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서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서양철학사상

책임과 판단 (한나아렌트)

동방박사님 2022. 7. 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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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왜 책임과 판단인가?
우리 시대 가장 중대한 정치철학적 이슈들을 파고든 책


20세기 최고의 지성 아렌트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저술한 미출간 에세이를 모았다. 대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부터 유작 『정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선과 악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아렌트는 도덕이 붕괴된 20세기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끊임없이 천착해왔다. 이에 관하여 아렌트는 기존의 일반적인 기준, 규칙, 학설이나 주의·주장에 경도되지 않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판단의 문제와 그것에 기초한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에 대한 행위자의 도덕적 책임의 문제를 논의의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아렌트는 우리가 가장 작은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도시와 국가, 마침내는 지구 행성의 일원으로서 인류라는 최상위 인간 다수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최상위 인간 다수체에 동시다발적이며 중첩적인 방식으로, 자의로든 타의로든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 각자의 선택과 관련된 정치적 판단의 문제와 각자가 속한 세계, 즉 정치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두 가지 시민적 의무를 동시에 이행하라고 주문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는 상황에 처한 현대인들에게 아렌트는 보다 슬기롭게 성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유법을 제공한다.

목차

옮긴이의 말
편집자 제롬 콘의 서문
이 책에 수록된 문건에 관한 보충설명
감사의 글

|서언|

1부 책임

1장 독재 치하에서의 개인적 책임
2장 도덕철학에 관한 몇 가지 질문
3장 집합적 책임
4장 사유함, 그리고 도덕적 고려 사항들

2부 판단

5장 리틀록 사건에 관한 성찰
6장 [대리인]: 침묵한 죄?
7장 심판대에 오른 아우슈비츠
8장 자업자득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보냈는데, 이때 어머니를 통해 유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조숙하고 명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했지만,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 마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하이데거에게 수학하지만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실존...

역 : 서유경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부 인문·고전전공 교수이며 현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 연구에 집중해온 골수 ‘아렌티안Arendtian’으로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아렌트 읽기』,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우리말로 옮겼고, 「아렌트 ‘정치 행위’ 개념 분석」과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에 비춰 본 1987년 이후 ...
 

책 속으로

당신은 특수한 사례들을 그 밑으로 복속할 수 있는 선취 기준, 규범, 일반 규칙에 매달리지 않고서 어떻게 판단을 하는가? 아니, 다른 표현을 사용해보자. 가령 모든 관례적 기준의 붕괴를 증거하는 사건들과 직면하게 된다면, 그래서 일반 규칙들로는 그 결과를 예견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전례가 없는, 심지어 그런 일반 규칙들의 예외사항 중에서도 전례가 없는 사건들과 직면하게 된다면, 판단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이런 질문들에 타당한 답변을 하려면 아직도 매우 신비로운 영역인 인간 판단의 본질에 관한 분석, 판단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분석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감정이나 자기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기능이 작동되는, 다시 말해 특수한 사례들이 그 밑으로 간단히 복속되는 기준이나 규칙에 묶이지 않은 채로 기능을 수행하면서 판단 활동 그 자체를 통해 그것만의 원칙들을 창출하는 어떤 인간의 능력이 현존한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우리가 확고한 [판단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이 매우 미끄러운 도덕적 지반 위에 [스스로] 발을 내딛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된 것이라 하겠다.
--- p.97

내가 이렇게 플라톤의 가르침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여러분이 양심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문제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아니 ‘되었을지’라고 해야 맞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양심이라는 말의 어원―즉 원래 그것의 정체가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말보다 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기관으로서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의 구체적인 도덕적 성격을 획득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안들을 세속적인 용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기독교 이전의 고대 철학 말고는 기댈 것이 거의 없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이 거기서, 즉 그 어떤 방식으로도 어떠한 종교적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은 철학적 사유의 한중간에서, 어떤 지옥과 연옥 그리고 낙원에 관한 이론, 그것을 보강하는 최후의 심판, 보상과 처벌,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구분, 그리고 그 최후의 심판의 나머지 요소들 모두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은가? 여러분이 찾다가 허탕칠 것이라곤 오로지 죄는 용서될 수 있다는 [기독교적] 관념뿐이다.
--- p.186

우리야말로 서구에서 기독교가 등장한 이래 처음으로 소수 엘리트층뿐 아니라 대중들도 더 이상?미국의 건국 선조들이 여전히 그렇게 표현했듯이?“미래의 위엄”을 믿지 않는 첫 번째 세대다. 따라서 우리 세대는 양심을 보상의 기대나 처벌의 두려움 없이 반응하는 기관으로 생각하려고―아마 그렇게 보일 것이다―한다.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이 양심이 어떤 신성한 목소리로부터 통지를 받는다고 생각하는지는 솔직히 말해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의 사법제도들이 적어도 범죄행위와 관련해서만큼은, 모든 사람이 비록 법률서에 정통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그 양심이라는 기관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양심이 현존한다는 것을 옹호하는 논거일 수는 없다. 제도들은 종종 그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기본 원칙들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 p.187

