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2.독립운동기억

임시정부기념관 2층 전시실 (임시정부관) / 2024-05 -31

동방박사님 2024. 6. 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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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大韓民國) / 1919~1948

 

표어:대한독립만세 (大韓獨立萬歲) / 국가(애국가) / 수도:서울(명목상 수도)

임시정부 소재지 / 상하이 1919-1932 / 항저우 1932-1935 / 자싱 1935 / 난징 1935-1937 / 창사 1937-1938 / 광저우 1936-1939 / 치장 1939-1940 / 충칭 1940-1945 / 서울 1945-1948

정치 정치체제 (민주공화정) / 의원내각제 (1919) / 대통령제 (1919~25) / 의원내각제 (1925~27) /  집단지도체제 (1927~40) / 주석제 (1940~48) / 임시 대통령 / 국무령 / 주석 / 부주석 이승만 (1919~25) / 이동녕 (1927~33) / 김구 (1940~47), / 이승만(1947~48) /김규식(1940~47) / 입법부(임시 의정원)

역사 / 독립선언 / 임시헌장 공포 및 상해임시정부 수립 /한성정부 수립 / 임시정부 통합 / 임시헌법 공포 / 한국 광복군 창설 /대일선전포고 / 광복 / 정부수립 선포 및 임시정부 해산 191931/ 1919411/ 1919423/ 1919911/ 1919911/ 1940917/19411210/ 1945815/ 1948815

지리: 면적220,951 km2 / 공용어(한국어) / 인구: 1919년 어림약 20,000,000(31일 기준) / 통화(()

현재국가: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1919년 발표된 3·1 독립선언서 및 3·1 운동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다. 간략히 임정이라고 한다. 1919411일 중화민국 상하이시에서 수립되었고,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해산하였다.

19193.1 운동 직후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같은 해 9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이때 4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의 내용을 대폭 보강하여 911일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강점기에는 윤봉길 의거 지휘, 한국 광복군 조직, 임정 승인을 위한 외교 등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지원하였고, 중화민국,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부터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광복 후 미군정기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 법통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리켜 상해 림시정부라 불렀다.

1948717일 제정된 제헌 헌법에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명시되었고, 제헌 국회 의장 이승만은 국회개원식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정 계승을 확실히 밝혔다.[9]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하였다. 임정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수립 배경: 민족자결주의

1917 4 6일 미국은 독일에게 선전포고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이후 전세가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지자 1918 1월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미국 의회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제기하였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에 전 세계의 독립운동가들이 크게 고무되었다

1918 11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유럽의 제국주의가 흔들리자 독립운동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1919 1 18,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어 전후수습을 논의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김규식 등의 대표단을 파리로 보내 독립을 염원하는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정부대표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김규식과 한국 대표단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며 문전박대했다.

독립선언

1919 1 21일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반일감정이 고조되었다. 1919 2 1일 만주 지린에서 만주, 연해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 39명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를 작성한 조소앙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1919 2 8일 일본 도쿄 YMCA 강당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 선언서 작성 후 예관 신규식은 동제사 요원들로서, 곽경, 선우혁 등을 국의 손병희, 이승훈 등에게 밀파하여 3 1일 독립혁명의 거사에 참여하도록 밀서 등을 통하여 동참을 요청하였다.

3·1 운동

1919 3 1일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민족대표 33인에 의해 3·1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3.1 만세 운동 참가자는 약 202만 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 2,000만 명의 10%에 달했으며, 사망자 7,500여 명, 부상자 16,000여 명, 체포·구금된 사람이 46,000여 명이었다. 만세 시위는 3월부터 시작하여 5월까지도 격렬하게 지속되었는데,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일제 경찰에 연행·구금되어 사실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3·1 운동으로 표출된 독립 의지를 대표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국내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다. 1919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순종이 건재하고 있어서 망설이는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출처 위키백과

임시육군무관학교

항일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운 이 학교는 1920320일 개교식이 있었고, 입학생이 40명이라고 하나 58일 제1회졸업생 19명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실제적인 설치시기는 1919년 말로 보인다.

