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4.한국학연구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이민

동방박사님 2022. 6. 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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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 많던 망국의 유민은 어디로 갔을까?

고구려는 중국의 야망과 함께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이이라고 보는 근거 중에 하나는 고구려 유민이 모두 중국에 흡수되어 중국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기인한다.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은 고구려 유민들의 역사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풍부한 검증자료를 통해 그들의 뿌리와 현재를 밝히는 책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의 저자는 동북공정을 현재에 국한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역대 중국 정권이 취했던 이민족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또한 이 책은 중국이 고구려 유민을 자신들의 역사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고구려 유민은 모두 중국에 흡수되었으므로 고구려 또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견해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고구려는 중국의 행보 앞에 놓여있다. 중국의 애국주의가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고구려는 대단히 민감하고 인화성이 큰 주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고구려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한국인에게 고구려는 현재의 불안감에서 회피하게 해주는 판타지가 아니다. 동북공정과 같은 외부의 도전에 맞서는 정체성이다. 그리고 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대응 사이에 한국판 디아스포라가 놓여 있다. 고구려 유민사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인 연유는 이와 같다.

 

목차

머리말

중국 남방에서 마주친 북방민족의 바지
먀오족의 만들어진 5,000년 역사
또 하나의 카레스키, 고구려 유민
고구려 유민과 먀오족, 그들의 관계
황하와 창강을 건너다
그들의 고향이 평양인 까닭
고구려의 도성을 등에 지고
먀오족의 자칭, 가뤼(가루오)
체질인류학으로 본 한국인과 먀오족
먀오족도 쌀을 쌀이라 한다
난생신화와 함께하다
북에 조상의 영혼을 모시다
새날개형 관식을 머리에 꽂다
바람을 가르는 모자, 절풍
또 하나의 실마리, 주름치마
아내의 집에서 결혼하고 살다
형수와 결혼한다
시신을 집 안에 묻는다
죽어서야 고구려 땅으로
영원한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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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김인희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했으며, 한 장어漢藏語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쉐량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논문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필자의 학문적 관심은 한국 고대사에서 시작되었는데, 공부를 계속하면서 고고학과 인류학이 상보적이며 학문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고고학 쪽으로는 동이 문화를, 인류학 쪽으로는 중국의 소수...
 

출판사 리뷰

그 많던 망국의 유민은 어디로 갔을까?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왜 다시 고구려 유민인가?
《앵그리 차이나中國不高興》, 〈대국굴기大國屈起〉는 현재 중국인들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만든 화두이다. 《앵그리 차이나》는 사회학자, 언론인, 군사전문가 등이 공동으로 집필한 책으로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노쇠해진 미국의 대안은 중국뿐이라며 미래 세계는 중국이 지배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대국굴기〉는 중국의 관영방송인 CCTV-2가 12부작으로 방송한 다큐멘터리로 역시 중국의 부흥을 모색하는 내용이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이 1990년대 중국의 바람을 담은 베스트셀러였다면, 2010년대의 중국은 실제로 세계를 향해 단호하게 뿌不(NO)!를 외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칼날의 빛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를 국가 지침으로 삼았던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국치의 역사를 설욕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의 현재 행보는 돌돌핍인??逼人(상대를 윽박지르며 압박하다)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자신감에 차 있고 매우 거칠다.

