 중요 모멘텀으로 삼고 있다. 저자는 1997년 홍콩 식민지의 반환을 아편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전후체제의 종언으로 인식했다. 또한 이 책이 쓰여진 1997년 시점에서 향후 전개될 중국의 부상과 팍스 시니카(Pax-Sinica)를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중화제국의 판도와 국제질서로서 조공체제의 붕괴과정에 대한 이해는 글로벌시대 역사인식의 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오늘날 G2의 한 축으로 성장한 중국을 이해하는 데 큰 의미를 담고 있다.

목차

1장 사양길의 대청제국

1. 건륭 말기의 중국 2. 역사와 내셔널리즘 3. 근대 중국과 일본

2장 아편전쟁- 조공체제의 동요

1. 영국과 중국 2. 아편문제 3. 중영관계의 긴박화 4. 아편을 위한 싸움 5. 제2차 아편전쟁

3장 태평천국운동

1. 상제신앙의 등장 2. 지상 천국의 실상 3. 전란과 지방사회의 재편 4. 함풍에서 동치로

4장 상해- 근대문명의 창구

1. 상해조계의 형성 2. 식민지적 경제발전 3. 근대문명의 창구 4. 상해의 도시화와 자치 5. 상해의 일본인 거리
5장 질서의 재편과 양무운동

1. 반란의 종식과 지방사회 2. 지방대관에 의한 양무 3. 변혁과 질서 4. 변경지역에 대한 새로운 통제

6장 변경의 위기- 조공체제의 붕괴

1. 조약체제와 화이사상 2. 러시아의 남하정책 3. 영국과 중국 4. 프랑스와 중국 5. 메이지 일본의 외교 공세 6. 조선을 둘러싼 중일 간의 대립 7. 청일전쟁

7장 국가건설의 구상

1. 광서제의 친정과 청류파 2. 메이지유신에 대한 관심과 변법론 3. 대청제국으로부터 중국으로의 전기

8장 화교세계의 확대

1. 해수 이르는 곳에 화교 있어 2. 아메리카의 화교 3. 황화론

9장 의화단과 신정

1. 의화단의 봉기- 서양에 대한 민중적 반응 2. 중국의 변혁과 일본모델 3. 신정과 사회변동

10장 신해혁명

1. 신해혁명 전의 국제환경 2. 청조의 멸망 3. 중화민국- 다사다난한 출발 4. 미완의 혁명

참고문헌/ 관계연표/ 문고판 보유/ 문고판 후기/ 역자후기/ 색인

 

저자 소개

저자 : 나미키 요리히사
1948년생으로 도쿄(東京)대학 문학부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도카이(東海)대학 문학부 강사, 조교수, 도쿄대학총합문화연구과 교수를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 日本人のアジア認識(2008), 捻群と華北社會─近代中國における民衆反亂(2010), 東アジアに?近代?を問う─竝木賴壽著作選I(2010), 近現代の日中關係を問う─竝木賴壽著作選II(2010)가 있다.
저자 : 이노우에 히로마사(井上裕正)
1948년생으로 교토(京都)대학 동양사학과와 동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시마네(島根)대학문학부 강사, 조교수를 거쳐 나라여자(奈良女子)대학 조교수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이다. 대표 저서로 中國歷史人物選 12 林則徐(1994), 淸代アヘン政策史の硏究(2004)가 있다.
역자 : 김명수
1970년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고,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대학원 경제학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역서로 한상룡을 말한다(역서, 2008), 日本帝?勢力?の東アジア都市??(공저, 2013), 인취성쇠기(仁取盛衰記)-미곡거래소(米豆取引所)의 흥망성쇠(편역서, 2015) 등이 있고, 한국과 일본의 근대경제사 관련...
 