1920124일에 제2회졸업식을 가진 이 학교에서는 당시 중국에 있던 청년 중에서 일반학교와 중국의 군관학교에 갈 수 없었던 사람으로 무관이 되려는 청년들이 교육을 받았다.

이 학교는 김희선(金羲善도인권(都仁權)을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졸업생은 국내와 일본 혹은 남만주의 임시정부 산하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에 배치하여 독립전쟁에 참전하게 하였다.

임시육군무관조례(전문 27, 부칙 2)에 의하면 중등 이상 학력 소지자로 1930세의 대한민국 남자가 입학할 수 있고, 수학기간은 초급장교에게 필요한 12개월로 되어 있었으며, 졸업하면 참위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 학교는 군무총장(軍務總長) 직속에 교장·부관 각 1, 교관 약간 명, 학도대장·학도대부관 각 1, 학도대중대장·학도대구대장 약간명에 주계(主計군의 약간명, 서기를 두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그 밖에 비행대·의무대 등을 위한 교육도 실시하였으나, 그 자세한 내용 등은 밝혀져 있지 않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 192066~6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安武)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은 1,300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00여 명 정도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선다. 192067일 북로 제1군 사령부(간도국민대) 부장 홍범도는 군무 도독부군,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짜고 제3소대 분대장이화일을 시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나기가 내리쳤고, 일본군 부대는 선봉으로 올라가던 일본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했다.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간 홍범도 부대는 이를 내려다보고 남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6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는 신호탄을 올렸다.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姜尙模)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전투를 전개해 나간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산리전투

192010월 김좌진(金佐鎭) · 나중소(羅仲昭) ·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정의

192010월 김좌진(金佐鎭) · 나중소(羅仲昭) ·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역사적 배경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 · 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8월에 서일(徐一) · 김좌진 · 이장녕(李章寧) · 김규식(金奎植) · 최해(崔海) · 정훈(鄭勳)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1919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경과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192010월의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앞서 중국군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방침을 통고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奉天省)의 경계지역인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 · 삼도구(三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다.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延吉縣)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부대는 1010일경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자,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했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10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人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오전 9시경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김좌진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 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해서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결국, 오후 늦게부터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명이 전멸당하였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군복의 색깔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자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한편, 22일 새벽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 · 2지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 곳으로 이동해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다.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랑촌 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해 신속히 대피하였다가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였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과

이와 같이 10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 권총 150,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 · 김훈(金勳) · 백종렬(白鍾烈) · 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등이었다.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 · 국민회군 · 의군부 · 한민회(韓民會) · 광복단 · 의민단 · 신민단 등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광복군 (韓國 光復軍)

한국의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중일 전쟁, 버마 전역에 참전

한국 광복군의 기 한국 광복군의 문장

활동기간 1940917~ 19465월 말

이념 한국 민족주의

지도자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김학규

박시창

김홍일

본부 중화민국 충칭

병력 339~564

상위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래단체 한국독립군

조선의용대

이후단체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군

동맹단체 국민혁명군

동맹국가 미국 미국

대영 제국 대영제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적대국가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참여한 전투 한국의 독립운동

태평양 전쟁

중일 전쟁

버마 전역

서울 진공 작전 (1945)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또는 줄여서 광복군(光復軍)19409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준군사조직이다. 1939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과 그 밖의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917일 성립전례식을 갖고 결성되었다.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통솔하였던 사람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이었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815일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5월 말에 해산하였다.

창설 과정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4. 4)

준비 작업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장제스는 임정이 무력수단을 갖추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선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장제스와 김구 개인이 돈독한 관계도 한몫했다.

1936년에 장제스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전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다. 광복군은 19391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9월 성립전례식을 준비, 계획하였다.

1940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총통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으나 19448월 임시정부로 통수권이 넘겨졌다.

성립전례식과 창군

1940915일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내용이다. 이어서 9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행사가 거행됐다.

