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문학의 이해 (책소개)/8.외국현대소설

노숙 인생 (2024)

동방박사님 2024. 2. 14.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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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09년 공쿠르상 단편 부문을 수상한 이 책에 관한 해외 독자들의 의견 중에 “왜 실뱅 테송을 읽을까? 아마도 그가 우리가 쓰지 않은 걸 쓰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테송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공감할 표현이다. 여행가이자 작가인 테송은 남이 쓰지 않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남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 탐험에 가까운 그의 극한 여행의 기록은 《시베리아 숲속에서》, 《눈표범》 등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 작품들은 각각 프랑스의 대표 문학상인 ‘메디치 상’, ‘르노도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세상의 구석들을 가능한 한 현대 기술의 지원 없이 발로 누비는 테송은 발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글을 쓴다. 걷는 동안 불쑥 등장하는 세세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그의 문체는 추적자처럼 정확하다. 그가 사계절 내내 걸어서 탐색하는 광대한 세상이 어느 순간 그의 말 속에 자리하고 있다. 다채로운 캐릭터,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을 진정성 있는 시선으로 담아낸 이 열다섯 개의 단편은 그의 편력이 낳은 또 하나의 멋진 결실이다.

목차

- 아스팔트 007
- 돼지 041
- 동상 056
- 버그 076
- 호수 098
- 그 여자 124
- 난파 133
- 행운 154
- 글렌 167
- 미립자 184
- 섬 189
- 크리스마스트리 207
- 우편물 214
- 내포 224
- 등대 243

옮긴이의 말 258

저자 소개

저 : 실뱅 테송 (Sylvain Tesson)
 
작가·여행가. 일찍부터 극한 조건의 여행과 탐험을 일삼았고 두 발로 세상을 살며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노숙 인생Une vie a coucher dehors》으로 2009년 중편소설 부문 공쿠르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고, 《시베리아 숲속에서Dans les forets de Siberie》로 2011년 에세이 부문 메디치 상을 수상했으며, 《눈표범La Panthere des neiges》으로 2019...

역 : 백선희

번역은 텍스트의 여백과 작가의 침묵까지 살려 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 전문 번역가.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 제3대학에서 문학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로맹 가리, 밀란 쿤데라, 아멜리 노통브, 피에르 바야르, 리디 살베르, 로제 그르니에 등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중요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옮긴 책으로 모파상의 『멧도요새 이야기』, 로맹 가리의 『레이디 L』, 『...

책 속으로

예전에는 길 때문에 느리게 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풍경 구석구석을 알았으며, 사고 때문에 슬퍼할 일이 없었고, 시간적 여유는 있었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멋진 새 아스팔트 위에서는 달랐다. 모두가 돌진하면서 피가 뜨거워졌다.
--- p.33

변한 건 우리가 아니라 사물의 가치라는 겁니다. 그게 예전과 같지 않다고 했지요. 고기 한 조각이 쟁취였을 때는 돼지 한 마리의 가치가 컸지요. 고기 한 조각이 습관이 된 뒤로 돼지는 그저 생산품이 되었고요. 고기가 권리가 된 뒤로 돼지는 제 권리를 잃었다는 거죠.
--- p.49

지뢰는 모범적인 보초다. 그것은 몇십 년 동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매복한 채 제 자리를 지킨다. 거미조차 먹이를 기다리다 지치고 마는데, 지뢰는 욕구 없는 병사다.
--- p.57

날짜를 아는 건 존엄의 표현이다. 감옥에서 날짜를 세지 않는 자들은 다른 자들보다 더 빨리 미쳐간다.
--- p.99

숲과 자갈길 사이에서 망설이며 하루를 보냈다. 어떤 이들에게는, 행복이 다른 곳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 적어도 그는 그런 암초를 피했다. 은둔생활은 그에게 불만에 대한 예방주사를 놓아주었다.
--- p.119

대리석 시대의 그리스에서 영원한 견고함을 추구하는 사유학파들이 발전한 것은 그 지리적 단순성 덕이다. 이런 풍경에는 정신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공기, 땅, 바다라는 요소들의 표현으로 축소된 자연은 철학자들에게 세상의 배열방식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작업을 도왔다.
--- p.144

이들의 마음속에 권태가 생겨났다. 그들은 시간의 적도무풍대에 갇혀 있었다. 일 분 일 분이 고요한 파도에 휩쓸리는 빈 조개껍질처럼 흘러갔다. 난파는 그들을 세상의 흐름에서 배제했고, 생존은 그들을 시간의 흐름에서 빼냈다. 마침내 태평양에 밤이 내리면, 하루가 그들에게는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다.
--- p.197

