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서양사 이해 (책소개)/2.서양고중세사

유럽중세 교회의 향연

동방박사님 2022. 3. 2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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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계사적 사건인 ‘카노싸의 굴욕’, 교권과 왕권의 충돌의 주역들을 살펴보다!

저자는 유럽 중세 천년의 역사 속에 갇혀 그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짓눌린 중세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조망해보려는 작은 시도에서 이 저술을 시작하였다. 책명 『유럽 중세교회의 향연』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세교회의 칙칙하고 어두운 이미지보다는 교회에서의 흥겨운 잔치를 연상시킨다. 이는 교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인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친교의 식탁 공동체에서 비롯되어 우리네 동네에서의 사람들의 출생으로 인한 돌잔치(세례사성사), 성장하여 혼인잔치(혼인성사), 아프거나 죽어서 장례식을 하는 곳(병자성사)이 바로 중세의 교회였다. 생로병사 인간사의 중요한 모든 일들과 때로는 개혁이 때로는 갈등이 표출되는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교회의 모습을 계속해서 그리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때문에 저자는 본 1권에서는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을 다루고, 곧이어 나올 2권에서는 유럽 고중세 도시에서 발달한 교회 문화와 성자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통해 도시문화의 근간을 살펴본다. 또한 세속 왕권에 굴복하여 무능하고 타락한 교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아비뇽의 유수’ 이후 아비뇽 교황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다루려 한다. 그리하여 유럽 중세와 근대를 날카롭게 단절시키고 대비시키는 전통적 관점을 넘어 중세와 근대가 이어지는 장기지속적인 역사상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목차

책을 펴내며

서 론
1. 그레고리우스 7세에 대한 평가
2. 문제 제기

제1장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시대와 삶
1. 힐데브란드Hildebrand의 생애
2. 추구한 정신적 이상들

제2장 개혁 사상의 토대
1. 성직자정치론
2.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

제3장 그레고리우스 7세 개혁
1. 교황주권론의 형성
2. 교황주권론의 실천: 서임권 투쟁

제4장 교황 수장제 교회정부의 실체화
1. 추기경 제도
2. 로마 시노드(Rome Synod)
3. 교황청 특사(Papal legates)

제5장 그레고리우스 7세의 현실 인식론
1. 로마 보편 교회론
2. 속죄 규정
3. 성전론

제6장 군주 하인리히 4세(1050-1106)의 진영
1. 하인리히(잘리에르조)의 통치방식
2. 독일에서의 ‘신의 평화’ 운동
3. 하인리히의 인간적인 면모

맺음말
부록 약어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영재
 
숭실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교 및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영국 리즈 대학교 중세연구소(IMS)에서 Post-Doc. 연수,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숭실대학교 초빙교수로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출강, 문학 박사이다. 연구서 : 「Gregory VII의 교황주권론 연구」(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역서 : 존...
 

출판사 리뷰

1077년 1월 이탈리아 북부 카노싸 성문 밖, 맨발의 한 사내가 3일 동안 한겨울 눈밭에서 성안의 한 인물에게 용서를 빌었다. 용서를 비는 사내는 신성로마제국황제 하인리히 4세, 그를 용서할지를 고민하는 성안의 사내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중세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표적 충돌로, 교과서에 실려 익숙한 세계사적 사건인 ‘카노싸의 굴욕’의 현장이다.

교회 추기경이나 주교 등의 임명권(소위 ‘서임권’)을 둘러싼 이 복잡한 투쟁은 이후 ‘와신상담’한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대반격으로 기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몰아내고 자신과 가까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에게 황제 대관을 받는 드라마틱한 전개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에 가려져, 쫓겨난 그레고리우스 7세가 추구한 교회 개혁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았다.

30년간 서양중세사를 연구해 온 이영재 박사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도 영욕을 오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의 명암을 살펴보는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y Ⅶ, 1015~1085)가 생존했던 11세기는 첫 번째 밀레니엄 시기로 접어들면서 이전 시기에 클루니 수도원 등이 추구했던 세기말적인 종말론의 비전보다는 천년왕국이라는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이 퍼져가고 있었다. 또한 봉건제가 확산되고 상업이 재개되며, 인구 팽창과 더불어 농업혁명에 의해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곧 이 시기는 유럽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틀을 갖추어 나가고 있던 때다.