당신 자신은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당신과 당신 자신 사이의 담론 과정에서 명료해진 것의 사실성에 도달했다. 가령 당신이 자신의 자아와 불화 상태라면 그것은 마치 억지로 자신의 적과 동거하면서 일상적인 교제를 갖는 것과 같다. 누구도 그런 것을 원치 않는다. 가령 당신이 불의를 저지르면 당신은 불의를 저지른 사람과 동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자기 이득을 위해 불의를 저지르기를 선호하는 한편, 그 누구도 도둑이나 살인자 혹은 사기꾼과 함께 사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살인과 협잡으로 권좌에 오른 전제자를 칭송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점이다.
--- p.189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중한 악행들은 그 악인이 [사유함의 과정 속에서] 자신과 다시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거나 그가 망각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최악의 악인들은 그 일에 대해 조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며, 그래서 기억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그들을 자제시킬 수가 없다. 인간들에게 있어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일은 깊이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 요컨대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안정화시킴으로써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시대정신이든 역사든 혹은 단순한 유혹이든―에 휩쓸리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대의 악은 [그 성격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아무 뿌리도 없고 뿌리가 없으므로 한계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극단들로까지 치달을 수 있으며 전 세계를 완전히 휩쓸어버릴 수도 있다.
--- p.196

사유 과정에 관한 소크라테스 - 플라톤적 설명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록 지나가는 말투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사람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 요컨대 단 한 사람Man이 아니라 여러 사람men이 지구상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다만 혼자서 존재할지라도 우리가 이 ‘홀로 있음’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하거나 실현할 때 우리가 동석 상태임을, 즉 우리 자신과 동석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외로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군중 속에서도 우리를 덮치는 그 악몽은 바로 이 ‘홀로 있음’이 자신에게 버림받은 상태, 말하자면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일시적으로 ‘하나 속 둘’이 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처신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처신에 좌우될 것이라는 점은
실제적인 사실이다. 오직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도, 특별한 의무들과 책임 사항들도 관련되지 않을 경우에만 사실상 사유와 회상의 순전한 능력이나 그것의 상실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 p.197~198

사유함과 행위함 사이에는 단순한 구분 그 이상의 내용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유형의 활동 사이에는 모종의 내재적 긴장 관계가 현존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결코 멈추지 않는 바쁜 사람들에 대한 플라톤의 경멸은 이후 모든 진실된 철학자에게 이런 저런 형태로 나타나게 될 어떤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러나 이 긴장 관계는 모든 철학자에게 소중한 어떤 관념, 즉 사유하는 것도 일종의 행위함acting이라는 생각에 의해서 그럴싸하게 얼버무려져 왔다. 부연하면 사유함이란 때때로 일컬어지듯이 일종의 “내부 행위inner action”라는 것이다. 이런 혼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학자가 행동하는 사람들과 시민들 측으로부터 받고 있는 비난들에 대한 자기방어 형식으로 말할 때 제시하는 부적실한 이유들과 사유의 본질 자체에서 기인하는 적실한 이유들이 함께 존재한다.
--- p.211

정치적으로 말해서 사유와 행위의 주된 구분은 다음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유하는 동안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자아나 또 다른 [나의] 자아와 함께 있는 반면,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많은 사람과 동석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전능하지 않은 인간들의 힘은 오직 인간 다수성human plurality의 여러 형태 중 하나 속에 있다. 다른 한편, 인간 단독성human singularity의 모든 양태는 정의상 무력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하나지만 둘로 분열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내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수성은 심지어 [나의] 단독성이나 사유 과정에서 나타나는 [나의] 이원성에서조차 하여튼 근원적으로 현전한다. 그러나 인간의 다수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 ‘하나 속 둘’은 마치 최후의 동행 흔적―내가 나 자신과 더불어 하나인 상태일 때조차 나는 둘이거나 둘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과 같다. 이 사실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못할 곳에서 [인간] 다수성을 발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타인들과 함께 있음에 관한 한 그 발견은 여전히 하나의 주변적인 현상으로 간주될 것임이 틀림없다.
--- p.212

우리는 시민들로서 우리들 모두―불의를 행한 자, 불의를 당한 자, 그리고 관중―가 함께 공유하는 세계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여기서 실제로 불의를 당한 것은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도시[세계]이기 때문이다.
--- p.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