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서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서양철학사상

비극의 탄생 (니체)

동방박사님 2022. 5. 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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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 초기 대표작이자 미학사의 고전

독불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중에 쓰인 이 책은 그리스 비극이 죽음을 맞는 것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낙관적 이론을 계승한 에우리피데스 때문이고, 비극이 재탄생하는 것은 바흐, 베토벤을 계승한 바그너 음악을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 책의 요지는 무엇보다도 문화가 가장 중요하고, 소름 끼치는 삶에 접근하려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균형을 기하는 것이 필요하고, 예술, 그중에서 음악, 그것도 바그너 음악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 자체가 데카당의 징후라는 것은 인식의 역사에서 새롭고도 유일한 제1급 인식이다”라고 말하면서, 서구의 문화적 전통이 너무 ‘아폴론적’인 것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한다. 그것이 지나치게 이성 중심적이고 개념 위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원리에 대한 니체의 강조는 칸트의 미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이런 전통의 영향으로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알렉산드리아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이러한 전통에 반대하며, 서구의 또 다른 전통을 찾아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되는 ‘디오니소스적’인 전통이다. 『비극의 탄생』이라는 디오니소스적 분출을 통해 니체는 세상에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주의, 이론적 세계관 그리고 학문을 공격함으로써 스스로 비극적 주인공이 되는 길을 걸었다.

 

목차

옮긴이의 글
자기비판의 시도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

1.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2. 아폴론적인 꿈의 예술가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예술가
3. 아폴론적 문화
4. 아폴론적 그리스인
5. 미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되는 현존과 세계
6. 의지로서 현상하는 음악
7. 그리스 비극의 기원
8.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
9. 프로메테우스의 이중적 본질
10. 비극의 주인공 디오니소스
11.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
12.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의 본질
13.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따른 에우리피데스
14. 비극 예술에 적대적인 소크라테스
15. 아이스킬로스 비극을 물리치는 소크라테스주의
16. 음악 정신에서 생겨나는 비극
17. 이론적 세계관과 비극적 세계관 사이에 영원한 투쟁
18. 흔들리는 소크라테스적인 문화
19. 독일 철학과 음악을 통한 비극의 재탄생
20. 디오니소스적 삶과 비극의 재탄생-뒤러의 기사 쇼펜하우어
21. 깨지고 파괴된 아폴론적 기만
22. 비극의 재탄생과 함께 태어나는 미적 청중
23. 독일 음악을 통한 독일 신화의 재탄생
24. 음악과 신화 사이의 친화력
25.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표현인 음악과 신화

해설: 니체의 삶과 『비극의 탄생』, 주요 저작 해설
프리드리히 니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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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

역 : 홍성광

 
서울대학교 인문대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 『마의 산』의 형이상학적 성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 읽기와 글쓰기』, 니체의 『니체의 지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책 속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벗이여, 나는 당신이 이 책을 받아볼 순간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이 저서에 통합되어 있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사상들이 우리의 미적 대중에게 야기할지도 모르는 가능한 모든 우려와 흥분과 오해를 멀리 떼어놓기 위해, 그리고 또한 우리가 만났을 때와 동일한 관조적 환희를 느끼며 이 책의 머리말을 쓸 수 있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환희의 흔적들은 좋았던 고무적인 시간들의 화석이 되어 이 책의 페이지마다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아마 눈 내리는 겨울에 저녁 산책을 마치고 책 표지의 쇠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를 보고, 내 이름을 읽고, 이 저서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든 간에 저자에게 무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말할 게 있구나 하고 즉각 확신하는 순간을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자가 생각해 낸 모든 것을 보고, 그가 당신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어, 이 대화에 상응하는 것만을 적어넣었을 거라고 당신이 확신하는 순간을 말입니다.
--- p.38

