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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사건

동방박사님 2017. 3. 1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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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예배당에서 희생된 사람들

4월16일 언더우드와 테일러, 커티스 일행은 수원을 거처 사건현장인 수촌리로 가던중에 불타는 다른 마을 을 만났다. 바로 전날 (4월15일) 일본군의 방화와 학살이 이루어진 제암리 였다. 거시서 그들은  수촌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던 만행의 현장을 목격하며 살아 남은 주민들로 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들을 통해 제암리 사건도 세상에 자세히 알려 졌다.사건의 내용은 이러 했다.

4월11일 우정면과 장안면일대를 재차 습격한 일본군은 계속해서 남양과 오산, 발안,팔탄, 사강 등지를 돌며시위가담자들을 색출하였다. 그리고 4월15일 오후 보름 전에 있었던 발안  팔탄, 사강 등지를 돌며 시위가담자를 색출하였다. 그리고 4월15일 오후 보름전에 있었던 발안 장날시위 주모자를 찿는다는  구실로 아리타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10여명이 제왕리 "두렁바위" 마을로 들어와 15세 이상 도니 남자들을 예배당으로 모이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경찰은 예배당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놓았는데 문을 부수고 탈출하려는 사람, 밭에서 일하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가족 들에게도 총을 난사하여 현장에서 23명이 희생 되었다.일본군은 50여 호 마을 민가에 불을 놓은후 위쪽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일가족 6명을 총살 하였다.

이처럼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 경찰이 사건현장을 미처 수습도 하기전에 언더우드 일행이 제암리에 들이 닥쳐 사진을 찍고 주민들의 증언을 듣는 바람에 사건의 진상은 고스란히 세상에 알려 졌다. 제암리 사건은 에배당 사람들을 가둬놓고 불을 질러 살해 했다는 면에서 서양인 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일본인들의 잔학성을 이보다 더 강렬하게 증언할 자료는 없었다. 사건현장이 된 제암리 교회도 수촌교회와 같은 190년, 안종후 권사 집에서 에배를 드림으로 시작하였다.  교회안에는  구 한국군 부대 장교출신 홍원식 권사가 세운 서재가 있어 민족주의 계봉운동을 실시 하였다. 두 권사는 모두 그 닐 에배당 안에서 희생 되었다. 제암리 교회가 설립되던 같은 시기에 천도교가 들어 왔는데 안정옥.안종린 등이 그 지도자 들이었다. 이들도 그 날 예배당 안에서 희생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 날 희생자 반은 감리교인 이었고, 반은 천도교인이었다. 수촌리처럼 제암리 에서도 기독교(감리교) 교인들과 천도교 교인 들이 만세운동을 함게 모의하여 발인 장날 (3월31일) 시위대 제암리 사람들이 태극기와 마을 깃발을 른들며 주도적으로 참여 하였고 그 후 밤마다 마을 네 지네산에 올라 야간 봉화불 시위를 벌였다. 수원지방시위 가운데 가장 격렬했고 시위중 면사무소와 주재소, 일본인 상정들이 불타고 일본인 희생자들이 나온 이 시위를 제암리 사람들이 주도 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일제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제암리에서 잔혹한 살육을 자행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