고구려는 이러한 중국의 야망과 함께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지방정권이이라고 보는 근거 중에 하나는 고구려 유민이 모두 중국에 흡수되어 중국인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기인한다.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은 고구려 유민들의 역사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풍부한 검증자료를 통해 그들의 뿌리와 현재를 밝히는 책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의 저자는 동북공정을 현재에 국한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역대 중국 정권이 취했던 이민족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또한 이 책은 중국이 고구려 유민을 자신들의 역사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고구려 유민은 모두 중국에 흡수되었으므로 고구려 또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견해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바로 그 곳에서 찾아낸 고구려 유민
저자가 고구려 유민을 찾는 작업은 아주 작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방 소수민족 연구자로 1995년부터 먀오족을 연구해 온 저자는 2000년 여름, 중국 광시성廣西省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했을 당시 학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먀오족 마을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자는 고구려인이 입었던 궁고(고구려인이 입었던 바지)를 보았다. ‘왜 고구려인의 궁고를 남방의 소수민족이 입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계기로 저자는 본격적으로 고구려 유민을 찾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다. 2000년에서 2005년까지는 한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내 먀오족 지역을 현장답사했으며, 2006년에는 아예 연구 기반을 중국으로 옮긴다. 저자는 기존의 먀오족 역사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고고학적인 분야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해 먀오족과 관련이 있는 고고문화인 삼묘三苗와 동이문화를 연구하기 위해 우한武漢에서 1년, 산둥山東에서 2년 반 동안 연구를 진행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자는 삼묘와 동이문화가 먀오족의 역사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오랫동안 후난성湖南省과 구이저우성貴州省 일대의 먀오족 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먀오족이 고구려 유민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2009년에는 먀오족의 거주지인 윈난성雲南省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으로 고구려 유민과 먀오족 간의 관계를 풀 19개의 주제를 선정하고 본격적으로 확인 답사를 체계적으로 실시했다. 하나의 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먀오족 지역을 한 달 여 동안 답사하기도 했다. 먀오족은 중국 내에서 가장 빈곤하고 고산지대에 거주하기 때문에 이들을 찾아가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산판트럭을 얻어 타기도 하고 터덜거리며 고산을 혼자 오르기도 했다. 어떤 때는 며칠 걸려 간 마을 초입에서 홍수로 길이 막혀 되돌아 선 일도 있다. 낯선 곳에, 낯선 사람들 속에 혼자 섰을 때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현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 시작되는 알레르기성 두드러기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필자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은 학자로서의 호기심과 끝까지 해결하고 말겠다는 집념이었다.

고구려 유민이 현대에 전하는 메시지
1) 고구려를 역사에서 말살하려 한 당나라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 유민의 이주는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빈곤하고 약한 자는 현지에 남게 하고 당나라에 저항하는 핵심세력들은 모두 중국 내지로 이주시켰다. 이는 고구려의 재건을 방지하고 유민이 고국과 먼 곳에 거주하게 함으로써 다른 민족에 동화되어 자연소멸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2) 한국사 최초의 카레스키
669년 당나라는 20만 명이라는 대규모의 인구를 중국 내지로 이주시킨다. 중국 남방으로 얼마나 많은 수가 이동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회와 산남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0만 이상이 중국 남방으로 강제 이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을 개인이 아닌 가족단위로 이주시킨다.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을 남방으로 강제이주시킨 까닭은 현지에서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후난성 일대로 이주시킨 후에는 현지의 호적에 편입시키고 요역을 시키고 남방민족과의 전쟁에 동원했을 것이다. 가족단위의 집단이주는 고구려 유민이 소멸하지 않고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3)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아니다
먀오족은 고구려 유민이 주간이 되어 현지민족과 융화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민족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두 한족에 동화된 것이 아니다. 특히 구이저우 동남지역의 경우 청나라 초기까지 1,000년간 자치권을 행사했다.
현재 전 세계에 걸쳐 1,00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 외에도 동남아,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서 200만이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이 모두 한족 혹은 중국인이 되었으니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

