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일본학 연구 (책소개)/2.일본문화

혼신의 힘

동방박사님 2022. 6. 18.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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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현대 일본 인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등장인물들은 각각 현대 일본을 만든 ‘거인’, 기존 일본 사회의 시스템에 도전한 ‘반항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일본 속의 ‘한국인’,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 일본 사회의 ‘개성파’들로 분류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도 각각 자신의 색깔을 뽐내는 개성 강한 인물들이다.

한국이 낳고 일본이 키운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 일본의 전설적인 무도가가 된 가라테의 고수 ‘최영의(최배달)’,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현대 건축의 거장 ‘안도 다다오’ 같이 비교적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인물부터, 한때 피카소를 비롯한 세계 예술계의 거장들에게 찬사를 받은 요리와 도자의 달인 ‘기타오지 로산진’, 부관(? 페리 사업의 공신이자 과거 한국 체육계의 큰손이었던 ‘정건영’, 일본 야구계의 이단아이자 천재 타자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쓰’처럼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인물까지 총16명이다.

 

목차

머리말

1부 일본 속의 한국인들, 그 파란만장한 삶
최영의 - 허(?망한 바람(F)의 파이터
정건영 - 현해탄에 떨어진 이카로스
김일 - 친일가에서 항일가가 된 영웅
한창우 - 그만이 할 수 있는 한류({?

2부 굴종하지 않는 반항아로 한 시대를 살다
이시이 고키 -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우국의 폭탄 사나이
오치아이 히로미쓰 - 조직 사회 일본의 고고(-L)한 개인주의자
이시와라 간지 - 만주국의 이단아, 이상 국가를 꿈꾸다
기타오지 로산진 - 세상사에 서툴렀던 맛의 달인

3부 개성파다운 사고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다
안도 다다오 - 고독과 싸우며 스스로를 세운 건축가
송웬저우 - 경제 대국 일본의 상식을 뒤엎은 화상(^?
미즈키 시게루 - 요괴들과 함께한 신기한 인생
다하라 소이치로 - 일본 TV 토론의 권력자

4부 현대 일본을 만든 거인들의 명과 암
세지마 류조 - 난세의 군인, 재계의 정점에 서다
와타나베 쓰네오 - 일본의 미디어 제왕
사사카와 료이치 - 반공 우익과 기부 천사의 두 얼굴
다오카 가즈오 - 쇼와의 라스트 갓파더
 

저자 소개

저자 : 최석영
지은이 최석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공부보다 록 음악과 소설책에 빠져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교 시절 일본어를 전공한 것을 계기로 일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했고, 군 제대 후 일본으로 건너가 간토 지역의 한 국립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이후 10년간 일본에서 지냈다. 생활 뮤지컬 극단과 IT기업에서 일하며 일본 사회의 ‘뒷모습’을 체득하는 기회를 얻었다. 신문, 블로그 등에 글을 ...
 

책 속으로

한국 사회에는 최영의가 일본에서 차별과 설움을 딛고 일어난 불세출의 무도가이자 한국인의 우수성을 알린 자랑스러운 존재로만 알려져 있지만, 최영의의 전력은 상당 부분 부풀려진 것이고, 증명되지 않은 것이 많다. 또한 그는 출신은 ‘반도’였지만 ‘열도’에서 일본인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의 저서에서 주장한 바를 고스란히 믿는다면 그는 “부모의 나라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특공대에 지원했으며, 일본이 항복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운동장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일본인으로서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토 에이사쿠 전 일본 수상을 자신이 세운 도장의 총재로 맞을 정도의 위치에 있던 그는 성공한 무도인이지 피해자가 아니었다.
최영의는 수십 년간 일본의 영웅이었으며, 여전히 그의 업적은 가라테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 뚜렷이 남아 있다. 사후에 일본과 한국에 가족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나, 행적에 의문점과 과장이 많고 알려진 바와는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의 명성과 존재감은 변함없이 절대적이다. 그를 위대한 무도인으로 기억하는 일본인들은 여전히 많다. (「최영의 - 허망한 바람의 파이터」, 32~33쪽)

전두환은 세지마와 고토에게 많은 조언을 얻는다. 세지마는 국민을 통합시킬 아이디어, 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법 등을 조언하고, 고토는 주로 경제에 관련된 조언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엑스포나 올림픽 같은 국제 대회를 유치하라”는 것이었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위치이니, 국가적 단합을 위해 목표를 제시하고 세계적 지명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그런 국제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결국 한국은 올림픽 유치 경쟁에 뛰어들어 일본 나고야와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나고야는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목표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기에 한국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고, 뒤늦게 뛰어든 한국은 올림픽 같은 국제 이벤트는 꿈꾸기 힘든 ‘개발도상국’이었다. 마치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같은 형국이었다.
세지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도큐 그룹의 총수 고토 노보루는 사실 한국에 그런 조언을 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나고야올림픽 유치 위원으로서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할 고토가 한국에 올림픽 유치를 권한다는 것은 일본올림픽위원회의 입장에서는 배신행위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고토는 전두환을 만나고 돌아간 후 갑자기 서울올림픽을 간접적으로 지지하고 나선다. 나고야올림픽 유치 위원회가 한국의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지 않도록 물밑 작업을 하고 다닌 것이다. 고토의 ‘작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지
만, 나고야에 비해서 열세라는 평을 듣던 한국은 1988년 올림픽 유치에 극적으로 성공하며 국제무대에서 화려하게 존재를 알린다. (「세지마 류조 -난세의 군인, 재계의 정점에 서다」, 309~310쪽)

