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전쟁연구 (책소개)/7.국가정보기관

김재규장군 평전 :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동방박사님 2022. 5. 9.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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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0·26 사건으로 처형당한 지 40년, 오늘날에 돌아보는 김재규의 삶!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진실은 무엇인가?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김재규는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우리는 김재규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졌다. 이로써 18년의 군사독재도 유신체제도 막을 내렸다.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희생은 어쩔 수 없었다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의 ‘정치적 사생아’인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이듬해인 1980년 5월 24일, 광주학살이 자행되던 그때 10·26 거사를 실행한 부하들과 함께 사형당하여 생을 마감했다. 저자는 “전두환 신군부는 정권탈취를 최종 목표로, 김재규 등을 하루빨리 처형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고, 군사재판부는 그들의 하수인 노릇에 충실”했기 때문에 재판진행과 사형집행을 서둘렀다고 한다. 유신체제와 군사독재의 심장이 멈추었으나,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군사독재체제는 한동안 계속되었고 김재규가 바라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도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올해는 ‘10·26 거사’가 일어난 지 41년이 되고,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주범’이 처형당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도 이 사건과 김재규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평가는 여전히 크게 엇갈린다. 박정희의 시혜를 받은 사람들은 김재규를 ‘박 대통령 시해범(弑害犯)’ 또는 ‘반역자’라 부르고, 민주인사들은 ‘독재자를 처단한 의인(義人)’이라 부르고, 김재규는 자신을 ‘군인이자 혁명가’라 불렀다. 저자는 군사독재에 저항한 민주화투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막상 유신의 심장을 멈추게 한 주역에 대해서는 평가를 ‘건너뛰었다’며, 이는 “‘국가원수 살해’라는 도덕적 감성주의와 함께 유신세력과 족벌언론의 세뇌 탓”이라고 분석한다.

김재규는 3심 재판에서는 졌지만 4심인 하늘의 심판, 즉 역사의 법정에서는 이길 것이라고 했으나, 역사의 법정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저자는 “우리는 김재규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가 있어 철옹성과 같은 유신체제를 한순간에 허물었다”라며 김재규를 역사의 법정에서 재평가해야 하고, 역사의 시각으로 10·26을 바라볼 시간과 공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제4심’의 주도는 하늘의 대행자인 의로운 사람들의 몫이다. 따라서 김재규의 ‘재심’과 ‘복권’은 민주시대를 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의 ‘빚 갚음’이며 ‘역사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최근 공개된 ‘10·26 재판 김재규 육성’에 따르면, 재판관들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대로 판결했고, 공판조서도 허위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예언대로 역사의 법정에서는 그와 부하들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까?

목차

책머리에: 왜 김재규 장군 평전을 쓰는가? 5

1.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한 소년 17
2. 군인의 길 29
3. 평탄하지 않은 군 생활 45
4. 5·16 군사쿠데타 이후 승승장구 55
5. 애증의 갈등 속에서 71
6. 운명의 길, 중앙정보부장 89
7. 박정희의 권력욕망에 맞서 113
8.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139
9. 군사법정의 피고인으로 161
10. 피고인 김재규를 사형에 처한다 179
11. 신군부 폭압 속에 열린 최종심 195
12. 대법원의 재심 기각과 구명운동 217
13.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239
14. 10·26 재평가와 명예 회복 257
15. 참고인들의 증언 269
16. 김재규의 재심과 복권 287

주註 295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현재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지금의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희생자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백범학술원 운영위원 등을 역임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
 

출판사 리뷰

“왜 김재규 장군 평전을 쓰는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이자 대한민국 근현대 인물 연구의 권위자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10·26 사건’이 아니라 ‘김재규’라는 인물과 그의 생애에 초점을 맞춰 김재규와 10·26 사건을 들려준다. 김재규의 삶 전체를 조명하면서, 그가 걸었던 권력의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와 함께 알려지지 않던 이력도 추적한다. 어용사학자들을 통해 ‘사육신’ 중에서 유응부 대신 김재규의 조상인 김문기를 사육신의 반열에 올리고자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다. 반면 중앙정보부장 등 고위직에 있으면서 축하 화환도 돌려보낼 만큼 청렴결백한 면과, 독립운동가 출신인 장준하 선생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이와 함께 이 책에는 대법원 판사 14명 중 소수의견을 낸 판사 4명의 소수의견과, 구명을 위한 건의문과 탄원서, 그리고 김재규의 마지막 유언 등이 담겨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민주공화제를 짓밟은 독재자였던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이 저자가 ‘김재규 장군 평전’에서 이르고자 하는 최종 목표지점이다.

두 번의 실패, 그리고 10·26 거사

김재규는 유신쿠데타를 대한민국의 기본가치를 뒤엎는 반역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짓밟은 민주공화제를 4·19 혁명으로 바로잡았는데, 박정희가 5·16 쿠데타에 이어 유신쿠데타로 주권재민과 삼권분립의 기본가치조차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애국심이 집권욕에 못 미치고” 있는 박정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래서 박정희를 두 차례나 ‘권좌’에서 끌어내릴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끝난다.

먼저, 3군단장 시절에 유신을 감행한 박정희가 군부대 시찰을 나왔을 때 박정희를 부대에 가두고 하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박 대통령이 군단을 방문하여 만나보면 전에 한 결심이 사그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에 건설부장관 발령장을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를 쏘고 자신도 자결하여 유신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고 한다. 국민과 가족들에게 전할 유서 5통까지 준비할 만큼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3군단장 시절 박정희를 연금해 하야시키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처럼 이 계획도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앞서 두 번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민심이 정권을 향해 들끓던 때인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더 이상 거사를 미루지 않고 실행에 옮겨 유신독재와 1인독재체제를 종식시켰다.

김재규는 어떤 사람인가?

김재규는 일제 통치가 극악하게 진행되던 1926년에 태어났다. 보통학교(오늘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성적이 좋지 못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일본 학생과 싸워서 2년여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뒤늦게 중등교육기관인 안동농림학교(5년제)에 입학하지만 4학년에 올라갈 때 일본군에 입대한다(징집인지 지원인지는 알 수 없다).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훈련부대에서 훈련을 받던 중, 다행히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가미카제 대원으로 희생되는 걸 면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다.

부모님의 강요로 원치 않는 결혼도 하고,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도 교사도 싫었기에 그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도피처로 택한다. 그곳에서 동기생(제2기)으로 박정희를 만난다. 이후 1973년에 육군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약 25년 동안 군대 생활을 했다.

김재규는 평소에 군인으로 명예롭게 은퇴하기를 바랐으나, 뜬금없이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에 추천되는 바람에 군복을 벗어야 했다. 김재규는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손바닥 안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처지였다. 내키지 않은 유정회 국회의원에 이어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장관, 그리고 1976년에 운명의 중앙정보부장(제8대)에 취임한다. 그리고 1979년 10·26 거사를 일으켜 이듬해인 1980년 5월 24일에 사형당하며 생을 마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