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문화예술 입문 (책소개)/5.예술미학

예술의 사회 경제사 (2012 이미혜)

동방박사님 2022. 12. 1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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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500년에 이르는 광범위한 예술사에 대해 다루는 『예술의 사회 경제사』.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에는 들소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이 벽화들이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원시인의 솜씨라고는 믿지 못했다. 보존 상태가 완벽했고 들소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스코 동굴 벽화에 그려져 있는 들소는 상처 입은 상태였는데 내장이 삐져 나오고 털은 곤두서 있는 모습을 자세히 표현했다. 그에 반해 사람은 몇 개의 추상적 선으로 대강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석기 시대인에게 중요한 것은 잡아야 하는 들소이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바람이 바탕이 되어 동굴 벽화가 탄생했을 것이다.

교회가 최대의 예술 수요자였던 중세에는 종교 예술이 지배적이었다. 중세의 경제, 문화가 정점에 다다랐던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 사이에 유럽은 유례없는 건축 열에 휩싸여 성당을 건설했고 도시마다 자리잡은 이 성당에서는 예배 음악이 연주되고 종교극이 상영되었다. 또한 종교화를 바탕으로 미술이 발전되었다.

19세기에는 영화가 단시간에 대중 예술의 중심 자리를 차지했고 20세기를 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으뜸가는 오락인 동시에 유행을 주도하고 먹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체제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이처럼 예술은 꾸준히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소비와 생산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처럼 인류의 사회경제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한 예술사의 광대한 역사를 살펴본다.
 

목차

책머리에
서장: 상처 입은 들소

1부 예술의 탄생
1장 세이렌의 노래(고대 예술)
2장 파리의 노트르담(중세 예술)
3장 미켈란젤로의 편지(르네상스 예술)
4장 마법 섬의 쾌락(바로크 예술)

2부 시장과 예술
5장 늙은 예술가의 초상(근대 예술)
6장 파멜라의 결혼(근대 문학)
7장 모차르트의 죽음(근대 음악)

3부 대중 매체 시대의 예술
8장 저주받은 시인(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9장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대중 문학)
10장 아무도 아닌 사람의 하루(산업 미술)
11장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대중 음악)
12장 네 멋대로 해라(영화)
13장 끝없는 갈림길이 있는 정원(현대 예술의 상황)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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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이미혜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의 불문학 수용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 4대학 대학원에서 수학하고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으로 박사후 과정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 경성대학교, 부경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1997년부터 예술과 사회 경제의 관계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으며 『예술과 경제』(공저), 『예술의 역사』(공저), 『이미지의 시대』(공저)를 저술했다.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 ...

출판사 리뷰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본 예술사
예술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내적 접근 방법과 외적 접근 방법이 그것이다. 전자는 예술을 그 자체의 고유한 논리에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고, 후자는 예술을 사회 경제적 환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각각의 방법에는 장단점이 있는데, 내적 접근 방법은 개별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예술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외적 접근은 정확히 그 반대의 장단점이 있다. 즉 인류의 역사 속에서 예술이 발전해 온 전체 과정을 거시적으로 포착할 수 있지만, 개개의 예술 작품에 대한 심미적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예술을 단지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예술을 후자의 외적 접근 방법, 다시 말해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들이 예술을 독립적, 자율적 실체인 양 다루어 왔다. 사회 경제적 접근은 예술을 단지 미적 감상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요하고 생산하는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방법이다. 예술은 그것을 원하고 즐기는 사람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욕구에 부응해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하고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산물이다. 사람들의 사회 경제적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서 예술이 생산되고 수용되는 방식, 예술의 형식과 내용도 달라진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나온 이후 현대 예술은 급진적 변화를 겪었으며 예술의 사회 경제적 기반도 크게 달라졌다. 예술에 대한 미시적 연구와 함께 사회 경제사 분야에서도 새로운 연구들이 등장하였다. 그에 따라 예술의 발전 과정에 대해 이전과 다른 해석이 가능해졌고 또 필요해졌다. 이 책은 이러한 연구 성과 위에서 예술의 사회 경제사를 재구성하였다.

