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9.전통한옥고택생가

다산유적지 여유당

동방박사님 2018. 4. 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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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선생 (1762~1836)의 묘

 

경기도 기념물 제7호

 

정약용 (丁若鏞)선생은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당시의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아버지 나주 정[丁]

씨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尹)씨 [고산윤선도의 후손] 사이 막내아들로 태어 나셨다. 이곳 마현9마재) 마을은 선생이 태어나시고 묻히신 곳이다. 위로 이복 맏형인 약현 (若鉉)과 동복형인 약전(若銓). 약종(若鐘) 

그리고 누이(매형:이승훈)가 계셨다.

서울에서 관직생활 (1783~1800)과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01~1818)을  제외 하고는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셨다.

선생은 반계(磻溪) 유형원. 성호(星湖) 이익 선생의 뒤를 이어 조선시대 실학사상 (實學思想)을 집대성한 분으로 조선후기 개화사상가들 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문도공(文度公)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선생은 1표 2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로 대표되는 500여권의 경집(經集)과 문집(文集)을 저술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수원의 화성을 설계하셨고 거중기 등의 과학기구를 제작하셨으며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도 남기셨다.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로지 수기안인 (修己安人) 즉 '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백성들의 삶을 행보가게 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현재 국립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로비에는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져 있는데 '한국최대의 사회과학자'라고 적혀 있다. 

 

 

 

거중기 (擧重機)

 

1792년 (정조16) 다산 정약용 (丁若鏞)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는 4.4m 너비는 1.7m이다.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이 기계를 써서 선설경비를 4만냥이나 절약하였고, 거중기를 이용하여 노동자 두사람이 약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을 높은 곳으로 운반 할 수 있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여 위에 네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건을 달아매고, 위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물레에 감아 동시에 물레를 돌림에 따라 연결된 끈을 통해 물건이 위로 들어 올려 지도록 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 축조에 사용 하였으며 다산 선생의 과학사상과 앞선 시대 정신을 엿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