광복군 성립 전례식에서의 김구(통수권자)와 지청천(총사령관)

해방 후 어느 광복군(1946)

김구 명의의 한국광복군 선언문이 독립기념관 광복군 어록비에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서기 1919) 정부가 공포한 군사 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

과거 30년 간 일본이 우리 조국을 병합 통치하는 동안 우리 민족의 확고한 독립정신은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자비한 압박자에 대한 영웅적 항전을 계속해 왔다. 영광스러운 중화 민족의 항전이 4개년에 도달한 이 때 우리는 큰 희망을 가지고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때가 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장개석 총통의 한국 민족에 대한 원대한 정책을 채택함을 기뻐하며 감사의 찬사를 보낸다. 우리 국가의 해방운동과 특히 우리들의 압박자 왜적에 대한 무장 항전의 준비는 그의 도의적 지원으로 크게 고무되었다. 우리들은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 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서기 1940915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한국 광복군 창설 위원회 위원장 김 구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처음 꾸려졌을 때 광복군은 총사령부만으로 이뤄진 군인 없는 군대였다. 초기 광복군은 “1기 임무로 장병을 급속 모집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 항일전선에 참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선이 가까운 시안으로 이동해 군인 모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1·2·3지대와 194111일 시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흡수한 5지대를 합친 4개 지대로 운영됐다.

19421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의 보고서는 충칭의 한국 거류민은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그러나 임정에서는 5백여 명 이상의 대원으로 시작했다 하며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전달받았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성장과 활동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6] 이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놓고 논란이 발생하였다.일부 흡수된 조선의용대는 사상의 차이로 결국 떨어져나가고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중공군의 하부세력으로 지내다가 6.25전쟁이 터질무렵 남한을 침략하기 위한 목적으로 북한으로 들어가게된다.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김문호, 신정숙,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 12 10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국내 정진작전과 국군 자격 귀국의 좌절

1945 8월 미국 육군 소장 도노반과 면담한 김구 주석

1945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국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더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대신 김구는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 8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8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그러나 일제 패망 후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다.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 5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군은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확군 작업에 정진했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1946 430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난징에서 해산하고 5월 말 이범석 장군의 통솔 아래 귀국했다. 귀국 대오에 참여한 병력은 500명쯤이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이 귀국 다음날인 1945 1125일치 기자회견에서 광복군의 총사가 1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통수권 이양받은 광복군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한국광복군 통수권 환수를 놓고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청천과 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이 저지른 난폭한 행동들은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증오감을 사고 있었다. 광복군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친일파나 '친일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보수 진영에 완전히 경사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험에 대해서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었다.

논란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인 병력의 귀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준하는 자신을 영입하려던 부사령관 겸 1지대장 김원봉을 비판하였고, 일본군 출신들을 독자적으로 영입하려던 것을 지청천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 병력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심어주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하였다.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대위 출신은 신현준과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보내 일제 패망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을 탈영한 한국인 병력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만주국군 대위 신현준과 중위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대대장과 2중대장을 각각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

박정희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장교는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에 적극 편입됐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사학)가 쓴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을 보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1,300여명, 난징 800여명, 상하이 1,300여명 등인 것으로 나타난다.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이었고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는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이게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한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의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증언자 이용(李龍)의 증언이다. 그의 이름은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격분한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년도 당시에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비판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언급돼 있다. ‘지금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이같은 언급에 대해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상황 보고로 장준하의 발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만군ㆍ일본군 출신들이 중국(만주)에서 해방과 함께 광복군에 편입된 사연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통역이 아니면 일선 지구를 돌아다니는 아편 장사나 일군 위안소의 포주들까지도 하루 아침에 광복군 모자 하나씩을 얻어 쓰고 독립운동가, 망명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목불인견의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타국에 있는 동포 재산을 이런 자일수록 앞장서 몰수하기가 일쑤였고, 광복군도 1,2,3 지대로 나뉘어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이런 상태에서 과거를 불문하고 독립운동자의 이름을 마구 나눠주었던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면 귀히 맞아들여(?) 광복군 모자를 하나씩 씌워주었다.>>