1962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김종필이 파견한 특사 최영택이 일본에 도착했다.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은 국가 재건을 위한 돈이 절실해서 어떻게 해서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서 배상금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당시 수상이던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는 수교에 적극적이었지만 자민당의 유력자였던 오노 반보쿠가 수교에 소극적이어서 난항을 겪고 있었다. 오노가 야당과 합심해 반대하면 한일 수교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를 설득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다.
최영택이 일본 정치가들과 교섭하며 한일 수교의 기초 작업을 어느 정도 정리하자, 협상을 위해 한국 측 대표로 김종필이 일본에 도착했다. 와타나베는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김종필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생각과 언행에 큰 호감을 가졌다. 김종필이 그릇이 큰 인물이라고 판단한 그는 부자지간처럼 친하게 지내던 오노를 찾아가 김종필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라고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상에는 서른여섯 먹은 큰 인물이 넷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두 번째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세 번째는 한국의 ‘김종필’, 네 번째는 바로 저 ‘와타나베’입니다. 앞의 세 명은 크게 출세했고 저는 아직 한낱 기자지만 말이죠.”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혼신의 힘’을 다해 인생과 대결한 일본 인물들의 이야기
반일과 친일의 프레임을 넘어서

일본의 새 정권 발족 1주년이 되는 지난해 12월 26일, 아베신조 일본 수상은 A급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방문했다. 또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 헌법을 개정해서 자위대를 방위군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 한국,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일본의 우경화 조짐에 중국 당국은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지린(?)성 기록보관소가 찾아낸 일제 종군위안부, 731부대 관련 문서 등을 잇달아 공개하며 일제의 만행을 들추는 폭로전을 계속하고 있다.

이처럼 잠잠하다 싶으면 반복되는 일본의 반성 없는 행동에 한일 관계는 온탕과 냉탕을 매번 왔다 갔다 했다. 한류라는 문화의 난류가 대한해협을 건너 두 나라 사이를 진정시키면, 정치적 긴장이라는 한파가 다시 둘 사이를 갈라놓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일관성 없는 관계는 양국의 국민들을 피곤하게 했고, 서로에 대한 신뢰는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이 매번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양국의 무대 위 인물들의 활약은 변함이 없다. ‘코리언특급’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때, 일본에는 ‘토네이도’ 노모 히데오가 있었고, 현재는 한국의 ‘피겨 요정’ 김연아와 일본의 ‘피겨 여왕’ 아사다 마오가 양국 국민에게 초유의 관심사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소설 등의 문화계 인사들과 야구, 축구 등의 스포츠계 인사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양국을 오간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은 역대 최고의 선인세로 화제를 모으더니 국내 시장에 출간되어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고, 한국의 케이팝 스타들은 공연을 할 때마다 일본의 아레나 경기장을 가득 채운다. 2010년에 NHK와 K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일본에서 한국인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김연아, 동방신기, 박지성 등이 거론됐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인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주로 역사나 스포츠계의 인물을 언급했다. 이는 양국의 매체에서 이들을 주로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 않는 한, 우리는 늘 언급되는 인물들만을 접하게 되고, 일본의 이미지는 많은 부분 그들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정립된다.

물론 이런 식의 ‘문화 흡수’ 역시 상대국을 아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화에 의해서 돈독해지고 정치에 의해서 소원해지기를 반복하는 한일 관계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이고도 더 본격적으로 ‘그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이고도 쉬운 방법이 ‘지금까지 몰랐던 과거와 현재의 일본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인·반골·외인·괴짜, 개성 만점 일본 인물들의 향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현대 일본 인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등장인물들은 각각 현대 일본을 만든 ‘거인’, 기존 일본 사회의 시스템에 도전한 ‘반항아’,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일본 속의 ‘한국인’,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 일본 사회의 ‘개성파’들로 분류되어 있고, 그 가운데서도 각각 자신의 색깔을 뽐내는 개성 강한 인물들이다. 한국이 낳고 일본이 키운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 일본의 전설적인 무도가가 된 가라테의 고수 ‘최영의(최배달)’,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현대 건축의 거장 ‘안도 다다오’ 같이 비교적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인물부터, 한때 피카소를 비롯한 세계 예술계의 거장들에게 찬사를 받은 요리와 도자의 달인 ‘기타오지 로산진’, 부관(? 페리 사업의 공신이자 과거 한국 체육계의 큰손이었던 ‘정건영’, 일본 야구계의 이단아이자 천재 타자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쓰’처럼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인물까지 총16명이다.

