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불교의 이해 (책소개)/1.불교입문인물

종용록: 칭기즈칸의 참모였던 야율초재 담연(耶律楚材 湛然) 거사

동방박사님 2022. 2. 2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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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벽암록]과 쌍벽을 이루는 선(禪)의 공안집(公案集)!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지배한 칭기즈칸의 참모이자 타고난 지략가였던 야율초재!
잔혹한 전장 속에서 대량 살상을 막았던 그의 곁을 지킨 단 한 권의 책, [종용록]!


[종용록(從容錄)]은 중국 선종사에서 [벽암록]과 쌍벽을 이루는 공안송고평창집(公案頌古評唱集, 공안에 대한 송과 평론, 주석, 해설서)이다. 이 책은 [벽암록]보다 100년 후(1224년)에 출간된 것으로 선문(禪門)의 명문(名文)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벽암록]이 임제종 계통[看話禪]을 대표하는 공안송고평창집이라면, [종용록]은 조동종 계통[?照禪]을 대표하는 공안송고평창집이다.
[종용록]은 묵조선 수행체계[?照禪]를 완성한 송대의 선승 천동정각(天童正覺, 1091~1157)의 [백칙송고(百則頌古)]에 만송행수(萬松行秀, 1196~1246)가 시중(示衆) · 착어(着語) · 평창(評唱)을 붙여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책은 만송행수의 재가제자이자 칭기즈칸의 참모였던 야율초재 담연(耶律楚材 湛然) 거사의 원력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지혜의 칼’([벽암록])과 더불어 ‘훈훈한 봄바람’([종용록])을 곁들이지 않으면 완벽한 선자(禪者)라고 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 선자(禪者)들은 사선(邪禪)으로만 알고 있는 묵조선(?照禪)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종용록]을 읽어봐야만 한다.
-[머리말] 중에서

[종용록] 은 일반인은 물론, 선승들도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매우 어려운 텍스트이다. 또 [종용록]에는 많은 고사(故事)가 있어서 더욱 난해하다. 그래서 [종용록]은 중국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약한 지혜의 보고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시중(示衆) · 착어(着語) · 평창(評唱)을 쓴 만송행수 스님은 불교 외에 유교와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에 정통했다. 따라서 선어록에 대한 이해가 깊고 중국 사상과 한자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종용록]의 문장들이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읽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종용록]이 [벽암록]과 더불어 선 수행자들의 필독서임에도 불구하고 석지현 역주·해설본 이전에는 제대로 된 번역서조차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 민족사에서 출간한 [종용록]은 [벽암록]을 역주·해설한 석지현 스님이 번역했다. 그는 뛰어난 언어감각을 지닌 시인으로 선시(禪詩)와 선어(禪語)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전념해 왔다. 원문에 토를 달고, 각 단락마다 상세한 해설과 주(註)를 달았다. 그리고 [종용록] 에서 언급되는 이야기들의 출처와 고사성어의 의미를 고증하여 밝혀 놓았다. 이 책의 마지막 권은 어휘사전으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당송 시대의 속어와 선어를 알 수 있도록 했다. 공안집이나 선어록은 속어를 모르면 완전히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이 어휘사전 한 권만으로도 선(禪)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번역을 시작한 지 6년, 교정과 편집에만 약 1년이 걸린 끝에 출간되었다! [벽암록]을 번역한 경험과 오래도록 선(禪)을 연구한 내공이 아니었다면 7년이란 세월을 굳건히 버틸 수 없었으리라. 총 5권(사전 1권 포함)으로 펴낸 [종용록]의 완역·출간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저자 소개 

저 : 석지현
 
13세 때 충남 부여 고란사로 출가.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詩) 부문에 당선되어 승려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973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명상에 심취하여, 인도, 네팔, 미국, 예루살렘, 티베트 등지를 오랫동안 방랑했다. 이 ‘방랑의 시절’ 동안 인도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네팔의 히말라야, 부탄의 산길, 예루살렘의 불타는 사막을 여행했다. 미국에서 5년 동안 살면서 전 세계의...
 

