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계사 이해 (책소개)/1.세계사

유럽인의 역사

동방박사님 2022. 4. 2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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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류의 출현부터 냉전의 종식까지,
정치적 발전을 줄기로 삼아
사회·경제·문화 등 유럽사 전반을 아우르다


이 책은 인류의 출현부터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을 거쳐 냉전의 종식에 이르기까지 유럽사 전체를 아우르는 개설서이다.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라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전 2권, 16개 장으로 구성하고 각 장마다 시대별 핵심 주제와 사건을 통해 내용을 전개하여 차례만으로도 유럽사를 한눈에 그려볼 수 있다.

한정된 지면을 가진 개설서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이 유럽사는 사실상 서유럽사이기 마련이지만,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역사 무대를 서양사의 주변부 취급을 받는 지역까지 확대하고자 했다. 그와 더불어 원천적인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 개설서에서 역사의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한 여성에게도 최소한의 지면이나마 할애하려고 노력했다.

전 2권으로 분량이 상당하지만 항목마다 세부 주제를 표시해 두었기 때문에, 관심사에 따라 필요 없는 부분은 건너뛰어 읽기로 분량에서 오는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서양 문명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목차

머리말
서문 유럽의 정체성

제1장 원시사회와 최초의 문명
1. 원시사회|2. 메소포타미아 문명|3. 이집트 문명|4. 문명의 계승과 확산

제2장 그리스 문명
1. 선행 문명: 에게 문명|2.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3. 고전기 그리스의 영광과 쇠망|4. 그리스의 문화|5. 헬레니즘 문명

제3장 로마 문명
1. 로마 공화정의 발전|2. 지중해 세계의 정복|3. 공화정의 위기와 붕괴|4. 로마의 평화|5. 제국의 쇠퇴와 멸망

제4장 중세 유럽 문명의 형성
1. 게르만 왕국들|2. 가톨릭교회의 발전|3. 카롤루스왕조|4. 봉건사회의 형성
제5장 형제 문명들: 비잔티움 문명과 이슬람 문명
1. 비잔티움 문명|2. 이슬람 문명

제6장 중세 봉건사회의 성장
1. 봉건 왕국의 발전|2. 중세 성기의 교회와 교황 국가|3. 기독교 세계의 정복 전쟁|4. 중세 성기의 경제적 발전|5. 중세 성기의 문화

제7장 중세 봉건사회의 변화
1. 위기의 14세기와 경제적 변화|2. 중세 교회의 쇠락|3. 국민국가의 발전|4. 이탈리아 르네상스

제8장 근대 유럽의 등장
1.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2. 기독교공동체의 해체|3. 유럽의 해외 팽창|4. 16세기 국민국가의 발전

제9장 절대주의의 전성ㅎ
1. 절대군주정의 발달|2. 절대군주정의 확산|3. 제한군주정의 대두|4. 절대주의 시대의 사회와 문화|5. 과학혁명
 

목차

제10장 계몽사상과 절대왕정의 변화
1. 계몽주의의 시대: 18세기의 문화?2. 정치적 발전?3.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
제11장 정치 혁명과 경제 혁명
1. 미국혁명?2. 프랑스혁명?3. 나폴레옹 시대?4. 산업혁명
제12장 이데올로기의 시대
1. 반동과 혁명?2. 민족주의와 현실 정치?3. 19세기의 문화와 학문
제13장 제국주의의 전개
1. 유럽 각국의 정치적 발전: 1870~1914?2. 아메리카와 유럽 바깥의 유럽인?3. 산업사회의 확산과 발전?4. 제국주의적 침탈
제14장 두 차례의 세계대전
1. 제1차 세계대전?2. 러시아와 패전 제국들의 혁명?3. 전간기의 서유럽?4. 전체주의의 대두?5. 제2차 세계대전
제15장 냉전 체제와 제국주의의 청산
1. 전후 처리와 냉전?2. 전후의 서방세계?3. 소련과 동유럽?4. 제국주의의 청산?5. 중동과 라틴아메리카
제16장 냉전 종식과 그 이후의 세계
1.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2. 냉전 이후의 서방세계?3. 20세기의 학문과 예술?4. 20세기 사회

 

저 : 송규범 (宋奎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석사, 문학박사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현재 서원대학교 명예교수
역서 및 저서: 『19세기 유럽 민족주의』(1984, 공역)
『영국의 역사』 상·하(2005, 공저)
『존 로크의 정치사상』(2015)
 
 