4) 1,300년의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고구려 유민이 중국 남방에 도착한 당나라 시기 이미 평지는 다른 민족에 의해 점유되었기에 먀오족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민족이 거주하지 않는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화경을 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역대 소수민족정책인 토사제도, 개토귀류는 먀오족이 정착생활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어렵게 개간하여 정착할 만한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침입을 당했고,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런 먀오족을 가리켜 중국인들은 ‘반란의 민족’이라고 했다.
먀오족의 수는 1,000만에 이르지만 세계 각지에 흩어져 소규모로 거주하기 때문에 먀오족은 자신이 뿌리를 내린 사회에서 지금도 소수자이며, 주변인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1,300년 전 패배한 고구려는 현재에도 이들에게 계속적으로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5) 동북공정은 중국의 역대 이민족 정책을 총체적으로 연구할 때만이 대안을 찾을 수 있다.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정책에서 볼 수 있듯이 당나라는 고구려 내에는 빈약자만을 남겨두고 강한 자는 모두 중국 내지로 이주시켰다. 말살과 동화 정책을 동시에 실시한 것이다. 당나라 시기의 기미주체제는 당시 중국 정권이 주변 민족들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원나라 시기에는 기미주체제의 연장선상인 토사제도를 실시했다.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직접 한족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개토귀류를 실시했다. 일련의 정책변화는 중국이 주변 민족지역에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과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보여준다.
현재 중국 정부에 의해 시행되고 있고 동북공정, 서북공정 등의 이민족 정책은 중국 역대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우리는 중국 역대 정권의 이민족 정책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때만이 앞으로 전개될 역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그 작은 단초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먀오족의 만들어진 역사
1950년대 초 중국 정부는 최초로 소수민족에 대한 조사를 전면적으로 실시해, 그 결과로 현대적 의미의 먀오족이 확정되었다. 다음으로 먀오족의 역사를 ‘기술’하려던 중국은 커다란 문제에 봉착한다. 먀오족이라는 명칭이 송나라 이전 문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한 끝에 먀오족이 송나라 시기에 후난성 일대에 거주했으니 당시 현지 민족인 남만일 것이라고 ‘합의’했다. 1980년 이후부터는 먀오족 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하면서 삼묘와 동이족으로 남만 이전의 역사를 보충해 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 정부는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결국 먀오족은 동이-삼묘-남만-먀오족으로 이어지는 일목요연한 역사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먀오족의 ‘일목요연해진 역사’는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고문헌상의 남만은 모두 반호라는 개를 토템으로 숭배한다. 그러나 먀오족은 반호라는 개를 토템으로 숭배하지 않는다. 삼묘의 경우 창강 중류의 신석기문화인 스자허家河문화(기원전 2,600~기원전 2,200년)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는데 송나라 때 등장하는 먀오족과는 3,000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치우를 먀오족의 조상으로 보는 이유로 먀오족 중의 일부가 치우와 비슷한 발음의 성姓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고문헌상의 치우가 단풍나무로 만든 착고를 찼는데 구이저우 동남지역의 먀오족도 단풍나무를 숭배한다는 점, 그리고 본래 북방에 거주했던 먀오족의 조?이 전쟁에 실패하면서 남방으로 이동해 왔다는 구전이 치우의 전설과 비슷하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치우와 발음이 비슷한 먀오족 성인 ‘치츠유’를 쓰는 이는 극히 일부일 뿐이며 단풍나무 숭배는 고대 월민족의 풍습에서도 찾을 수 있는, 먀오족만의 풍습도 아니고 먀오족의 조상이 북방에서 이주해 왔다는 전설은 치우의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고구려 유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송나라 이전의 먀오족의 역사는 먀오족의 자민족주의와 중국 정부의 묵인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 남방의 소수민족들은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원거주지에서 이동했기 때문에 그들의 선사를 제대로 재구하기 어렵다. 중국 남방의 어떠한 민족도 먀오족과 같은 ‘일목요연한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2) 19개의 증거로 본 고구려 유민과 먀오족
