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3.중국근현대사

중국 현대사 : 혁명국가에서 경제 대국으로

동방박사님 2022. 6. 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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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난 두 세대 동안 중국이 걸어온
분투, 승리, 좌절, 재기의 현대사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난 두 세대 동안 걸어온 역사는 중국공산당의 분투, 승리, 좌절 그리고 재기가 이어진 과정이다. 중국공산당은 정부를 수립하여 경제기반을 구축했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인해 벌어진 대참사를 수습했으며, 개혁개방을 주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G2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중국인들은 이제 더 이상 죽의 장막 뒤에서 세계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던 사람들이 아니다. 국가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다른 나라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국제무대에서도 경제력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난 두 세대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이 걸어온 중국 현대사의 자취를 바탕으로 그 성취를 평가하고 좀 더 냉정하게 미래에 대한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난 2019년에 한국 학자의 시각으로 중국의 역사를 담아냈던 『중국 근대사』의 지은이 이영옥 교수가 이번에는 ‘중국 현대사’에 주목했다. 『중국 현대사』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혁명세대 이후까지 국제사회에서 변화해온 중국의 위상과 성취를 깊이 있게 다루며, 미래 중국에 대한 전망까지 분야별로 세심하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이 국내 독자들에게 ‘현대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를 기대한다.

목차

머리말

1장 중국공산당의 승리
중국공산당 | 국민정부 | 혁명활동 | 국공내전

2장 중국공산당 통치의 제도화
인민민주독재 | 당·국가체제 | 양회(兩會) | 지방정부

3장 냉전과 자력갱생
냉전과 재건 | 1·5계획 | 반우파투쟁 | 중소균열

4장 대약진운동
인민공사 | 루산(廬山)회의 | 조정정책 | 독자외교

5장 문화대혁명
특권사회 | 권력투쟁 | 혁명열기 | 조반외교

6장 불신의 시대
비림비공(批林批孔) | 4·5운동 | 경제위기 | 다각외교

7장 계획과 시장의 양립
과거청산 | 계획과 시장 | 개혁개방 | 독립자주외교

8장 인민의 목소리
자유의 바람 | 개혁의 그늘 | 톈안먼사건 | 실용주의 외교

9장 거침없는 질주
남순강화(南巡講話) | 세계공장 | 세대교체 | 화평굴기(和平?起)

10장 책임 있는 국가

맺음말

참고문헌
도판 및 통계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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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이영옥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청나라 이후 중국의 정치 구조가 변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견제받는 권력』이 있고, 공저로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북방민족과 중원왕조의 민족인식』, 『한중 외교관계와 조공 책봉』이 있다. 번역서로 『타인들 사이의 중국인』, 『근대 만주와 대한제국』, 『중국의...
 

책 속으로

일반인이 중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서 그 역사를 알려고 한다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현대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중국현대사는 가장 최근 중국의 역사라는 점에서 비교적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중국의 역사라고 하면, 진시황의 통일제국 건설이나 유비나 조조로 대표되는 삼국지의 시대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흥미가 아니라 현재 중국 사회를 알고 싶다면, 우선 현대사의 전개 과정, 그 속에서 일어난 사건, 그 사건을 이끈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국의 현대사와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중국인을 직접 만나고 교류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머리말」 중에서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여러 정치세력의 대표자들과 함께 톈안먼의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중국 전역에서 국민정부군이 산발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이미 승패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국민정부는 비밀리에 정부와 주요 기관들을 이전했다. 12월, 장제스는 50만 군대와 여전히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이끌고 타이완으로 달아났다. 일부 국민정부의 관계자들은 홍콩이나 미국으로 탈출했다. 중국공산당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국민정부군과의 내전에서 농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승리했고, 창당 28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었다.
--- 「1장 중국공산당의 승리」 중에서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당·국가체제이다. 당·국가체제는 당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당치국)으로, 독점적 권력을 지닌 정당이 중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책임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정당의 활동이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공산당 이외의 정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일당독재로 비난받을 여지도 충분하다.
--- 「2장 중국공산당 통치의 제도화」 중에서