출판사 리뷰

[종용록], 칭기즈칸의 정신적 지주 야율초재의 원력으로 빛을 보다!

[종용록(從容錄)]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야율초재 담연 거사(耶律楚材 湛然居士, 이하 야율초재)이다. [종용록]은 만송행수가 연경(燕京)의 보은원(報恩院)에 종용암(從容庵)을 짓고 은거 중이던 시절에 그의 재가제자였던 야율초재의 간청에 의해 집필되었다. 야율초재야말로 [종용록]을 펴낸 장본인이고, [종용록] 완성의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종용록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송노사에게 ‘(천동의) 이 송(頌, 頌古)을 평창하여 후학들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7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편지를 드렸다. 그래서 비로소 그 편지와 평창 원고([종용록] 원고)를 받아보게 됐다. 내 서역에서 외로이 떠돌기 수 년 만에 문득 (스님의) 이 편지를 받아보니 술 취했다가 깨어난 것 같고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 같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스님 계신) 동쪽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한 다음, 또다시 (이 원고를) 펼쳐 놓고 음미하며 원고를 어루만지면서 ‘만송스님이 서역에 오셨다’고 혼잣말로 되뇌곤 했다. (……) 나는 행궁(行宮, 왕이 임시 거처하는 곳)의 여러 벗들과 아침저녁으로 이 책(만송스님의 [종용록] 평창 원고)에 푹 젖어 지냈는데 (그것은 마치) 보배의 산에 오르고 화장세계의 바다(華藏海)에 들어간 듯했다. 진귀한 보물들이 광대하게 두루 갖춰져 있어서 왼쪽으로 가도 보물이요, 오른쪽으로 가도 보물이며 보는 눈이 풍요롭고 마음은 흡족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를 어찌 세상의 언어로 그 만분의 일이라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 혼자만 이 아름다운 법열을 독차지할 수가 없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생각했다.”
-야율초재 담연 거사가 쓴 [서문] 중에서

야율초재는 서문에서 스승 만송행수 스님에 대한 존경심과 [종용록] 원고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을 따라 원정길에 올라 서역의 아리마성(阿里馬城, Almalik, 몽골에서 터키, 이란, 러시아로 가는 요충지대, 차가타이칸국의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그는 [종용록]의 원고를 받아 보고 매일 아침 만송 스님이 계신 곳을 향해 큰절을 했다. 또 [천동백칙송고] 평창을 중국인 각료들과 함께 읽으며 ‘우리 스승 만송 스님이 서역에 오셨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서문을 써서 연경(북경)에 있는 사제 종상(從祥)에게 이 원고를 보내 책으로 발간하도록 부탁했는데, 이것이 바로 [종용록(從容錄)]이다. 야율초재는 [종용록]을 간행하는 이유를 두 가지 이유로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 좋은 원고를 혼자서만 보기가 아깝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 법열(法悅)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역사상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행정비서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칭기즈칸을 도와 대제국을 건설한 장본인이었다. 보잘것없는 일개 유목민 부족의 리더였던 테무친(칭기즈칸의 본명)이 세계 최고의 정복자로 거듭나고 몽골제국을 건설하여 약 150년 동안 동서양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하늘이 주신 선물” 야율초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야율초재를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나랏일과 군사작전에 대한 것을 모두 그와 상의해서 처리했다.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다면 칭기즈칸에게는 야율초재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야율초재를 가르친 것이 바로 [종용록]이었다. 그는 [종용록]이란 보물을 늘 가슴에 품고 있으며 잔혹한 전장에서도 누구보다 지혜롭게 대처했고,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