이러한 시기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추구한 그리스도교 공화국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단일 정치 공동체로서 성 베드로의 권한을 계승한 로마 교황이 정신사와 현세사 즉 교권과 속권 모두에서 절대적 권한을 지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현세 사회의 일부였던 교회는 바야흐로 교황을 그 정점으로 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주권론에 입각해서 단행했던 개혁적 조치들로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첫째,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당시 유럽의 정치지배 집단에 대해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성직자의 성직매매 금지, 성직자 결혼 금지 등 성직자 계층의 윤리적 규범을 확립하는 일과 또한 세속인(황제. 군주 등)에 의한 성직서임 금지 등의 조치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개혁조치는 교회 내에서는 성직자 특히 재속성직자들과 갈등을 야기하였으며, 교회 밖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투쟁’을 초래하였다. 교황권의 간섭은 지방적 자율적 성격을 가졌던 교구 성직자는 물론 군주들에게도 고유한 권한을 침해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특권을 유지하려던 군주와 성직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야말로 전통을 위협하는 ‘위험인물’이었다. 성직자들에게 엄격한 윤리기준을 적용할 때, 당시에는 어기지 않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를 교회법상의 강제규범으로 제도화함으로써 확고한 의지로 실천하였다. 그는 주교와 수도원장에 관한 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채택하였던 자유선출제를 재확립하였으며, 이를 통해 성직매매의 금지 규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성직자의 윤리 규범 확립이라는 화두를 통해서 교회정부와 세속정부 모두의 지배계층에 교황의 주권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개혁적 의도와 밀접히 결부되었다. 때문에 그는 교황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파문되고 폐위될 수 있다는 교황주권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둘째,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주권론은 교권 및 속권의 관계라는 정치쟁점에서 교권의 우위를 주장하였다. 교황만이 신의 주권적 대리자임을 주장하고, 모든 현세적 권한의 원천임을 천명하였으며, 특히 교황은 법률의 입법권, 사법권, 집행권을 동시에 가지는 정치적 실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군주라면 예외 없이 교황의 계도와 명령에 순종해야 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이러한 교황주권론을 실천하기 위해서 서임권 투쟁과 같은 반황제 투쟁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론과 실천은 카로링조 이후 전통적으로 군주권에 부여되어 온 종교적 신성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군주 역시, 그가 그리스도교도인 한, 교황권에 대한 세속권의 도전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었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주권론이 파생시켰던 군주권의 탈종교화는 이후 흥미롭게도 군주권의 세속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서구 입헌주의의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셋째,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주권론은 교회조직과 재산을 서유럽 전역에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이 직접 관리했던 교황령을 현저하게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교황령의 확대야말로 그 이후 중세 교황권의 성장을 가능케 한 근거가 되었다.

넷째, 그레고리우스 7세는 수도원 및 수도 참사회의 확대 재편을 단행하였다. 이들은 그의 개혁운동 전반에 지속적인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게 되었다. 은수자, 수도승, 수도참사원 등은 자신들의 금욕적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그레고리우스 7세가 주창하였던 성직매매 금지와 성직자 독신생활 등의 엄격한 윤리적 규범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이들이 교황청이 주도하는 개혁전선에 합류함으로써 그레고리우스의 교황주권론은 구체적으로 종교적 사회적 실체가 될 수 있었으며, 또한 이들로서도 교황청으로부터 면제권 등의 특권들을 인정받음으로써 교회정부의 강력한 전위조직이 될 수 있었다.

다섯째,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정부의 제도적 개편 역시 단행하였다. 먼저 추기경단은 교황에게 이론적 조언과 함께 실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개혁가 집단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로마 시노드도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을 실천하는 중대한 교회조직으로 기능하였다. 교황이 주재한 로마 시노드의 결정사항은 교황령과 같은 교회법적 효력을 가졌다. 이 시노드 결정사항들은 교황청 특사들을 통해 지방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런 교황청 특사의 활동은 특히 주교의 권한이 강했던 마인쯔, 브레멘, 랭스 등의 대주교들과는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리하여 교황청 특사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던 이들에 대해서는 대주교라 하더라도 파문과 폐위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청 특사에게 부여하였다.