1957년 봄, 마오쩌둥은 처음에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쌍백운동을 독려했다. 하지만 가을이 되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정풍운동이 이용되고 있다면서 대대적인 반우파투쟁을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덫을 놓았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당과 중앙인민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좋은 의도로 시작한 쌍백운동이 사회주의에 저항하는 개인과 집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집단화를 방해하고 분열을 획책하는 데 이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당과 중앙 인민정부로서는 우파들을 인민들로부터 분리시키고 권위를 세워야만 동유럽과 같은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고, 정책을 수정하여 언로의 개방이 아닌 통제를 선택했다.
--- 「3장 냉전과 자력갱생」 중에서

1959년 4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류사오치가 제2대 국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주석을 계속해서 유지했지만, 형식적인 권력의 크기는 작아졌다. 1959년 여름, 루산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7월)와 제8기 전국대표대회 제8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8기 8중전회, 8월)가 열렸다.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와 8중전회를 합쳐서 루산회의라고 부른다. 펑더화이는 과장된 미곡 생산량이나 잘못된 철강생산 방식으로 야기된 심각한 상황을 지적했다. 그는 국가와 당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혁명동지 마오쩌둥에게 좌경 일변도의 대약진운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일부 당원들은 펑더화이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우경 기회주의이고 당 중앙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 「4장 대약진운동」 중에서

1967년이 되자 혁명의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거리와 광장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혁명계급들은 그들대로 자신의 순수혈통을 증명하고, 그렇지 않은 계급들은 혁명성을 입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노동자들도 혁명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문혁16조〉를 근거로 파리코뮌을 본떠서 낡은 권력을 대체하는 인민자치조직을 만들었다. 2월에 등장한 상하이인민공사(상하이코뮌)가 대표적이었다. 상하이인민공사는 인민들이 각급 정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서 장악하는 탈권 운동을 전개했다. 4월 1일, 『인민일보』에는 류사오치를 당내 최대의 실권파로서 중국의 흐루쇼프라고 공격하는 글이 실렸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을 공격하는 집회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 「5장 문화대혁명」 중에서

린뱌오라는 버팀목이 사라지자, 조정정책을 주도했던 실용주의자들이 저우언라이와 함께 다시 주도권을 회복하는 듯이 보였다.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했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여전히 중미관계는 안개 속에 있었지만, 이로써 관계개선의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 린뱌오가 사라지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가시화되면서 문화대혁명으로 비판받던 인물들도 복귀했다. 1972년 1월, 공산주의청년단 주석 겸 산시성 제1서기였던 후야오방의 이름이 『인민일보』에 보이기 시작했다. 4월, 덩샤오핑이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 「6장 불신의 시대」 중에서

실사구시는 마오쩌둥이 사라진 시대에도 여전히 마오쩌둥의 박제된 시신을 끌어안고 정치적 이익을 꾀하는 인물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인물은 바로 화궈펑이었다. 덩샤오핑은 이제 화궈펑의 주변 인사들이 아니라 화궈펑을 겨냥하고 있었다. 한편, 화궈펑과 왕둥싱, 우더, 지덩쿠이 등은 모두 문화대혁명 시기 당과 군대의 원로들이 숙청된 틈을 타서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인방처럼 거리의 혁명이 다시 일어나게 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 기대는 것 이외에 특별한 정치적 자산이 없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을 비판할 수도 없었다. 사실, 그들의 운명은 당과 군대 원로의 지지를 받던 덩샤오핑을 다시 복귀시켰을 때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덩샤오핑 등은 사인방의 제거만으로 과거가 청산되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 「7장 계획과 시장의 양립」 중에서

