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본중부,동북.섬 (여행지)/3.대마도

오후나에

동방박사님 2011. 3. 23.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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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나에" 라는 곳은 기록에 의하면 1663년 에 만들어진 번선의  계류시설 (배를 가두는곳)이라고 되 있지만 현지에 가보면 예사로운 시설은 아니다. 배를 정박시켰으면 시겼지 왜? 그사실을 은폐시키려 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번선은 관용선인데 말이다.육지에서도 보이지 않고 몰론 바다에서도 보이지 않은곳에  은밀하게 번선의 정박시설을 차려놓고 있었다는사실은 아무레도 이상 스러웠다. 길쭉한 주머니 처럼 생긴 "오후나에" 입구를 또 교묘하게 만들어서 만조 대는 배들의 출입이 가능하지만 간조때는 물 믿이 낮아서 배의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바다 쪽에서 보면 마치 밑이 낮아서 배가 들어갈수 없는 아주 작은 개천의 입구 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항상 적당한 물속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잔잔한 호수 같았고 나무가 울창한 산밑으로 돌로 샇아 만든 배의건조, 수리, 하역등을 위한설비가 서너게 있다

 

도대체 왜 정박해 있는 배나 배에 싣고 온 물건들의 하역하는 모습들은 남들에게 숨기려 했을까? 문득 이 섬이 한때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중국의 연변에 가지 노략질해 다녔던 왜구들의 본고장 이었다는 사실과 연관이 되는 열러가지 일들이 떠 올려지는것이다. 아니면 조선과의 무역량을 "에도" 막부에는 엉터리 보고를 했었기 때문에 이런사실을 은폐하고  이런곳에 출하장을 다로 차려놓았을 수도 있다.

조선은 대마도 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살 (콩포함) 을 주고 1년에 20~50척 의 배로 교역하러오는 것을 허락한것 외에도 여러가지 이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것은 왜구들의  노략질의 피해가 너무 심한데 대한 조선 조정의 양보였고 그대신 도주로 하여금 왜구들의  해적질을 단속해주기를 약정 했던 것 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소우" 씨는  때때로  조선을 교묘히 몰아세워 다른 이권을 얻어가곤했다.

'해적을 단속하는 것도 방치하는 것도 다 대마도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소우"씨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식의 태도로 교섭에 임하는 상투적인 수단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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