출판사 리뷰

중국 근대의 시발점이자 중화제국의 위기와 도전, 제국 간의
거대한 충돌과 각축전의 시작인 ‘아편전쟁’의 전후 역사는
오늘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재편과정을 보는 프리즘이다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의 장을 연 사건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서구 제국들과 불평등조약을 맺었고,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갔다. 이후 계기는 달랐지만 일본과 조선 또한 중국과 마찬가지로 강제개항과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했다. 중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반식민지 상태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에 반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를 빼앗겼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과정과 결과, 그 배경에 아시아와 유럽을 무대로 한 두 국제질서의 충돌이 있었고, 그 접점에 중국의 아편전쟁이 있었다. 우리가 아편전쟁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아편전쟁 이후의 열강에 의한 외부 충격과 이에 대한 중국인들의 대응을 중국 근대사의 중요 모멘텀으로 삼고 있다. 저자는 1997년 홍콩 식민지의 반환을 아편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전후체제의 종언으로 인식했다. 또한 이 책이 쓰여진 1997년 시점에서 향후 전개될 중국의 부상과 팍스 시니카(Pax-Sinica)를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중화제국의 판도와 국제질서로서 조공체제의 붕괴과정에 대한 이해는 글로벌시대 역사인식의 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오늘날 G2의 한 축으로 성장한 중국을 이해하는 데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책 속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제국주의’의 시대로, 서구열강은 경쟁적으로 식민지 획득에 열을 올렸다. 서구열강들은 중국에서도 이권을 요구하며 격렬한 경쟁을 시작하였다. 1840년의 아편전쟁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인 조공체제가 서구의 조약체제와 조우하면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패배는 서구열강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건륭제乾隆帝(재위 1735~95) 말기 영국의 메카트니사절단이 영국과의 통상을 위해 방문하였지만 청조 번영의 정점에 있었던 건륭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후 가경제嘉慶帝(제위 1796~1820)가 제위를 계승한 1796년에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난이 일어났고, 이 사건은 청조를 ‘성세’에서 ‘사양’의 시기로 전락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아편전쟁 후 청은 백련교도의 반란을 훨씬 뛰어넘는 공전空前의 내란을 겪게 된다. 홍수전洪秀全(1814~64)이 시작한 배상제교拜上帝敎의 신도들이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고, 청의 지배를 타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태평천국은 중국 남단의 광서성廣西省에서 시작하여 북상, 장강長江 하류에 있는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거의 15년 동안 북경의 청에 대항하여 정권을 유지했다.
태평천국도 종교적인 반란이었지만, 백련교와 같은 전통적 종교결사의 봉기와는 달랐다. 19세기 초엽부터 프로테스탄트의 중국 포교가 본격화했는데, 태평천국은 그 영향을 받아 탄생한 신기新奇한 신앙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반발을 받는 일도 많았고, 또한 공포스러운 눈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청에 대항하는 태평천국 정권이 장강 하류 지역의 군사거점으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남경에 존속했다는 사실은 청조체제에 대한 신뢰감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태평천국에 맞선 청조 측의 대표적인 인물은 증국번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태평천국의 세력 확대를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의용군을 편제하여 태평군을 진압하였다. 이후 1856년에 일어난 애로우호 사건으로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이로 인해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화가 더욱 심화되었다. 원명원圓明園은 영·불 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북경도 점령되었다.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북경조약으로 화해하였고,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의 북경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중국지식인의 고뇌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났고 서양문물을 배우고 도입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하되 중국 전통의 정신과 철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정신을 유지하였다. 열강들의 중국내 세력 강화와 청일전쟁의 패배 등에 자극받아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등 일부 선각자들은 국내 제도의 혁신을 통해 중국을 근대화시켜 난국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광서제光緖帝는 이들을 중용하고, 과거제 개혁, 근대 학교의 설립, 관보 발행, 입헌정치 계획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어린 광서제와 서태후西太后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서태후와 조정 보수파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개혁파를 축출하고 실권을 잡았다(무술정변, 1898). 그리고는 개혁정치를 중단하고 과거체제로 회귀하였다. 이는 중국이 보수화의 길을 택하여 근대화가 지연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은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이 전국을 분할 관리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청-불전쟁(1884~5)에서 프랑스에게 패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일본에게 패함으로써, 베트남(월남), 조선 등에서의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타이완마저 일본에게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청조는 그 동안 동양의 강자로 군림하던 패권을 일본에게 내주게 되었고, 동양의 국제질서는 일본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이 봉기하여 외국 공관에 방화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의화단은 당시의 사회모순, 기독교 포교, 독일의 진출 등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부르짖으며 무력적 배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00년에는 북경에까지 들어와 관군과 함께 열국의 공사관을 공격했으나,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 연합군에게 격파되었다. 1901년 9월 북경의정서北京議定書(신축조약辛丑條約)의 성립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엄청난 배상금 지불을 포함한 12개 항의 내용은 독립국의 면모를 실추시키는 동시에 중국의 식민지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화단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조의 무기력함이 더욱 심화되자 청조의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민의는 더욱 강성해졌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사망하고 어린 세 살의 선통제宣統帝(부의)가 황제로 등극하자 정치는 더욱 혼란을 거듭했고 중국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중국의 탄생

1905년에 중국동맹회로 결집한 혁명파는, 그 후 화남華南·화중華中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반복했다. 혁명파는 1911년 12월 29일 남경에서 귀국한 혁명운동의 상징인 손문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 다음 해 1912년 1월 1일에 정식으로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남경에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했다. 혁명파는, 10월 10일 무창武昌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해혁명 발발에 이르는 과정에는 혁명파, 입헌파, 보수파, 혹은 부르조아(민족자본가), 지방 엘리트(향신), 민중(인민)의 운동이나 투쟁이 복잡하게 뒤얽힌 혁명상황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후 총리대신으로 다시 정치 무대로 등장한 원세개와 혁명파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1912년 2월 12일에 황제 퇴위에 관한 3개의 상유가 내려졌고, 청조 최후의 황제뿐만 아니라 중국의 ‘라스트 엠페러’이기도 한 선통제(부의)가 퇴위함으로써 약 270년에 걸친 청조의 역사는 그 막을 내렸다.

신해혁명 후에 탄생한 중화민국이 안고 있던 최대의 정치목표 중 하나는 불평등조약을 철폐하여 주권국가로서 재생하는 것이었다. 굴욕의 근대사를 경험한 중국이 주권국가로서의 재생을 완성하는 것에 있어 홍콩 반환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고, 중국 근현대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세계사’의 근대적 전개라는 관점에서 보면, 홍콩 반환으로 아편전쟁의 전후의 종결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두 ‘문명’의 해후에 ‘전쟁’이라는 ‘야만’성이 있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