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서양사 이해 (책소개)/2.서양고중세사

서양 중세 교회의 파문

동방박사님 2022. 3. 28.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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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서양 중세인들의 삶에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통제 도구로서의 실체를 다각도로 조명한 책


서양 중세사회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그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단순히 암흑의 시대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점차 중세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이 낱낱이 알려지면서 중세 유럽의 사회가 자체의 뚜렷한 특징을 가졌고, 각 분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했으며, 현대 서양문명의 토대를 이룬 매우 중요한 문명의 시대였음을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다. 중세의 역사는 흥미로운 역사의 탐구 대상일 뿐 아니라 현대인이 향수를 느끼며 공유하고 싶어하는 문화 콘텐츠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번에 도서출판 혜안에서 펴낸 장준철(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서양중세교회의 파문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규정하는 법과 형벌을 통해 이러한 중세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상을 들여다 보았다.

목차

책머리에
서 문
1. 중세 유럽 사회의 이원성
2. 파문: 교회와 국가의 가교
3. 파문: 교황의 정치적 도구
4. 구성과 서술의 방향

제1장 파문의 기원과 개념
1. 파문의 기원
2. 파문의 개념
3. 파문의 종류
4. 파문의 선고와 사면
맺음말

제2장 보편공의회의 파문 법규
1. 보편공의회의 권위와 파문
2. 이단 파문 법규
1)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2)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 431년 에베소 공의회 4) 451년 칼케돈 공의회
5) 제2?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7)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3. 아나테마와 엑스코뮤니카티오
4. 자동 파문
5. 파문의 절차와 부수적 효력
맺음말

제3장 중세교회 파문 의식의 역사와 파문장
1. 10세기 이전의 파문 형식
2. 비정규적 파문장
3. 주교 전례서 파문장
1) 레기노 법령집 〈제412~413조〉의 파문장 2) 레기노 법령집 〈제414조〉와 〈제415조〉 파문장
3) 레기노 법령집 〈제416조〉와 〈제417조〉 파문장
4. 신의 권위 파문장
1) 캉브레의 온건한 파문장 2) 로체스터의 극히 간소한 파문장
3) 달리의 파문장
5. 멍드의 파문장
6. 일반 파문장
맺음말 155

제4장 파문과 세속 권력의 협력
1. 참회고행과 세속의 협력
2. 파문의 집행과 세속의 협력
1) 잉글랜드 2) 프랑스
3) 독일
맺음말

제5장 불명예효(infamia)와 파문
1. 로마적 기원
2. 중세교회법의 불명예효 수용
3. 교회법학자들의 해석 논쟁
4. 불명예효의 법정 관할권
5. 불명예의 종류
1) 판결 불명예(infamia iuris) 2) 계율 불명예(infamia canonica)
3) 사실 불명예(infamia facti)
맺음말

제6장 파문과 사법적 자격의 상실
1. 파문된 자의 사법적 자격 박탈
2. 파문 이의신청
3. 파문 이의신청의 세속적 효력
1) 프랑스 세속 법정에서의 효력 2) 잉글랜드 세속 법정에서의 효력
맺음말

제7장 파문의 정치적 이용
1. 11~12세기 정치적 파문의 사례들
2. 아나테마 파문의 정치적 의미
3. 파문과 봉건적 관계의 해제
맺음말

제8장 교황 중심 유럽질서와 파문
1.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
2. 평화 유지와 파문의 선포
3. 교황의 대영주권과 파문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Excommunication in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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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장준철
전북대학교 사학과 학사?석사, 전남대학교 박사, 오하이오 주립대학 수학, 캔사스 주립대학 연구교수, 전북사학회 회장, 한국서양중세사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박물관장을 역임했고 현 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중세 수도원의 클라모르(Clamor): 외침에서 탄원기도로의 변천〉, 〈중세교회법에서의 불명예효〉, 〈전통과 혁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개혁의 양면성〉,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교회...
 

출판사 리뷰

서양 중세인들의 삶에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통제 도구로서의 실체를 다각도로 조명한 책