6월 4일, 광장의 아침을 깨운 것은 여느 때와 같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다. 광장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탱크 소리, 줄을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인민해방군의 발소리,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음소리 등이었다. 이름 모를 남자는 맨몸으로 탱크 앞을 막아서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남자가 탱크를 막아선 것은 잠깐이었다. 광장에는 시위대 수백 명의 붉은 피가 뿌려졌다. 인민해방군이 인민에게 총을 겨눈 사건은 세계인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6월 9일, 덩샤오핑은 텔레비전 연설에서 군대가 동원된 것은 유감이라면서도 공산당, 사회주의체제,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려 한 반혁명세력을 제거한 것이라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인민들은 침묵했다. 그 후로, 인민들은 오랫동안 6·4 톈안먼사건(제2차 톈안먼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8장 인민의 목소리」 중에서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덩샤오핑은 한 달이 넘게 우한, 광저우,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 개혁개방의 상징적인 도시들을 방문했다. 그는 남부의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개혁개방에 대한 발언을 쏟아냈고, 이것을 ‘남순강화’라고 부른다. 남순강화는 마오쩌둥이 반우파투쟁(1956)과 문화대혁명(1966) 직전에 창강을 헤엄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론을 움직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행동이었다.
남순강화의 핵심내용은 11기 3중전회의 결정을 따르고, 13전회에서 제시된 “하나의 중심과 두 개의 기본점을 견지”한다는 것, “생산력, 국력 그리고 생활수준의 향상 등 세 가지 측면에서 유리한 제도와 정책은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세 가지 유리론은 먼저 홍콩의 언론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보도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지방 간부들은 덩샤오핑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개혁개방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보수적인 분위기는 일거에 바뀌었다. 3월 9일, 중앙정치국 전체회의가 개최되었고, 정식으로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 「9장 거침없는 질주」 중에서

농민과 노동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희생해왔다.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 소득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주의국가라고 말하기 어렵다. 중국공산당은 과거 중국대륙의 왕조와 국가들이 주변국에게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세계의 강대국이 번영을 구가하다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평화로운 질서를 위해 책임 있는 국가로서 행동해야 한다.
--- 「10장 책임 있는 국가」 중에서
 

출판사 리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혁명세대 이후까지,
국제 사회에서 변화하는 중국의 위상과 성취를 담아내다


1950년대 이후 한국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현대사는 신해혁명이나 5.4운동부터 국공내전 전후까지를 서술범위로 삼았다. 이러한 방식은 반세기 가까이 유지되었고, 비교적 최근이 되어서야 현대사의 연구범위가 넓어지면서 문화대혁명 시기가 다뤄지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지은이는 국내 한계에서 일반적으로 다뤄지는 방식과 달리 중국현대사의 범위를 앞에서 한 세대를 줄이고 뒤에서 한 세대 정도 더 늘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면 중국현대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부터 2010년까지 60여 년의 두 세대가 되고, 현재 대다수 중국인들이 살아왔고, 살고 있는 시대까지 다룰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에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을 시작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혁명세대와 그 시대가 끝난 후 중국의 변화와 미래 중국에 대한 분야별 전망까지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연구자보다 중국에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들이 이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선에는 깊이를 가지되, 흥미롭고 친절하게 서술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책의 구성은 단순히 하고, 각 장은 독립된 주제를 다루도록 했다. 이러한 구성으로 독자들은 책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을 수도 있고, 흥미가 있거나 궁금한 부분을 순서에 상관없이 살펴볼 수도 있다. 각 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1장 중국공산당의 승리: 국민정부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중국공산당
1921년 7월 창당 이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았고,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국민당에 협력함으로써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1927년 4·12쿠데타로 중국국민당과 결별하여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고, 국민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노동운동과 혁명 활동을 지속했다. 1935년 10월, 국민정부군의 포위 공격에도 대장정을 거치며 생존했고,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국민정부를 견제하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1937년부터 8년 동안 일본의 침략에 맞서 국민정부에 협조하여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49년 10월, 국민정부와 무력대결에서 승리했고, 마침내 중국대륙의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우뚝 섰다.

2장 중국공산당 통치의 제도화: 신중국의 강력한 지도자 마오쩌둥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지했고, 외세로부터 자유롭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 열정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게 만들었다. 이제 권력은 공산당의 손에 들어왔다. 공산당은 중국에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그랬듯이 그 권력을 유지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대륙의 인민이 주인인 나라이다. 공산당은 인민을 위해, 인민을 받들고, 인민의 나라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공산당의 통치를 제도화해나갔다.

