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5.남북관계역사

4.평화의 최전선 판문점

동방박사님 2018. 9. 21.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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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후 악수하는 이후락정보부장 (왼쪽)과 박성철부수상.경향신문/1973


밀입북 뒤 판문각 앞에 서 있는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를 들러싼 취재진. 경향신문/1979


판문점 남북기자  


남북 적십자 연락관. 김녕만 /1992


남북 고위급회담 정치분과위원회 회담. 김녕만 /1992


미군유해송환 . 김녕만/1992


미군유해송환 . 김녕만/1992


남북고위급회담 수행원으로 평양에 가는 남한장교와 북측안내장교. 김녕만 /1992


리인모 노인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 김녕만/1993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 북으로 송환. 김녕만 /1993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군사분계선 통과. 연합뉴스/1998


판문점 중앙에서 마주선 남북정상. 연합뉴스/2018


비무장 지대


1953년 정전협정에서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 각각2km, 총 4km구간의 으로 규정한 중립지대이다.


판문점


현재의 판문점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동서800m  남북400m 넓이의 공동경비구역 (JSA)으로, 정전협상의 이행을 감독하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원만한 운용을 위해 1963년에 설치 되었다.

서울 청롸대와 평양 노동당 본관과는 직선거리로 각각 48km 142km 떨어져 있다. 



판문점  -  분단속 평화를 꿈꾼다


판문점은 현대사의 비극인 6.25전쟁을 멈추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이 곳에서 1951년부터 2년여간의 협상이 진행되어 1953년 7월27일 정전(停戰)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 후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중국군이 협정의 이행을 위해 이곳을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반도를 가르는 군사분계선은 판문점의 땅과 건물, 그 안의 회담장 탁자까지도 남과 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긴장과 적대로 이곳을 빗겨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그 어느 곳보다도 판문점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전쟁 후 남북이 대화를 시작한 1971년부터 현재 (2018년 7월) 까지 이루어진 667회의 회담가운데 371회가 판문점에서 열렸습니다. 

6.25전쟁 휴전회담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글었던 판문점이 2018년 4월과 5월에 열린 남북정상회담으로 또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사진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사진을 중심으로 판문점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최근 남북정상회담까지 주요 장면을 보여주고자 기획 하였습니다. 대립과 대화를, 분단과 평화를 함께 품어온 판문점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꿈꿔 보기를 기대합니다.


북한이 보내온 수재물자 하역

1984년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는 쌀, 옷감, 시멘트 등의 수재물자를 남한 이재민에게 지원해 주었다.

북한트럭에 실린 수재물자는 판문점을 통과한 후 비무장지대에 있는 유일한 남측마을인 대성동에 내려졌다. 이는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인도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미루나무

사진 왼편에 일부만 보이는 나무가 "도끼만행사건"의 계기가 된 미루나무이다. "도끼만행사건" 은 1976년에 초소의 관측 시야를 화고하기 위해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려던 유엔사령부소속 미군2명이 북한군에게 살해 당한 일이다. 이 산건을 계기로 높이7cm, 너비40cm의 시멘트 경계선이 중립지대였던 판문점 까지를 남과 북으로 갈랐고, 판문점의 "공동" 경비는 "분할" 경비로 바뀌었다.



2백 년쯤 뒤 판문점이란 고어로 "板門店"이 될 것이다.

그때 백과사전에는 이렇게 쓰일 것이다.

1953년에 생겼다가 19XX년에 없어 졌다

지금의 개성시의 남단 문화호관이 바로 그 자리다 

 이호철 .1961."판문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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