모든 인간은 꿈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완전한 예술가이고, 그 꿈의 세계라는 아름다운 가상은 모든 조형 예술의 전제 조건이다. 또한 그 가상은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시문학의 중요한 절반을 차지하는 것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형상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면서 즐기고, 모든 형식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때 중요하지 않은 것과 불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꿈의 현실이 펼쳐지는 최고의 삶에서도 우리는 그것이 가상임을 어렴풋이 느낀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이런 경험이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 그러니까 정상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많은 증거와 시인의 발언을 전할 수 있으리라. 심지어 철학적 인간은 우리가 살아가고 존재하는 이 현실의 아래에도 전혀 다른 두 번째의 숨겨진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고, 그러므로 그것 역시 하나의 가상이라고 예감하기도 한다.
--- p.44

우리는 지금까지 아폴론적인 것과 그 대립물인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예술적인 힘들로 간주했다. 이 힘들은 인간 예술가의 매개 없이 자연 자체로부터 불쑥 튀어나오며, 이 힘들 안에서 자연의 예술 충동들이 맨 먼저 또 직접적으로 충족된다. 한편으로는 꿈의 영상 세계로 간주했는데, 이 세계의 완전성은 개인의 지적 수준이나 예술적 교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취적인 현실로 간주했는데, 이러한 현실은 다시금 개개인을 존중하지 않고 오히려 개체를 파괴하고는 신비로운 일체감을 통해 개체를 구원하고자 한다. 자연의 이러한 직접적인 예술 상태에 비하면 모든 예술가는 ‘모방자’이다. 그러니까 아폴론적인 꿈의 예술가이거나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예술가, 혹은 마지막으로-예컨대 그리스 비극에서처럼-도취의 예술가인 동시에 꿈의 예술가이다.
--- p.53

조형 예술가는, 그와 친족 관계에 있는 서사시인과 마찬가지로 이미지에 대한 순수 직관에 몰두해 있었다. 디오니소스적 음악가는 어떠한 이미지도 없이 전적으로 근원적 고통이자 그것의 근원적 반향일 뿐이다. 서정적 천재는 자기 포기와 합일이라는 신비한 상태로부터 이미지들과 비유의 세계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이 세계는 조형 예술가나 서사시인의 저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색채와 인과율과 속도를 지니고 있다. 조형 예술가와 서사시인은 이 이미지들 속에서, 또 단지 그 이미지들 속에서만 즐겁고 안락하게 살고, 그 이미지들을 극히 세세한 특성들에 이르기까지 애정을 갖고 직관하면서 결코 지칠 줄 모른다. 반면 분노한 아킬레우스의 모습 자체는 그에게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며, 그는 그 분노하는 표정을 가상 속에서 꿈의 즐거움을 가지고 즐긴다.

그래서 그는 이 가상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형상과 하나가 되어 용해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와는 반대로 서정시인의 이미지는 다름 아닌 시인 그 자신이며, 말하자면 그 자신의 상이한 객관화일 뿐이다. 그 때문에 서정시인은 저 세계의 움직이는 중심점으로서 ‘나’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자아는 깨어 있는 자아,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인간의 자아가 아니라, 유일하게 무릇 참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자아, 사물의 밑바탕에 깃들어 있는 자아이다. 서정적 천재는 이 자아의 모상들을 통해 사물들의 밑바탕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본다.
--- p.86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미로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데,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논의해온 모든 예술원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고대적 전승의 너덜너덜해진 조각들이 벌써 아무리 자주 다양한 조합으로 함께 꿰매졌다가, 그리고 다시 쪼개졌다 하더라도 그리스 비극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지금까지 진지하게 제기된 적조차 없었다고 말한다면, 나는 결코 불합리한 주장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은 비극은 비극 가무 합창단에서 생겨났으며, 비극은 원래 합창일 뿐이고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아주 단호하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비극 합창단은 이상적인 관객이라든가, 또는 무대 장면의 호사스러운 영역에 맞서 민중을 대변해야 한다든가 하는 진부한 예술적 상투어에 아무튼 우리가 만족하게 하지 않고, 본래의 원시 연극으로서 이 비극 합창의 핵심을 부득이하게 꿰뚫어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후자의 언급, 즉 비극 합창단이 민중을 대변해야 한다는 언급은, 마치 일반 대중의 합창 속에 민주적 아테네 시민들의 불변의 윤리 법칙이 서술되어 있으며, 이 민중의 합창은 왕들의 열정적인 월권과 방종을 넘어서 정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부 정치인들에게는 고상하게 들리는 해석일지도 모른다.
--- p.102