책 속으로

이집트인은 수학에서는 메소포타미아인보다 훨씬 뒤처졌다. 산수는 덧셈과 뺄셈 수준에 머물렀고, 대수학의 이해도 초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적 기하학에서는 상당한 지식을 가졌다. 기하학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없어진 농지의 경계를 다시 구분한다든가, 피라미드를 축조한다든가 할 때의 필요 때문에 발달했다. 이런 종류의 토목 사업에서는 이집트인이 같은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들은 아직 사고방식이 신관의 지배와 종교의 굴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진정한 과학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메소포타미아인처럼 이집트인도 진정한 과학적 방법의 발달 없이 필요한 기술을 습득했다. 이집트인은 우리의 역법의 직접적 선조가 되는 태양력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고왕국 초기에 이미 나일강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 홍수 범람의 평균 주기가 365일임을 밝혀낸 것이다.
---「제1장 원시사회와 최조의 문명」중에서

국가가 새로 태어난 모든 아기의 생존 적합성을 심사하고, 불구이거나 병약한 아기는 죽게 내버려두었다. 소년은 7세에 가족을 떠나 국가의 통제 아래 들어가, 엄한 규율 아래 고된 훈련을 받고 국가에 헌신하도록 교육받았다. 그는 20세가 되면 병적에 오르고, 30세까지 병영에서 생활했다. 그 시기에 결혼은 허용되었으나, 병영 생활은 계속해야 하며 밤에만 부인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서른이 되어서야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되어 민회에 참석하고, 저녁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60세까지 군사훈련을 하며 군대 동료와 공동으로 저녁 식사를 해야 했고, 60세 이후에야 비로소 병영에서 완전히 벗어나 가정에서 가족과 생활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 시민은 복종과 준법의 정신 속에서, 사생활의 의지 없이 오로지 공동체의 유기적 일부로 존재했다. 전사-시민 가족의 생계는 헤일로타이가 떠맡았다. 이들은 국가가 시민의 몫으로 분배한 토지를 경작해 주었다.
---「제2장 그리스 문명」중에서

결혼은 원래 평생을 함께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이혼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혼은 양쪽 모두가 요구할 수 있었고, 결혼의 파탄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이혼은 기원전 1세기에 특히 성행했는데, 이때는 정치적 혼란기로서 결혼이 정치적 동맹을 위해 이용된 탓도 컸다. 여성은 조혼이 널리 행해졌다. 소녀의 법적 최소 결혼 연령이 12세였는데, 흔히 14세쯤에는 떠밀려 결혼을 했다.

키케로(Cicero)의 딸은 공화정 말기 로마 상류사회 여성의 일생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그녀는 16세에 결혼한 뒤, 22세에 과부, 일 년 뒤 재혼, 28세에 이혼, 29세에 다시 재혼, 33세에 다시 이혼, 그리고 34세에 삶을 마쳤다. 로마 사회에서 이는 여성으로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제3장 로마 문명」중에서

고전의 필사는 유럽의 문화 발달에 또 하나의 귀중한 공헌을 했다. 그것은 오늘날 유럽에서 쓰이고 있는 글씨체의 발달이다. 로마 시대에 글은 대문자로 썼다. 그러다가 로마 말기에 다양한 형태의 소문자가 도입되었는데, 메로베우스 시대에 쓰인 글자체는 판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궁정학교에서 고전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읽기가 쉬운 글자체가 고안되어 이전의 글자체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글자체는 모두 이 ‘카롤루스 소문자’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제4장 중세 유럽 문명의 형성」중에서

박해가 심해지고, 나아가 살해 계획까지 알려지자, 무함마드는 622년 대다수가 자신의 하심 씨족에 속하는 200여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북쪽에 있는 메카의 경쟁 도시인 야스리브(Yathrib)로 도피했다. 야스리브에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유일신 신앙에 익숙해 있던 야스리브 주민들이 이들을 통해 무함마드를 초청한 것이었다. 야스리브 주민들은 무함마드를 그들 부족 간의 갈등을 해결해 줄 강력한 지도자라고 판단했다. 그 도시는 나중에 메디나(Medina), 즉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되었다. 역사에서 히즈라(Hijrah, Hegira)로 알려진 이 ‘이주’가 행해진 해는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이 되었다.
---「제5장 형제 문명들」중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치명적인 단점은 제위 세습이 원칙으로 확립되지 못하고, 대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관행이 굳어졌다는 점이다. 작센왕조와 잘리어왕조는 각각 한 세기 남짓 동안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제위는 자주 이리저리 옮아갔으며, 많은 경우 대제후들은 자신들을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둘 허약한 황제를 선출했다. 그 결과 프랑스 왕들이 느슨한 봉건체제를 좀 더 중앙집권화한 왕국으로 개혁하는 과업과 씨름하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차츰 각 봉토, 각 주교구, 각 도시가 독일 안에 있든 북이탈리아에 있든 사실상 작은 독립국가로 바뀌어간 것이다.
---「제6장 중세 봉건사회의 성장」중에서

