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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이야기 (2024-03-10)

동방박사님 2024. 4. 1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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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德惠翁主, 1912525~ 1989421)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이다. 황녀로서 덕혜라는 호를 하사받기 전까지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고, 1962이덕혜’(李德惠)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였다.[1]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나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에 따라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져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 외동딸 소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이즈음 조울증, 우울장애, 반복성 우울 장애와 더불어 정신장애인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고, 1955년 이혼하였다.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엄밀히 황족은 아니며, 일본의 왕공족 신분이었다. 1962년 기자 김을한과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의 협조로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2]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덕혜옹주의 강제 일본 유학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황손들은 정책적으로 일본유학이 추진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황실의 왕자들은 모두 일본으로 보낸데 이어 덕혜옹주마저 일출 심상소학교 5학년 때인 1925년 일본으로 보낼 것을 결정하였다. 1925년 3월27일 옹주는 이왕직 장관 한창수, 이왕비전하부촉탁 스미나가 히테코, 그리고 나인 2명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도착 후에는 영친왕부부의 처소에서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1925년 4월에 학습원 여자 중등과에 입학하였다. 학습원은 황족이나 귀족 자녀의 교육을 위해 새워진 교육기관으로 덕혜옹주 외에도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우의 부인 박찬주도 학습원 출신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였던 옹주는 독살 당하지 않기 위해 보온병에 물을 넣어 나니는 등 타국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하였다.

일본으로 떠난뒤 1년 만인 1926년 4월25일 아버지 처럼 따르던 순종이 서거하였다.옹주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침식도 잊을 때다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3년 뒤인 1929년 5월30일에는 어머니 양구인마저 돌아가셨다. 덕헤옹주는 일제가 규정한 왕공가궤범 에 따라 상복도 입지 못한채 장례를 치러야 했다.어머니의 장례이후 도쿄로 돌아온 덕혜옹주는 신경쇄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병세는 날로 나빠져 조발성 치매를 진단 받기에 이르렀다.

덕혜옹주의 결혼과 생활

한일 강제병합 후 대한제국 황실을 왕공족으로서 일본의 황실에 포함시킨 일본은 영친왕에 이어 덕혜옹주의 배우자로서는 쓰시마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 (1908~1985년)가 선택 되었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가 혼인하게 된 배경에는 쓰시마가 오랫동안 조선과 일본의 외교창구 역할을 해 왔다는 상징적 의미 외에도 대한제국 황실의 유일한 여성미혼자로서 상당한 경제력을 보유한 덕혜옹주를소 가문에 맺어주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 1929년부터 혼담이 오고 간 끝에 1931년 5월8일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덕혜옹주 부부는 도쿄의 자택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정략결혼이었으나 신혼생활 초반 덕혜옹주 부부의 사이는 순탄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결혼 이듬해 딸 마사에가 태어난 후 덕혜옹주의 정신질환이 악화되면서 부부의 결혼생활은 위기를 맞게되었다. 

게다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왕공족 제도의 폐지로 소 다케유키는 백작 지위를 읽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다케유키는 덕헤옹주를 도쿄 도립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으며, 결국 1955년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고 일본여성과 재혼 하였다. 딸 마사에는 그 다음해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실종되었다. 소다케유키는 덕혜옹주가 머물고 있는 창덕궁의 낙선재를 방문하였으나 만남을 거졀당하고 돌아 갔다고 전한다.

조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은 일방적으로 덕혜옹주에게 이혼을 선언하고일본여자와 재혼 하였으며, 딸 마사에는 편지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덕혜옹주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입원생활 동안 한반도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격변의 세월을 지나고 있었다. 덕혜옹주를 찾아네 환국을 환국을 추진한 것은 언론인 김을한 (1906~1992년)이었다. 김을한은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을 지내고 영친왕 부부와도 가깝게 지냈는데, 1950년 처음 덕혜옹주의 소식을 접하고 옹주의 환국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제국 황손의 귀국을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거절당했다. 

이후 대한민국과 일본 양측에서 모두 잊혀 가던 덕혜옹주의 존재는 정권이 교체된 이후, 김을한의 노력으로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 에게 알려저 1961년 드디어 환국이 승인되었다. 덕혜옹주는1962년 1월26일 5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난 지 38년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된 덕혜옹주는 주변인물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꽃다운 소년의 모습으로 조국을 떠났던 덕혜옹주는 정신질환을 앓는중년 여성이 되어 돌아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바로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약6여년간 요양하였고, 1967년에 퇴원하여 창덕궁 낙선재의 수강재에서 영친왕비 이방자여사, 어린 시절의 유모 변복동여사와 함께 지냈다. 낙선재에서는2주에 한번씩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나 병환에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다만 정신이 맑은 날에는 주변인들의 도움을 받아 낙선재 주변을 나들이 하거나. TV를 보거나아리랑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딸 마사에의 이름을 쓰고 부르면서 옛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고 한다.덕혜옹주는 1989년 4월21일 78세의 나이에 수강제에서 영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