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종교의 이해 (책소개)/6.종교철학

해석학 1 .2 : 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020) -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해석학

동방박사님 2023. 9. 1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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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앎의 속임이라는 문제를 비판하고 삶의 해방을 도모하는 기획이 1권을 만들었다면, 2권에서는 앎의 위치에서 작동하고 있는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믿음도 앎의 차원에 머무르는 한 만만치 않게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2권은 믿음을 인간의 정신적 영역으로만 추려왔었던 종교전통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하여 결국 삶에서 믿음의 뜻을 다시금 길어내는 방향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구체적으로 종교를 교리나 윤리로 추려왔던 종래의 이념체계가 삶의 현실을 억압해왔다고 고발하고 대안으로 불안한 현실에서 자유를 향한 실존으로서 믿음의 뜻을 일구려는 시도에서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런 터전 위에서 신의 계시도 교리나 윤리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행동하게 하는 힘의 원천으로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통찰로 나아간다. 나아가 이와 같은 앞선 논의들을 아우르면서 종교 바깥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성찰을 되새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해석학은 결국 앎과 믿음에 의해 벌어졌던 무수한 기만과 왜곡, 그리고 이에 의한 억압과 강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삶의 현실로 나갈 수 있는 길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풀이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

0.1. 잘 살려고 자기를 찾다가 자기에게 얽매이는 인간
0.2. 자기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앎이 아니라 삶이 살게 해야
1. 삶의 터로서 자연 그리고 이를 갈고 닦는 과정
2. 종교가 문화로: 성 - 미 - 선 - 진
3. 물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다: 1-3-6
4. 주제파악으로서 해석학에 이르기까지
5. 진리인가, 의미인가?: 인식과 해석의 갈래
6. 사람의 꼴: 단순에서 복잡으로 / 대답에서 물음으로

2부 삶이 나를 살게 한다

1장 있음에 대한 삶의 반동
앎의 뿌리인 삶, 종교의 뿌리인 자연: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2장 앎에 대한 삶의 절규
니체의 종교비판과 해석학적 의의
확신의 진리의 반대: 니체, 〈안티크리스트〉
생명을 박제화하는 종교 비판: 니체, 〈우상의 황혼〉
도덕의 기만에 대한 삶의 항거: 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과 종교의 억압을 비판하다: 니체, 〈도덕의 계보〉

3장 삶으로 다시 있음을
삶과 얽히는 있음: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있음은 본디 살게 하는 사건이다: 하이데거, 〈형이상학 입문〉
진리도 명제가 아니라 사건이다: 하이데거,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목차

들어가는 말

3부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산다는 것

1장 믿음은 앎이 아니라 삶
인식론을 넘어서 해석학으로: 불트만, 〈학문과 실존〉
계시란 모름을 고백하는 것: 불트만, 〈신약성서의 계시개념〉
“진공 중에서, 빈손으로!”: 불트만, 〈예수 그리스도와 신화〉

2장 삶으로 밀고 들어오는 계시
다름과 모름으로서 계시: 본회퍼, 〈행위와 존재〉

3장 앎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믿음으로
삶으로서 믿음이기에: 리쾨르, 〈해석의 갈등〉

4부 종교 강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하여

0. 무종교시대에 종교 강박이라니?
1. 믿음의 터가 넓어지고 깊어지다: 이성에서 정신을 거쳐 실존으로
2. 종교와 그 뿌리인 인간, 자기가 핵심이다!
3. 교회-그리스도교-성서-하느님의 관계는?
4.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에 대하여
5. 그렇다면 다시 ‘인간’은?
6. 신학방법론에서도 구도전환을 거쳐 해석학에 이르다
7. 해방과 치유를 위한 인간학으로서 해석학
 

저자 소개 

저 : 정재현 (鄭載賢)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종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드미션대학교 석좌교수, 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이다.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성정이 어떻게 문명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인간을 억압하는 동인이 되는지에 대해 관심한다. 아울러 그러한 초월지향성을 품은 종교가 어떻게 본래 뜻인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모색하고자 한다. 주요 저서로는 《신학은 인간학이다》, 《자유가 너희...

