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인문교양 (책소개)/6.작가인물탐구

김남주 평전

동방박사님 2022. 12. 8.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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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남미에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있다면 한국에는 혁명시인 김남주가 있다

이 책은 한국의 ‘파블로 네루다’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시인 김남주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가 지녔던 세계관을 드러내는 평전이자 ‘철학적 전기’이다. 단순히 독재정권에 저항한 혁명가의 삶을 그린 것이 아니라 김남주의 사상적, 정치적, 철학적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그의 대표작 『나의 칼 나의 피』, 『사상의 거처』, 『조국은 하나다』,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등에서 발췌한 다수의 시와 산문도 초판본과 철저히 대조하여 이 한 권의 책에 수록했다.

1970년대에 김지하가, 1980년대에 황석영이 있었다면 1970~80년대를 통틀어서는 온몸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다 스러져간 ‘전사’ 김남주가 있었다. 그는 남미의 혁명시인 네루다처럼 명쾌한 의식과 철저한 원칙을 지니고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지는 세상을 염원하고 실현하려 했다. 역사상 어떤 독재정치도 진실을 향한 외침을 원천 봉쇄할 수 없다. 아무리 군화가 평화를 짓밟고 자유와 진리의 숨통을 틀어막아도 저항하는 세력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1960~80년대 한국 민중의 움직임은 독재의 발걸음에 미약하나마 제재를 가했고, 이들의 용기 있는 저항은 행동하는 지성인의 올바른 태도에 관해 생각하게 했다. 아무리 자유와 평등, 화해와 협력 등의 보편적 진리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정통하다 하더라도 불의가 공공연히 행해지던 때에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김남주는 이러한 신념으로 평생을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웠다. 고된 감옥 생활 탓에 얻은 병으로 출옥한 지 5년 만에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2004년 문예진흥원 우수도서에 선정되었고 2008년 국방부 불온도서에 이름을 올렸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김남주의 정신도 새롭게 계승하고자 이번에 개정신판으로 재출간하게 되었다.

 

목차

머리말
김남주 시인 주요 연보

제1부 격동기의 삶
인간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래 그랬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다
실망과 좌절의 세월
『함성』과 『고발』
시인으로 등단하다
전사가 되다
감옥이라는 학교
5?18 광주민중항쟁
출옥과 결혼
붉은 새는 숲을 떠난다

제2부 투쟁의 무기
민족시인과 민중시인
자유민주주의의 허상
유물론과 관념론
종교의 본질
누구를 위한 예술인가?
“나는 투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조국은 하나다
세계의 민중문학
욕의 미학
자주·민주·통일
마지막 한 사람

맺음말
미주
이 책에 인용된 김남주 저작 목록
 

저자 소개

저 : 강대석 (姜大石)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과 및 같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독일 정부 초청 장학생(DAAD 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하여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독문학, 독일사를 공부했고,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철학, 독문학, 미학을 연구했다. 귀국 후 광주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과 및 대구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국제헤겔학회’ 회원, ‘국제포이어바흐학회’ 창립 회원이다. ...
 

책 속으로

김남주는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는 검판사들이 가진 자의 하수인이 되어 힘없고 못 가진 자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머리 좋은 아들들이 보통 꿈꾸는 것처럼 착취자의 대열에 끼거나 이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는 수탈과 착취가 사라지고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질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서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길을 택했다. --- p.32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있나’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좋지 않은 감정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주 단순한 데서 왔다. 그는 일제 때 우리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고 죽이는 것을 일삼았던 일본군 장교였다. 이런 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앉아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치욕이었다. 그는 또 수많은 청년 학생들의 희생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지 얼마 안 되는 민주당 정권을 폭력으로 때려눕힌 자였다.” --- p.64

“나는 그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말이 적은 그 사내는 내 웃도리를 벗기고, 겨울내의까지 벗기고, 내 대갈통을 자기 사타구니에 처박아 놓더니 뭔가 까끌까끌한 것으로 내 등을 긁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철판에 못 구멍을 내서 농부들이 소의 진드기를 떼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그런 기구였다. 끔찍했다. 그가 얼마나 심하게 내 등가죽을 긁었는지 나는 일주일 후에 손바닥만 한 피딱지를 떼어냈던 것이다.” --- p.71~72

김남주는 교양을 넓히기 위해서만 감옥에서 책을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투쟁을 계속했으며 투쟁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그에게서 시는 투쟁의 무기였고 시를 계속 써갈 수 있는 토양은 민중의 삶이었으며 시를 옳게 쓸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준 것이 그의 확고한 세계관이었다. 그는 이러한 세계관을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얻어갔다. 김남주는 감옥에서 불후의 명시들을 하나하나 써간다. --- p.103

김남주의 신념에 의하면 참된 민족문학은 ①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②민족을 배반하는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고 민중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③외세의 강요에 의해서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우리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 ④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창조적으로 민족문화의 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의 건설에 동참해야 한다. --- p.164

자본주의 사회구조 안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와 계약을 체결할 때만 자유롭고 그 이후부터 자본가의 노예로 전락한다.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본가와 자본가를 도와주는 정부, 부패한 언론들은 ‘노동자’라는 말 대신에 ‘근로자’라는 말을 만들고 노사화합과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이는 자본가를 지키려는 교묘한 수단일 뿐이다. 자본 자체가 바로 착취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 p.186

