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2.한국전쟁기념관

부산 임시정부 기념관

동방박사님 2019. 7. 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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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으로서 한국 전쟁의 발발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소련, 중국 유엔군이 가세 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발발의 원인은 해방후 전개된 좌우익의 갈등에서 찿을수 있는데, 1946년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도 4,3사건, 1948년 여수, 순천사건 등 북한이 지우너한 비정규적인 게릴라전의 전개에서도 알 수 있다.

1949년 3.8선 부근에서 남한과 북한의 상호간 국지전이 자주 발생하였다. 김일성은 1949년 본격적으로 소련과 중국에 파병을 요청하여 남침을 준비하였다. 전쟁이 시작된이후 북한의 공격은 파죽지세로 이어졌다.

미국과 유엔은 즉각 참전 하였고, 9월15일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서울을 수복한 이후에도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이에 중국이 직접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성격이 드러내었다.









피란살이와 재활용품

피란민들은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이후부터 부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부산으로 온 피란민들은 약 4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에는 피란민을 위한 수용소는 턱없이 부족했다.극장. 공장. 여관 심지어 일반 주택도 수용시설로 동원되었다. 대부분의 피란민들은 공터나 산, 해안가에 판자집을 빽빽하게 지어 살았다. 밀집된 판자집 촌들은 화재에 쉽게 노출되어 한 순간에 모든것이 잿더미로 사라지기도 하였다. 부산의 도시기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교통, 전력, 식수문제가 커다람 고통으로 대두되었다. 피란민들의 생게문제는 더욱 열악하였다. 가진 것을 내다파는 행상이 유행하였고, 부두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생활용품은 해외 구호물품이나 미군 PX물품이 주를 이루었다. 미군물품들이 불법적으로 시장에 흘러나왔는대 그중 미군목, 밀가루, 커피.C레이션. 양담베 등이 인기를 끌었다. 또한 원자재가 부족하여 재활용품이 많이 사용되었다.삐삐선(PP선)으로 만든 장바구니, 철모를 이용한 똥바가지. 탄약상자를 재활용한 돈통, 포탄피로 만든 소 워낭 등이 이었다.


피란민 의복 (1950)

평안북도 태천군 남면이 고향이신 이기활님이 기증하신 파란의복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중공군의 개입으로 퇴각하게 되자, 국군의 재열을 따라 피란길에 올랐다.나이 15세 소년 혼자 몸으로 대룡강, 청천강을 건너, 피란 15일 만에 우어곡절 끝에 아버지를 안주에서 만나고, 이후 부터는 두분이 함께 하셨다. 파란의복은 고향에 남겨진 어머니가 손수 오사짓고 실을 자아 장만해 주신 무명저고리 2벌이다. 원래는 겨울옷이라 솜이 들어 있었으나, 손질하여 홑겹이 되었고, 폐기된 일본동전 1원이 단추로 끼워져 있다.







국제시장과 도떼기 시장

한국 전쟁 당시 국제시장은 "도떼기시장" 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국제시장은 해방이후 귀환동포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을 차리고, 일본인들이 남겨둔 가재도구를 거래하면서 출발하였다. 1948년에는 목조건축물이 건립되면서 '자유시장" 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커 미군물자도 흘러들어와 통조림, 기계부속, 청과, 양곡, 잡화 등이 거래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국제시장은 더욱 활기찿다.서울이나 이북 피란민들이 국제시장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피란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가재도구를 팔았으며, 원자물자 구호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밀수품 등의 유통도 활발 하였다. 이중에는 불법으로 유통된 물자도 많았다. 단속반과 상인들의 생존을 위한 실랑이로 시장은 시끌 벅적 하였다. 국제시장은 전국적인 규모로 성장하였다. 국제시장에는 수 차레의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상인들을 괴롭혔다. 특히 1953년 1월"국제시장 대화재" 는 역대 화재중 물질적 손실이 가장 큰 재해 였다, 하지만 상인들의 억척스렁 노력으로 복구가 가능하였다.


문화사랑방 으로서의 다방

다방은 개항 이후 근대문물의 유입과 함께 상류층의 문화 애호적 분위기에서 생겨 났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상업적인 용도로 변모 하였다.전쟁으로 인해 문화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차를 마시고쉬는 공간에서 나아가 종합적인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다방에서 그림 전시회 문학의 밤, 영화의 밤, 출판기념회, 환영회, 강습회, 송별회, 추모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다방은 , 다름 한편느로는 허영의 표상이기도 하였다.전방에서 치열하게 전투하는 군인 들과 달리 음악이나 감상하고 커피를 마시러 한량이 모여든 다방은 전시분위기를 망각한  퇴폐의 상징 이었다. 헌병대는 수시로 다방을 습격하여 전시상황임을 일깨웠다.가난 하지만 순수한 예술가들이 즐겨 찿은 다방은 광복동과 남포동 일댕의 밀다원, 금강, 춘추 등이 있었다. 그 곳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중심을 이루어 전시에도 꺼지지 않은 예술혼을 보여 주었다.




구월산의 여장군

이정숙 1953년


해부된 흑막

1953 조석호


숙명여고 예술전 팜플렛

 1952




해님 국극단 전단 1953


젊은이의 양지

 1951







임시수도시기의 정치

해방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신생국가로서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념대립으로 많은 희생자 들이 발생하였다. 전쟁 이전부터 극심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는데, 한국전쟁은 남한에서 좌익세력에 대한 공세가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처참한 인명 피해가 일어났다. 또한 군 고위관계자들의 부패로 인하여 국민 방위군 사건도 발생 하였다. 이것은 제2국민병으로 징집된 국민방위군 5만명이 기아와 혹한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다. 이외에도 1952년 대통령 직선제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연행한 부산정치파동, 중석(텅스텐)으로 번 외화의 환율차익으로 정치자금을 축척한 중석불사건도 있었다. 임시수도시기의 이런 사건들은 당시 우리나라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선거 포스터 1956



거창군 신원면 사건 조사서 1951

1951년 3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민간인 500여명이 학살된 거창양민학살사건 조사보고서이다. 이 사건은 3월29일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고, 4월에 고회, 법무부, 내무부, 국방부관계자들이 진상조사를 위해 현지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공비로 위장하여 충격을 가하여 현장접근을 막아 사건을 은페하려고 하였다. 이 문서는 당시 조사단이 작성한 문서로, 주요내용에는 사살자가 187명이고, 자세한 현장검증은 공비 습격으로 불가능 하였다는 경위가 기재되었다. 이후 이사건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배급통장 1950~1953



등록지 이동증명서 1950



구호물자 할당자료 1951




민병대 서류철 1954









1952년 물가지수표


경상남도 상공 장려관 출품 기념 사진첩 1956



부산시 상공전감 1954



부산 상공 명감 1954



직럽별 요람부 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