서양 중세사회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그 실체를 알지 못한 채 단순히 암흑의 시대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점차 중세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사실들이 낱낱이 알려지면서 중세 유럽의 사회가 자체의 뚜렷한 특징을 가졌고, 각 분야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했으며, 현대 서양문명의 토대를 이룬 매우 중요한 문명의 시대였음을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다. 중세의 역사는 흥미로운 역사의 탐구 대상일 뿐 아니라 현대인이 향수를 느끼며 공유하고 싶어하는 문화 콘텐츠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번에 도서출판 혜안에서 펴낸 장준철(원광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서양중세교회의 파문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규정하는 법과 형벌을 통해 이러한 중세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활상을 들여다 본 것이다.
서양중세교회의 파문은 서양 중세사회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교회법, 교황과 세속군주 사이의 정치적 갈등, 그리고 중세사회의 사법적 역학관계 속에서 통제의 도구였던 ‘파문’의 실체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 책이다. 파문의 기원과, 법규, 교령, 재판, 정치적 갈등 등을 통해 중세교회가 행사했던 파문 제재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서양중세의 세계는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통합된 사회라고 보는 통념과는 달리 뚜렷한 이원성을 가진 사회였다. 기독교 정신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지배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삶과 문화도 엄연히 존재하였다. 교권과 속권이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기도 했지만 교회와 국가는 서로 분명히 다른 별개의 개체로서 기능하였다. 신정정치적 교권 이론도 그러한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고 세속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한 저항은 중세사회의 이원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의지의 발로였다.
교회 법정에서는 교회법이 세속법보다 우위를 점했지만 교회법에 규정되지 않은 것은 세속법을 적용하였다. 세속 법정에서도 교회법에 따라 결정된 것이나 판결을 존중하는 관행이 중세 사회 전반에 형성되어 있었다. 교회 법정에서 판결한 파문은 세속 법정에서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유럽의 사회는 다른 분야에서와 같이 사법적인 면에서 뚜렷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파문은 어떻게 교회 법정과 세속 법정 사이에 가교를 형성했을까? 세속 권력은 교회 법정의 파문을 어느 선까지 국가의 사법 체계 안에 수용했을까? 교회 법정에서 판결한 파문이 황제와 국왕들에게 어떠한 위력을 발휘하게 될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중세 교회의 파문제재를 살펴보게 된다면 중세 사회가 가지는 이중성의 실체를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파문과 게르만 전통의 반(Bann)은 원래부터 공동체로부터 범행자를 격리시켜서 추방한다는 처벌 형식을 그 기본적인 속성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파문은 그러한 처벌의 결과로 초래될 수 있는 갖가지 불이익과 제제가 오랜 시간이 경과된 뒤에야 부수적인 제재 형태로 부가되었다. 사법적인 권리의 상실, 봉건적 권리의 상실 등 법적 권리를 상실하게 되는 불이익, 그리고 일정 유예기간을 경과하면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제제조치 등 교회가 파문을 시행하면서 수용한 이 요소들은 게르만적 반(Bann)에서 형벌과 함께 부가되는 강제적 처벌 내용과 매우 유사한 것들이었다. 영적인 죽음과 동일시하려 했던 교회의 파문, 그리고 사형과 동일한 형벌로서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게르만 사회의 반은 공동체 내에서 결코 용인할 수 없는 범죄자를 추방하고 처벌하는 데에 있어 최후의 형벌이었다. 이 두 형태의 형벌은 기본적인 속성이 매우 유사하였고 언제든지 어느 한쪽의 요소가 다른 한쪽으로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여건과 분위기 속에서 반의 형벌에 따른 제재 조치의 내용들이 교회의 파문 형벌에 도입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 규정한 파문은 교회법으로 정한 여러 형벌 가운데 가장 엄중한 최후의 형벌이었다. 파문은 ‘엑스코뮤니카티오(excommunicatio)’와 ‘아나테마(anathema)’의 두 가지 용어로 표현되었는데, 아나테마는 주로 이단을 정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이단 파문’으로 번역한다.
아나테마는 범죄의 정도가 너무도 심각하고 개전을 기대할 수 없어서 범죄자를 영적으로 완전히 포기하고 그의 영혼을 사탄에게 던져버리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처벌이었다. 이에 비해 엑스코뮤니카티오는 심각한 정도의 범죄에 해당하지만 후회하고 뉘우치면 속죄의 과정을 거쳐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선포되었다. 그래서 엑스코뮤티카티오는 치유적 성격의 정죄이고, 교정벌이라고 하였다.
범행자를 파문으로 처벌하여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형벌은 멀리 구약 시대의 히브리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볼 수 있고, 초대 교회의 사도 시대에도 그와 같은 엄중한 처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일정한 형식과 의식을 갖추어 그러한 처벌을 시행한 것은 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난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에 특정한 사건에 맞추어 파문장이 작성되고 선포되는 ‘비정규적 파문장’이 출현하는데, 900년 랭스의 파문장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 형태인 이 파문장에서는 범행자를 아나테마로 낙인을 찍으면서 영원한 파멸과 저주로 연결시키고 있다. 교회의 품으로부터 추방하며, 성스러운 땅에 매장될 수도 없으며, 촛불이 밟혀 꺼지는 것처럼 영혼의 빛이 소멸된다고 선언하는 처벌과 저주를 파문장에 명확히 기술하였다. 이 같은 초기의 파문의식서에는 이후에 출현하는 파문장에 사용될 기본 요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후기의 파문장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지역적 형편에 따라 각기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강조하는 내용도 크게 달라진다. 파문의식을 담고 있는 파문장은 작성된 시기와 유포 지역, 그 형태와 성격에 따라 비정규적 파문장, 주교전례서 파문장, 신의 권위 파문장, 멍드 파문장, 일반 파문장 등 크게 다섯 종류로 구분될 수 있다.