처음부터 종교는 인간이 과학적으로 자연을 지배해가는 문명화의 과정을 방해하고 인간을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게 만들며 인간생활에 오히려 해를 끼쳤다. 착취하는 인간과 착취당하는 인간으로 갈라지는 사회가 형성되면서 종교의 부정적인 역할은 더욱 강화되었다. 착취계급은 생산수단을 갈취하여 사회적 부를 독점하면서 종교를 이용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생산 수단의 사유화, 계급적인 불평등,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국가권력 등을 합리화하고 옹호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 p.226

김남주는 현실을 사랑하기 때문에 절망과 저주가 뒤섞인 목소리로 현실을 거부하는 서구의 예술지상주의자들과 달리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민중을 배반하는 한국의 순수 예술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발산하는 것 같지만 속은 검고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말하자면 순수 예술가들의 정체이다. 순수예술을 표방하는 문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거나 예총의 감투를 쓰고 군사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경우가 우리에게 있었지 않는가? --- p.272~273

“사랑을 주제로 한 네루다의 시는 소위 순수시의 옹호자들이 사랑의 대상으로 또는 비유로 삼고 있는 자연의 현상이나 신화 속의 미남 미녀 따위를 인간의 노동과 물질적인 삶에서 떼어내어 노래하지 않는다. … 그의 시에는 수없이 많은 꽃의 이름과 이슬, 바람, 별, 달, 태양이 등장하나 노동의 대지와 인간의 투쟁이 없는 자연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 시는 정신과 육체, 물질과 의식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합일하는 유물론적인 통일 속에서 하나로 용해되어 있다.” --- p.333

혁명이 오고 세상이 바뀌어도 노동자들이나 하층 민중은 잃을 것이 없다. 있다면 자본의 쇠사슬뿐이다. 이는 광주항쟁에 참여한 민중의 모습을 그린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무식하고 가난한 자들이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것은 비단 광주에서뿐만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건재하는 한 어디에나 존재한다. --- p.362

문화적인 범람의 배후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마수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본에 의한 착취가 계속되는 한 순수한 민족문화란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동시에 정치적 평등만으로 참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참된 민주화 없이는 자주화나 통일도 의미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다시 말하면 자주·민주·통일은 어느 것이 우선적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함께 맞물려 있다.
김남주는 미국의 경제적 침략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 p.372
 

출판사 리뷰

“나는 알고 있다 또한 이 길의 어제와 오늘을
이 길을 걷다가 쓰러진 다리와 부러진 팔과 교살당한 모가지를
고문으로 구부러진 손가락과 비수에 찔린 등과 뜬 눈의 죽음을
그들은 지금 공비와 폭도와 역적의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으로 쓰러져 있다.
아무도 그들을 일으켜 세워 자유와 조국의 이름으로 노래하지 못한다
해와 달과 조국의 별이 밝혀야 한다 밤이 울고 있다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걷는 이 길의 오늘과 내일을”
―「길」 부분

칫솔을 갈아 우유갑에 시를 새기며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운 시인 김남주

먼저 1부에서는 김남주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김남주는 가난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시절에는 미국식 교육과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발하여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민주화 투쟁을 위해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 3선 개헌과 유신 헌법에 반대하여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을 펴내어 1973년 수배되기도 했다. 피신하는 와중에도 그는 『함성』지의 이름을 『고발』로 바꿔 전국에 배포하려 했지만 곧 체포되었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 앞에서 스스로 한없이 나약해졌던 체험을 「진혼가」에 자조적으로 고백하기도 했다. 이 시와 더불어 「잿더미」라는 시가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실렸고 이후 본격적으로 문인이자 저항시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한때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와 해남농민회를 결성하는 등 지역 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했다. 1978년에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을 결성하여 조직 신문인 『민중의소리』를 펴냈다. 남민전 전위대 활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면서도 독서와 독학을 하며 투쟁 준비를 계속했다. 그에게 시는 투쟁의 무기였고 시를 계속 쓸 수 있는 토양은 민중의 삶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종이와 연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칫솔 끝을 뾰족하게 갈아 우유갑에 시를 썼고 이를 교도관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내보냈다.

2부에서는 투쟁의 무기가 되었던 김남주의 작품을 다수 살펴보며 그의 예술관과 세계관을 해설한다. 김남주는 자유를 존중하고 진리를 숭상했으며 보편적으로 귀하게 여겨야 할 가치들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랐다. 돈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사라지는 세상을 염원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동경했다. 이런 김남주에게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는 현실과 타협하고 입 닫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저항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악에 반하여 행동하지 않는 것을 그에 동조하는 것이라 여기고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저항할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민중에게 요구했다. 남민전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민중의 애환을 담은 작품을 썼을 뿐 아니라 루카치, 네루다, 브레히트, 푸시킨, 오도옙스키 등 유물론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에서 세계와 인간관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글들을 번역하고 책으로 엮어 널리 배포하며 독재에 항거했다. 옥중에서도 그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한 편의 글이 독재정권의 총칼보다 무섭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4?19 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 항쟁,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그리고 이름만 4대강으로 바꾼 대운하 사업. 우리는 분노했고 맞서 투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2016년, 국정농단사태로 인해 광장에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134일간 20회에 걸쳐 누적인원 1,600만 명이 광장을 찾았다.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다시 불리기 시작했다. 김남주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20여 년이 흘렀고 이 땅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아직도 그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은 온전히 오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이 거대한 자본주의적 구조와 친일 잔재들 속에서 노예처럼 소외당하고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 변화는 시작되었지만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지언정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며 저항했던 김남주의 말처럼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