그리스 비극의 아폴론적 부분, 즉 대화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은 단순하고 투명하며 아름다워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대화는 헬라스인들의 모사이고, 그들의 본성은 춤에서 드러난다. 춤에는 더없이 큰 힘이 잠재되어 있을 뿐이지만, 유연하고 화려한 율동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포클레스의 주인공들의 언어는 아폴론적인 확실함과 명료함을 통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즉각 그들의 본질의 가장 깊은 밑바탕까지 보았다고 착각하게 되고, 이 밑바탕에 이르는 길이 그토록 짧다는 사실에 적이 놀란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겉으로 드러나 눈에 보이게 되는 주인공의 성격을 도외시한다면-이 성격은 기본적으로 검은 동굴 벽에 투사된 빛의 영상, 다시 말해 전적으로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오히려 이 밝은 반사된 영상 속에 투사된 신화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되며, 우리에게 익숙한 광학 현상과는 반대되는 어떤 현상을 갑자기 체험하게 된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결연한 시도를 하다가 눈이 부셔 몸을 돌릴 경우, 우리는 눈앞에 흡사 치료제로서 어두운 색채의 반점을 보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의 저 빛의 영상의 현상은, 요컨대 아폴론적 가면은 자연의 내부와 끔찍한 것을 들여다본 시선이 만들어낸 불가피한 산물로, 말하자면 소름 끼치는 밤을 보고 손상된 눈을 치유하는 빛나는 반점인 셈이다.

우리는 ‘그리스인의 명랑성’이란 진지하고 중요한 개념을 이런 의미에서만 제대로 파악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반면에 물론 오늘날 우리는 명랑함이라는 이 개념이 위험하지 않은 편안함의 상태라는 의미로 잘못 이해되는 현상과 어디서나 끊임없이 마주치고 있다.
--- p.124

그리스 비극은 그것과 자매 관계에 있는 더 오래된 모든 예술 장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몰락했다.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갈등 때문에 자살을 통해, 그러니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에 다른 모든 예술은 고령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평온하게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다시 말해 훌륭한 자손을 남기고 고통 없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행복한 자연상태에 적합한 것이라면, 비극보다 더 오래된 예술 장르들의 종말은 그러한 행복한 자연상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그것들은 서서히 몰락해 간다. 죽어가는 그들의 눈길 앞에는 그들보다 더 멋진 후손이 용감한 몸짓으로 조바심하며 고개를 쳐들고 서 있다. 반면에 그리스 비극의 죽음은 어디서나 심하게 느낄 수 있는 엄청난 공허를 남겨 놓았다. 즉 언젠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그리스 뱃사람들이 어느 절해고도에서 “위대한 판은 죽었다”라는 충격적인 절규를 들었던 것처럼.
--- p.147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에우리피데스의 그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은 동시대 고대인도 간과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의 시작(詩作)을 도와주곤 한다는 아테네에 떠돌던 풍문은 이러한 예민한 감각을 가장 웅변적으로 표현해 준다. ‘좋았던 옛 시절’의 신봉자들이 현재의 민중 선동가들을 손꼽을 때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이 한꺼번에 거론되었다. 신체적, 정신적 힘이 점차 위축됨과 아울러 옛날 마라톤을 하던 억센 신체와 정신의 유용성이 의심스러운 계몽에 희생되는 것이 이들의 영향 탓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어조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저 두 사람에 과해 반은 분개하고 반은 깔보면서 말하곤 하는데, 이는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들은 사실 에우리피데스는 기꺼이 희생할 의향이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는 최초이자 최상의 소피스트로, 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거울이자 진수로 등장한다는 데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경우 그들은 아리스토파네스 자신을 시단의 비열한 거짓말쟁이 알키비아데스라고 공개적으로 낙인찍음으로써 유일하게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 p.175