3장 냉전과 자력갱생: 당·국가체제의 확립
중국공산당은 불굴의 의지, 피비린내 나는 전투 그리고 동지들의 희생을 통해 혁명에 성공했다. 과거의 구중국과 단절을 선언한 신중국이 등장한 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맞닥뜨린 것은 혁명과는 다른 어려움이었다. 구체제와 국민정부를 비판함으로써 챙길 수 있었던 정치적 이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중국공산당은 당·국가체제 아래에서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인민의 마음을 얻어야만 했다. 또한 외교라는 생경한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4장 대약진운동: 사회주의 경제를 향한 대약진의 좌절
1958년은 제2차 5개년 경제계획이 시작되고, 1959년은 건국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제도화하기 위해 권력기관을 정비했고, 농업의 집단화, 민간기업의 국영화 등을 통해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반대세력은 한국전쟁과 반우파투쟁을 거치면서 힘을 잃었고, 마오쩌둥의 권위는 높아졌으며, 당의 권력기반은 탄탄해졌다. 이제 중국공산당과 중앙인민정부는 당원과 인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중국의 거대한 도약과 전진, 즉 대약진에 착수했다.

5장 문화대혁명: 혼돈의 소용돌이
1960년대 초반, 중화인민공화국은 류사오치가 주도한 조정정책을 통해 대약진의 악몽으로부터 차츰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대내외적으로 거대한 위기에 직면한 사회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린뱌오와 사인방은 마오쩌둥의 목소리를 키웠다. 전국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혁명동지들 사이의 갈등은 권력투쟁으로 비화되었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인민의 분노를 자극했으며, 분노한 인민은 거리에서 무리를 이루었다. 국제관계는 국내정치의 도구가 되었다.

6장 불신의 시대: 문화대혁명이 남긴 깊은 상처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린뱌오와 사인방은 마오쩌둥의 잘못을 비판하기보다 그를 떠받들었다. 그들은 조정정책에 매진하던 류사오치 국가 주석에게 반기를 들었고,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어 사회주의를 지켜야 한다면서 학생들을 선동하여 거리로 나가게 만들었다. 거리의 문화대혁명은 1969년에 끝났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마오쩌둥을 숭배하던 인간들은 혁명이 계속되기를 희망했고, 그들의 권력 농단은 거리의 광풍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7장 계획과 시장의 양립: 개혁개방을 향한 움직임들
중국공산당, 중국혁명, 중화인민공화국을 자신의 분신과 같이 여겼던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에 인민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권력의 세계에서 심장의 박동이 끝난 인물에 대한 애도의 시간은 짧았다. 반면 여전히 심장의 박동이 계속되는 인물들의 욕망은 강했다. 마오쩌둥의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중심에 화궈펑이 있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사인방을 제거하고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행동했다. 하지만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구도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었다.

8장 인민의 목소리: 개혁의 그늘과 억눌린 인민의 목소리
1986년, 중화인민공화국은 기본적이고 새로운 경제체제의 기초를 확립한다는 목표 아래 제7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5계획)에 착수했다. 7·5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다. 당시 덩샤오핑은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했고, 경제발전이라는 목표가 분명했으며, 유연한 외교정책을 통해 대외관계도 원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경제개혁이 급속히 추진되고 경제체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인민의 목소리는 억눌렸고, 경제의 주도권, 투자 과열, 물가상승, 분배 등의 문제는 풀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9장 거침없는 질주: 세계를 향한 중국의 거침없는 질주
10여 년 동안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뒤에 톈안먼사건이 일어났고,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에서 뼈아픈 상처로 남았다. 일부 학자들의 부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개혁개방의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자본주의의 ‘시장’이라는 요소를 들여와서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 확고한 의지는 부유한 삶을 열망하던 인민들과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던 국제사회에도 전달되었다. 그 뒤, 중화인민공화국은 한 세대 동안 세계의 경제, 정치 무대에서 거침없이 질주했다.

10장 책임 있는 국가: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민들 앞에 놓인 미래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제 과거와 다른 과제를 안게 되었다. 과거가 경제부흥, 정치안정, 외교협력 등을 추구하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대내외적으로 정치와 외교의 주도권을 쥐고 경제성장을
유지해야 되는 시대이다. 국내 인민과 국제사회는 당과 국가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당·국가체제는 성장과 발전의 시대와 다른경제, 정치, 외교 그리고 사회·문화적인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변화 된 환경 속에서 과거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통해 억압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힐 수도 있다. 중국공산당은 과거 중국대륙의 왕조와 국가들이 주변국에게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뒤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세계의 강대국이 번영을 구가하다가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는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