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3.중국근현대사

아편전쟁

동방박사님 2022. 4. 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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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편전쟁은 오랜 세월 중화사상에 입각한 세계관 속에서 살아온 중국과 산업혁명에 성공해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에 나선 영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역사적 흐름이 바뀌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막상 이 전쟁의 내막을 파헤친 책은 거의 없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강의를 진행하면서 아편전쟁이 중국 문명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학생들이 볼만한 읽을거리를 찾지 못했고 아편전쟁의 내막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펜을 들었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를 선택하고 정리하는 일은 물론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되어 일어난 전쟁의 성격상 전쟁의 전후 사정을 엮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다. 이 책은 중국 문학을 연구하는 저자가 학자가 아닌 ‘이야기꾼’으로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사정과 난징조약으로 일단락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양한 자료들을 토대로 엮은 ‘이야기’이다.

 

목차

책을 펴내며

서론

1장 중국인의 바다: 정크무역, 해금과 밀무역

해상무역과 해금
양이의 출현과 마카오, 위에깡
홍마오: 레이에르센과 웨들
해금 완화: 사구통상에서 일구통상으로

2장 유혹의 상품: 차와 아편

영국인의 차
중국인의 아편

3장 광조우 무역체제: 이익과 갈등

광조우: 까다로운 항구
규제, 쥐어짜기, 횡포
격리된 해방구: 광조우 상관
밀월관계: 꽁홍과 영국동인도회사
약점의 노출: 앤슨 함장의 센추리온호
야만적 법률: 레이디휴스호 사건

4장 광조우 무역체제의 변화

영국동인도회사와 중개상
인도 식민정부
매카트니 특사단과 마카오 침공
상관의 변화: 꼬마 코스모폴리탄 사회

5장 아편의 검은 바람

폭풍의 시작: 가장 점잖은 투기
풍선 효과: 단속과 확산
애머스트 특사단과 동인도회사의 석양
전설의 탄생: 자딘과 매더슨

6장 무역감독관

네이피어: 초대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엇: 네 번째 무역감독관
야만과 계몽
아편 논쟁: 엄금론과 이금론
거세지는 바람

7장 린쩌쉬의 폭풍과 역풍

흠차대신의 부임
폭풍의 시작: 상관 봉쇄, 아편 몰수와 폐기
후폭풍과 충돌
전쟁의 함성

8장 느슨한 전쟁: 압박과 협상

원정대
해안 봉쇄와 딩하이 점령
베이허의 협상
광조우: 협상과 전투
되살아난 주전론: 반격 시도
광조우: 포위와 항복, 싼위엔리 전투
홍콩에 닥친 태풍

9장 새로운 전쟁: 점령에서 조약까지

원정대 재편: 샤먼과 딩하이 공략
양쯔강으로: 쩐하이와 닝뽀
반격과 실패
난징을 향해: 자푸, 우쏭, 쩐쟝
다시 협상으로: 난징조약

뒷이야기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서경호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87~2009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중국소설과 중국문학사를 주로 강의했다. 2009년 같은 대학 자유전공학부로 옮겨 2017년 퇴직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이다. 2005~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으로 ...
 

책 속으로

조정은 일찍부터 아편을 경계했다. 17세기 말엽부터 아편이 쾌락의 상품으로 알려지자 1729년에 황제가 아편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금령禁令은 느슨해서 아편 반입을 무조건 금지하는 게 아니라 의약품으로 들여왔다고 하면 관세를 부과하고 통과시켰다. 이즈음 아편은 주로 네덜란드 상인들이 반입했지만 물량은 많지 않았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기록을 보면, 1738년에서 1745년 사이에 취급한 아편 중에서 인도네시아로 운반된 물량이 80톤이었으나 중국으로 보낸 물량은 12톤밖에 되지 않았다. 느슨한 금령은 효과가 없었고, 아편은 계속 퍼져 나갔다. 흡연자의 상당수가 금령 시행의 당사자여서 적발된다 해도 잡아넣기 곤란한 사람들이었다. 금령은 오히려 호기심을 부추겨 흡연을 확산시키고 지하경제를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 운송과 유통에 위험요소가 커져서 가격이 오르자 아편은 더욱 비싼 사치품이 되었고, 흡연 도구도 갈수록 고급화되었다.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아편은 대중적 기호품이 아니어서 확산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황제의 금령도 아편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여러 해악 중에 아편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그렇지만 금령 반포 후 80년이 된 19세기 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편 확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고, 은의 유출로 국가적으로 통화 위기를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 「2장 유혹의 상품: 차와 아편」중에서