고대 동굴 벽화에 사람이 그려 있지 않은 이유
기원전 1만 5천 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에는 들소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본문 15쪽) 19세기 후반 고고학에 심취한 한 귀족이 알타미라 벽화를 발견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이 벽화를 원시인의 솜씨로 믿지 못했다. 보존 상태가 완벽했을 뿐만 아니라 들소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라스코 동굴 벽화에 그려져 있는 들소는 상처 입은 상태였는데 내장이 삐져 나오고 털은 곤두서 있는 모습을 자세히 표현했다. 들소 앞에는 막대기 모양의 한 남자가 누워 있다. 그런데 들소는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공들여 표현된 데 반해 사람은 몇 개의 추상적 선으로 대강 그려져 있다. 수렵 생활을 하던 석기 시대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사냥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사냥의 성공을 바라면서 또는 사냥감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동굴에 벽화를 그렸을 것이다. 사람보다 들소가 더 중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동굴 벽화에는 식물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식물이 그림의 소재로 등장하려면 고대 이집트 같은 농경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예술의 내용과 형식은 이미 고대부터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경제적 조건, 생활 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술의 수요자로 등장한 오디세우스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가 지은『오디세이아』에는 예술과 노동이 갈리면서 예술 수요자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발견된다.(본문 23쪽)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홀려 죽게 했다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의 일화가 그것이다. 이 일화에는 예술에 대한 고대 사회의 관점이 엿보인다.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한배에 타고 있으나 각각 다른 선택을 한다. 부하들은 귀를 막고 힘껏 노를 저어야 한다. 그들은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 쾌락은 비생산적인 것이고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향락에 탐닉하는 일은 금기이다. 부하들은 노래가 위험하다는 것만 알 뿐 그 아름다움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노래를 듣고 즐긴다. 생산 노동에서 면제되어 있고 남의 노동을 지배하는 유한 계급은 향락에 탐닉할 자유를 누린다. 함께 사냥하고 함께 여가를 누리던 원시 사회가 지난 후, 예술과 노동은 이렇게 갈라진다. 여가와 노동은 사회 구성원 간에 대립적인 것으로 분리되고, 여가를 가진 계급이 예술을 독점하게 된다. 예술 수요자는 노동에서 해방된 오디세우스뿐이고, 노동에 종사하는 부하들은 예술과 단절된다.

미켈란젤로를 키운 최대 스폰서, 교회
교회가 최대의 예술 수요자였던 중세에는 종교 예술이 지배적이었다. 중세의 경제, 문화가 정점에 다다랐던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 사이에 유럽은 유례없는 건축 열에 휩싸여 성당을 건설하였다. 도시마다 세워진 성당에서는 예배 음악이 연주되고 종교극이 상영되었다. 세속 예술 장르는 중세 내내 미약했다. 영주의 궁성을 중심으로 한 세속 문학이 있었지만 성당 건축 같은 장르의 사회적 중요성이나 예술적 완성도에 비하면 비중도 작고 사소한 오락에 불과했다. 건축은 지배적 예술로 건축에서 유래한 로마네스크와 고딕이라는 말은 그대로 중세 예술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 들면서 도시 귀족들이 뛰어난 미술가를 적극 후원하면서 이들은 다른 직종의 장인들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저택에서 먹고 자면서 상류층 생활 방식에 접했고 학자들과 사귀면서 인문학과 과학에 눈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가이자 과학자, 발명가였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중세 미술가들이 몰랐던 원근법을 사용하고 인체 해부학에 관심을 보였다. 예술 수요자가 늘어나 미술가의 보수가 높아지면서 그들의 지위는 고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도시 귀족들과 교황청이 경쟁적으로 거창한 예술 사업을 벌이면서 뛰어난 미술가들의 몸값은 높아만 갔다. 교황청이 제시한 보수에 이끌려 많은 미술가들이 피렌체를 떠났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 피렌체의 귀족들은 보수를 더 높였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로 3천 두카스를 받았는데 당시 피렌체에서는 이 돈의 10분의 1만 가지면 1년을 귀족처럼 살 수 있었다. 인문적 교양을 갖추고 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거장 미술가들은 더 이상 후원자의 발아래 엎드리지 않고 교황이나 왕에게도 자존심을 내세울 정도로 자부심이 높아졌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를 알현하러 갔다가 비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보따리를 싸서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세 번이나 친서를 보내야 했다고 한다.(본문 94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예술적 자유를 누린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예술적 문제에 있어서 후원자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미술가는 작업 대상과 작품의 주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지위가 높아졌어도 미술가는 여전히 권력을 가진 수요자들에게 고용된 존재였다. 왕과 교황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취미와 목적에 맞는 예술품을 제작하게 했다. 미술가들은 일단 특정 후원자에게 고용되면 여행의 자유, 다른 후원자들에게 주문을 받을 수 있는 자유 등이 제한되었다.

