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전쟁연구 (책소개)/7.국가정보기관

박정희와 김일성의 스파이 전쟁

동방박사님 2022. 5. 9.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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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냉전시대 음지에서 활동하던 이데올로기 전사들의
숨막히는 첩보전과 총성 없는 전쟁!

한국적 국가정보 연구의 선구자 정주진 박사가 되돌아본
1960년대 남북의 비밀전쟁 이야기

이 책은 잃어버린 60년대에 대한 기억이다. 남과 북의 대립구조를 기본 축으로 삼아 그 흐름을 추적해간다. 냉전적 사고를 다시 끄집어내어 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결과를 되돌려본다. 냉전시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피 흘리며 싸웠던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진단하고 미래에 대비해나가야만 다시는 그러한 불행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란 소망이 배어 있다. 선전과 선동으로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규명해서 올바로 기록해놓아야만 후세들이 민족의 진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란 연구자의 사명감도 실려 있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기 북한의 대남전략이 재정비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2장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북한-소련-중공으로 연결되는 북방 삼각동맹에 맞대응하여 한국-미국-일본으로 이어지는 남방의 삼각동맹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자 이를 북한이 방해하는 공작과 남한 내부의 반발을 점검해본다. 3장에서는 김일성이 남한에 우회 침투하는 공작거점을 동베를린에 차리고 대남연락부장 출신인 박일영을 주동독대사로 보내 유럽지역 남한 유학생들과 지식인들을 포섭해나가는 과정과 중앙정보부가 그에 대응하는 경과를 탐색해본다. 4장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동백림 사건을 처리한 방식에 대한 논란과 북한의 대남공작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5장에서는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한에서 지하 정당인 통일혁명당이 창당되는 과정과 중앙정보부의 수사경과를 분석한다. 통일혁명당 사건의 여진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건이 시작되는 출발점을 규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6장에서는 이수근 간첩사건의 진위를 추적한다. 이수근 사건은 문재인 정부에서 무죄로 판정됐다. 수사과정에서의 변호인 접견제한 등 수사절차상의 하자가 무죄의 근거였다. 7장은 1968년 1월 21일의 김신조 일당 청와대 기습사건을 해부한다. 청와대 기습의 근본 목적은 박정희를 살해하는 데 있었다. 8장은 김일성의 살해 시도에 격분한 박정희가 응징 보복을 추진하는 경과를 되짚어본다. 김신조 일당의 기습에 상응하는 보복을 준비했으나 미국의 비협조로 무산되는 과정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변동을 중심으로 진단한다.

 

목차

머리말

1장|1960년대 북한의 대남공작목표와 인프라

북한 대남공작 관련 법령의 성격
박헌영 숙청이 북한 대남공작에 미친 영향
북한 대남공작기구 대명사 ‘3호 청사’
대남연락부의 4·19 정세 오판과 김일성의 힐책
북한 3호 청사의 5·16 예측 실패
연락부 내 공화당 공작과 신편
김일성의 3대 혁명역량 강화론
김형욱 부장 시대 북한 대남공작 개관
김중린과 어윤갑의 김일성에 대한 충성 경쟁
대남연락부의 5·16 주체 이석제 포섭 시도

2장|북한의 한일 국교 정상화 방해 공작

박정희 정부의 반공태세 재정비
중앙정보부의 한일 국교 정상화 비밀교섭
세계조류에 적응하려는 결단
조총련의 한일회담 방해 책동
김재규와 이만섭의 6·3 사태 수습책
미 CIA 한국지부장의 김종필 2차 외유 주선
6·3 사태 배후 인민혁명당

3장|대남연락부장 출신 박일영의 동백림 공작

동백림 사건은 조작인가?
북한에 포섭된 조선일보 서독 특파원
북한 스파이망을 탈출한 임석진의 공포
동백림 북한대사는 대남연락부장 출신 공작전문가
자수자 임석진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관용
김형욱의 수사 단서 왜곡
중정 이용택 과장에게 떨어진 대통령 특명
사상 최초 해외 북한스파이망 국내유인 공작
김형욱의 저돌성과 예리함
회유하되 불응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 것
황급히 달아난 북한 스파이들
북한 대남사업총국의 역공작
청와대 경호실장 비서로 잠입한 북한 여간첩
북한과 내통한 주서독대사 최덕신
최덕신 처리 문제로 고심한 박정희

4장|중앙정보부의 불완전한 승리

조작시비에 대한 이용택의 반론
서독의 반발과 중정의 외무부 대응 전폭 지지
강제납치는 없었다
서독과 한국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승리
조국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김형욱의 비판
과잉수사에 대한 아쉬움
공포와 강제만이 꽉 찬 사회에 대한 환멸
대남사업총국장 이효순의 쇼크와 대남공작 중단
이효순 대남사업총국장 체제의 와해

5장|김일성을 사랑한 스파이들

북한 대남연락부에 포섭된 임자도 면장
영호남 공산주의자들의 커넥션
김일성의 품을 찾아간 통혁당 총재 김종태
누가 통혁당을 제보했는가
김종태의 묵비권 행사와 장독대 밑 난수표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말려든 북한 대남연락부
‘학사주점’과 「청맥」이 포섭공작의 중심
김형욱의 김대중 감싸기
김일성의 김종태 애도와 김질락의 때늦은 참회
공화당 침투 간첩의 귀싸대기를 후려친 김형욱
대통령 턱밑까지 접근했던 북한 공작원
박정희 대통령의 여당침투 간첩 구속 지시

