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7.독립운동이야기

유림 독립운동의 상징 김창숙

동방박사님 2022. 1. 2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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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유교 지식인의 표본 김창숙의 평전

근현대 인물 연구가 활발한 가운데 유교 지식인으로서 심산 김창숙의 삶과 사상을 재조명한 평전이 경상북도독립기념관 인물총서 열네 번째로 출간되었다. 심산을 다룬 다른 여러 책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책의 미덕은 심산 고유의 사상과 행동에 주목한 것을 들 수 있다. 김창숙은 유림의 일원으로서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유교 지식인이었지만, 유교의 변혁을 추구했던 박은식, 신채호와 같은 혁신적 유교 지식인들과 달리 유교를 일관되게 자신의 신념체계로 견지했다는 것이다. 배성룡과 조소앙 등 근대 인물과 사상 연구에 정진해 온 저자는 심산의 삶과 일화를 꼼꼼하게 직조(織造)해 나감으로써 그가 왜 진정한 유림 독립운동의 상징인가를 논리정연하고도 명쾌하게 형상화하였다.

목차

머리말… 5

제1장 출생과 성장 / 13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출생… 14
아버지 김호림의 가르침…17
어머니의 가르침과 누이동생의 도움… 23
전통적 유학 공부 …27
동학농민운동 시기의 역사의식 각성… 35
한주학파의 문하생…41

제2장 구한말 구국운동 / 49
을사오적 처단 상소운동 참여…50
국채보상운동 참여와 성명학교 설립… 55
대한협회 성주지회 결성… 67
일진회 성토운동… 77

제3장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 85
유학 공부를 통한 망국의 실의 극복…86
유림단의 파리장서운동 주도…94
파리장서의 내용 분석…103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118
대중국 외교활동…122
중한호조회의 조직…131
북경에서의 활동… 140
독립전쟁 준비 방략의 채택…153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 활동… 162
의열투쟁 방안 채택…164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운동과 피체… 171
옥중 투쟁… 173

제4장 해방 이후의 활동/ 187
임시정부 중심의 반탁독립운동 참여… 188
유림계의 통합과 혁신운동 추진… 19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198

제5장 결어 / 203

심산 김창숙 연보… 210
참고문헌… 216
찾아보기… 218
 

저자 소개 

저 : 김기승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학과에서 문학박사를 받았다.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대학장, 아산학연구소장, 스마터아카데미원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순천향대학교 향설나눔대학 교수이며 인문학진흥원 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근현대 사회사상사 연구 · 배성룡의 진보적 민족주의론』( 1994), 『21세기에도 우리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공저, 2003), 『조소...
 

출판사 리뷰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

저자는 심산의 사상과 행동에 성주 지역 한주학파 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한 아버지 김호림의 가르침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심즉리설을 주장한 한주학파는 서양인들 마음에서도 보편적인 의리를 발견하고자 하면서 서양 문물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아버지는 너그러운 교육으로 아들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는 시대상을 일깨워 주었다. 동학농민운동 전후 아이들을 농민들과 섞여 앉게 한 일화는 심산이 《주역》의 이치를 몸으로 터득하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이로 볼 때 심산이 대한협회 성주지회 총무로서 구습 혁파와 계급 타파를 역설한 일이나, 중국에서 이념과 정파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방략을 탄력적이고 유연하게 선택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론가보다는 실천가: 삶 그자체로서 유교 실천

“심산에게 유학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심산은 한국의 독립을 전 세계에 호소한 〈파리장서〉를 제출하여 제1차 유림단 사건을 일으켰고, 중국에 망명해 있다가 독립운동 기지 자금 마련을 위해 국내에 몰래 잠입하기도 하였으며,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한국인 스스로의 독립운동 역량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아 북경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과단성 있는 실천력의 소유자 심산의 일생은 1896년 항일의병 봉기를 시도했던 아버지의 용단과 겹쳐진다. 김창숙이 나태해질 때마다 곁에서 꾸지람을 서슴지 않았던 어머니 인동장씨도 심산이 평생 대의(大義)에 투신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또한 김호림이 아들 심산의 교육을 부탁한 이승희가 성주 지역 유학자들 통합 운동을 벌인 것도 제자 심산의 강한 실천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의병 기의가 실패한 원인을 지역사회 공동체적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유교를 그 결속의 실천적 가르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이후 항일독립운동을 벌일 때나 이념의 차이를 가리지 않고 특정 이념에 대한 경도 없이 민주공화국 건설을 지향해 나가는 방법론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창립된 유도회와 성균관대는 심산의 그러한 정신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한계와 성과

저자가 지적하듯이, 곽종석이 작성하고 김창숙이 제출한 〈파리장서〉 내용은 근대적 국민국가 개념에 접근한 것이기는 하나 전통적 군주와 사직(社稷) 개념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창숙은 부모님과 스승 이승희 등 성주 지역 유림의 전통을 한 단계 발전적으로 계승해 유교를 통한 조국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부단히 모색한 화신이자, 치열한 민족정신의 현현이었다. 그의 일생은 “한국 민족주의 발전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심산의 거룩한 삶과 투쟁은 한국 근현대 민족주의 발전에 유교가 기여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유학을 견지하되 근대정신을 아울러 수용함으로써 유학의 나아갈 바를 지향한 유림의 바람직한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