책 속으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 방면에서 많은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우리 맥락에서는 이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바이러스의 공격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윤리적 일탈 가능성을 포함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의 뿌리에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자화상이 놓여있다고 진단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보다 잘살아보겠다고 내뻗은 앎의 짓거리가 세상을 주무르는 듯하더니 급기야 인간 자신도 거기에 속박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달리는 인류문명사를 근본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바이러스의 출현은 우연히 일어나는 자연적인 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생물의 준동이 일어나는 빈도가 점차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러한 자연적인 악을 그저 우연으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 말하자면 더 깊은 뿌리에 생태윤리의 문제가 깔려있음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더 깊은 곳에 인간이 저지르는 생태파괴라는 도덕적인 악이 드리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를 자인하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종의 기원〉이 출현한지 몇 세기도 되지 않아서 ‘종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 「1부,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 중에서

종교의 뿌리는 감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감성이라 하니 욕구를 떠올리면서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 배에서만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솟구쳐있다고 폭로한다. 종교를 지성이나 의지의 영역에서 교리나 윤리로 새겨왔던 이전 시대가 인간을 지엽적으로 축소시켜 왔었다면, 감성이라는 욕망이 몸 전체, 아니 인간 전체를 휘감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라고 한다. 말하자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사실상 사유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즉 앎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삶이나 실존이라는 현대의 아우성이 물질과 육체로, 그래서 결국 욕망으로 드러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를 관통하는 포이어바흐의 통찰은 오늘날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반동인 것은 비단 종교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통을 이루어 온 존재와 사유의 위상에 대한 도전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읽혀야 한다.
--- 「2부 1장, 있음에 대한 삶의 반동」 중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표현 자체가 역설적이면서도 꽤 재치 있다. 이성적인데 그 정도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좋은데 지나치다는 것이겠다. 이성의 체계화가 극치에 도달한 근대성이 지닌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는 물론 적극적으로 평가했지만, 그 이면에 부정적인 것에 대한 염증을 절절하게 느낀 현대 정신의 통찰이다. 그것의 탁월한 사례가 앞서도 언급한 대로 도덕주의이다. 실제로 변증법도 그렇다. ‘정’과 ‘반’ 사이의 모순을 모순대로 두지 않고 불편한 것들을 제거하는 지양을 거쳐 종합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하면 더이상 긴장은 없어진다. 긴장 없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그러면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다. 그런 것이 정신변증법이고 역사변증법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실존변증법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이성성, 도덕주의, 변증법이 같은 말이다. ‘영원한 햇빛’이라는 은유가 이들이 공유하는 분위기다. 이것들이 니체에게는 거부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와 대비하여 ‘어둠의 욕구’가 예찬된다. 소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폴론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짓눌렸던 도덕과 문화의 역사에 대한 생명의 반동이다.
--- 「2부 2장, 앎에 대한 삶의 절규」 중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있음’은 ‘삶이라는 터전에서 삶과 얽히는 있음’이다. 나아가 ‘살게 하는 있음’이다. 현존재와 세계를 논했던 『존재와 시간』이 그 시작이었다. 이전의 있음은 삶에서 그려질 수 없었다. 삶의 바닥에 있을 수 없고 ‘저 높은 보좌 위의 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있음은 ‘떠 있는 있음’이었다. 하이데거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생명적인 언어가 중세 라틴어로 넘어가면서 납작하게 찌그러졌다고 개탄한다. 라틴어는 존재를 명사화시킨 주범이다. 제도를 구실로 삶의 언어를 있음의 언어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제국의 체제를 만들 때 수많은 꿈틀거렸던 것들을 납작하게 정형화시켰다. 그래서 존재가 의미를 잃어버렸다. 존재 망각이다. 그래서 다시 이를 복원시켜야겠다고 하이데거는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 문화권에서 납작하게 찌그러졌던 것들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프로젝트를 이 책에서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 「2부 3장, 삶으로 다시 있음」 중에서
 

출판사 리뷰

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펴내면서…

군림해왔던 앎보다 더 깊은 뿌리에 삶이 있다는 반동에서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런 삶을 앎이 잘라내고 눌러왔다는 절규를 곱씹는다. 나아가 이런 반동과 절규를 싸안고 삶에서 있음이 뜻을 지닐 수 있는 길을 더듬는 성찰도 살핀다. 정신에만 골몰하는 관념론에 대한 육체와 물질의 유물론적 반동이 시작이라면 포이어바흐와 함께 정신에 대한 자연의 권리원천을 회복시킨다. 그러한 정신이 도덕이나 문화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연과 생명을 억압해왔다는 니체의 고발은 삶의 원초적 전율을 더욱 강렬하게 일으키니 앎의 속임에 의한 우상화가 기만과 억압의 원흉임을 만천하에 폭로한다. 이러한 저항과 반동은 급기야 삶을 살게 하는, 그래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된, 있음을 새삼스레 드러내니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의 기여가 적지 않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서 머물렀던 앎의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서 삶의 철학에서 서주를 울렸던 현대의 해방 추구가 그렇게 육체와 실존에 대한 절규를 거쳐 삶에서의 뜻풀이로서 해석학에 이르게 된 진전과정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