6장|이수근은 중앙정보부장을 포섭하러 내려온 공작원

이수근은 대남사업총국이 남파한 공작원
북한 조사부 부부장의 김형욱 포섭 지령
김형욱 최측근에 접근한 이수근
위장귀순의 징후와 근접 관찰
김형욱의 이수근 비호와 감찰실의 반발
평양에 납치됐다 돌아온 사나이의 불안
이수근의 노골적인 친북행각
베트콩의 월남 대통령 관저 기습
이수근 탈출 전야
김형욱 부장의 이수근 사살 명령
냉전시대 스파이 소굴 홍콩
미 CIA 한국지부장의 결정적 제보
티우 대통령의 사이공 공항 봉쇄 명령
방준모의 파면
김형욱의 변명
경찰관 안응모의 판단

7장|박정희를 살해하러 온 게릴라들

허봉학 대남사업총국장의 게릴라 노선
김신조 일당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의 전조
대통령 주재 비상치안회의
북한의 모택동 식 게릴라전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북한 최고의 대남 테러리스트 규합
박정희 암살조의 청와대 습격 훈련
김일성을 위한 죽음에의 진군
평양의 원대복귀 지령
나무꾼이 살린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재직 중 최대의 판단착오
박정희를 살해하러 청와대에 들어가는 방법
전두환과 장세동의 1·21
살아서 돌아간 자와 남은 자
김신조의 투항과 전향

8장|박정희의 응징 보복 시도와 무산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북
김형욱의 경호실 침투 여간첩 비판
대간첩 작전에서 소외된 김형욱의 불만
중앙정보부의 부실한 대북정보력에 대한 고백
박정희의 대북 응징 보복 결심
미국 언론에 밝힌 대북 응징이 불가피한 이유
러스크와 키신저의 응징 보복론
김일성 암살 공작
공작명 - 오소리 계획
오소리 계획의 표류
허봉학 게릴라들의 2차 기습
그들은 왜 그렇게 잔인했나?
이종찬의 김형욱 비판
김일성의 박정희에 대한 사과
김정일의 칼에 날아간 허봉학
세계 첩보사상 전무후무한 수법
김 부장의 혁혁한 업적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오

일지(日誌)
참고 자료
 

저자 소개

저 : 정주진
 
1958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김천고, 충남대 철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석사), 가천대 행정대학원(박사) 등에서 공부했다. 국가정보기관에서 30년 동안 정책정보 담당관으로 일하다 2014년 은퇴했다. 2015년부터 사단법인 21세기전략연구원 연구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6년 9월부터는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를 겸임하며 한국적 국가정보이론 정립에 필요한 사료들을 수집하고 있다. 우리나라...
 

책 속으로

냉전시대 북한의 대남공작은 박헌영이 주도하던 시기, 김일성이 독점하던 시기, 김정일이 장악한 시기로 구분된다. 김일성이 대남공작을 독점적으로 수행한 시기는 1960년대 10여 년이다.
김일성은 6·25 전쟁 후 박헌영과 남로당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함으로써 공작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해방 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는 김일성도 독자적인 대남라인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박헌영이 대남공작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끝나고 김일성이 박헌영을 비롯 이승엽, 이강국 등 남로당 지도부를 미제 간첩으로 몰아 숙청함으로써 1950년대 말에 이르면 박헌영 세력이 대남공작 노선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대남공작 부문에서도 김일성 독점 시대가 열린 것이다.
--- p.5

그렇게 해서 1960년대는 강 대 강의 대결이 맞부딪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대가 됐다.
그 전쟁의 최일선에 한국의 중앙정보부와 북한의 대남사업총국이 있었다. 중앙정보부를 대표하는 김형욱과 대남사업총국을 대표하는 이효순, 허봉학의 싸움이었다. 전선이 따로 없었던 박정희와 김일성의 간접전쟁 시대였다.
--- p.6

북한의 대남정책 관련 법규는 우리의 국가보안법, 군사기밀보호법 등 안보형사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법원은 ‘북한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이나, 동시에 남북한 관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적화통일 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고 획책하는 반국가단체’로 북한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북한이 노동당 규약을 통해 적화통일 노선을 명문화하고, 이에 변경을 가할 징후를 보이지 않는 점을 들고 있다(대법원, 2008. 4. 17.).
그러므로 북한이 남북관계의 발전에 따라 더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명백한 변화를 보이고 그에 따라 북한 법률이 정비되지 않는 한, 국가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우리 안보형사법의 규범력이 훼손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 p.22-23

김신조는 붙잡힌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1월 22일 저녁 7시 육군 방첩부대 사령부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밤사이 김신조를 심문했던 백동림 방첩부대 수사계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윤필용 방첩부대장이 보고를 받자마자 기자회견을 열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백동림이 기자회견을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건의했으나 ‘국민들 관심이 대단하므로 기자회견을 빨리 하는 것이 좋겠다’며 강행 지시를 내리고 김신조의 답변이 미진한 사항에 대해서는 백동림이 옆에 붙어 앉아 대신 답변토록 했다(백동림, 1995: 302).
이처럼 성급하게 열린 기자회견에서 함경도 출신의 김신조는 함경도 사투리가 섞인 거친 말로 남파 목적을 밝혔다.
“나, 청와대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
김신조의 이 말은 생중계되던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전파됐다.
---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