여섯째,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주권론은 교황을 ‘입법자-군주’로 확립함으로써 교회법의 발달 및 교회정부의 법률적 운용과 지배를 가능케 하였다. ‘법률에 의한 지배’에 관한 한 교회정부가 세속정부의 대안적 모델이 됨으로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주권론은 중세 법과 정치문화의 발달에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일곱째,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당시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로마시를 로마 교회의 이미지와 강하게 연결시키면서 사도좌로서 정비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것은 영원한 내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왕국이 아닌 현실적인 영역에서의 로마 교회를 근거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로마 교회의 보편 이념에 따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당시의 새롭게 등장한 기사 및 상인 계층 등 직업상 죄에 노출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속죄 법령을 제정해 주었으며, 일반인들의 속죄를 위해 로마 순례를 장려하였다.

또 중세교회 내에서는 아우구스틴 때부터 ‘성전’의 개념이 발달되어 왔는데 무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인 군인’의 개념을 강화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전사’를 축복하였고, 이제 기사들에게 자신들의 군사기술을 활용하여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십자군 원정 등으로 현실화 되었다.

그러나 카노싸의 굴욕 이후 ‘절치부심, 와신상담’한 하인리히 4세는 마침내 1084년 3월 로마로 진군했고, 교황편을 든 노르만공 귀스카르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로마시는 약탈과 파괴로 얼룩졌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로마에서 쫓겨나 살레르노에서 1년여 간 망명생활 중 1085년 5월 25일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언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였고, 죄악을 미워하였노라. 그리하여 나는 추방 생활 중에 죽노라.”는 성경구절이었다.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은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그의 뜨거운 열정과 정의를 추구하는 카리스마는 일부 사람들의 비난도 받았지만, 수도승 출신의 겸손과 인내, 금욕과 강인함은 어려운 개혁운동을 지속시키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상대인 하인리히 4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하인리히는 선대인 오토조에서부터 내려오는 신정적인 군주상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가 요구한 속인의 서임권 금지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군주의 전통적인 권리였고, 이를 지키려는 완강한 의지를 지니고 관철시켰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작센과 남부 독일의 세속 제후들 세력들의 저항, 나중에는 왕위 후계자인 자신의 아들들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는 그의 군주권한이 매우 취약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 발전해온 신의 평화운동이 독일에서의 ‘지역의 평화’에서 ‘제국의 평화’로까지 점차 확대되어가며, 무장하지 않은 자들 즉 약자에 대한 보호 조항에서 유대인까지 포함되어 발전되는 모습도 보였다.

저자는 유럽 중세 천년의 역사 속에 갇혀 그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짓눌린 중세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조망해보려는 작은 시도에서 이 저술을 시작하였다. 책명 ‘유럽 중세교회의 향연’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세교회의 칙칙하고 어두운 이미지보다는 교회에서의 흥겨운 잔치를 연상시킨다. 이는 교의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인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친교의 식탁 공동체에서 비롯되어 우리네 동네에서의 사람들의 출생으로 인한 돌잔치(세례사성사), 성장하여 혼인잔치(혼인성사), 아프거나 죽어서 장례식을 하는 곳(병자성사)이 바로 중세의 교회였다. 생로병사 인간사의 중요한 모든 일들과 때로는 개혁이 때로는 갈등이 표출되는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교회의 모습을 계속해서 그리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때문에 저자는 본 1권에서는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을 다루고, 곧이어 나올 2권에서는 유럽 고중세 도시에서 발달한 교회 문화와 성자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통해 도시문화의 근간을 살펴본다. 또한 세속 왕권에 굴복하여 무능하고 타락한 교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아비뇽의 유수’ 이후 아비뇽 교황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다루려 한다. 그리하여 유럽 중세와 근대를 날카롭게 단절시키고 대비시키는 전통적 관점을 넘어 중세와 근대가 이어지는 장기지속적인 역사상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의 후속작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책소개

타락한 교회의 몰락을 보여준다는 ‘아비뇽 유수 시기’에 오히려 교회가 근대를 품었다!