음악이 모든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갖는 이 밀접한 관계에서 다음의 사실도 설명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행위, 과정, 환경에 맞는 적절한 음악이 울리면, 그로써 그것들의 가장 비밀스러운 의미가 우리에게 해명되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 음악은 그에 대한 가장 올바르고 분명한 주석(註釋)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교향악이 주는 인상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삶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과정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럼에도 그는 곰곰 생각해보면 음악과 자신의 눈앞에 떠오르는 과정들 사이의 유사성을 제시할 수 없다. 음악은 이미 말했듯이 현상의 모사,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닌 의지 그 자체의 직접적인 모사이며, 그러므로 세계의 모든 형이하학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것을 나타내고 모든 현상에 대해 사물 자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예술과 다르기 때문이다.
--- p.210

일반적으로 예술이 가상과 미(美)라는 유일한 범주에 따라 파악되듯이, 비극적인 것이 예술의 본질로부터는 솔직하게 결코 추론될 수 없다. 음악 정신으로부터 비로소 우리는 개체의 파멸에서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파멸의 개별 사례들에서만 우리는 말하자면 개체화의 원리의 배후에서 전능한 의지를 표현하는 예술, 모든 파멸에도 불구하고 모든 현상의 저편에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영원한 현상을 분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기쁨을 느끼는 것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지혜가 이미지의 언어로 옮겨져 있어서이다.

최고의 의지 현상인 비극의 주인공은 흡족하게도 부인된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단지 현상에 불과하고, 의지의 영원한 생명은 그의 파멸에 의해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외친다. 반면에 음악은 이 생명의 직접적인 이념이다. 조형 예술의 목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아폴론은 현상의 영원함에 대한 빛나는 찬양을 통해 개체의 고통을 극복한다. 여기서 미(美)는 삶에 내재한 고통을 이기고, 고통은 자연의 특성들 가운데서 어떤 의미에서 속임수로 제거된다. 디오니소스적 예술과 그것의 비극적 상징성에서는 동일한 자연이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처럼 되어라! 현상의 끊임없는 변전에서 영원히 창조적이고, 영원히 현존으로 몰아가며, 이 현상의 변전에 영원히 만족하는 원초적 어머니!”
--- p.214

영원한 현상이란 이런 것이다. 즉 탐욕스러운 의지는 사물 위에 펼쳐진 환상을 통해 자신의 피조물을 살아있게 하고,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수단을 항상 발견한다. 어떤 사람은 현존의 영원한 상처를 치유할지도 모르는 인식과 망상의 소크라테스적 즐거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눈앞에 맴도는 유혹적인 미의 베일인 예술에 혹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현상의 소용돌이 밑에서 파괴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계속 흐른다는 형이상학적 위로에 현혹될 것이다.

하물며 의지가 매 순간 마련해 두고 있는 더 흔하고 더욱 강력한 환상들에 관해서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단계는 보다 고귀한 천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이들은 현존의 부담과 중압감을 더욱 심각하고 불쾌하게 느끼고, 특별히 찾아낸 자극제를 통해 이 불쾌감을 속여넘겨야만 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이러한 자극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혼합 비율에 따라 문화는 대체로 소크라테스적 문화이거나 예술적 문화 또는 비극적 문화이다. 또는 역사적인 실례를 드는 것이 허용된다면 알렉산드리아 문화나 헬라스 문화, 또는 불교 문화가 있다.
--- p.226