또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소설 광복군이 출간될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것으로 1967~68년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만)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렵게 책을 수거해 봤더니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해방후 광복군'이기는커녕 길거리를 배회하던 그를 체포해서 국내로 송환했다는 자료도 있다. 김홍신의 홈페이지 '박정희 광복군편입은 허위날조'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의 항일투사 이재현(이형진의 부친)은 북평 판사처 주임(광복군 소령/지역 사령관)이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 8단이 해체되고 베이징으로 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던 박정희를 잡아 들여 한국으로 송환한 책임자가 이재현이라고 한다. 당시 북평 판사처의 임무는 재 중국동포와 한국 국적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임무였다. 일본군 출신이 너무 많아 군의 편제가 필요하여 신현준 일본군 대위를 대대장으로 이주일과 박정희 일본군 중위를 중대장으로 하여 통솔케 하고 본국으로 송환하였던 것뿐이다. 박정희가 광복군 3지대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전 정보원장인 이종찬 씨가 2004 8 26일 중앙일보에 투고한 글에 대한 반박을 위해 쓴 글이었다.

광복군에 근거하여 많은 가짜 정보들이 유통되었다.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도 등장한다.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

창군전사 말고도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사망)씨는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신태양악극단이 1945 29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육사 졸업생’ 26)

그러나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부대장의 이름을 따 일명 '철석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1939년 명월구에서 조선인 독립대대로 출발한 부대로 박정희는 이 부대에 간 적이 없다.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육군 준장 예편, 작고), 송석하(육군 소장 예편, 작고)씨 등은 생전에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태양 악극단' 단장을 지낸 작곡가 손목인(작고)씨는 생전에 "더러 군대 위문도 갔지만 철석부대는 들어본 일이 없고, 이용기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또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씨와 영화배우 황해씨 등도 지난 97 "이용기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와 8단에 같이 근무했던 방원철(육군대령 예편, 작고)씨는 "8단 시절 연예인이 부대로 위문온 적이 없었다" "박정희는 8단 부임 이후 반벽산(단 본부 소재지)을 떠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소설 광복군의 여파는 최근까지 이어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에서도 독립군 박정희의 모습을 사실처럼 그려 독립운동가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논란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

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인 병력의 귀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장준하는 자신을 영입하려던 부사령관 겸 1지대장 김원봉을 비판하였고, 일본군 출신들을 독자적으로 영입하려던 것을 지청천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출신 한인 병력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심어주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하였다.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대위 출신은 신현준과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보내 일제 패망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을 탈영한 한국인 병력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만주국군 대위 신현준과 중위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대대장과 2중대장을 각각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

박정희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장교는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에 적극 편입됐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사학)가 쓴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을 보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1,300여명, 난징 800여명, 상하이 1,300여명 등인 것으로 나타난다.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이었고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는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이게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한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의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증언자 이용(李龍)의 증언이다. 그의 이름은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격분한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년도 당시에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비판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언급돼 있다. ‘지금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이같은 언급에 대해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상황 보고로 장준하의 발언을 일일이 기록했다.

만군ㆍ일본군 출신들이 중국(만주)에서 해방과 함께 광복군에 편입된 사연을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통역이 아니면 일선 지구를 돌아다니는 아편 장사나 일군 위안소의 포주들까지도 하루 아침에 광복군 모자 하나씩을 얻어 쓰고 독립운동가, 망명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목불인견의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타국에 있는 동포 재산을 이런 자일수록 앞장서 몰수하기가 일쑤였고, 광복군도 1,2,3 지대로 나뉘어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이런 상태에서 과거를 불문하고 독립운동자의 이름을 마구 나눠주었던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면 귀히 맞아들여(?) 광복군 모자를 하나씩 씌워주었다.>>

또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소설 광복군이 출간될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것으로 1967~68년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만)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렵게 책을 수거해 봤더니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해방후 광복군'이기는커녕 길거리를 배회하던 그를 체포해서 국내로 송환했다는 자료도 있다. 김홍신의 홈페이지 '박정희 광복군편입은 허위날조'에 따르면 광복군 출신의 항일투사 이재현(이형진의 부친)은 북평 판사처 주임(광복군 소령/지역 사령관)이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박정희가 속한 만주군 8단이 해체되고 베이징으로 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던 박정희를 잡아 들여 한국으로 송환한 책임자가 이재현이라고 한다. 당시 북평 판사처의 임무는 재 중국동포와 한국 국적의 일본군들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임무였다. 일본군 출신이 너무 많아 군의 편제가 필요하여 신현준 일본군 대위를 대대장으로 이주일과 박정희 일본군 중위를 중대장으로 하여 통솔케 하고 본국으로 송환하였던 것뿐이다. 박정희가 광복군 3지대에 편입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전 정보원장인 이종찬 씨가 2004 8 26일 중앙일보에 투고한 글에 대한 반박을 위해 쓴 글이었다.