시장 경제의 희생양, 렘브란트
근대에는 시장 경제가 발전하면서 예술 생산의 형태가 근본적으로 뒤바뀐다. 건축같이 주문 생산될 수밖에 없는 일부 장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예술에서 주문 생산은 과거와 같은 비중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특권 계급에 한정되었던 예술 수요자는 중산층이 주축을 이루는 불특정 다수로 바뀌었다. 수요자의 확대는 예술 시장을 성립시켰다. 예술가들은 주문을 받고 작품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먼저 제작한 다음, 시장에 내놓고 사줄 사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시장을 염두에 두고 생산되고 시장에서 팔리지 않으면 가치를 잃는 상품이 되었다. 이미 20대에 유명해진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고향에서 거둔 성공을 기반으로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고 상류층 인사들을 고객으로 확보하면서 초상화가로 자리 잡았다. 고객은 많았고 그림은 비싸게 팔렸으며 수업료를 내는 제자들도 몰려들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국제 경제의 중심지였다. 네덜란드는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근대적 시장 제도로 빠르게 이행했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중산층이 새로운 경제 수요자로 등장했다. 중산층 수요자들은 전근대 예술 수요자와 달리 특정 미술가를 후원하지 않았다. 부호들도 예술가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지속적으로 그림을 주문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때때로 필요한 그림을 주문하거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으면 구입하는 소비자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고객의 마음에 들려고 하기보다는 예술적 완성에 몰두했으며 작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자기 스타일을 고집했다. 자연히 고객은 줄어들었다. 거친 터치와 두껍게 바른 물감, 명암이 뚜렷한 렘브란트의 스타일은 한물가고 고객의 취향은 매끈하고 정교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1640년대 후반 성공의 무대에서 밀려났다. 초상화 주문은 줄어들고 신혼 초 구입한 주택은 채무로 남아 그를 파산으로 내몰았다.

노동자들의 오락실, 영화관
19세기 말 탄생한 영화는 단시간에 대중 예술의 중심 자리를 차지했다. 20세기 사람들에게 영화는 으뜸가는 오락인 동시에 패션, 실내 장식, 일상 용품의 유행을 주도하고 먹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체제로 자리잡았다. 또한 떿화는 점차 다른 예술을 그 속에 끌어들이고 모든 예술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확산된 결정적 계기는 노동자 계층의 수요였다. 20세기 초 미국 노동자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이민이었다. 산업 혁명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을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혹은 더 잘 사는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180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약 5천만 명이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등으로 이주했다. 미국은 가장 많은 이민을 받아들인 나라였다. 이주가 절정에 달했던 19세기 말에는 남부와 동부 유럽에서 1천만 명 이상이 흘러들었다.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경제에 이민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노동자들은 도시 슬럼 지역에서 어렵게 살았지만 최소한의 오락을 원했고, 초기 영화는 이들에게서 시장 가능성을 발견했다. 1905년 노동자 주거 지역에 니켈로디언(5센트를 뜻하는 니켈과 극장을 뜻하는 오디언의 합성어)이라는 허름한 극장이 생겨났다. 니켈로디언에서는 30분 동안 한 릴짜리 영화 세 편이 상영되었으며 프로그램은 매일 바뀌었다. 니켈로디언 입장료는 5~10센트로 보드빌 극장보다도 쌌다. 노동자들이 즐길 수 있는 오락은 값싸고,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영화는 이 조건에 딱 맞는 매체였다.

예술 시장을 뒤흔든 또 하나의 큰 흐름, 디지털
2,500년에 이르는 예술사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전근대 예술에서 근대 예술로의 전환이다. 시장 경제의 대두는 예술의 상황을 전근대의 주문, 후원 제도와는 판이하게 바꾸어 놓았다. 자본주의 경제가 확립된 19세기 후반 대중 예술이 확산되면서 기존 예술과 대립이 심화되었고 이는 순수 예술, 즉 모더니즘이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20세기 후반 소비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등장시켰고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의 이원적 대립은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토대가 되어 준 20세기 후반의 경제 상황은 2000년을 전후해 디지털 경제로 이동했다. 컴퓨터,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분야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으며 많은 경제 활동이 디지털 환경 속에 편입되고 있다. 이제 이 디지털 기술의 진보와 확산이 예술 수요와 생산의 조건을 또 한번 바꾸어 놓고 있다. 인터넷은 기존의 다른 대중 매체와 달리 쌍방적, 분권적 성격이 강하다. 모든 사람이 콘텐츠의 수요자인 동시에 잠재적 생산자인 인터넷에서는 양자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특정한 주체가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웹 페이지를 열고 전 세계를 상대로 책을 출판하고, 음반을 배포하고, 영화를 만들어 상영할 수 있다. 예술의 역사는 꾸준히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소비와 생산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예술의 소비와 생산이 한 단계 더 민주화되는 토대를 제공하고 있으며 디지털 경제는 수요자, 매체, 생산자의 세 요소로 구성된 예술 시장 제도의 근간을 또 한번 바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