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4.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2014)

동방박사님 2023. 9. 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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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90년 김세일 필사본, 1995년 이함덕 필사본의 탈초본, 2008년 이인섭 필사본이 학계에 소개되었지만 사실 ?홍범도 일지?는 연구자들에게 크게 활용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홍범도 일지?가 20세기 전반기에 작성되었다보니 해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옮겨 쓰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오자, 탈자, 띄어쓰기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문헌자료였던 것이다.
이 책은 ?홍범도 일지?의 세 가지 필사본을 모두 참고하여 일지를 현대어 표기로 바꾸고 주(註)를 달아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홍범도의 독립무장투쟁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하여 살던 말년의 모습까지 연구한 논문도 담고 있어 홍범도 장군의 전반적인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목차

제1부 홍범도 일지
서문 ‘홍범도 일지’의 판본 검토와 쟁점
주해 ?홍범도 일지?
탈초 ?홍범도 일지?
자료 ① 이력서
자료 ② 앙케이트
자료 ③ 홍범도 부고
자료 ④ 홍범도의 기고문

제2부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과 말년의 삶
1장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2장 홍범도 장군과 러시아(소련)의 고려인사회

저자 소개

저자 : 반병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학사), 한양대학교 사학과(석사)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러시아원동과 북간도 지역에서의 한인민족운동(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the Russian Far East and North Chientao, 1905-1921)을 주제로 1996년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근현대사를 전공분야로 하...

책 속으로

김세일의 필사본과 이인섭의 필사본은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두 필사본은 어법, 문법, 띄어쓰기가 다르며, 특히 김세일 필사본에는 탈자, 오자가 많고 누락되거나 불명확한 부분 역시 많다. 김세일 필사본의 경우 이인섭 필사본에 들어 있는 단락 전체가 누락되었거나 단락의 중간 부분이 빠져 있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은 1958년에 작성된, 이인섭으로부터 넘겨받은 이함덕본을 30여 년 후인 1989년에 고송무에게 전달하기 직전에 급히 필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 보인다. _ 23쪽

1958년 당시 고려극장의 당책임비서였던 김진에 따르면, 홍범도가 직접 쓴 원본 ?홍범도 일지?는 러시아 연해주의 한카이 구역에서 작성한 ‘일기’를 희곡 [홍범도]를 쓴 태장춘이 갖고 있었고, ‘일기’의 내용은 의병활동에 관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홍범도 일지?는 홍범도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한 후의 시기, 즉 빨라도 1938년 11월 이후의 어느 시점까지만 기록되어 있다. 김진이 1958년 3월과 4월 이인섭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홍범도가 직접 쓴 ‘원본’ ?홍범도 일지?를 이인섭의 자료제공 요청을 받은 김진의 지시로 희곡 [홍범도]를 쓰기 위해 홍범도를 자주 면담했던 태장춘의 부인 이함덕이 1958년 4월 16일 ‘등사’하여 이를 김진이 1958년 4월 17일자로 이인섭에게 발송한 것이다. ‘고려극장 필사본’ 또는 ‘이함덕 필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_ 47쪽

홍범도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했는데, 이르쿠츠크파는 홍범도를 상해파의 지도자인 이동휘에 맞서는 인물로 부각시키려 했다. 특히 홍범도는 조선독립군부대의 대장의 명의로서 레닌을 면담했는데 이때 레닌으로부터 “싸총, 100루블의 상금, 적군모자, 그리고 레닌이 친필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를 선물로 받았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자유시에 관한 질문을 했는데 홍범도는 “몇 마디”로 답했다고 한다. _ 191쪽

청산리전투 전후 북간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허근의 의군부 군대를 주축으로 하는 대한총군부, 그리고 대한국민회 소속 안무의 대한국민군이 먼저 이동했고, 뒤를 이어 홍범도·이청천의 대한의용군과 서일·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연합한 ‘대한통의부’가 이동했다. 이처럼 시차를 두고 노령 이만으로 이동한 이들 부대는 이만에 주둔하다가 무장해제를 당한 후 각각 러시아 아무르 주(흑룡주) 자유시로 갔다. _ 192쪽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참변은 이르쿠츠크파가 상해파계열의 독립군과 한인빨치산대를 탄압한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홍범도는 사건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파쟁에 활용했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이후 체포된 상해파계열 한인장교와 병사들에 대한 재판부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_ 202쪽

?홍범도 일지(일기)?는 표현은 ‘일기’ 또는 ‘일지’이지만, 매일의 일을 적은 명실상부한 ‘일기’는 아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3개의 필사본은 ‘일기’ 형식이라기보다 ‘약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대담상대가 있는 구술형식으로 서술된 부분도 있어서 ?홍범도 일지?의 기초가 되었을 법한, 홍범도가 직접 쓴 다른 메모 또는 기록책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_ 214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2014년 6월 7일 봉오동전투 94주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하면 김좌진 장군만 떠오르십니까?
홍범도는 청일전쟁 이후인 1890년대 후반 항일의병투쟁에 나선 이래 3·1운동 이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로 대표되는 항일무장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군의 실력양성 및 교육에도 힘썼던 항일운동지도자이다. 홍범도는 ‘불패의 전설’로 기록되고 있는 저명한 항일투사로서, 투쟁의 역사는 투쟁기간의 장구함에서 뿐만 아니라 투쟁의 치열함에서 단연 돋보이는 역사를 남겼다.

부하들이 애정과 존경을 담아 부르던 “홍 대장”
진정한 일반 민중의 영웅으로 기억하라
홍범도는 ‘군벌적 계급의식’이나 ‘특권의식’이 있었던 양반이나 지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전형적인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군 지도자였다. 부하들은 함께 노동하고 고난을 나누며 투쟁했던 지도자에 대한 깊은 존경과 사랑을 담아 홍범도를 ‘홍 대장’이라고 불렀다.
러시아(소련)으로 망명한 이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떠나온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서거하기 전까지 고려인들의 크나큰 존경을 받은 민족의 영웅이었다. 홍범도를 기리는 연극 [홍범도]가 여러 차례 공연되었고, 말년에 거주하던 집은 크즐오르다의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집 근처에는 ‘홍범도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지금도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업이 이어지며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