몽골군은 정복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리 항복한 성들은 살려주지만 끝까지 저항한 도시는 철저히 파괴해 왔다. 그런데 야율초재는 끝까지 저항한 나라의 백성들을 모두 도살하고 농지를 초지(草地)로 바꾸자는 몽골군 장군에게 맞서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는 법”이라고 응수했다. 대량 살상을 하지 않도록 왕을 설득시킨 야율초재 덕분에 점령지에서 관례대로 해 오던 파괴행위와 대살육의 풍조가 몽골군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아율초재는 잔혹한 전장에서 대량 살상을 막고 몽골인들에게 법도와 예절, 문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인물이다. 이는 [종용록]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禪) 수행의 필독서! 묵조선(?照禪)의 정수!
묵조선과 간화선의 수행 방법 차이를 한눈에!


“깨달음(부처의 기능)은 이미 우리의 본성 속에 내재돼 있다(本證). 그러나 좌선수행(只管打坐)을 하지 않으면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다(妙修).”

묵조선(?照禪)은 좌선수행을 통해 우리의 본성 속에 이미 내재한 깨달음을 현실화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묵조선 수행이란 ‘내재된 깨달음을 충전하는 작업’이다. 이때 공안은 ‘수행의 깊이를 측정하는 계기판’이다. 반면 간화선(看話禪)은 공안을 ‘깨닫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로 보고, 좌선보다는 공안 타파(公案打破), 즉 ‘공안 참구(公案參究)를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이런 간화선 수행의 최고 교과서가 바로 [벽암록]이다.

그러나 묵조선에서 공안 타파란 좌선수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되는 한 현상일 뿐이다. 중요한 건 공안 타파 이후에도 좌선수행은 부단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이 삶 전체가 공안화(公案化)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고 한다.

이런 묵조선을 완성시킨 사람이 [종용록]의 공안 100칙 송고를 읊은 천동정각(天童正覺)이다. 묵조(?照)에서의 ‘묵(?)’이란 몸을 부동의 자세로 바로잡는 것(坐禪, 只管打坐)이고, ‘조(照)’란 이 부동자세를 통해서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기복을 관찰(수동적인 注視)하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거든 따라가지 말고 (부동의 자세로 앉아서) 그저 (수동적으로) 그것들이 가고 오는 걸(사라지고 나타나는 걸) 지켜보기만 하라.’ 이런 식으로 꾸준히 좌선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차고 더운 걸 그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念起不隨去 但觀自去來 久久純熟 冷煖自知).”([石門文字禪])

천동정각의 묵조선 수행법은 달마대사의 면벽(面壁)수행에 근원을 둔 재래적인 수행법으로서 좌선(坐禪,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않는 坐法) 그 자체를 강조한다. 이런 묵조선 수행법의 정수가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종용록]이다.

대혜종고의 간화선 수행체계의 영향권에 들어있는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는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는 대혜종고의 주장(주로 [書狀]에서의 주장)이 이미 오래전부터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져 내려오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종용록]은 선 수행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다.

역자 소개

[종용록] 번역한 석지현 스님!
[종용록] 번역은 무모한 도전이자 목숨을 건 사투!


석지현 스님은 13세 때 충남 부여 고란사로 출가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詩) 부문에 당선되어 승려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973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명상에 심취하여, 인도, 네팔, 미국, 예루살렘, 티베트 등지를 오랫동안 방랑했다.

“방황의 시절이었지요. 그땐 구루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자연도 스승이었습니다. 그때 만난 오쇼 라즈니쉬의 말 중에서 가장 괜찮았던 말, ‘굽이쳐라, 삶의 이 에너지로 굽이쳐라. 살아라. 힘차게 살아 굽이쳐라. 삶은 신이다’라는 말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절감했지요.”