이들은 결코 역사 속 위인이나 영웅이 아니다. 혹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고 해도, 이 책에서 밝히는 인물의 생애를 잘 따라가 본다면 그 역시 영욕의 세월을 산 한 인간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일본 현대사의 음과 양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삶에는, 전후 일본 고도 성장기의 태동부터 지난 한일 관계의 비사(R~)까지 모두 녹아 있다. 그중에는 지금까지 언론 매체를 통해 익히 들은 이야기와는 너무 달라 깜짝 놀라게 되는 사실도 있고,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고하게 만드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16인의 삶을 좇다보면, 시대와 국적을 떠나 한 사람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절감하게 될 것이다.

김일과 ‘역도산’

어려서부터 힘이 좋아 씨름을 잘했고, 씨름판이 열리는 곳이라면 원정까지 가서 송아지를 타오곤 했던 김일은 일본에서 이미 슈퍼스타였던 역도산을 동경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도착했지만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그는 검문에 적발되어 밀입국 혐의로 구치소에 보내졌다. 절망에 빠진 김일은 형무소 안에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역도산에게 보낸다. 역도산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동포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본 것이다. 주소도 몰랐던 김일은 편지 봉투에 ‘도쿄 역도산’만 써서 보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그 편지는 역도산의 손에 들어갔고, 김일의 딱한 처지를 동정한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 커미셔너인 오노 반보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역도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오노는 역도산이 신원을 보증한다는 조건으로 형무소에서 김일을 빼냈다.
김일은 동경해온 역도산 밑에서 수련을 시작한다. 당시 역도산은 성격이 거친 것으로 유명했다. 술집에 가면 사람들과 시비가 붙기 일쑤였고, 술집 종업원을 폭행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거칠었다. 기분파여서 잘해줄 때는 한없이 잘 해주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역도산은 일본인 제자는 심하게 때리지 않았으나, 김일에게만은 유독 혹독하게 굴었다. ‘일본인 제자는 안 때리는데 왜 같은 조선인인 나만 이렇게 때리는가.’ 이런 생각은 김일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결국 역도산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김일은 짐을 싸서 체육관을 나가버렸다. 하지만 혈혈단신으로 밀항했던 그가 보증인인 역도산을 버리고 갈 수 있는 곳은 없었개 때문에, 불과 반나절 만에 다시 돌아가 용서를 구했다.

정건영과 ‘부관페리’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정건영은 한국을 자주 드나들며 한국의 실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당시 만난 사람들은 김종필, 국무총리 정일권, 대통령경호실장 박종규, ‘장군의 아들’ 김두한 등 당대를 주름잡는 인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절친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 박종규로, 박종규는 정건영을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도세카이를 해산한 정건영은 그동안 쌓아놓은 한국의 인맥을 이용한다. 한일회담의 뒤에서 많은 노력을 한 그는 그 대가로 부관(?페리 운영권을 얻는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국제 여객선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것은 정건영이 받은 혜택이 아니라 한국이 그에게 진 또 하나의 신세였다. 이 사업은 이미 한일회담 때부터 거론되었는데, 한국 쪽에서 출자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한국은 정건영에게 이 사업의 출자자로 나서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조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던 그에게는 감개무량한 일이었지만, 이 부관페리는 매년 적자만 기록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후일 그의 사업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안도 다다오와 ‘권투’

17세의 안도는 체육관에 다니며 권투를 배웠다. 평소 운동에 자신이 있던 안도는 입문한 지 1개월 만에 프로테스트에 합격해 프로 복서로 링 위에 섰고, 4회전 경기를 뛰면서 대전료로 4,000엔을 받았다.
권투는 외로운 경기였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링 위에서 오직 자신의 힘과 결정만을 믿고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 시합을 위해 체중 감량과 식사 조절을 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그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해외 원정 경기의 기회가 온다. 태국의 방콕에서 열리는 시합이었는데 안도가 속한 체육관에서는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아서, 안도는 외국 구경을 한 번 하는 셈치고 자원을 한다. 그러나 그 조건은 상당히 열악해서 대동하는 스태프도 없었다. 그야말로 혼자서 싸우고, 혼자서 의자를 꺼내서 앉고, 혼자서 물을 마시고, 공이 울리면 다시 혼자서 의자를 치운 뒤 싸우러 나가야 하는 고독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때의 경험을 통해 혼자서 싸워나가는 일에 큰 자신감을 얻었다.