18세기 중엽에 영국동인도회사는 광조우 시장에서 압도적 세력으로 부상했다. 1753년에 수년간의 로비 활동으로 차 수입의 독점권을 장악한 후 회사는 60여 문의 대포를 장착한 1,000톤급의 동인도 무역선East Indiaman이라 부르는 범선들을 투입했고 연간 정기 운항 횟수도 크게 늘렸다. 회사는 광조우 무역량의 70%를 차지해 많은 이익을 거두는 동시에 영국과 인도 식민정부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에 따라 상관의 직원들은 분에 넘치도록 풍족한 생활을 했다. 무역량이 큰 만큼 봉급도 많이 받았고 체류 비용도 넉넉해서 요리사와 하인, 청소부를 고용해 세계 어느 거류지에서도 누릴 수없는 풍요를 누렸다. 그들은 반년 일하고 1년 봉급을 받았고 무역 종료 후에는 마카오의 근사한 저택에서 느긋하게 생활하는 혜택을 누렸다. 런던 본사에서 비용을 너무 많이 쓴다고 까탈을 부렸지만 직원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직원들은 회사 선박에 개인 화물 적재 할당량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 「3장 광조우 무역체제: 이익과 갈등」중에서

매카트니는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될까 봐 당황했다. 그는 마지막 시도로 황제의 측근에게 자신의 임무를 기술한 편지를 보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지만 특사단이 베이징을 떠나 운하에 접어들 무렵 황제의 답신이 도착했다. 이 편지도 조지 3세에게 보내는 것이었지만 지난번 편지와는 어조가 달랐다. 점잖은 훈계가 아니라 요청 사항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표현으로 채워져 있었다. 중국에는 없는 것이 없으므로 굳이 오랑캐와 무역할 필요가 없으며, 설사 닝뽀를 개항한다 해도 통역과 창고가 없는 그곳에서 무역이 가능할 리 없고, 조우산의 할양은 꿈도 꾸지 말라는 어조가 분명했다. 중국은 영토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불순한 의도가보이면 무력으로 몰아내겠다고 했다. 충실히 복종하고 의무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훈계였다. 이로써 영국의 특사 파견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도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르던 영국의 실체를 파악할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양국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이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오해와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4장 광조우 무역체제의 변화」중에서

합작 후 자딘과 매더슨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사업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현지 소비자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동시에 인도의 가격 동향과 자금 사정에 관한 정보를 소상히 파악하고 적절히 활용했다. 아편이 가장 중요한 상품이었지만, 그렇다고 아편만 취급한 것은 아니었다. 옷감과 면화, 인디고를 수입하고 차를 수출했으며, 보험과 금융, 선박 중개에도 뛰어들었다. 그들은 아편을 취급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합법적인 상품으로서의 아편을 취급하는 것뿐이며, 소비가 있는 곳에 상품을 공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편 사업을 가장 안전하면서도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점잖은 투기gentlemanly speculation’라고 생각했다.
--- 「5장 아편의 검은 바람」중에서

그런데 쌍방 간에 심각한 오해가 있었다. 흠차대신은 아편을 몰수했지만 감독관은 인도했기 때문이다. 흠차대신에게 불법상품인 아편의 몰수는 문자 그대로 빼앗아 버리는 것으로 보상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흠차대신은 오랑캐들이 과오를 뉘우치고 자신의 명령에 따랐다고 생각해서 칭찬의 표시로 비단과 차를 선물로 보냈다. 그는 엘리엇이 서류상의 물량을 영국 정부의 재산으로 이관시킨 것을 몰랐고, 설사 알았다 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엇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 아편은 중국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바다에 떠 있었으므로 여전히 영국인 소유의 합법적 상품이었고, 그것을 내놓으라는 명령은 국제법 위반이었다. 그는 아편을 몰수당한be confiscated 것이 아니라 연금된 영국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영국 정부가 몸값을 지불하는 수단으로 인도한surrender 것이었다. 이런 인식 차이는 몰수와 인도 과정의 신경전으로 나타났다. 흠차대신은 하역선을 수로 입구까지 끌고 와서 관리들이 직접 배에 올라 아편을 압수하는 징벌적 몰수를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반면 엘리엇은 영국 정부의 재산을 중국 정부에 인도하는 것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맞섰다. 그는 영국 관리가 입회한 상태에서 정해진 물량을 인도하고 인수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을 끌던 신경전은 흠차대신이 엘리엇의 제안을 수용함으로써 끝났고, 월해관은 엘리엇의 보좌관인 존스턴이 마카오로 가는 것을 허용했다. 이것을 엘리엇은 중국과 영국 정부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공식 교섭의 타결이라고 정의했지만 흠차대신은 오랑캐의 체면을 살려 주기 위한 관대함이라고 생각했다.
--- 「7장 린쩌쉬의 폭풍과 역풍」중에서