스님은 이 ‘방랑의 시절’ 동안 인도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네팔의 히말라야, 부탄의 산길, 예루살렘의 불타는 사막을 여행했다. 미국에서 5년 동안 살면서 전 세계의 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난 이슬람 수피의 가르침도 인상적이었고, 다람살라에서 만난 달라이 라마의 소탈함과 따스한 자비심에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행과 글쓰기에 필요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다. 스님의 저술 활동이 불교 경전과 힌두교, 티베트 불교, 선어록 등을 망라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만행 덕분이다.
석지현 스님은 [벽암록]을 출간한 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이뤄내야 하는 것은 결국 선의 원형을 찾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인도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습관처럼 부딪히고 있는 이 땅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도 인도·네팔을 몇 번씩이나 방황하고 나서야 뒤늦게 그것을 깨우쳤다.”

전 세계의 다양한 종교인들,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스님에게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 것은 한국의 간화선이었다. 구도 여행을 마친 뒤 이번에는 선의 원형을 찾아 나섰다. 선의 원형을 찾기 위해 스님은 선 수행에 정진했고, 선의 정수를 담고 있는 선시(禪詩)와 선어(禪語)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전념했다.

선 수행에서 핵심은 바로 공안(公案 : 깨달은 사람들의 언행이나 선문답)이다. 예로부터 선 수행자들은 이 공안을 꿰뚫지 못하면 깨달음의 체험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공안의 암호를 풀기 위하여(공안 속의 활구를 꿰뚫기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덤벼들었던 것이다. [벽암록] 완역 작업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 하에서 이루어졌다.

“티베트 불교와 위파사나가 서양에 불교 붐과 명상 붐을 일으켰는데 이젠 바닥이 다 드러난 상태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불교 수행을 활용해서 다른 것을 계발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정신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분야가 있다면 간화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원전이 어려워서 번역을 못해 전혀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종용록] 완역 작업에 착수!

“2007년 필자의 [벽암록 완역 역주본](전 5권)이 출간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이런 와중에서 내친김에 [종용록]도 마저 완역해 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벽암록] 완역 작업에 10년 세월을 보낸 나로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 후 주위 사람들의 지속적인 권유에 나는 또 한 번 무모한 도전을 시도, [종용록] 완역 작업에 착수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하여 [종용록] 완역 작업이 모두 끝나자 2013년 12월 말이 됐으니 꼬박 6년이 걸린 셈이다.”([종용록] , [머리말] 중에서)

석지현 스님은 간화선 공안집 [벽암록]을 완역한 후 이 책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묵조선의 공안집 [종용록] 완역 작업에 착수했다. [벽암록]이 출간되기까지 10년, [종용록]이 출간되기까지 또 7년, 총 17년을 선어(禪語) 번역에 매달렸다. 스님의 작업방식은 워드가 아니라 모두 육필이었다.
-석지현 스님 친필 원고

이렇게 정서하기를 3번 반복했다. 스님은 언어를 통해 언어를 깨고, 깨달은 후에는 깨달음조차 깨부숴야 한다고 말하는 선사(禪師)들의 가르침을 좇으며, 쓰고 또 썼다. 스님은 손으로 원고지 약 1만 8천여 매의 원고를 줄 노트에 또박또박 써 내려 갔다. 그러다 손가락이 마비된 적도 있다고 한다. 선어(禪語)를 한 글자 한 글자 해석해 내는 과정이 얼마나 힘겹고 고된 여정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스님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깨달음으로 가는 무모한 도전이자 목숨을 건 사투(死鬪)였다.

[종용록]처럼 당송대의 속어가 뒤범벅된 선어록을 번역하고 해설하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석지현 스님은 시인으로서 탁월한 언어 감각을 갖고 있으며, 뛰어난 한자 실력, 영어, 일본어, 산스크리트어, 벵골어 등 다양한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는 실력자다. 또 젊은 날의 구도 여행을 통해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고 공부한 것이 번역 과정에서 큰 힘이 되었다.