광복군에 근거하여 많은 가짜 정보들이 유통되었다.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도 등장한다.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

창군전사 말고도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사망)씨는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신태양악극단이 1945 29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육사 졸업생’ 26)

그러나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부대장의 이름을 따 일명 '철석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1939년 명월구에서 조선인 독립대대로 출발한 부대로 박정희는 이 부대에 간 적이 없다.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육군 준장 예편, 작고), 송석하(육군 소장 예편, 작고)씨 등은 생전에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태양 악극단' 단장을 지낸 작곡가 손목인(작고)씨는 생전에 "더러 군대 위문도 갔지만 철석부대는 들어본 일이 없고, 이용기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또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씨와 영화배우 황해씨 등도 지난 97 "이용기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박정희와 8단에 같이 근무했던 방원철(육군대령 예편, 작고)씨는 "8단 시절 연예인이 부대로 위문온 적이 없었다" "박정희는 8단 부임 이후 반벽산(단 본부 소재지)을 떠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소설 광복군의 여파는 최근까지 이어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와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에서도 독립군 박정희의 모습을 사실처럼 그려 독립운동가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과장된 광복군 숫자와 가짜 독립유공자

독립운동가 서훈을 둘러싼 잡음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광복군이 있었다. 서훈 잡음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친일파 서훈, 둘째가 5단계로 나뉜 건국훈장 등급, 셋째가 가짜 또는 자격 미달 광복군이다. 앞의 두 논란은 그동안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광복군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금기에 가까웠다.

광복군 숫자에 과장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기존의 광복군에 '해방 후 광복군'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다. 2005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이다. 이들 중 해방 후인 8 19일에 입대한 사람도 있다.[30] 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 1지대 89, 2지대 185, 3지대 119,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광복군 독립유공자 560명과는 차이는 매우 많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인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

박정희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장교는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에 적극 편입됐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사학)가 쓴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을 보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1,300여명, 난징 800여명, 상하이 1,300여명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광복군 출신의 한 인사는 가짜 논쟁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들은 광복군 3지대 출신이라고 말했다.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에 있었던 1지대나 시안에 거점을 둔 2지대와 달리 3지대는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둬 본부의 직접 통제가 어려웠다. 광복회 간부 출신인 한 인사는 서훈 초기에 광복군에 잠시라도 몸담았던 사람들이 너나 없이 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에게 몰려가 서로 인우보증을 서가며 서훈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가짜나 자격 미달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과 함께 1992년 펴낸 <친일파2>에서 “(전두환) 국보위 시절 정부는 독립유공자들 가운데 가짜가 많다는 진정서를 접수해 대상자 100여명을 조사했는데, 40여명이 가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독립유공자 포상 초기인 1960년대 백지가 나돈 적이 있다는 것은 독립유공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광복회 간부를 지낸 한 인사가 귀띔했다. 자주 거론되는 부대는 광복군 3지대 토교대 광복군 1지대 3구대(비호대) 등이다.

가짜 독립유공자가 많다는 지적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지원 업무를 맡았던 왕지셴 전 상교(대령) 1994년 월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91명이 비호대란 단체를 결성해 중국군 9전구(후난성 소재) 사령관을 돕고자 항일전투에 참가했다던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비호대란 단체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나 같은 정보장교도 9전구 사령관을 만나기 힘들었다. 한국광복군 중에서는 만난 이가 거의 없다면서 비호대 조직설은 거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일부 한국인이 검증되지 않은 단체 이름을 지어내 독립유공자 행세를 해왔음을 추론할 수 있다.

왕 전 상교는 한국에서 가짜 독립투사가 대거 등장한 이유로 1945년 해방 뒤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한국인이 광복군으로 들어가 신분 세탁에 나섰기 때문으로 봤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1918~1975)의 장남 호권(광복회 서울지부장)씨도 엉터리 독립유공자의 유래를 사이비 광복군(해방 후 광복군)에서 찾는다. 일본군이었다가 해방 뒤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들 상당수가 귀국해서 광복군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지도자

한국광복군의 지도자는 다음과 같다.