지옥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들이 도착할 가능성이다.
--- p.225

매년 그들은 3주 동안 항해했다. 소금보다 걱정을 잘 녹이는 건 없었다. 게다가 에드는 일 년 내내 여행했다…. 이 배는 그들 사랑의 풍압 중심점이었고, 만남의 장소였다. 뱃머리에는 파란색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애드 비탐ad vitam(삶에게). 파도의 덧없음에 내거는 영원의 약속.
--- p.226

출판사 리뷰

공쿠르상 단편 부문 수상(2009)

노숙하며 내면을 들여다보기. “숲에는 정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정의인 건 드문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 실뱅 테송이 자연과 인간에 관해 쓴 책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우리가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리, 즉 광활한 세계 속의 아주 작은 부분을 여행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한다. 관록 있는 여행가인 이 작가는 노숙을 일상으로 삼으며, 우리를 구소련의 광대한 영토,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키클라데스 제도의 가장자리, 심지어 중동의 중심부로 데려가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개의 단편은 페미니즘, 동물 복지, 생태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적 현실을 바탕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동시대성을 유지한다.

이 책에 실린 열다섯 편의 이야기 중 〈아스팔트〉 편의 비극적 운명을 읽다 보면 인간의 애석한 망상이 초래하는 불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지아의 낙오한 시골에 사는 에돌피우스는 도로라곤 자갈길 하나뿐인 마을에 아스팔트를 깔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온적인 마을 사람들을 설득한다. 오로지 도시만 꿈꾸며 온종일 빈둥거리는 쌍둥이 딸을 구원할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아스팔트가 깔리자 첫째 딸은 그 길로 도시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다 애인의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함께 죽고, 딸을 죽게 만든 아스팔트를 원망하며 한밤중에 트랙터를 몰고 가 아스팔트를 온통 파헤쳐놓고 돌아오니 남은 쌍둥이 딸이 슬픔을 못 견디고 손목을 그은 바람에 다급하게 이웃의 차에 실리고 있다. 이웃이 말한다. 다행히 아스팔트 도로가 있으니 도시까지 한 시간 안에만 도착하면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이 한 편의 짧은 이야기 안에 시대와 지리와 그곳 사람들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노숙을 일상처럼 살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테송의 시선은 늘 이렇듯 사람들을, 그것도 불운한 사람들을 향해 있다.

테송은 파타고니아, 조지아, 아프가니스탄 등을 배경으로 지뢰제거반 병사, 불평등과 학대에 복수하는 여성들, 집약 축산업에 절망한 축산업자, 난파선 약탈자들, 세상 끝의 등대지기… 등을 등장시켜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쳐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있고 대부분 극적인 몰락을 피하지 못하지만, 부드러운 아이러니가 단편들 전체를 관통하며 독자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전체가 행복하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이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건 무슨 조화일까. 스케일 있는 풍경들에,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순수하면서도 화려한 문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주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면면을 그리고, 현대사회의 명암과 연결 짓는다. 그러면서 고독, 파괴, 휴머니즘 등의 철학적 개념들도 파고든다.

“피오트르는 혼자 지내지 않으려고 개 한 마리를, 배고프지 않으려고 총 한 자루를, 춥지 않으려고 도끼 한 자루를 가졌다. 이날 그는 개를 쓰다듬었고, 총에 기름을 쳤으며, 도끼를 갈았다. 모든 야심 위로 숲의 커튼을 치면 삶은 복잡하지 않다.” _ 110p

세상은 우리가 연민을 갖고 봐야 할 불운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인류는 마치 조난자들 같다고, 테송은 말한다. 그에게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무언가에 갇힌 존재다. 그것이 본성이든 환경이든 아니면 물질이든.

하지만 작가는 욕망과 운명의 무게추를 간결한 통찰로 조율하며 이 세상에 조난된 우리의 희망을 자극한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세상과 사람들에 결코 도덕 같은 것을 내비치지 않는데도, 그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운명의 법과 자연의 힘이 욕망과 희망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자연에 바치는 서정시처럼 존재 내면에 미치는 풍경의 영향력을 유려하게 포착한 이 책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과소비를 생각하게 하고,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만든다. 상상의 기제가 낳을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시적인 것들을 지리적 현실 속에서 보고 살아온 그가 이 단편들에서는 길 위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 속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운명의 법칙과 자연의 힘을 거스르는 인간의 ‘애석한 망상’이 초래하는 불운을 더이상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