저자는 유럽 중세 천년의 역사 속에 갇혀 그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짓눌린 중세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조망해보려는 작은 시도에서 이 저술을 시작하였다. 책명 ‘유럽 중세교회의 향연’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세교회의 칙칙하고 어두운 이미지보다는 교회에서의 흥겨운 잔치를 연상시킨다. 생로병사 인간사의 중요한 모든 일들과 때로는 개혁이 때로는 갈등이 표출되는 살아 숨쉬는 역동적인 중세교회의 모습을 계속해서 그리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때문에 저자는 2020년에 나온 1권에서는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 개혁을 다룬 데 이어, 본 2권에서는 유럽 고중세 도시에서 발달한 교회 문화와 성자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삶을 통해 도시문화의 근간을 살펴보았다. 또한 세속 왕권에 굴복하여 무능하고 타락한 교회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아비뇽의 유수’ 이후 아비뇽 교황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다루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12세기 중세 도시에서의 교회 문화

제1장 중세인들에게 대성당은 어떤 곳인가?
1. 12세기 고딕 대성당의 종교적, 사회적 위상
2. 대성당 구성원의 신분과 역할
3. 도시의 거실인 대성당의 기능
4. 맺음말
제2장 도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와 그의 탁발수사들
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누구인가
2. 충직한 교회의 아들 프란체스코
3. 프란체스코의 혁명적 세계관
4. 맺음말
제3장 성 프란체스코 아씨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식 비교
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근대인인가?
2. 두 인물의 공통성
3. 두 인물 비교
4. 맺음말

제2부 14세기의 아비뇽 교황청

제1장 아비뇽 교황청은 유수인가? 아니면 성장인가?
1. 아비뇽 교황청의 연구 동향
2. 교황청의 아비뇽 이전
3. 아비뇽 교황청의 보편적 지배의 추구와 제도 정비
4. 맺음말
제2장 교황 요한 22세의 통치이념과 대외정책
1. 교황 요한 22세는 누구인가?
2. 교황직에 오른 요한 22세
3. 통치 이념
4. 대외 정책
5. 맺음말
제3장 교황 요한 22세의 재정 제도의 정비
1. 머리말
2. 세수 확충 정책
3. 교황청 재무성Camera의 정비
4. 맺음말
제4장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새로운 조망
1. 머리말
2. 피에르 로저는 어떤 인물인가?
3. 클레멘스 교황의 새로운 인식들
4. 맺음말
제5장 아비뇽에서 활동한 고전학 연구자들
1.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2. 페트라르카의 주변 친우들
3. 맺음말

부록 약어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이영재
 
숭실대학교 인문대 사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시애틀 퍼시픽 대학교 및 시카고 로욜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영국 리즈 대학교 중세연구소(IMS)에서 Post-Doc. 연수,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숭실대학교 초빙교수로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출강, 문학 박사이다. 연구서 : 「Gregory VII의 교황주권론 연구」(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역서 : 존...
 

출판사 리뷰

코로나 19의 팬데믹은 인간들로 하여금 다시 수많은 문명의 역사와 그속에서 창궐한 전염병의 궤적들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동안 인류에게는 수많은 전염병이 발병해 왔지만 그것의 파괴력, 전파력, 지속력, 생존력(변이)에서 코로나는 강력한 슈퍼 바이러스로서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방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감지된다. 이러한 전염병 가운데 일찍이 14세기 유럽에서 발병한 흑사병은 이에 못지않은 초강력 슈퍼 바이러스로서 이후 유럽 사회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위기의 14세기’라고 불릴 정도로 14세기 유럽은 오늘날과 유사한 대형 사건, 사고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시대는 본서의 주제인 아비뇽 교황청의 시기이다. 교황청이 그동안 천년이 넘게 자리해온 로마를 떠나 프랑스의 쇠락하고 변방이었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는 가스코뉴 지배권을 놓고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시기에 교황직에 오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을 임시적인 교황 거주지로 삼았으며, 이사벨라 공주와 에드워드 왕자의 혼인 이라는 두 나라 왕실 간의 결합을 성사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여 자신의 고향인 가스코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수호자로서 조력해 왔다. 그러나 ‘교회의 맏딸’로 여겨지던 프랑스는 필립 단려왕 시기에 교황들과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교황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교회가 거둔 성직자 세금과 십일조를 군주들이 유용하도록 인정해 주었으나, 군주들은 점차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였으며 이를 군주권 강화의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황 요한 22세 시기는 민족의식이 점차 성장하고 있는 터라 영국과 스코틀랜드 간, 프랑스와 플랑드르 지방 간, 스페인에서는 무슬림으로부터의 국토회복 운동 중에 있어서 무슬림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하는 상황이었다. 요한 교황은 주로 군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정책을 펼쳤다.