통수권자 김구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

참모장 이범석

총무처장 최용덕

참모처장 채형서

부관처장 황학수

경리처장 조경한

훈련처장 송호성

군무처장 유진동

군무처장 채한성

주요 인물

한국광복군 출신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범석 (李範奭, 1900 10 20 ~ 1972 5 11) : 1919 3.1운동 직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0년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어 대승을 거두었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육군소장에 임명되었다. 1945 8 18일 일본 패망 소식을 듣고 미군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입국했으나 일본군에서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1946년 귀국하여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창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회에서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초대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였다.

안춘생 (安椿生, 1912 8 12 ~ 2011 1 26) :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서,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및 제1, 2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다.

장준하 (張俊河, 1918 8 27 ~ 1975 8 17) : 1944 1월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였으나 7월에 탈출한 후 중국군 준위로 활동했다. 이듬 해인 1945 2월 중국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찾아가 소위로 복무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 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정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문사를 당했다.

김준엽 (金俊燁, 1920 8 26 ~ 2011 6 7) :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나 1942 2월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학병탈출 1호였다. 1945년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82년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시위학생을 제적하라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요구에 맞서다가 1985년 총장직에서 사임을 당했다. 1987 6.10 민주화 운동 이후 개정된 9차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문장을 삽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을 통해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관철했다.

계급 체계

한국 광복군의 경우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다.

계급

장관(將官) 정장(대장)(正將)

부장(중장)(副將)

참장(소장)(參將)

영관(領官) 정령(대령)(正領)

부령(중령)(副領)

참령(소령)(參領)

위관(尉官) 정위(대위)(正尉)

부위(중위)(副尉)

참위(소위)(參尉)

준위(准尉)

하사관(下士官) 복무정사(원사)(元士)

정사(상사)(正士)

부사(중사)(副士)

참사(하사)(參士)

병사(兵士) 상등병(上等兵)

일등병(一等兵)

이등병(二等兵)

출처: 위키백과

과장된 광복군 숫자와 가짜 독립유공자

독립운동가 서훈을 둘러싼 잡음 한가운데에는 어김없이 광복군이 있었다. 서훈 잡음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친일파 서훈, 둘째가 5단계로 나뉜 건국훈장 등급, 셋째가 가짜 또는 자격 미달 광복군이다. 앞의 두 논란은 그동안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광복군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금기에 가까웠다.

광복군 숫자에 과장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기존의 광복군에 '해방 후 광복군'이 대거 포함됐기 때문이다. 2005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 취재에 의하면, 1945 4월에 작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문서에는 광복군의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560명이다. 이들 중 해방 후인 8 19일에 입대한 사람도 있다.[30] 광복군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이 작성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총사령부 108, 1지대 89, 2지대 185, 3지대 119, 기타 13명 등을 합쳐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이었던 독립운동가 김득명은 이것도 사실 중국으로부터 물자를 타기 위해 부풀려진 수라고 말했다. 광복군은 당시 중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다. 김씨는 중국정부로부터 더 많은 보급물품을 타기 위해 가족 등 관련 없는 이들도 숫자에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김씨의 증언을 차치하고 공식문서에 언급된 339명이 모두 진성 광복군이라 하더라도 광복군 독립유공자 560명과는 차이는 매우 많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군에 편입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인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

박정희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일본군 장교는 “(세력 확장을 위해) 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광복군에 적극 편입한다는 한국독립당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에 적극 편입됐다. 염인호 서울시립대 교수(사학)가 쓴 논문 해방 후 한국독립당의 중국 관내지방에서의 광복군 확군활동을 보면, ‘박정희처럼 해방 이후 확군된 병사의 수는 베이징 1,300여명, 난징 800여명, 상하이 1,300여명 등인 것으로 나타났다.