중세의 파문은 종교적 생활뿐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친 교회의 가장 준엄한 형벌이었다. 파문을 당한 사람은 원칙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단절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파문을 선고한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고 일정 기간 동안 뉘우치지 않고 불복종한 채로 있다면 그는 별수없이 세속 권력의 제재를 받게 된다.
파문된 자의 처리를 위한 세속의 협력은 그 시행 시기와 형식에서 서유럽의 각 국가가 상이한 모습을 보이지만, 12세기까지 각 국에서 교회의 파문 집행에 세속이 협력하는 절차와 형식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잉글랜드의 경우, 교회 결정에 불복종하는 사람을 세속 권력이 체포하여 응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주교가 왕에게 체포영장 신청(significavit)을 함으로써 세속의 협력을 받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왕의 상서원에 파문된 자의 체포영장(de excommunicato capiendo)을 신청할 수 있는 권리는 주교에게만 부여되어 있었다. 파문을 당하고도 40일이 지나도록 사면을 받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을 경우에 체포영장 신청 대상이 되었다. 잉글랜드와 달리 프랑스와 북부 독일지역에서는 대부분 1년을 상한선으로 삼았고, 남부 독일지역에서는 6주를 파문자의 불복종 유예기간으로 삼았다.
11세기 교회 개혁운동과 더불어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파문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문제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교황들은 교권 강화를 위해서, 그리고 세속 권력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파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나아가서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을 확립하고 교황 중심의 유럽 질서체계를 이룩해 가는 가운데서 파문을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1세기 교회 개혁운동 이후로 교황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세속군주들에게 수없이 많은 파문을 선고하였다. 정치적 동기에서 파문을 선고한 사례들은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교황이 황제의 정적들을 견제하고 제재를 가하여 황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사건들이다. 둘째는 성직서임권 투쟁을 중심으로 한 교·속의 갈등 속에서 황제를 압박하고 교황권을 강화하려 했던 사례들이다. 셋째는 교황령과 주변 지역을 침해하는 노르만 세력을 제재하기 위한 경우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인 문제뿐 아니라 현세적인 문제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교황권의 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는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이 완성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황은 그리스도 국가(Christianitas)에서 사제권과 왕권을 동시에 소유하고 세상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보았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교황은 그리스도 국가에서 유일한 수장이고 단일 수장제 하에서 현세권을 동시에 소유한다고 보았다. 교황이 현세권을 소유한다는 것은 이제 세속에 대한 통치가 교회 중심의 질서에 속하며, 교황이 교?속의 모든 것을 통괄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13세기의 교황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영적?세속적 수위권을 가지고 유럽 세계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정책과 의도를 가로막고 저해한다면 그러한 세력은 제제를 받아야 했으며 그 제재 수단의 하나가 파문이었다. 10세기 이래로 사회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그러한 관심 속에서 사투 금지를 다루기 위한 평화 공의회들이 소집되었고, 12세기 말까지 신의 평화와 신의 휴전이 보편 공의회의 규정으로 공식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투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13세기의 교황들은 호전적인 군주나 도시들에 대해서 전투 중지를 지속적으로 훈계하였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단호하게 파문이라는 제재를 가하였다.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고 사회 통합을 이룩하려는 교황들의 야망은 십자군 운동을 통해 표출되기도 하였다. 십자군 운동은 귀족들의 호전성을 해소시켜 줌으로써 유럽 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교황이 보편적 지배권을 구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유럽 내의 도시와 국가들을 평화로 이끌어 가는 것을 교황과 보편 교회의 사명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십자군 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보편 교회의 소망일 뿐 아니라 세속 군주들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군주에 대해서는 파문을 통해 경각심을 주고 제재를 가하였다.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은 교황의 대영주권 확립 속에서도 구체화되어 갔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의 대영주권 이념을 확립하기 시작하였고, 13세기까지 교황들은 세속군주와 봉건적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땅을 교황의 땅으로 봉토화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3세기 교황중심의 유럽질서는 사회의 평화와 통합을 유지하고 교황의 대영주권 확립을 통해서 현실 속에 구체화 되었다. 교황은 서유럽 세계를 교황의 보편 왕국으로 여겼고 보편적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그와 같은 세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파문은 그러한 교황의 야망을 실현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효율적인 수단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