석지현 스님의 편·저·역서로는 [禪詩], [禪詩감상사전](전 2권), [벽암록](전 5권), [법구경], [바가바드 기따], [우파니샤드], [반야심경], [숫타니파타], [불교를 찾아서], [선으로 가는 길], [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제일로 아파하는 마음에-관음경 강의], [행복한 마음 휴식] 등 다수가 있다.

본문 구성

[종용록]은 각 칙마다 7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①시중(示衆), ②본칙(本則), ③본칙착어(本則著語), ④본칙평창(本則評唱), ⑤송(頌), ⑥송의 착어(頌著語), ⑦송의 평창(頌評唱)이 그것이다.

먼저 시중(示衆)은 해당공안[本則]을 소개하는 부분으로서 벽암록의 수시(垂示)에 해당한다. [벽암록]의 수시가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쓰고 있다면 [종용록]의 시중(示衆)은 시종일관 잔잔한 흐름을 잃지 않고 있다. [벽암록]에는 수시가 없는 공안이 여러 개 있지만 [종용록]에는 100개의 공안 전체에 100개의 시중이 붙어있다.

본칙(本則)은 옛 공안(古則, 또는 公案)으로서 [종용록]의 핵심이다. 만송행수가 옛 공안 가운데 중요한 공안 100개를 가려 뽑아왔다. 그런데 이 100칙 공안 가운데 29개 칙(29개의 공안)이 [벽암록]과 동일하다. 이 29개 칙에 대한 견해가 [벽암록]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때로는 [벽암록]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고, [벽암록]이 놓친 급소를 언급하기도 한다. [종용록]의 이 100칙 공안은 [종용록] 의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앞의 시중(示衆)과 본칙착어(本則著語), 본칙평창, 송(頌), 송의 착어, 송의 평창 등은 모두 이 본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부착물인 셈이다.
이 100개의 공안에는 경전의 문구를 비롯하여, 제1칙 부처, 제2칙 달마대사로부터 개성이 다른 선승들의 선문답이 총망라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벽암록]에는 없는) 그 유명한 조주의 무자공안(趙州無字公案, 趙州狗子)도 포함돼 있다.

본칙착어(本則著語)는 일종의 촌평(寸評)이다. [벽암록]의 착어가 기지와 익살로 넘친다면, [종용록]의 착어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종용록]의 이 담담함 속에 번뜩이는 예지와 절묘한 언어의 구사력이 돋보인다.

본칙평창(本則評唱)에는 본칙공안에 대한 보조설명과 배경이 기술돼 있다. 그러나 그 문장이 당(唐)?송(宋)?원(元)때의 속어체(俗語體, 口語體)로 쓰여 있기 때문에 기존의 문장체 한문(文語體) 해석만으로는 그 해독이 불가능하다. 이 점을 고려하여 별권(別卷)으로 [어휘사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평창에는 고사(故事)의 인용이 워낙 많기 때문에 차근차근 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사는 그 숨은 뜻과 출처를 일일이 밝혀놨기 때문에 그리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송(頌)은 100칙 공안 하나하나마다 붙인 천동정각의 공안시(公案詩, 頌古)를 말한다. 천동의 이 공안시는 그 시상(詩想)이 웅대하고 심원한 반면에 시정(詩情)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시어(詩語)는 투명한데 이 역시 수많은 고사가 인용되어 있다. 고사와 시어의 이 절묘한 결합은 묵조풍선시(?照風禪詩)의 절정인데 우린 여기서 공안선시(公案禪詩)의 진수를 맛보게 된다.

송의 착어(頌著語)는 공안시 한 구절 한 구절마다 그 밑에 붙인 만송의 촌평이다. 만송의 이 착어는 송(頌)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만송의 이 착어가 때로는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는데 이는 만송이 이 착어를 통해서 그 자신의 안목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읽는 이는 이를 놓쳐선 안 된다.

송의 평창(頌評唱)은 천동의 송에 대한 만송의 평창이다. 이 기본골격은 본칙평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창의 문장은 대체로 짧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속에 너무나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