고대 로마 세계와 달리 중세 문명은 ‘몰락’하지 않았다. 야만인 침입의 물결도, 사회질서와 상업의 붕괴도 없었다. 오히려 중세가 끝날 때, 서유럽은 대단한 활력과 팽창 정신을 드러냈다. 중세는 뚜렷한 단절 없이 근대로 이동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내세우고, “여기서 중세가 끝났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현재의 문명이 중세의 연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명 서유럽 생활의 가시적 양상은 크게 변해 왔으며, 그 변화는 14세기에 일련의 사회적 재난을 거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제7장 중세 봉건사회의 변화」중에서

헨리 8세는 영국의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제한하는 여러 조치로 압박을 가했으나, 교황은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었다. 안달이 난 헨리 8세는 1532년 마침내 토머스 크랜머(Cranmer)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이듬해 1월 서둘러 그의 주재 아래 비밀리에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했다. 왕비의 시녀였던 앤은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이후 곧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헨리와 앤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1534년 마침내 의회는 수장법(Act of Supremacy)을 제정하여 영국의 국왕이 영국 교회의 최고 수장임을 선언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영국의 교회와 로마교황청의 모든 관계가 단절되어 영국의 교회는 독립된 영국교회가 되었다. 반가톨릭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국교회는 이제 국왕의 정책 추진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엄청난 액수의 교회 소득이 왕실 금고에 쏟아져 들어갔다.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뒤, 헨리는 1539년 수도원을 폐지하고, 방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상당한 부분을 측근과 지지자들에게 분배했다. 그리하여 헨리는 쪼들리던 재정을 넉넉하게 확보했을 뿐 아니라, 로마와의 결별에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든든한 지지 세력으로 지주 계층을 새로 창출했다.
---「제8장 근대 유럽의 등장」중에서

은행의 이와 같은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의 하나는 국가 채무 관념의 발달이었다. 17세기까지도 정부가 빌린 돈은 국왕의 개인 빚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새 왕은 종종 선왕이 남긴 빚을 갚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중세 말 은행가 자크 쾨르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거금을 빌려주었다가, 갚지 않으려는 국왕의 음모에 걸려들어 유죄 선고를 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정부와 거래하는 은행은 파산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자율은 그 위험도에 상응하여 높았다. 그런데 17세기에 왕이 진 빚은 왕 개인이 아니라 정부가 진 것이라는 관념, 이를테면 국가 채무 관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제 은행은 좀 더 안전하게 거금을 정부에 대여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관념은 왕권이 약한 영국과 공화국인 네덜란드에서 먼저 발달했다. 그 덕분에 그 두 나라 정부는 은행에서 낮은 이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으며, 이는 전시나 다른 비상시에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제9장 절대주의의 전성」중에서
 

출판사 리뷰

유럽사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다각적으로 조명한 개설서
복잡하고 방대한 유럽 역사의 흐름을 읽다


유럽이라는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 8세기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의 작품에서다. 에우로페가 어떤 연유로 유럽을 가리키는 지명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스인들은 ‘에우로페’를 오리엔트의 좀 더 오래된 땅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에게(Aegea)해 서쪽에 있는 자신들의 영토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에우로페는 페니키아어의 ‘저녁’ 혹은 ‘서쪽’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 설은 유럽 역사의 여명기에 아침의 문명 세계는 동쪽에 있고 어둠에 싸인 서쪽 세계는 아직 문명의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흔히 말하는 서양사 개설서이다. 그런데 지역을 뜻하는 명칭을 피하고 굳이 제목으로 ‘유럽인’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서양사라는 용어가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서양을 유럽과 더불어 아메리카를 포함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런데 서양사를 유럽과 더불어 아메리카의 역사를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한다면, 이는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서양사 개설서’에서 아메리카는 콜럼버스의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 이후의 아메리카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이주하기 전의 아메리카는 서양사의 범주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이후라 하더라도 아메리카의 역사는 유럽에서 건너간 유럽인의 이야기일 뿐, 그 땅의 원래 주인인 원주민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양사에서의 아메리카는 거의 전적으로 유럽인의 나라인 미국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이베리아반도는 일찍이 로마제국 시대에 유럽의 역사 무대에 등장했으나, 8세기 초에 무슬림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로는 5세기 이상 동안 유럽의 역사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이베리아반도가 유럽 역사에 다시 편입된 것은 이른바 ‘리콩키스타(Reconquista)’, 즉 기독교도 유럽인이 무슬림을 물리치고 반도를 재정복한 이후부터이다. 『유럽인의 역사』는 이러저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붙인 이름이다.

역사는 변화에 대한 설명이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변화를 드러내는 데 특히 많은 신경을 썼다. 물론 그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들의 생각과 결단이 만들어낸 결과일 터이다. 이 책은 정치적 발전을 줄기로 삼아 사회·경제·문화 등 제반 현상을 종합하여 역사 현상이 단절되거나 파편화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서 개설서에서 다룰 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은 될 수 있는 대로 모두 언급하고, 또한 언급한 사항에는 최소한의 설명을 곁들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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