이 책은 송나라 문헌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는 먀오족의 뿌리가 고구려 유민임을 다음에 나오는 19개의 증거를 들어 설명한다.
첫 번째, 송나라 이전의 먀오족 역사는 만들어진 것이다. 주변의 다른 소수민족의 경우 모두 송나라 이전 문헌에 등장하나 먀오족만이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두 번째, 669년 고구려 유민 20만 명이 중국 내지로 끌려가는데 이들은 주로 강회와 산남 지역으로 이주한다. 강회와 산남은 중국 중부와 남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공한처로 이동시켰다는 것으로 보아 인구밀도가 낮은 산악지역으로 이동시켰음을 알 수 있다. 《광이기廣異記》는 고구려 유민이 남방으로 끌려간 지 40년~80년 이후에 쓰인 책으로 후난성 서부 일대에 고려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기고희寄故姬〉라는 시는 당나라 시기의 작품인데 후베이성湖北省 남부 일대에 고려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고구려의 말기 국명은 고려이다. 고구려와 직접적인 교류가 없는 이들 지역에서 고려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이유는 고구려 유민의 집단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이 남방으로 끌려간 후 후난성 일대 인구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현상이 발견되는데 이는 고구려 유민의 유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송나라 시기 문헌인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는 ‘가뤼’라는 민족이 새롭게 등장한다. 역시 송나라 시기 문헌인 《계만총소溪蠻叢笑》에는 먀오족이란 민족이 등장하는데 가뤼는 자칭이고 먀오족은 한족이 부르는 타칭이다. 당시 한족 문인들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낯선 민족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인 야만인이란 의미에서 먀오족이라 불렀다. 이후 문헌에서 계속해서 이들을 먀오족이라 불렀고 고구려 유민은 이후 먀오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네 번째, 먀오족 중 구이저우 서부와 윈난성 일대에 거주하는 먀오족은 자신들의 조상이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밤이 긴 곳에서 전쟁에 실패하여 각각 흙탕물과 맑은 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강을 건너서 왔다고 한다. 흙탕물의 강은 황하이고 맑은 물의 강은 창강長江이다. 이러한 전설은 구술로도 전승되고 자신들이 입는 치마 위에도 두 개의 강을 그려 넣어 기억하고 있다. 이들이 조상이 이동해 온 노선을 잊지 않는 이유는 죽은 동족의 영혼을 조상이 살았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귀신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들은 장례를 치를 때 조상이 이동해 온 길을 따라 조상의 영혼을 한 발 한 발 되돌려 보낸다. 고구려 유민은 랴오닝성遼寧省 일대인 차오양朝陽과 산둥성의 라이저우萊州에 집결시킨 후에 내지로 이동시키는데 이들은 차오양 일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황하와 창강을 건너 중국 남방으로 이동했고 당시의 기억을 구술과 치마 위의 문양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후난성과 구이저우 동남지역의 먀오족은 동방의 바닷가 국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구이저우 서북과 윈난 일대의 먀오족과는 조상의 기원이 다르다. 그 이유는 이들은 평양을 출발하여 산둥성山東省의 라이저우를 거쳐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운하를 타고 전장鎭江 일대에서 창강을 타고 이동해 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먀오족들은 등에 랑차오라는 이름의 사방형의 문양이 있는 천을 댄 옷을 입는다. 이들은 이 문양이 조상들이 살았던 궁궐과 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조상이 살았던 궁궐과 도성 도안을 가진 민족은 중국 남방의 다른 소수민족에서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궁궐과 도성을 가졌던 고구려 유민의 역사 문화적 유산으로 이러한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소유한 적이 없는 다른 민족 사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일곱 번째, 먀오족은 다른 민족이 부르는 타칭이고 먀오족 스스로는 모두 가-라는 어두음을 가진 자칭을 가지고 있다. 이들 자칭은 모두 송나라 시기의 가뤼에서 변형된 것들이다. 고구려 국명의 마지막 시기의 발음은 고리로 남방으로 이주하면서 남방민족의 발음의 영향을 받아 가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루오, 가나오, 가무, 아무, 몽 등의 자칭을 가지고 있는데 서쪽으로 이동할수록 가-발음이 탈락하고 아-가 첨가되었다가 아예 몽으로 발음하는 현상이 발견된다.