치잉은 황제와 오랑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황제는 아직도 현장 상황과 동떨어진 지시를 내렸다. 8월 중순에는 흠차대신이 오랑캐 두목을 직접 만나서는 안 된다고 했고, 얼마 후에는 개항 대상에서 푸조우를 취엔조우로 바꾸고 개항하더라도 오랑캐가 영구히 거주할 수는 없게 하라고 지시했다. 또 협정서에 국새 대신 흠차대신의 관방을 찍으라고 했다. 이런 지시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하루빨리 협정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관리들 중 누구도 그런 지시 사항을 관철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치잉과 이리뿌도 언제 황제가 변덕을 부려 강경 노선으로 돌아설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무시하면서 협상을 밀어붙였다. 그들은 사실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루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고, 협정 내용보다 협정문을 황제의 체면을 살리는 문안으로 채우는 데 더 집중했다. 치잉은 각종 미사여구를 동원해 황제를 다독거렸다. 오랑캐가 무역에만 관심이 있어서 협상 과정에서 매우 양순하고 복종하는 태도를 취했다고 하면서 홍콩 할양, 배상금, 꽁홍 폐지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결국에는 손들고 말았다. 그리고는 2,1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어떻게 마련할까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 액수는 연간 세수의 절반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 「9장 새로운 전쟁: 점령에서 조약까지」중에서
 

출판사 리뷰

‘아편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서구의 학자들은 아편전쟁의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전쟁으로 중국이 세계 무역질서에 편입됨으로써 16세기 이래 진행된 세계화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통설로 자리 잡고 있다. 반면 이 전쟁이 동서 문명 사이의 오해와 경제적 탐욕 때문에 벌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덜 주목한다. 이 책은 아편전쟁이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닌 무역, 정치, 외교술, 국제 질서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어 일어났음에 주목하여, 이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여 전쟁에 이르게 되었으며 전쟁의 결과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아편전쟁에 관한 논의는 이분법의 스펙트럼을 가진다. 문명화된 영국과 덜 문명화된 중국, 해양국가와 대륙국가, 개방과 폐쇄, 군사력의 우세와 열세 등이 대표적 이분법이다. 이런 구분은 원래 유럽인이 시작했지만, 중국도 중국은 피해자이고 유럽은 제국주의 침략자였으며, 중국 상인은 규범에 따라 무역을 진행한 반면 유럽 상인은 이익을 노려 밀수를 일삼았다는 시각에서 이분법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은 이런 이분법에 맞추어 아편전쟁을 재단하지 않는다. 다양한 사료들과 여러 연구들을 토대로 하여 전쟁이 어느 시점에,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세하면서도 사실적으로 서술했다. 무엇보다도 딱딱한 서술이 될 수 있는 주제를 저자는 재미있게, 쉽게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180년 전의 전쟁, 오늘과 맞닿아 있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열어젖힌 영국이 막대한 이익을 거둔 것은 분명하다. 다른 유럽 국가와 미국도 이에 편승해서 이익을 거두었다. 중국은 왕조국가에서 벗어나 근대국가로 변했고, 서구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의 중국 역사에 대한 기여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중국 사회에서 서구는 침략자로 각인되어 강렬한 외국인 혐오증을 배태했다. 21세기 중국에서 아편전쟁은 객관적인 역사 탐구 주제가 아니다. 아편전쟁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증폭시켜 중국인을 거대한 희생자 집단으로 만들어 결속을 강화하고 공산당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보다 180년 후의 세상을 사는 세대가 그 아픔을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이 아편전쟁의 특수한 단면이다.

2020년 현재 중국을 둘러싼 일이 여럿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의 무역갈등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으며, 2019년 여름부터 시작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는 홍콩보안법이 시행되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중국과 미국의 무역갈등 상황은 180년 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센 놈이 상대에게 ‘우리 식으로 해라’라고 요구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아편전쟁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출발까지를 100년의 치욕기로 생각하며, 현재의 ‘대국굴기大國?起’를 그 설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목표는 왕년의 가해자가 아니라 만만한 주변국들로, 이들을 대상으로 제한적 천하를 재구성하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강 건너 불 보듯이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저자는 이러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으로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아편전쟁은 문명의 충돌이며, 오랜 기간에 걸친 동서양의 접촉에서 한 단계를 접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므로 중국 사회와 문화의 이해, 세계주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아편전쟁을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