오페라가 우리의 알렉산드리아적 문화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는 나의 견해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똑같이 명백한 하나의 증거를 덧붙이고자 한다. 오페라는 예술가가 아닌 이론적 인간, 즉 비판적인 문외한의 산물이다. 이는 모든 예술의 역사에서 가장 의아한 사실의 하나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은 참으로 비음악적인 청중이었다. 그러므로 음악의 재탄생은 주인이 하인을 다스리듯 가사가 대위법을 지배하는 창법을 발견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신체보다 훨씬 더 고귀한 만큼이나 가사 역시 반주되는 화음 체계보다 더 고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페라의 초창기에는 음악, 이미지와 가사의 조합이 이러한 견해 때문에 아마추어처럼 비음악적으로 조야하게 다루어졌다. 이러한 미학의 정신에서 피렌체의 고상한 애호가 동호회에서도 이들의 후원을 받은 시인과 가수 들에 의해 최초의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예술적 능력이 없는 인간은 자신이 비예술적 인간 자체라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일종의 예술을 만들어 낸다.
--- p.241

비극은 최고의 음악적 황홀경을 자신 속에 흡수하여, 우리의 경우에서처럼 그리스인의 경우에도 음악을 완성시키고, 그런 다음 비극적 신화와 비극적 주인공을 옆에 나란히 세운다. 이 비극적 주인공은 힘센 거인처럼 디오니소스적 세계 전체를 자기 등에 짊어지고 우리의 그 짐을 덜어준다.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비극은 동일한 비극적 신화를 이용해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인물의 형태로 이 현존에 대한 열렬한 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경고하는 손으로 다른 존재와 더 높은 즐거움을 상기시켜 준다. 투쟁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파멸에 의해 그러한 즐거움을 불길하게 예감하며 준비한다. 비극은 음악의 보편적인 효력과 청중의 디오니소스적 감수성 사이에 고상한 비유, 즉 신화를 세워 청중에게 마치 음악이 단순히 신화라는 조형적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최고의 재현 수단에 불과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p.262

음악적 비극의 독특한 예술적 효과들 중에서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음악과의 직접적인 합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는 아폴론적 기만을 강조해야 했다. 반면에 우리의 음악적 흥분은 아폴론적 영역으로 또 사이에 끼워 넣어진 가시적 중간 세계로 발산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바로 이러한 발산이 무대 위의 사건이 전개되는 중간 세계, 즉 연극을 다른 어떤 아폴론적 예술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정도로 내부로부터 가시적이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을 관찰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아폴론적 예술이 말하자면 음악의 정신에 의해 날개를 달고 높이 솟구치는 바로 여기에서 아폴론적 예술의 힘이 최고로 상승하고, 따라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사이의 저 의형제 관계 속에서 디오니소스적 예술 의도뿐 아니라 아폴론적 예술 의도 역시 정점에 이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92

음악과 비극적 신화는 똑같은 방식으로 한 민족의 디오니소스적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양자는 아폴론적인 것의 저편에 놓인 예술영역에서 유래한다. 양자는 어떤 영역, 그 즐거움의 화음 속에서 세계의 끔찍한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불협화음이 매력적인 소리로 멎는 어떤 영역을 변용시킨다. 양자는 극도로 강력한 자신의 마법을 믿으면서 불쾌의 가시를 가지고 논다. 양자는 ‘최악의 세계’의 존재조차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놀이를 이용한다.

여기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비교해 볼 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현상의 세계 전체를 현존 속으로 불러들이는 영원하고 근원적인 예술적 힘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을 얻은 그 개체화의 세계가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는 이 현상세계의 한가운데에 하나의 새로운 변용의 가상이 필요해진다. 만약 우리가 불협화음이 인간이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그리고 인간은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이 불협화음은 살아있기 위해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아름다움의 베일로 은폐하는 훌륭한 환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것이 아폴론의 진정한 예술적 의도이다. 우리는 매 순간 현존 일반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그다음 순간을 체험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아름다운 가상의 저 모든 무수한 환상들을 아폴론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한다.
---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