여덟 번째, 중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페이샤오퉁費孝通은 먀오족 일부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이 한국인과 가장 가깝다고 언급했다. 중국과학원 원사인 우루캉吳汝康 또한 혈액형 조사를 통해 먀오족이 화북인, 즉 황하 이북 거주민과 같음을 밝혔다. 모두 국민당 시절에 이루어졌던 연구들이다. 근래 진행되었던 체질인류학적 연구 결과는 먀오족이 남방민족적인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구려 유민이 남방으로 이주한 후에 현지민과 융합되어 현재의 먀오족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남방에서 유일하게 먀오족만이 한국과 같은 ‘쌀’, ‘벼’라는 말을 사용한다. 고구려 시기에도 쌀, 벼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한족 또는 주변의 백월민족과 전혀 다른 도작용어를 가지고 있다. 먀오족은 지역별로 언어차이가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벼와 쌀만은 공통적으로 발음하고 있는 것은 벼와 쌀이 이들의 고유어이기 때문이다.

열 번째, 남방민족 중 유일하게 난생신화를 가지고 있다. 먀오족의 신화에 따르면 마이 리에(봄꽃 어머니)가 낳고 새가 품은 알에서 먀오족의 조상이 나왔다. 유화가 낳은 알에서 주몽이 나온 고구려의 난생신화와 매우 유사한 이야기이다. 남방의 다른 민족들은 시조가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열한 번째, 먀오족은 동굴에 조상의 영혼이 깃든 북과 조상의 신상을 모셔 두었다가 축제가 되면 이를 모시고 와 제사를 한다. 축제를 거행할 때면 나무를 통해 조상의 영혼을 강림시켜 북 안에 모신다. 남방 민족들도 수목숭배가 있으나 용수龍樹라고 하여 물[水] 숭배와 관련이 있다. 나무를 우주사다리라고 인식하는 것은 북방민족의 특징이다. 그리고 조상의 영혼을 북에 강림시키는 의례도 남방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는데 이는 부여의 영고와 같은 방식이다. 동굴에 모셨던 조상의 신상을 모시고 와 여는 축제는 고구려의 수신제에서 수신을 모시고 축제를 거행하는 모습과 일치하는데 이러한 현상 역시 남방민족들 사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열두 번째, 구이저우 동남지역의 먀오족은 축제 때 새날개형 관식을 머리에 꽂아 장식한다. 신라의 새날개형 관식과 같은 모양이다. 고구려 시기 이미 새날개형 관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유민이 남방으로 이주한 후에도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구이저우 동남지역의 먀오족은 주로 평양 일대에서 이동한 이들로 당시 귀족이나 왕족들로 고구려의 상층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열세 번째, 남방민족은 두건을 두르고 북방민족은 모자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절풍의 구체적인 모양은 차이가 있으나 일부는 원뿔형을 취하고 있다. 먀오족 중 구이저우 서북과 윈난 일대에 거주하는 다화먀오大花苗는 절풍과 같은 원뿔형의 모자를 쓰고 있다.

열네 번째, 고구려인은 엉덩이가 뾰족하게 나온 ‘궁고’라는 바지를 입었다. 엉덩이가 튀어나온 이유는 말을 타야 하는 생활환경 때문에 삼각형 모양의 바대를 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먀오족 사회에서도 궁고가 발견된다. 남방 민족들은 종아리를 감싸는 형태인 경의를, 한족들은 가랑이가 터져 있는 개당고를 입었다. 궁고가 중국 남방에서 발견되는 것은 고구려 유민이 궁고를 입고 남하했기 때문이다.

열다섯 번째, 남방의 민족들은 평지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통이 좁은 통군을 입었다. 고구려인들은 말을 타야 하고 산악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통이 넓은 주름치마를 입었다. 먀오족들은 모두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한족이나 남방 소수민족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현재 일부 민족이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데 이는 먀오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열여섯 번째, 결혼풍습은 생활환경에 따라 쉽게 변하는 문화이다. 현재 먀오족들 사이에서는 발견할 수 없으나 예전에는 신부집에서 결혼하여 신부집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일부 데릴사위제를 하는 민족을 제외하고 중국 한족과 남방 소수민족들은 모두 남자집에서 결혼하고 남자집에서 생활한다. 신부집에서 결혼하여 신부집에서 생활하는 문화는 고구려와 최근까지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열일곱 번째, 형이 죽은 후에 형수와 결혼하는 풍속은 북방민족의 특징이다. 고구려에도 형사취수 풍습이 있었다. 먀오족은 최근까지도 보편적으로 형사취수를 행했다.

열여덟 번째, 고구려인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삼년간 집 안에 묻었다가 장례를 치렀다. 이러한 현상은 내몽골의 싱룽거우興隆溝유적에서 발견되는데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먀오족 중 일부에서 아직도 시신을 집 안에 임시 매장하는 풍속이 남아 있다.

열아홉 번째, 먀오족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을 조상이 살던 원거주지로 돌려보낸다. 이때 조상이 이동해 온 길을 하나하나 되짚어?다. 구이저우 서북과 윈난의 먀오족은 조상의 영혼을 창강과 황하를 건너 조상이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낸다. 구이저우 동남의 먀오족은 동방의 해가 뜨는 곳으로 보낸다. 이처럼 조상의 영혼을 각기 다른 곳으로 보내는 이유는, 전자는 만주 일대에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이고 후자는 평양 일대에서 이주한 고구려 유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먀오족 사회에 현재까지도 고구려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이들의 강한 민족의식 때문이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당나라는 강하고 힘이 있는 자는 내지로 이주시키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현지에 남겨 도성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강제로 중국 내지로 이주된 사람들은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고구려의 핵심세력이며 상류층으로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300년이 흐른 현재에도 고구려 문화가 먀오족 사회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