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4.조선왕릉

광해군 묘

동방박사님 2016. 5. 1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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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조선왕 제15대 묘호 : 광해군 (光海君)  휘: 이혼 선조와 공빈김씨의 둘째아들이다.

 

생애  : 어려서 생모 공빈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그러나 선조에 적자가 없는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양자가되어 임진왜란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승리에 적지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안정은 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그후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지만, 1608년 지병이 악화된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게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리고 승하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후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이후 줄곧 인목왕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살해 했다는 폐모살제 (廢母殺弟 )를 이유로 패륜자로 일컬어져 왔으나, 현대에 들어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치적 :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면서 전후 복구사업을 시행 하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1611년 양전사업을 벌였다.이어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강행 하였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등도 이시기에 쓰여졌다.

 

 

 

인조반정

인조반정 (仁祖反正)은 1623년 음력3월2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인조)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과 정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대외적으로 명과 후금사이에 중립외교를 펼치면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막았다.하지만 궁궐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폐모살제. 즉 동생인 영창대군을 처형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킴으로써  도덕적인 약점을 갖게되었다. 아울러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해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것으로 매도 되었다. 이러한 점을 틈타 이항복문하의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이제 정권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 하였고 이에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정책을 비판하여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인조반정의 결과로 광해군은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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