1348년에는 흑사병이 발병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거의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가 유럽 전체 인구의 절반 내지 1/3이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어려운 시기에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민첩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동시대인이었던 페트라르카나 윌리엄 오캄에 의해 아비뇽 교황청의 7인의 교황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타락하고 악명높은 교황’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이전 교황인 요한 22세 시기에 교황의 명을 받고 중세의 대석학이지만, 당시 여러 신학 논지에서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었던 토마스 아퀴나스를 조사·연구하여 그를 성인품에 오르게 한 명철하고 시대정신을 뛰어넘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흑사병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클레멘스 6세의 대처는, 병의 원인을 알기 위해 사망한 시신을 해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당시로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러한 교황의 태도에서 일찍이 의학 및 과학적인 접근방식을 찾아볼 수 있었다. 더욱이 흑사병 발병의 원인으로 낙인찍혀 유대인 대량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에 그들에게 안전한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었고, 또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교황의 무료 배급소의 증설은 오늘날의 종교계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본서에서 12세기 중세 도시 교회문화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다. 당시 도시에는 거대한 규모의 고딕 대성당들이 건립되었다. 오늘날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중요 대도시 어디를 가든지 거의 예외없이 높은 첨탑과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의 교회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다. 각 도시의 도시민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더 높은 그들의 대성당을 세우려고 경주하였다. 당시에 그러한 대성당을 짓는 것이 그들에게는 심각한 경제적, 심적 부담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고딕 예술을 보면서 중세인들은 그 지역의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과연 대성당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그 거대한 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고, 어떻게 소통했는가? 또한 그것이 지방의 도시경제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는지 고찰하였다.

또한 본서에서는 13세기의 도시의 성자 프란체스코 아씨시를 주목한다, 그에게서 대표적인 근대 시민혁명인 프랑스 혁명(1789년)의 “자유”, “평등”, “형제애”의 이념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는 사업에 대성한 부친에게서 유산으로 받을 수 있는 막대한 부를 전부 포기하며, 누더기의 거지 옷을 걸치고 구걸하는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오늘날 과도하게 부를 쫓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의 이러한 한 가지 삶의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의 삶의 태도가 파급력이 대단하였다는 것이다. 누구의 강제도 없이 수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그를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맨몸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자 프란체스코회 형제들이 되었다. 또한 여성들도 모여들어 프란체스코회 여자 수도회인 클라라 수녀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가난한 삶의 방식은 도시민들 특히 프란체스코회 제3회원들을 양산해 내었으며, 결국 재속회를 포함하는 이들 탁발수도회들을 통해 유럽의 도시문화의 근간이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었다.

더욱이 당시 아비뇽에는 많은 학자들이 모여와서 연구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 다수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봉직하였다. 이런 문인들 가운데 특히 ‘최초의 근대인’이라 불리는 페트라르카 및 그와 친분을 가졌던 지오반니 콜로나, 지오반니 카발리니, 루도비쿠스 상투스 등에 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는 다양한 인적구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문주의가 14세기 아비뇽과 그 주변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비뇽은 이미 여러 문인들의 활발한 연구를 통해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고전 문화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고 실험하며 조탁하는 무대였던 것이다.

고전어 또는 라틴어도 제대로 모르던 13세기의 성 프란체스코에게서 이러한 근대 이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14세기 아비뇽 교황청의 연구를 통해서, 15?16세기 르네상스, 이후 근대 세계로의 발전이 고전고대 문명의 부활에서 발전되었다는 일반화되고 도식화된 개념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미 중세교회 안에 이러한 근대의 혁명적인 사상들이 싹트고 자라나고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중세와 근대를 날카롭게 단절시키고 대비시키는 부르카르트적인 역사 해석에 대한 반론으로써, 유럽 역사의 14세기, 15세기, 16세기를 장기 지속적인 관점에서 서서히 변화, 성장하고 있음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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