광복군 출신의 한 인사는 가짜 논쟁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람들은 광복군 3지대 출신이라고 말했다.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에 있었던 1지대나 시안에 거점을 둔 2지대와 달리 3지대는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안후이성 푸양에 본부를 둬 본부의 직접 통제가 어려웠다. 광복회 간부 출신인 한 인사는 서훈 초기에 광복군에 잠시라도 몸담았던 사람들이 너나 없이 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에게 몰려가 서로 인우보증을 서가며 서훈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가짜나 자격 미달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과 함께 1992년 펴낸 <친일파2>에서 “(전두환) 국보위 시절 정부는 독립유공자들 가운데 가짜가 많다는 진정서를 접수해 대상자 100여명을 조사했는데, 40여명이 가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독립유공자 포상 초기인 1960년대 백지가 나돈 적이 있다는 것은 독립유공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광복회 간부를 지낸 한 인사가 귀띔했다. 자주 거론되는 부대는 광복군 3지대 토교대 광복군 1지대 3구대(비호대) 등이다.

가짜 독립유공자가 많다는 지적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지원 업무를 맡았던 왕지셴 전 상교(대령) 1994년 월간지 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91명이 비호대란 단체를 결성해 중국군 9전구(후난성 소재) 사령관을 돕고자 항일전투에 참가했다던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비호대란 단체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나 같은 정보장교도 9전구 사령관을 만나기 힘들었다. 한국광복군 중에서는 만난 이가 거의 없다면서 비호대 조직설은 거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일부 한국인이 검증되지 않은 단체 이름을 지어내 독립유공자 행세를 해왔음을 추론할 수 있다.

왕 전 상교는 한국에서 가짜 독립투사가 대거 등장한 이유로 1945년 해방 뒤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한국인이 광복군으로 들어가 신분 세탁에 나섰기 때문으로 봤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1918~1975)의 장남 호권(광복회 서울지부장)씨도 엉터리 독립유공자의 유래를 사이비 광복군(해방 후 광복군)에서 찾는다. 일본군이었다가 해방 뒤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들 상당수가 귀국해서 광복군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지도자

한국광복군의 지도자는 다음과 같다.

통수권자 김구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

참모장 이범석

총무처장 최용덕

참모처장 채형서

부관처장 황학수

경리처장 조경한

훈련처장 송호성

군무처장 유진동

군무처장 채한성

주요 인물

한국광복군 출신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범석 (李範奭, 1900 10 20 ~ 1972 5 11) : 1919 3.1운동 직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1920년 김좌진, 홍범도 등과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어 대승을 거두었다.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육군소장에 임명되었다. 1945 8 18일 일본 패망 소식을 듣고 미군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입국했으나 일본군에서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1946년 귀국하여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을 창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회에서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초대 국방부 장관을 겸직하였다.

안춘생 (安椿生, 1912 8 12 ~ 2011 1 26) :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서,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및 제1, 2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냈다.

장준하 (張俊河, 1918 8 27 ~ 1975 8 17) : 1944 1월 일본군에 자원 입대하였으나 7월에 탈출한 후 중국군 준위로 활동했다. 이듬 해인 1945 2월 중국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을 찾아가 소위로 복무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여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 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정 제1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거사를 준비하던 중 의문사를 당했다.

김준엽 (金俊燁, 1920 8 26 ~ 2011 6 7) : 일제강점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으나 1942 2월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학병탈출 1호였다. 1945년 해방 후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82년 고려대 총장이 되었으나, 시위학생을 제적하라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요구에 맞서다가 1985년 총장직에서 사임을 당했다. 1987 6.10 민주화 운동 이후 개정된 9차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문장을 삽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을 통해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관철했다.

계급 체계

한국 광복군의 경우 계급 체계는 상당 부분 대한제국군에서 따왔다.

계급

장관(將官) 정장(대장)(正將)

부장(중장)(副將)

참장(소장)(參將)

영관(領官) 정령(대령)(正領)

부령(중령)(副領)

참령(소령)(參領)

위관(尉官) 정위(대위)(正尉)

부위(중위)(副尉)

참위(소위)(參尉)

준위(准尉)

하사관(下士官) 복무정사(원사)(元士)

정사(상사)(正士)

부사(중사)(副士)

참사(하사)(參士)

병사(兵士) 상등병(上等兵)

일등병(一等兵)

이등병(二等兵)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